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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토스트’ 대표 김석봉 전도사
아침의 ‘핑거 댄싱’
무교동엔 출근을 서두르는 직장인들보다 더 바쁜 곳 무교동 45번지, 코오롱 본사와 파이낸셜 빌딩 사이 도로변, 소형 트럭을 개조한 한 토스트 판매점에 앉아 있는 김석봉 전도사의 이마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www.suk-bong.com)
노릇한 버터가 둘러진 넓은 철판 위엔 식빵이 바삭바삭하게 구워지고, 도톰한 계란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간다.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 위엔 계란과 햄, 치즈, 야채들이 올라가고, 케첩과 겨자소스로 마무리된 토스트는 호일에 싸여 손님 손으로 전달된다. 버터를 두르고, 식빵을 굽고, 계란을 부치는 김 전도사의 손길은 마치 춤을 추듯 현란한 손동작을 보이며 철판 위를 날아다닌다.
아침식사를 하지 못한 직장인들의 발길이 토스트 가게 안으로 밀려들면 밀려들수록 김 전도사의 손길은 현란한 초식을 구사하는 중원의 무림고수 마냥 철판 위에서 눈부신 동작 선을 그려낸다.
어린이전도협회와의 만남
아침 출근길,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스트 가게. 아침나절에만 열어 허기진 직장인들의 배를 달래주는 노점상이다. 김 전도사가 그런 노점상을 8년째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돈벌이에 나섰습니다.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올라온 후 자동차 정비공장, 합판공장, 조선소, 과일행상, 용접공,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인천에서 교회를 다니며 성경공부를 했는데, 신앙도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엘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 전도사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어린이’이다. 주일학교에서 부교사로 활동하던 김 전도사는 어린이전도협회를 만나게 되고, 마침내 82년에는 어린이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서원 하게 된다. 그러면서 신학을 공부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결국은 전도사가 된 것이다.
“어린이전도협회에서 어린이 전도사로 사역을 하면서 오전에만 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노점상을 생각하게 됐고, 직장인들을 위해 토스트를 팔기로 한 것입니다.”
프로가 되자
처음 노상으로 나선 그에겐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주위의 시선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단속을 피해 도망 다니다 붙잡혀 집기류를 뺐기고, 그렇게 험난하고 고달픈 거리의 생활이 이어졌다. 그런 3년에 걸친 단련의 시간들을 거치면서 김 전도사는 불현듯 알게 되었다. 긍정적 자세의 중요성이었다.
“자존심을 버려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프로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 전도도, 노점상도 다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김 전도사는 ‘확’ 변했다. 새벽 4시 30분 경이면 일어나 오전 장사 준비를 시작한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고객의 건강. 직장인들의 아침 건강을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그는 토스트에 들어가는 재료들의 위생상태에 특히 신경을 쓴다. 양배추도 두 번씩 철저하게 씻어 기생충을 제거하고 물도 정수기 물만 사용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교동 일대에 외국인 고객들도 많다는 것을 안 김 전도사는 부족한 잠을 줄여가며 외국어 공부에도 열을 올렸다. 그래서 이제 그는 중국어, 영어, 일본어도 구사한다. 물론, 장사에 필요한 문장들을 중심으로 공부한 것이지만, 찾아오는 손님들과 대화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토스트로 연봉 1억
김 전도사는 토스트로만 연 매출 1억 원을 올리고 있다. 프로로 거듭나기로 결심하고 맛과 위생, 부대 서비스에 승부를 건 결과였다. 그의 그런 노력은 그의 가게를 찾는 손님의 거의 90%가 단골 손님이라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손님들이 모르는 그의 비밀은 또 있다. 바로 기도다.
“장사를 나가기 전에 성경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손님들이 토스트를 먹고 더욱 건강하게 해달라고, 제 손에 솜씨를 주시고 맛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그를 이끌어 가는 또 다른 원동력은 바로 즐거움. 토스트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먹이는 것은 ‘너무도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다.
“사실 힘든 일입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재료를 준비하고 장사준비를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새벽에 일어나려면 보통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일이 즐거웠습니다. 손님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웠고, 제가 만든 토스트를 맛있게 먹어주시는 손님들이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일 자체가 재미있고 즐겁지 않았다면 도저히 버텨낼 수 없었을 겁니다.”
전도 캠프장 마련의 꿈
2002년 12월 김 전도사는 위암 수술을 받았다. 위의 절반을 잘라내는 대수술이었다.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김 전도사를 사로잡았던 생각은 두려움보다는 가족에 대한 염려와 자신의 사명에 관한 것이었다.
“열심히 정직하게 살았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너무 부족한 아버지가 아니었을까?하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제가 정말로 바랬던 것은 바로 아이들에게 꿈을 남겨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소망은 사실 자신의 자녀들에게만 국한된 꿈은 아니다. 그는 어린이전도협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어린이 선교사로 사역을 하면서,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해 꼭 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린이 캠프장을 만드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여섯 번을 다녀가도 프로그램이 전혀 중복되지 않는 어린이 캠프장을 세우는 것이 꿈입니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지금과 같은 형식적인 캠프가 아니라 각자 가슴에 꿈을 심어줄 수 있는 그런 캠프장을 세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캠프장 안에는 선교센터가 들어있는 그야말로 전문 캠프장을 마련하고 싶은 것이 제 꿈입니다.”
김 전도사는 그 꿈을 위해 오늘도 토스트를 굽고 있다. 그가 굽는 토스트는 기도와 즐거움, 고객에 대한 성실함이 한데 버무려진 독특한 맛의 토스트다. 김석봉 전도사가 그 토스트를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꿈은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한 전도공간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꿈은 한 발 한 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신촌점을 시작으로 11곳에 마련된 체인점이 그러한 꿈을 앞당기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신앙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긍정적인 신앙을 우리는 매일 아침 무교동에서 만날 수 있다. 깔끔하게 조리사 복장을 갖춰 입은 김 전도사의 현란한 핑거 댄스가 싱그러운 아침 햇살 속에서 오늘도 변함없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기독신문 제1481호․김지홍 기자)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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