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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날짜를 딱 맞춰서 도착했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지구는 생명체가 너무 많아서 너를 찾는데 고생을 좀 많이 했어.”
“풉!”
뭐라고? 비웃음과 당혹을 숨기지 못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학생인가. 여자에 키가 나랑 비슷하고 살집이 좀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에 대강 묶은 머리, 거대한 가방, 주렁주렁 달린 귀여운 인형들, 커다란 티, 펑퍼짐한 반바지. 종아리 아래까지 올려 신은 하얀 양말, 운동화, 무채색한 옷에 혈색 없는 밋밋한 얼굴. 그리고 잘 안 씻는 사람의 냄새가 났다. 으.
어린것이 갑자기 튀어나와 내 앞에 서더니 반말부터 까고 있다. 뒤에서 뜀박질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나에게 오는 소리인 줄은 몰랐다.
집으로 가는 비탈길을 오르는 중이었다. 한여름 8월의 습습한 공기 속에서, 해는 떨어지고 박명 중에 3분 단위로 어두워지는 게 느껴지는 길목에, 아스팔트 땅바닥이 뜨거워 발바닥이 뜨겁고 온몸은 피로하고, 면으로 된 티는 몸에 착 붙어 무겁다.
나는 왜 이런 날에 태어났나. 내가 태어난 날도 이런 뜨거운 아스팔트가 사람들을 괴롭혔을까.
“일단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모든 곳을 가볼 수 있는 자야. 나는 너를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하고, 내가 들어갔던 사람에게서 널 배웠어. 그 사람이 너의 생일에 축하 편지를 썼는데, 그걸 전달 해 주려고 왔어.”
여자애가 발랄하고 열심하게 설명한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는 들어 봤음 직한 이야기지만, 실제 사람이 마주보고 내 앞에서 입으로 나불거리는 걸 들으니 정말로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미친자다. 미친자를 만났다. 오늘 같은 날에. 저는 오늘 아주 좋은 날이라고요. 생일이라고요. 그럭저럭 선물도 받았고, 그럭저럭 축하도 받았고요. 이제 집에 가서 엄마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미역국을 먹고, 스스로 산 꽃다발과 케이크로 생일 축하도 할 거란 말이에요. 놔주세요, 집에 갈래요.
케이크가 흐트러질까봐 재빠르게 피할 수가 없다. 귀여운 발음으로 머릿속에서 욕을 읊조려본다. 샤갈!
나는 꺼지라는 말을 표정으로 하고 있었을거고, 옆으로 걸었지만 학생은 나를 따라서 옆으로 걸으며 나를 계속 막고 자기 말만 쏟아내느라 바빴다. 나는 이런 사이비종교 포교자들에겐 “악!”하고 고함을 지르며 지나치는데 오늘은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었다. 조심스러워야 한다. 케이크가 뭉개지면 생일 축하를 하면서 내 케이크를 망가트린 이 새끼를 떠올릴 테니..
“당황스러울 거라는 거 알아. 그래도 잠깐만 시간을 내줘! 오늘은 너한테 좋은 날이니까”
생일이지만 기대만큼 축하받지 못해 조금 서운하긴 했다. 생일이니까 오늘만은 모두들 기운 내서 나한테 다정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 고작 생일이 뭐라고.
“누구세요? 저를 아세요?”
케이크가 아깝지만 이걸 버리고 뛰어야 할까, 이걸로 이 사람을 치고 뛰어야 할까, 이걸 들고 뛰어야 할까. 내 케이크.
축하를 받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예쁜 사람으로 부탁한다고요! 너처럼 냄새나는 애 말고!
“너를 좋아하는데 너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걔가 너의 생일은 알고, 생일 축하를 너무너무 해주고 싶은 거야. 너는 왜 SNS를 다 끊었니? 왜 내 번호를 차단했어? 멀리서 사니까 도저히 만날 수가 없잖아. 나는 애도 있고 남편도 있고 시댁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일도 하고 싶고 너랑 다시 놀고 싶은데 왜 넌 날 버렸어? 앗! 또 혼동됐다! 잊어줘! 이 사람 저 사람 몸을 타고 다니다 보면 자꾸 정신이 섞이는데, 너한테 생일 축하를 해주는 걸 잊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까 그 사람이랑 너무 합쳐져 버렸어”
음…당황스럽지만 누군지 알겠다. 내 좁은 인간관계 속에 그런 사람은 걔뿐이지.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기쁨과 비참함이 뇌를 휘저으며 가슴을 땅땅하게 굳게 한다. 와, 정말 내 앞의 이 사람의 말을 믿고 싶다. 뭐, 날 안 잊었다고?
그리고 3초 뒤에 생각이 바뀐다. 여전히 용기 없고 게으르긴. 정말 축하해주고 싶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을. 다른 사람의 번호를 빌린다던가, 새 SNS 계정을 만든다던가, 지인에게 전달을 부탁한다던가. 걔는 그냥 자기가 아는 몇 가지 방법만 좀 시도해보다가 내가 자기를 거부한 걸 알아차리고 상처받았겠지. 그래서 그냥 그만뒀겠지. 하지만 이 앞의 애를 사용한건 좀 신박하다. 어떻게 구한거지. 이 정도 시도라면 기분이 좀 풀린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3초 동안 나의 열은 싹 식어버려서…이미 걔가 잘살든 말든 죽던 말든이라서…
“흠흠, 이제 축하해줄게.”
잘 살고 있니? 난 잘 살고 있고, 너는 뭐…불행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제 나는 너가 불행하던가 말던가란다…라고 머나먼 곳에 있을 옛 친구에게 말하며, 흐린 눈을 하고 앞의 못생긴 여학생을 보고있다. 어서 끝내주렴. 덥고 피곤하고 양손에 든 봉다리들이 불편하다. 그리고 너 몸 냄새나.
하지만 난 생일이지!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고 있다고? 활짝 웃음이 지어진다. 관자놀이와 턱 아래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덥다.
“그런데 사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내용을 다 잊어버렸거든. 대신 내가 축하해줄게.”
“정말 괜찮고, 마음만 잘 받을게요. 저는 집에 가겠습니다.”
“제발! 나는 너를 찾아서 5년을 돌아다녔다고!”
“그러시군요. 집에 보내주세요.”
악을 쓸까. 집 앞인데.
얘라면 나랑 등치가 비슷하니까 몸싸움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왜 하필 생일날!
장단 좀 맞춰서 빨리 처치해 버리자!
“빨리 말하세요.”
예쁘지도 않은 애가 활짝 웃으면서 기뻐한다.
“일단 걔는 5년 전 8월 31일 오늘에 너의 생일을 축하하는 생각을 했어.”
아- 옛날 이구나. 지금은 걔도 나를 잊었겠네, 쌤쌤.
“나는 그때 걔의 뇌 속에 들어가 있었는데,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
“어?”
“내가 들어가서 죽는 게 아니야! 곧 죽을 거라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죽을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거든. 인간들 속에 들어가는 건 재미있지만, 곧 죽을 사람들이라 그런지 생각이 재미가 없어. 난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살려고 애를 쓰지만 죽으면 바로 튕겨 나오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의 걔는 너의 생일 축하를 생각하는 중이었어.”
기분이 나빴다. 자살을 시도했나? 우웩
우리는 어느새 길가에 주차된 차들 사이에 쭈그려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의 케이크가 아스팔트 바닥에 익어간다. 세상은 푸르스름한 어둠이 덮었다. 여학생의 몸에선 땀 쉰내가 났다.
얘도 곧 죽을 건가?
불쾌하군.
나는 이 불편한 상황에서 어둡게 변한 아스팔트 바닥만 보고 있었다.
“나는 이 세상 어디든지 다녀왔는데, 지구는 정말 특별해. 우주는 대부분 아무것도 없고, 원자나 전자나 아주 일부분만 있는데 그것들도 그냥 규칙에 따라 움직일 뿐, 세상은 정말 아무것도 없어. 여기 지구는 식물도 동물도 벌레도 있는데 정말로 신기한 건 너희 인간이야. 이 세상에 움직이는 것들은 여기에만 있어. 유일해. 너희뿐이야. 아니, 근데 왜 죽으려고 하지? 사는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있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라고!”
집에 가고 싶다
“138억 년 전에 세계 탄생이라는 기적이 일어났는데, 사실 그때는 뭐가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아주 가만했어. 나는 계속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세상에서 심심해하고 있었어. 1억 년 뒤쯤부터 새로운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나는 뭐 할 것도 없으니까 걔네을 찾아가 봤지. 하도 심심하니까 그냥 빛나고 빙글빙글 도는 돌덩이들을 구경하려 계속해서 우주를 돌아다녔어. 혜성을 타고 이동하기도 하고, 우주먼지에 서서 빛나는 별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무너무 오래 살았어.”
재밌군. 나는 어둠으로 검게 변한 여학생을 보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고 검게 칠해진 몸에서 목소리만 들린다.
“여기저기 들리면서 떠돌아다니는 중에 지구에 왔는데, 여기는 너무 시끄러운거야. 생명이 너무 많았어. 나는 내가 사는 생중에 지구에서 산 게 찰나도 안돼. 하지만 정말 많은 생명체들을 만났어.
식물이나 벌레나 동물은 열심히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데, 인간은 좀 달라. 생각이라는 걸 하더라고. 진짜 신기하지. 이 우주에서 유일해! 오직이야! 이건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어. 인간은 정말 기적이야. 기적중에 기적이고, 기적 안에 기적의 기적으로 만들어져있어.
그래서 너의 탄생은 이렇게 엄청난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여기는 기적들이 너무 많고 이미 오래오래 기적들이 한가득이라서 너가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할 거야. 하지만 이 세상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고 오직 너희만 있는데, 그중에서도 너가 태어난 건 진짜 기적중에 기적이니까, 너의 탄생은 정말로 축하할만한 일이야. 생일 정말 축하해.”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건 옛 친구가 해 주는 생일 축하가 아니라, 생일 축하를 부탁받은 영생의 존재가 나를 굳이 굳이 찾아와서 내가 태어난 게 얼마나 기적인지, 살아있는 게 얼마나 특별한지 나 자신에게 알아달라고 사정하는 걸로 들렸다. 축하받는 게 당연한 거라고, 너 자신이 기적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라고. 비단 나에게만이 아니라, 이 애가 지나쳐 온 온갖 사람들과 이제 곧 들어갈 사람들과 이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정말 정말 아무것도 없어. 너희들뿐이야.
그 애는 퍼뜩 일어나더니 “안녕!”하고 인사하면서 후다닥 떠나버렸고, 나는 조금 뭉클해진 상태로 눈알이 눈물에 젖어 말랑말랑해 진 상태로 아파트 입구로 걸어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예전에 친했다가 서로가 조금 변해버리자 각자 버림받은 거라 멋대로 생각하고, 환대받지 못할까 무서워 용기 내지 않기를 선택해 흐지부지 헤어지게 되었던 그 친구는, 그래도 속으론 나에게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 옛날 친구는, 나에겐 이미 떠난 사람이고 마음을 정리한 사람이기에 정말로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행복하려면 행복하시고 불행하시려면 불행하시고. 자살을 하셨다면 그러한 선택을 존중하고, 성공 축하 드리고, 실패해 살아가신다면 계속 고생하시고.
옛날엔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감정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사랑은 뭘까, 사는 건 뭘까.
드디어 집이다! 현관문을 여니 TV를 보시던 엄마와 아빠가 생일 축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어정어정한 걸음으로 나오신다. 그래도 생일이라고 축하를 위해 반겨주신다. 사랑합니다! 내 세계, 내 가족들! 우리 집은 생일이건 크리스마스건 챙긴 적이 없다가 내가 경제 활동을 하면서부터 돈이 생기니 챙기기 시작했는데, 아직 익숙해지진 않았다. 두 분의 저 어색한 걸음과 표정을 봐!
굳이 다른 사람들과 약속을 잡지 않고 생일날 저녁에 집에 온 건, “생일날 저녁 식사는 가족과 함께!”라며 내 권유를 거절하던 나의 다른 친구로부터 배운 그 가정의 문화이다. 좋은 건 따라 해야지. 그 옛 친구도 내 인생에 잠깐 들어와 자신이 사는 방법을 나와 주고받으면서 나를 제법 바꾸고 갔지만, 이제는 그냥 지나간 사람일 뿐. 잘 지내시건 말 건입니다. 안녕!
나는 내 행복을 만끽해야지! 밥을 먹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씻었다. 나의 실내복인 파자마로 갈아입고 셀프로 고깔모자를 쓰고 식탁에 앉았다. 엄마의 사랑이 가득 담긴 미역국이 나왔다. 나는 금세 옛 친구를 잊었고 그 이상한 여학생도 잊었고 행복과 기쁨과 감사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니까!
그리고 며칠 뒤,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나에게 생일 축하를 해 준 여학생의 사진을 보여주고 아느냐고 질문했다. 죽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몸 냄새가 심한 여학생이 길을 묻으면서 안 놓아주길래 잡혀있었다고만 대답했다. 3일 전에 옆 지역에서 실종되었는데, 걸어서 이 동네를 지나가다 나를 만났다고 알려줬다.
그 며칠 후, 아침밥을 먹다가 강에 여학생 시체를 건졌다고 짧게 지나는 뉴스를 봤고, 걔가 죽었구나 했다. 좀 무서워졌고, 나는 다시는 그 이상한 외계인과 만나지 않기를 기원했다.
첫댓글 이게 감동물이여 호러여 장르가 뭐여ㅠㅠㅠㅠㅠㅠ 무섭잖아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 완전 쫄보니까 이런 비스무리한거 쓰실 때 앞에 꼭 미리 스포써주시라구요ㅠㅠㅠㅠㅠㅠㅠㅠ
근데 읽는 내내 '나'가 좀 너무하다고 느꼈어요. 저라면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꽤 대화를 나눴을 것 같은데요.
근데 여자아이는.... 실종되었다가 죽은거니.. 혹시... 납치당한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