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14화 ― 철무광이 지킨 두 번째 명부
낙혼협을 벗어난 뒤 일행은 서쪽 산길로 접어들었다.
적운곡까지는 말을 타고 사흘 거리였다.
그러나 검후 연비화의 상태를 생각하면 서두를 수 없었다.
두 해 동안 낙혼협의 석실에 갇혀 있던 그녀는 잠맥쇄에 공력을 빼앗겼다. 양쪽 다리의 경맥도 오랫동안 막혀 있어 혼자 걷기 어려웠다.
백리운은 산 아래 마을에서 작은 수레를 구했다.
수레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햇빛과 바람을 막을 천막도 쳤다. 남궁소연과 당소혜는 수레가 흔들리지 않도록 양옆에 가죽끈을 달았다.
육지검객은 손목과 발목에 기관쇄를 찬 채 수레 뒤를 걸었다.
당소혜가 만든 기관쇄는 억지로 끊으려 하면 손목의 혈도를 눌렀다. 백리운이 바른 마비독까지 묻어 있어 함부로 내공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무혁은 말고삐를 잡고 수레 옆을 걸었다.
연비화가 말했다.
“말을 타도 된다.”
“수레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소연 소저가 앞에서 몰고 있지 않느냐?”
남궁소연은 앞쪽에서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속도를 낮추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비화는 다시 무혁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네가 종일 걸을 필요는 없다.”
“나는 괜찮습니다.”
“검객은 다리가 중요하다.”
“어머니의 다리도 중요합니다.”
어머니.
무혁이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그 호칭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지 못한 듯 수레바퀴만 살폈다.
그러나 연비화는 듣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
스무 해 동안 한 번도 직접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억지로 불러 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혁이 자신의 마음으로 부를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연비화는 고개를 돌려 산길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당소혜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백리운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어요?”
“들었네.”
“검후께서 우실 것 같아요.”
“모른 척하게.”
“왜요?”
“때로는 기쁜 마음도 혼자 간직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소혜는 잠시 연비화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일행은 얕은 계곡가에서 쉬었다.
백리운은 평평한 바위 위에 천을 깔고 연비화를 앉혔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덮은 옷자락을 무릎 아래까지 걷었다.
두 발은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다.
그러나 발목에서 무릎까지 이어진 경맥 위로 검은 선이 남아 있었다. 잠맥쇄가 진기를 빼앗으면서 생긴 독맥이었다.
백리운이 손가락으로 세 군데 혈도를 눌렀다.
연비화의 발끝은 움직이지 않았다.
“감각이 있습니까?”
“조금.”
“어느 정도입니까?”
“찬 바람이 닿는 것은 느껴진다.”
백리운은 가는 은침 하나를 발목 위에 놓았다.
연비화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것은요?”
“따갑군.”
“다행입니다. 경맥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무혁이 물었다.
“다시 걸으실 수 있소?”
“지금 당장 대답을 원하나?”
“가능한지만 말씀해 주시오.”
백리운은 연비화의 무릎과 단전 아래를 차례로 살폈다.
“가능성은 충분하네. 하지만 다리만 치료해서는 안 돼.”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잃어버린 공력을 조금씩 되돌려야 하네. 다리의 경맥을 열어도 운기할 힘이 없으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연비화가 말했다.
“내공을 다시 쌓으면 된다.”
“평범한 내상이었다면 그렇겠지요.”
백리운은 잠맥쇄가 남긴 검은 흔적을 가리켰다.
“검후의 공력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흑수림의 봉인대로 빨려 들어갔다가 일부가 뒤틀린 채 경맥에 남았습니다.”
당소혜가 물었다.
“막힌 물길처럼 된 건가요?”
“비슷하네. 물길을 한꺼번에 열면 고인 물이 둑을 무너뜨릴 수 있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먼저 독맥을 없애고, 막힌 경맥을 한 줄씩 열어야 하네.”
백리운은 약상자에서 세 종류의 침을 꺼냈다.
가장 가는 은침.
조금 굵은 금침.
마지막은 검은빛이 도는 철침이었다.
무혁의 눈빛이 굳었다.
“위험한 치료요?”
“검은 철침은 독기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네. 잘못 놓으면 공력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단전까지 상할 수 있어.”
“다른 방법은 없소?”
“있네.”
“무엇이오?”
“반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약만 먹는 방법.”
연비화가 즉시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백리운은 한숨을 쉬었다.
“검객들은 하나같이 의원의 편한 방법을 거부하는군요.”
연비화가 물었다.
“위험한 방법은 얼마나 걸리느냐?”
“첫 번째 치료에 한 시진. 이후 매일 운기와 침술을 병행하면 다리의 감각을 되찾는 데 보름 정도 걸릴 겁니다.”
“적운곡까지 사흘이다.”
“그러니까 적운곡에 도착할 때까지 걸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연비화가 대답하지 않았다.
백리운은 무혁을 바라보았다.
“환자가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으니 보호자가 지켜보게.”
무혁이 연비화에게 말했다.
“걸으시면 안 됩니다.”
“네가 의원이냐?”
“아닙니다.”
“그런데 왜 명령하느냐?”
“아들이니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연비화는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당소혜가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였다.
백리운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혁이 처음으로 환자를 다루는 법을 제대로 익혔군.”
---
치료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백리운은 연비화의 양쪽 발목과 무릎에 은침 열두 개를 놓았다.
그다음 금침 네 개를 단전 아래의 혈도에 꽂았다.
마지막으로 검은 철침을 오른쪽 발목의 독맥 위에 올렸다.
“이제 진기를 아주 조금 흘려보낼 사람이 필요하네.”
무혁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하겠소.”
“안 돼.”
연비화가 제지했다.
“왜입니까?”
“귀검과 같은 혈맥을 지닌 네 진기가 내 몸에 들어오면 봉인의 잔기가 반응할 수 있다.”
백리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있네. 무혁의 내공은 맑지만 진백현 선생의 혈맥을 이어받았으니 귀검의 심철과 반응할 수도 있어.”
남궁소연이 말했다.
“그렇다면 제 진기를 사용하십시오.”
연비화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궁가의 심법은 양기가 지나치게 강하다. 막힌 경맥에 넣으면 충돌할 수 있다.”
당소혜가 물었다.
“내공이 가벼운 사람이 해야 하나요?”
“가벼우면서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하네.”
백리운의 시선이 소혜에게 향했다.
소혜가 눈을 깜박였다.
“제가요?”
“당문의 소천류심법은 가는 실처럼 진기를 나누는 데 적합하네.”
“하지만 저는 의원이 아닌데요.”
“내가 방향을 알려 주지.”
백리운은 연비화의 왼쪽 다리 앞에 앉고, 당소혜를 오른쪽에 앉혔다.
“내가 금침을 반 치 돌리면 진기를 한 줄 보내게. 다시 돌리면 멈추고.”
“잘못하면요?”
“검후의 경맥이 상할 수 있네.”
소혜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너무 큰 책임 아닌가요?”
연비화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렵느냐?”
“두려워요.”
“그렇다면 할 수 있다.”
“두렵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두려움을 아는 손이 함부로 힘을 쓰지 않는 법이다.”
소혜는 숨을 고른 뒤 연비화의 발목에 손을 올렸다.
백리운이 금침을 천천히 돌렸다.
“지금.”
소혜의 진기가 아주 가느다랗게 경맥 안으로 흘러들었다.
연비화의 발목 위로 작은 떨림이 일었다.
검은 철침이 미세하게 울었다.
백리운은 손끝으로 맥의 움직임을 읽었다.
“멈추게.”
소혜가 즉시 진기를 거두었다.
“다시.”
두 사람은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당소혜가 막힌 혈도를 안쪽에서 밀면, 백리운은 침으로 독기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반 시진이 지났을 때 검은 철침 끝에 먹물 같은 물방울이 맺혔다.
무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치료를 지켜보았다.
검으로 상대하는 적이라면 자신이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저 어머니의 표정과 백리운의 손을 살필 뿐이었다.
남궁소연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을 믿으십시오.”
“믿고 있소.”
“그런데 손을 너무 세게 쥐고 있습니다.”
무혁은 그제야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소연은 그의 굳은 손가락을 하나씩 펴 주었다.
“걱정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답답하오.”
“당신이 흑수림에서 검후를 구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할 차례입니다.”
무혁은 치료 중인 소혜와 백리운을 바라보았다.
소혜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백리운은 농담 한마디 없이 연비화의 맥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군.”
“무엇이 말입니까?”
“강해진다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소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야 다시 배우는군요.”
“무엇을 말이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법을요.”
무혁은 소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아직 그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소연도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손을 거두려는 순간 무혁이 말했다.
“조금만 이대로 있어 주시오.”
소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손이 아픕니까?”
“그것은 아니오.”
“그렇다면 왜…….”
무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소연의 손이 닿아 있으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은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저 도움이 되오.”
소연은 더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잠시만입니다.”
두 사람은 치료가 끝날 때까지 나란히 앉아 있었다.
---
한 시진 뒤 백리운이 마지막 철침을 뽑았다.
연비화의 오른쪽 발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무혁이 즉시 다가왔다.
“움직이셨습니까?”
연비화가 다시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더욱 분명하게 움직였다.
당소혜가 환하게 웃었다.
“됐어요!”
백리운은 기뻐하는 대신 연비화의 맥부터 확인했다.
“첫 번째 독맥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연비화가 다리에 손을 올렸다.
“감각이 전보다 선명하구나.”
“오늘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왼쪽 다리는?”
“내일입니다.”
“지금 함께 하면 안 되느냐?”
백리운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됩니다.”
“내 몸은 내가 안다.”
“환자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지요.”
“나는 검후다.”
“지금은 환자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당소혜가 무혁에게 속삭였다.
“백 의원이 이긴 것 같지?”
“아직 모르오.”
연비화는 잠시 백리운을 노려보다 몸을 뒤로 기댔다.
“좋다. 오늘은 따르마.”
백리운이 말했다.
“앞으로도 따르셔야 합니다.”
“그것은 내일 생각하겠다.”
“역시 무혁의 어머니시군.”
“그게 무슨 뜻이냐?”
“고집이 닮았다는 뜻입니다.”
무혁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 나까지 포함시키는 것이오?”
당소혜가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계곡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흑수림을 벗어난 뒤 처음으로 모두의 어깨에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
---
그날 밤 일행은 버려진 산신각에서 묵었다.
지붕 일부가 무너져 있었지만 바람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남궁소연과 당소혜가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고, 무혁은 무너진 문짝으로 연비화가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백리운은 낮에 뽑아낸 독기를 확인하며 탕약을 달였다.
육지검객은 산신각 기둥에 묶여 있었다.
무혁은 그의 혈도를 막았지만 눈과 입은 가리지 않았다.
“적운곡에 무엇이 있소?”
육지검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철무광이 지킨 두 번째 명부를 알고 있지 않소?”
“알고 있다.”
“무영객의 이름도 적혀 있소?”
육지검객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 명부를 보면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왜요?”
남궁소연이 물었다.
“첫 번째 명부는 무영객에게 포섭된 자들의 이름이다.”
육지검객은 연비화에게서 나온 금속 명부를 바라보았다.
“두 번째 명부는 그들을 감시하고 추적한 자들의 이름이지.”
당소혜가 물었다.
“그게 왜 혼란스러워져요?”
“두 명부에 동시에 적힌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백리운의 손이 멈췄다.
“배신자이면서 추적자였다는 말인가?”
“혹은 추적자인 척했던 배신자겠지.”
“누구의 이름입니까?”
육지검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혁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적운곡에 도착하면 확인하겠소.”
육지검객이 무혁을 바라보았다.
“철무광이 살아 있다면 말이지.”
무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사부님께 무슨 일이 생겼소?”
“무영객도 두 번째 명부를 찾고 있다. 네가 적운곡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그자가 모를 것 같으냐?”
“당신은 붙잡힌 뒤 누구에게도 소식을 보내지 못했소.”
“내 소식이 끊어진 것이 곧 신호다.”
당소혜는 육지검객의 옷과 기관쇄를 다시 살폈다.
“몸에는 전서 장치가 없어요.”
백리운도 말했다.
“섭혼향이나 추적향도 남지 않았네.”
남궁소연은 산신각 밖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를 지켜보는 자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무혁은 산신각의 어둠을 천천히 살폈다.
겉으로 드러난 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흑수림에서 적운곡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누군가 먼저 달려갔다면 이미 적운곡에 도착했을 수도 있었다.
연비화가 조용히 말했다.
“철무광은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다.”
무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철무광 사부님을 잘 아십니까?”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열일곱 살이었다.”
현재 서른일곱인 철무광이 스무 해 전에는 열일곱 살이었다.
흑도에 몸담은 어린 도객.
그러나 이미 칼을 든 어른들보다 눈빛이 깊은 소년이었다.
“그 나이에 아버지께서 귀검을 맡기셨다고요?”
“진백현은 무공보다 사람을 보았다.”
연비화가 대답했다.
“철무광은 흑도에서 자랐지만 빚을 잊지 않았고, 힘없는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약속을 무겁게 여겼다.”
“어떤 인연이 있었습니까?”
“진백현이 죽어 가던 그의 누이를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누이의 병은 이미 깊었다.
진백현도 목숨을 구하지는 못했다.
다만 마지막 며칠 동안 고통 없이 가족과 작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철무광은 그 은혜를 평생의 빚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 진백현은 귀검을 맡기며 한 가지를 물었다.”
연비화가 말했다.
“이 검 때문에 천하가 너를 쫓는다면 지킬 수 있겠느냐고.”
“철무광 사부님께서는 무엇이라 답했습니까?”
“검은 지킬 수 없지만 약속은 지키겠다고 했다.”
무혁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었다.
철무광다운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이십 년 동안 귀검을 숨기셨군요.”
“그리고 태허문이 멸문한 뒤 너를 찾아갔다.”
무혁은 불타는 태허문을 떠나 처음 철무광을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우연한 만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철무광은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태허문이 무너져 귀검의 첫 봉인이 깨지고, 숨어 있던 적들이 무혁을 추적하기 시작하자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철무광 사부님은 왜 모든 사실을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도 전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연비화는 모닥불 너머의 육지검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는 것마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육지검객의 눈빛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남궁소연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철무광과 무영객 사이에 다른 관계가 있군요.”
육지검객은 눈을 감았다.
“적운곡에서 직접 확인해라.”
---
모두가 잠든 뒤에도 무혁은 쉽게 눈을 감지 못했다.
그는 산신각 밖의 바위 위에 앉아 귀검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달빛을 받은 검집은 묵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철무광이 이십 년 동안 지킨 검.
아버지 진백현이 만들고 없애려 했던 검.
태허문이 멸문한 뒤에야 자신에게 전해진 검.
무혁은 귀검의 자루에 손을 얹었다.
검은 조용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남궁소연이 산신각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무혁에게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았다.
“철무광 사부님 생각을 했소.”
“걱정됩니까?”
“그분은 내게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았소.”
“원망스럽습니까?”
“아니오.”
무혁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이제는 왜 말하지 못했는지부터 묻게 되오.”
소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이었다면요?”
“숨겼다는 사실부터 원망했을 것이오.”
청허진인과 연비화를 만나며 무혁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진실을 숨긴 일 자체가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숨긴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정이 잘못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다만 검을 뽑기 전에 끝까지 들어야 할 이유가 되었다.
“소연.”
“말씀하십시오.”
“적운곡에서 남궁세가의 더 큰 죄가 드러날 수도 있소.”
소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정말 괜찮겠소?”
“괜찮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태허문을 구하려 했다는 증거가 나왔을 때는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가문의 인장이 태허문의 퇴로를 막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소연의 잘못은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무거운 표정을 짓소?”
소연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앞에서 남궁세가의 이름이 부끄러워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는 소연을 가문의 이름으로 보고 있지 않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렵소?”
소연은 무혁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 두렵습니다.”
무혁의 손이 귀검 위에서 멈췄다.
소연의 마음은 이제 분명했다.
그녀는 가문의 진실만을 밝히기 위해 이 길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혁의 곁에 떳떳하게 남고 싶어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무혁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소연이 진실을 숨기지 않는 한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오.”
“가문이 태허문의 멸문에 깊이 관여했다 해도요?”
“잘못한 자에게 책임을 묻겠소.”
“그 사람이 제 아버지라면요?”
“직접 말씀을 듣겠소.”
“그 뒤에도 제가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습니까?”
무혁은 이번에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 선택은 소연이 하는 것이 아니오?”
소연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이 싫다고 하면 할 수 없습니다.”
“싫다고 하지 않겠소.”
짧고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소연의 가슴은 검을 맞댈 때보다 세차게 뛰었다.
무혁은 아직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소연이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소연은 조용히 웃었다.
“그 말은 기억해 두겠습니다.”
“무슨 말이오?”
“제가 곁에 있는 것이 싫지 않다고 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소.”
“뜻은 같지 않습니까?”
무혁은 반박하지 못했다.
산신각 안에서 당소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무슨 이야기 해요?”
백리운이 뒤이어 말했다.
“잠든 사람은 계속 자는 것이 예의일세.”
“백 의원도 안 자고 있잖아요.”
“나는 환자를 살피고 있었네.”
남궁소연은 산신각 쪽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당소혜와 백리운은 얼른 안쪽으로 숨었다.
무혁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소연은 그 웃음을 오래 바라보았다.
---
이튿날 아침 백리운은 연비화의 왼쪽 다리를 치료했다.
이번에는 당소혜 혼자 진기를 보내지 않았다.
첫날의 치료로 독맥의 성질을 알아낸 백리운이 자신의 내공을 섞어 진기의 흐름을 조절했다.
무혁은 약초를 달였고, 남궁소연은 수레의 바퀴와 가죽끈을 점검했다.
각자가 맡은 일이 달랐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연비화가 다시 자신의 두 발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것.
치료가 끝났을 때 연비화는 양쪽 발가락을 모두 움직일 수 있었다.
둘째 날 저녁에는 무릎 아래까지 감각이 돌아왔다.
셋째 날 아침, 연비화는 바위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백리운이 즉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 무리입니다.”
“한 걸음만 걷겠다.”
“어제도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어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도 걷지 말라는 겁니다.”
연비화는 백리운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그 순간 무혁이 그녀의 다른 팔을 받쳤다.
“한 걸음만입니다.”
“네가 허락하는 것이냐?”
“백 의원께서 허락하신다면.”
백리운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 한 걸음만입니다.”
연비화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발끝이 땅에 닿았다.
아직 힘이 온전히 들어가지 않았지만 무릎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어서 왼발이 움직였다.
두 걸음.
연비화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이마에 땀이 맺혔고 호흡도 조금 거칠어졌다.
그러나 자신의 두 발로 서 있었다.
무혁의 눈빛이 밝아졌다.
“걸으셨습니다.”
“고작 두 걸음이다.”
“첫걸음이 가장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철무광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연비화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좋은 사람에게 무공을 배웠구나.”
“엄한 분입니다.”
“너처럼 고집 센 제자를 가르치려면 그래야 했겠지.”
당소혜가 웃었다.
“한무외 선배님도 같은 말을 하실 거예요.”
백리운은 연비화의 맥을 확인했다.
“오늘 치료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제 수레에 타지 않아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두 걸음이나 걸었다.”
“두 걸음 걸었으니 더더욱 쉬셔야 합니다.”
연비화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수레에 올랐다.
당소혜가 무혁에게 속삭였다.
“검후께서도 백 의원에게는 못 이기나 봐.”
백리운이 말했다.
“강호에서 의원의 말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환자를 포기한 사람뿐일세.”
연비화가 수레 안에서 대답했다.
“공력을 되찾으면 가장 먼저 네 말버릇부터 고쳐 주마.”
“그때는 치료비부터 받겠습니다.”
사흘 동안 함께 지내며 다섯 사람 사이의 거리도 조금씩 좁아졌다.
연비화는 더 이상 전설 속의 검후로만 보이지 않았다.
아들의 식사를 걱정하고, 소혜의 붕대가 풀리면 다시 묶어 주며, 밤늦게까지 약재를 정리하는 백리운에게 쉬라고 말하는 마흔두 살의 여인이었다.
남궁소연에게는 검법의 작은 허점을 알려 주기도 했다.
“검을 거둘 때 오른쪽 어깨가 조금 먼저 내려가는구나.”
소연이 곧바로 검을 다시 펼쳤다.
“이렇게 말입니까?”
“허리를 먼저 돌리지 말고 발끝에서 힘을 끌어올려라.”
연비화가 검을 잡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검로를 그렸다.
소연의 검이 전보다 반 치 짧아졌다.
그러나 힘은 더욱 응축되었다.
“검후라는 별호가 괜히 생긴 것이 아니군.”
백리운이 감탄했다.
연비화가 말했다.
“검을 다시 잡을 수 있다면 직접 보여 주마.”
공력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리운과 소혜의 치료 덕분에 단전에 흩어져 있던 진기가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 공력이었다.
그럼에도 연비화의 눈빛은 흑수림의 석실에 있을 때보다 훨씬 밝아졌다.
---
사흘째 해가 질 무렵 적운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개의 붉은 암봉 사이로 좁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골짜기 입구에는 낡은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赤雲谷.
적운곡.
비석 아래에는 오래전에 마른 핏자국처럼 검붉은 이끼가 끼어 있었다.
무혁이 걸음을 멈췄다.
“사람이 있소.”
남궁소연도 검에 손을 올렸다.
“몇 명입니까?”
“보이는 자는 없소.”
“그런데 어떻게 압니까?”
“나무가 베여 있소.”
골짜기 입구의 나무 세 그루에는 최근 도검에 베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흔적은 얕았지만 일정했다.
누군가 나무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검의 거리를 재기 위해 베어 본 자국이었다.
백리운은 땅에서 검은 재를 집어 냄새를 맡았다.
“반나절 전까지 불을 피운 사람이 있었네.”
당소혜는 발자국을 살폈다.
“적어도 스무 명이에요.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어요.”
무혁은 육지검객을 바라보았다.
“무영객의 사람들이오?”
육지검객이 대답했다.
“나도 모른다.”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
남궁소연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연비화는 수레에서 적운곡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이십 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구나.”
“명부가 어디에 있습니까?”
“철무광만 정확한 위치를 안다.”
“사부님께서 없으면 찾을 수 없습니까?”
“진백현은 명부를 귀검과 함께 보관하지 않았다. 귀검이 발견되어도 명부까지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소혜가 비석 뒤를 살폈다.
작은 홈 하나가 있었다.
“여기 기관이 있어요.”
그녀가 홈 안에 기관침을 넣었다.
딸깍.
비석 옆의 바위가 옆으로 밀리며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통로 안쪽에는 횃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먼저 들어간 것이다.
남궁소연이 말했다.
“함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무혁은 연비화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나도 들어간다.”
“아직 걸으실 수 없습니다.”
“공력은 일부 돌아왔다.”
“일부일 뿐입니다.”
연비화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들이 어미를 지키겠다고 뒤에 남기려 하는구나.”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나도 이십 년 전에 했다.”
무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비화가 갓난아이였던 자신을 사마진천에게 맡길 때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위험하니 데려갈 수 없다.
살리기 위해 곁에서 떼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무혁은 그 선택 때문에 스무 해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다.
남궁소연이 두 사람 사이에 나섰다.
“검후께서 함께 가시되 싸움에는 나서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연비화가 말했다.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
백리운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또 네가 막는 것이냐?”
“공력을 쓰시면 다리의 경맥이 다시 닫힐 수 있습니다.”
당소혜도 말했다.
“제가 수레가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를 살필게요. 위험하면 함께 빠져나오면 되잖아요.”
연비화는 네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아무도 자신을 환자로 남겨 두고 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싸우도록 허락할 생각도 없었다.
“좋다.”
그녀가 마침내 물러섰다.
“싸움에는 나서지 않겠다.”
백리운이 말했다.
“약속하셨습니다.”
“검을 뽑지 않겠다는 약속은 아니다.”
“검후께 검이 없지 않습니까?”
연비화의 시선이 남궁소연의 검으로 향했다.
소연은 자신의 검을 품에 더 가까이 당겼다.
“제 검은 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연비화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혁보다 빈틈이 없구나.”
---
적운곡의 비밀 통로는 아래로 이어졌다.
당소혜가 앞에서 기관을 확인했고 남궁소연이 그 뒤를 따랐다. 무혁은 연비화의 수레 옆을 지켰으며, 백리운은 포박된 육지검객을 맡았다.
통로 양쪽 벽에는 도흔이 남아 있었다.
한 번씩만 베어 낸 흔적이었다.
거칠고 무거웠다.
무혁은 손가락으로 도흔을 훑었다.
“철무광 사부님의 도법이오.”
“확실합니까?”
소연이 물었다.
“예. 힘을 퍼뜨리지 않고 끝에서 멈추는 습관이 있소.”
도흔은 길을 표시하고 있었다.
왼쪽 벽에 남은 것은 안전하다는 뜻.
오른쪽 벽의 흔적은 기관을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철무광은 누군가 자신을 뒤따라올 것을 알고 흔적을 남겼다.
세 번째 갈림길에서 도흔이 양쪽 벽에 모두 새겨져 있었다.
무혁은 걸음을 멈췄다.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오.”
그 순간 통로 뒤쪽의 바위문이 닫혔다.
쿵!
앞쪽에서도 쇠창살이 떨어졌다.
사방의 작은 구멍에서 붉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백리운이 즉시 외쳤다.
“호흡을 멈추게!”
그는 약상자에서 중화분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육지검객이 갑자기 몸을 돌려 약상자를 걷어찼다.
약병과 침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자를!”
당소혜가 기관쇄를 당겼다.
육지검객의 손목 혈도가 눌렸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어깨로 백리운을 밀어냈다.
육지검객은 애초부터 도망칠 생각이 아니었다.
통로 안의 독에 스스로 노출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연비화를 노렸다.
그의 손에 가느다란 독침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남궁소연의 검이 번뜩였다.
챙!
독침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육지검객은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무혁이 있었다.
무혁의 검집이 그의 가슴을 눌렀다.
쿵!
육지검객의 등이 벽에 부딪쳤다.
그가 무릎을 꿇는 순간 당소혜의 기관쇄가 더욱 조여졌다.
백리운은 넘어진 약상자에서 해독환을 찾아 연비화와 세 사람에게 던졌다.
“삼키지 말고 혀 밑에 물게!”
무혁은 해독환을 입에 넣은 뒤 육지검객에게도 하나를 내밀었다.
“먹으시오.”
육지검객이 비웃었다.
“나를 살리겠다고?”
“당신에게 물을 것이 남았소.”
“끝까지 어리석군.”
“적을 살리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오.”
무혁은 육지검객의 턱을 눌러 억지로 해독환을 넣었다.
남궁소연이 물었다.
“이 독은 육지검객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백리운이 붉은 연기의 냄새를 살폈다.
“그렇네. 이자는 우리와 함께 죽을 각오로 움직인 것이 아니야. 누군가 우리가 들어온 뒤 기관을 작동시켰어.”
당소혜는 쇠창살 옆의 톱니를 확인했다.
“안쪽에서 조종하고 있어요.”
“얼마나 버틸 수 있나?”
무혁이 물었다.
“해독환이 있어도 일각 정도예요.”
당소혜는 벽의 기관을 두드렸다.
오른쪽 벽에서 빈 소리가 났다.
“이쪽에 통로가 있어요. 하지만 문을 여는 축이 반대편에 있어요.”
남궁소연이 검을 들었다.
“벽을 베겠습니다.”
“안 돼요. 안쪽에 화약선이 있어요. 억지로 부수면 통로가 무너집니다.”
무혁은 양쪽 벽에 남은 철무광의 도흔을 바라보았다.
왼쪽에도 한 줄.
오른쪽에도 한 줄.
두 흔적은 같은 높이에 있지 않았다.
왼쪽 도흔은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 도흔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두 도흔을 동시에 눌러야 하는 것이오.”
당소혜가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나는 잠금축이고 다른 하나는 안전축이에요.”
“얼마나 떨어져 있소?”
“세 장이에요. 한 사람이 동시에 누를 수 없어요.”
무혁과 남궁소연은 눈빛을 마주쳤다.
소연이 왼쪽 벽 앞에 섰다.
무혁은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당소혜가 가운데에서 기관의 진동을 살폈다.
“제가 신호하면 동시에 검을 넣으세요. 힘이 다르면 축이 부러져요.”
백리운은 연비화의 입과 코를 천으로 막고 독연을 늦췄다.
당소혜가 손을 들었다.
“하나.”
남궁소연의 검 끝이 도흔 앞에 놓였다.
“둘.”
무혁은 녹슨 철검을 세웠다.
“지금!”
두 검이 동시에 벽을 찔렀다.
챙!
무혁의 무거운 힘과 소연의 날카로운 진기가 각각의 축을 눌렀다.
벽 안의 톱니가 맞물려 돌아갔다.
철컥!
빈 소리가 나던 벽이 위로 올라갔다.
새로운 통로가 나타나며 독연이 빠져나갔다.
당소혜가 먼저 수레를 밀었다.
“빨리 나가요!”
모두가 통로를 빠져나오자 벽은 다시 닫혔다.
백리운은 인원부터 확인했다.
“모두 있군.”
당소혜가 말했다.
“당연하죠. 한 명이라도 두고 오지 않기로 했잖아요.”
연비화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위험에 빠질 때마다 누군가를 희생해 길을 열지 않았다.
각자의 힘을 나누어 모두가 나갈 방법을 찾았다.
스무 해 전 자신과 진백현은 무혁을 살리기 위해 헤어지는 길을 선택했다.
청허진인도 태허문을 지키기 위해 혼자 칠성의 자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귀검사우는 다른 선택을 하고 있었다.
누구도 남기지 않는 것.
혼자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연비화는 그것이 자신들이 다음 세대에 끝내 가르치지 못했던 강함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새 통로 끝에는 넓은 지하 석실이 있었다.
벽마다 수백 자루의 낡은 도가 걸려 있었다.
석실 한가운데에는 철무광이 서 있었다.
검은 무복은 여러 곳이 찢어졌고, 왼쪽 어깨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손에 든 장도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검은 복면을 쓴 무인 일곱 명이 쓰러져 있었다.
무혁의 눈빛이 밝아졌다.
“사부님!”
철무광의 시선이 무혁에게 향했다.
늘 무뚝뚝하던 얼굴에 아주 작은 안도감이 떠올랐다.
“늦었군.”
무혁은 그에게 다가갔다.
“다치셨습니까?”
“긁혔다.”
백리운이 철무광의 어깨를 살폈다.
“뼈 가까이 베였는데 긁힌 것이라 하시는군.”
“팔은 움직인다.”
“검객들이나 도객들은 왜 상처의 기준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군.”
당소혜가 끼어들었다.
“무혁도 똑같아요.”
철무광은 무혁의 등에 멘 귀검을 확인했다.
“함부로 뽑지는 않았겠지?”
“필요하지 않을 때는 뽑지 않았습니다.”
“필요할 때는?”
“아직 그 필요를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철무광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잘 지켰다.”
그의 시선이 수레 위의 연비화에게 향했다.
철무광의 얼굴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검후…….”
연비화가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무광아.”
서른일곱의 흑도 도객이 마흔두 살의 연비화 앞에서 잠시 열일곱 살 소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철무광은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했다.
“살아 계셨군요.”
“네가 귀검을 지켰다는 말을 들었다.”
“약속했으니까요.”
“이십 년은 긴 세월이다.”
“약속에는 기한이 없었습니다.”
연비화의 눈에 고마움이 떠올랐다.
“고생했다.”
철무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무혁은 처음으로 사부의 굽은 어깨를 보았다.
철무광은 이십 년 동안 귀검을 지켰다.
태허문이 멸문한 뒤 무혁을 찾아 첫 번째 스승이 되었고, 원한에 빠진 제자가 검에 삼켜지지 않도록 보호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감당한 세월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무혁이 철무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왜 그러느냐?”
“고맙습니다.”
철무광의 눈썹이 꿈틀했다.
“갑자기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귀검을 지켜 주신 일도, 저를 찾아오신 일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누가 말했느냐?”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철무광은 연비화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숨길 때가 지난 모양이군.”
“제 출생을 알고 계셨습니까?”
“네가 진백현의 아들이라는 것은 몰랐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고 계셨습니까?”
“귀검이 네 피를 찾는다는 것.”
철무광은 장도를 검집에 넣었다.
“진백현은 네 이름도, 부모의 정체도 말하지 않았다. 태허문에서 자라는 아이가 열여덟이 되면 멀리서 지켜보라고만 했다.”
“왜 열여덟이었습니까?”
“귀검의 심철이 피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했다.”
“그래서 태허문 근처에 계셨습니까?”
“멸문하기 석 달 전부터.”
무혁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면 태허문이 공격받던 날에도 근처에 계셨습니까?”
철무광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있었다.”
“왜 태허문을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석실 안이 조용해졌다.
철무광은 변명하지 않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림맹의 토벌진이 태허문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도 들어오실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들어가려 했다.”
그의 손이 장도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진백현이 남긴 봉인함이 열렸다.”
귀검은 태허문이 아니라 적운곡에 숨겨져 있었다.
태허문의 지맥 봉인이 무너지자 적운곡에 보관된 귀검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검이 울면서 무혁의 피를 찾았다.
동시에 적운곡을 지키던 무인들이 귀검을 빼앗으려 움직였다.
“나는 태허문으로 갈 것인지, 귀검을 지킬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무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청허진인도 선택했다.
연비화도 선택했다.
철무광 역시 같은 순간 앞에 섰다.
“사부님께서는 귀검을 선택하셨군요.”
“아니다.”
철무광은 무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를 선택했다.”
그가 귀검을 버리고 태허문으로 갔다면 적들은 검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검이 무혁의 피를 찾아 깨어나는 순간 태허문의 남은 제자들까지 몰살당했을 것이다.
철무광은 적운곡에서 귀검을 노리던 자들을 막고, 검의 두 번째 봉인을 지켰다.
그 뒤 태허문으로 달려갔을 때 전각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그는 폐허에서 살아남은 무혁을 찾아냈다.
“그날 너를 처음 보았다.”
철무광이 말했다.
“태허문의 불길 앞에 홀로 서 있더군.”
무혁은 그날을 기억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밤.
철무광은 말없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무혁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그리고 살고 싶다면 따라오라고 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왜 그때 모든 사실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아는 진실도 절반뿐이었다.”
철무광은 잠시 연비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 눈에는 복수밖에 없었다. 귀검과 출생을 말하면 곧장 검을 들고 적을 찾아갔을 것이다.”
무혁은 부정하지 못했다.
열여덟 살의 자신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무공을 가르치셨습니까?”
“검을 드는 법보다 내려놓는 법을 가르치려 했다.”
철무광은 무혁의 허리에 찬 녹슨 철검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조금 배운 모양이군.”
---
철무광은 석실 안쪽 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낡은 장도 한 자루가 세로로 걸려 있었다.
그가 장도를 반 바퀴 돌리자 벽 안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바닥이 갈라지며 검은 철함 하나가 올라왔다.
철함에는 자물쇠가 없었다.
대신 앞면에 네 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검.
구름.
전갈.
태극.
당소혜가 가까이 다가갔다.
“기관 자물쇠예요.”
남궁소연은 구름 문양을 살폈다.
“남궁세가의 운룡인입니다.”
소혜는 붉은 전갈을 가리켰다.
“적갈당의 표식이고요.”
백리운은 검 문양을 손으로 훑었다.
“진백현 선생의 천검인일세.”
무혁은 마지막 태극을 바라보았다.
“태허문의 표식이오.”
철무광이 말했다.
“네 사람이 함께 열어라.”
“사부님은 방법을 모르십니까?”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저희가 열어야 합니까?”
“진백현이 그렇게 정했다.”
검과 태극.
남궁세가와 당문.
서로 다른 네 갈래의 단서가 모두 모여야 두 번째 명부가 열리도록 만든 것이다.
당소혜는 기관 상자에서 가느다란 침 네 개를 꺼냈다.
“각 문양에 맞는 기운을 동시에 보내야 해요.”
남궁소연이 구름 문양 앞에 손을 올렸다.
당소혜는 전갈을 맡았다.
백리운은 검 문양을 선택했다.
무혁은 태극 문양 앞에 섰다.
철무광이 말했다.
“진기를 많이 넣을 필요는 없다. 각자의 무공 뿌리만 확인되면 된다.”
네 사람이 동시에 내공을 흘려보냈다.
남궁소연의 청명한 창궁심법.
당소혜의 가늘고 날카로운 소천류심법.
백리운의 부드럽고 변화가 많은 독문 내공.
무혁의 태허심법과 천애귀원공이 어우러진 단단한 진기.
철함의 네 문양이 차례로 빛났다.
철컥.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안에는 두 번째 명부와 작은 목패 하나가 들어 있었다.
명부는 첫 번째 것처럼 금속판이 아니었다.
검은 실로 묶은 두꺼운 장부였다.
표지에는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影中之影.
그림자 속의 그림자.
남궁소연이 첫 장을 펼쳤다.
수십 개의 이름과 날짜, 장소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첫 번째 명부에 적힌 자들을 추적한 기록이었다.
남궁진호.
그를 감시한 사람은 남궁가주 남궁천호.
적갈당주 당적산.
그를 추적한 사람은 당문 내당의 당효중.
비검당주 제갈현.
그를 조사한 사람은 무림맹주 유천백.
당소혜가 말했다.
“유천백 맹주도 제갈현을 의심하고 있었어요.”
백리운이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런데 조사가 모두 태허문 멸문 한 달 전에 멈췄네.”
철무광이 말했다.
“그때 두 번째 명부가 적운곡으로 옮겨졌다.”
무혁은 마지막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한 사람에 관한 기록만 남아 있었다.
무영객.
본명 불명.
나이 불명.
소속 불명.
그러나 그 아래에는 열여덟 해 동안 연비화가 추적한 행적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십 년 전.
천검산장의 내부 지도를 칠성검문에 전달.
십팔 년 전.
하북의 세 문파를 이간하여 혈전을 일으킴.
십오 년 전.
남궁세가 내당에 사람을 심음.
십이 년 전.
당문 적갈당의 독초 거래망을 장악.
칠 년 전.
무림맹 비검당의 밀고 체계를 손에 넣음.
이 년 전.
청허진인이 수집한 첫 번째 명부를 바꿔치기함.
남궁소연의 손이 멈췄다.
“명부를 바꿔치기했다고요?”
연비화가 수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백리운이 기록을 읽었다.
“청허진인이 유천백에게 보낸 명부와 우리가 가진 첫 번째 명부가 서로 다르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무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유천백 맹주는 거짓 명부를 받았군.”
두 번째 명부의 기록에 따르면 청허진인은 무영객의 수하들을 밝혀낸 진짜 명부를 무림맹주에게 보냈다.
그러나 명부는 전달 과정에서 바뀌었다.
유천백이 받은 명부에는 무영객의 수하들이 아니라 무고한 정파 인사들과 태허문에 협력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마교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태허문이 마교와 내통하여 정파를 공격하려 한다는 증거로 보이도록 조작된 것이다.
“그래서 유천백이 태허문을 역적으로 규정했군요.”
당소혜가 말했다.
남궁소연은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토벌령에 서명하기 전에 직접 확인했어야 합니다.”
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천백 맹주의 말을 직접 들어야 하오.”
백리운은 마지막 기록을 가리켰다.
태허문 멸문 칠 일 전.
무영객, 무림맹주 유천백의 신분으로 비검당에 출입.
석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당소혜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무영객이 유천백 맹주라는 말이에요?”
철무광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명부에는 유천백의 신분으로 들어갔다고 적혀 있잖아요.”
남궁소연이 말했다.
“유천백 본인이 아니라 유천백으로 위장한 자일 수도 있습니다.”
백리운은 날짜 아래의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무영객은 얼굴이 아니라 자리를 훔친다.
그를 본 자들의 증언은 모두 다르다.
노인.
중년의 검객.
젊은 서생.
복면을 쓴 여인.
“한 사람이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나?”
당소혜가 물었다.
백리운이 대답했다.
“역용술이 극에 달했다면 가능할 수도 있네. 하지만 목소리와 체격, 걸음걸이까지 완전히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아.”
연비화는 두 번째 명부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십팔 년 동안 무영객을 쫓았다.”
무혁이 물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자만 추적하셨습니까?”
연비화는 마지막 장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희미하게 지워진 문장이 있었다.
천검산장을 공격한 자의 오른손에는 반달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이 흔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연비화는 이십 년 전 천검산장이 불타던 밤을 떠올렸다.
검은 장포를 입은 자가 진백현의 서재에서 명부와 주조 기록을 가져갔다.
연비화는 그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다만 문을 닫는 오른손에 반달 모양의 흉터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 흔적 하나를 따라 십팔 년을 움직였다.
남궁세가의 내당에서 같은 흉터를 지닌 자를 보았다는 증언을 찾았다.
당문 적갈당에서도 같은 자가 독초를 사 갔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무림맹 비검당에서는 그 손을 가진 사람이 제갈현의 방을 드나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증언마다 얼굴과 나이가 달랐다.”
연비화가 말했다.
“나는 무영객이 역용에 능한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무혁이 묻자 연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객은 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당소혜가 눈을 크게 떴다.
“여러 사람이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는 뜻이에요?”
철무광이 철함 안의 목패를 꺼냈다.
목패 앞면에는 얼굴 없는 사람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뒷면에는 세 글자가 있었다.
無影席.
무영석.
그림자 없는 자리.
철무광이 말했다.
“진백현은 죽기 전 무영객을 사람으로 찾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자리.”
철무광이 대답했다.
“무영객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무영주의 명령을 대신 수행하는 자리다. 임무마다 다른 사람이 그 이름과 얼굴을 쓴다.”
첫 번째 무영객은 천검산장을 공격했다.
다음 무영객은 남궁세가에 들어갔다.
또 다른 무영객은 당문의 독초 거래를 장악했다.
그리고 이 년 전에는 누군가 유천백의 얼굴과 신분을 사용해 비검당에 출입했다.
십팔 년 동안 연비화가 쫓은 자는 하나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어받은 하나의 자리였다.
남궁소연이 물었다.
“그렇다면 무영주는 별개의 인물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다.”
철무광은 목패를 뒤집었다.
목패 가장자리에는 매우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무영객은 얼굴을 바꾸고,
무영주는 이름을 바꾸며,
그들이 섬기는 주인은 역사를 바꾼다.
백리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영주 위에 또 누군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당소혜가 말했다.
“비밀이 너무 많아지는 것 아니에요?”
무혁은 명부의 마지막 장을 살폈다.
지워진 글씨 아래에 미세한 눌림 자국이 있었다.
먹은 지워졌지만 종이에 남은 흔적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종이를 등불 옆에 비스듬히 세웠다.
“여기에 이름이 있었소.”
당소혜가 기관 상자에서 검은 가루를 꺼냈다.
“종이 아래에 댄 채 눌러 쓴 글씨라면 살릴 수 있어요.”
그녀는 가루를 얇은 천에 묻혀 종이 위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희미한 글자가 하나씩 나타났다.
열여덟 년 전 무영객의 자리를 이어받은 자.
출신, 무림맹.
현재 신분, 알 수 없음.
오른손에 반달 흉터.
그 아래에는 이름의 일부만 남아 있었다.
天.
하늘 천.
한 글자뿐이었다.
남궁소연이 중얼거렸다.
“이름에 천 자가 들어가는 사람…….”
당소혜가 곧바로 말했다.
“유천백.”
“남궁천호도 있습니다.”
백리운이 덧붙였다.
“사마진천도 있지.”
석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유천백.
남궁천호.
사마진천.
지금까지 진실과 가장 가까운 세 사람의 이름에는 모두 천 자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한 글자만으로 누구도 의심할 수는 없었다.
특히 무영객이 신분을 훔치는 자리라면 그 이름조차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연비화가 명부를 덮었다.
“이것이 그들이 원한 혼란이다.”
“무슨 뜻입니까?”
무혁이 물었다.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서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
남궁소연은 자신의 아버지 남궁천호를 생각했다.
그는 태허문을 구하려 했다는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가문의 내부를 장악한 배신자를 막지 못했다.
사마진천은 무혁을 구해 태허문에 맡겼다.
하지만 마교주가 된 뒤 이십 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유천백은 태허문을 역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제갈현과 무영객을 추적한 기록도 남아 있었다.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의심만으로 죄인이라 정할 수도 없었다.
무혁이 말했다.
“한 글자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소.”
철무광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 사람이 한 일을 확인하겠습니다.”
“말과 증거가 다르면?”
“둘 다 살피겠습니다.”
“그래도 알 수 없다면?”
무혁은 잠시 생각했다.
“직접 만나 검을 겨누지 않고 묻겠습니다.”
철무광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나타났다.
“한무외가 사람 하나는 만들어 놓았군.”
“사부님께서도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살아남는 법만 가르쳤다.”
“그래서 진실을 확인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철무광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에는 제자를 향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
그때 석실 벽에 걸린 도 한 자루가 울렸다.
우웅.
철무광의 표정이 달라졌다.
“누군가 적운곡의 바깥 진을 건드렸다.”
당소혜가 바닥에 손을 댔다.
“한 사람이 아니에요. 사방에서 동시에 들어오고 있어요.”
남궁소연이 검을 뽑았다.
“무영객의 수하들입니까?”
육지검객이 낮게 웃었다.
“두 번째 명부가 열렸으니 모두 죽이러 온 것이다.”
백리운은 두 권의 명부를 약상자에 넣었다.
“검후는 아직 싸울 수 없습니다.”
연비화가 수레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시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 분노가 일었다.
검후라 불렸던 사람이 검조차 들지 못했다.
무혁이 그녀 앞에 앉았다.
“어머니는 명부를 지켜 주십시오.”
“나도 싸울 수 있다.”
“공력을 쓰시면 다시 걷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적이 앞에 있는데 누워 있으라는 것이냐?”
“이번에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연비화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스무 해 전에는 자신이 무혁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이제는 다 자란 아들이 자신을 지키겠다고 검 앞에 서려 했다.
“혼자 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연비화가 물었다.
무혁은 세 벗을 바라보았다.
남궁소연은 이미 오른쪽에서 검을 세웠다.
당소혜는 석실 입구에 기관을 설치했다.
백리운은 철무광의 상처에 지혈약을 바른 뒤 독침을 준비했다.
“혼자가 아닙니다.”
철무광이 장도를 뽑았다.
“나도 있다.”
백리운이 말했다.
“그 어깨로 도를 휘두르시면 상처가 벌어집니다.”
“싸우는 데 지장은 없다.”
“환자 둘이 똑같은 말을 하는군.”
연비화가 철무광을 바라보았다.
“무광아.”
“말씀하십시오.”
“아이들을 지켜라.”
철무광은 무혁과 세 벗을 차례로 보았다.
“이제 내가 지키지 않아도 될 만큼 컸습니다.”
당소혜가 말했다.
“그래도 도와주시면 좋겠는데요.”
백리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은 많을수록 좋지.”
남궁소연이 말했다.
“오는 적의 수는 마흔이 넘습니다.”
무혁은 귀검이 아니라 녹슨 철검을 뽑았다.
“명부를 빼앗기지 않겠소.”
철무광이 그의 옆에 섰다.
“목숨보다 명부를 먼저 지키려 하지 마라.”
“알고 있습니다.”
“정말 아느냐?”
“명부는 다시 찾을 수 있어도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철무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실 밖에서 검과 도가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쇠창살이 흔들리고 기관이 연이어 작동했다.
당소혜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삼십 걸음.”
두 개.
“이십 걸음.”
마지막 한 개.
“십 걸음.”
남궁소연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백리운의 손가락 사이에는 은침이 들렸다.
철무광의 장도는 불길처럼 붉은 기세를 품었다.
무혁의 철검은 오히려 고요했다.
적운곡의 석문이 굉음과 함께 갈라졌다.
검은 복면을 쓴 무인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가슴에는 얼굴 없는 목패가 매달려 있었다.
무영객의 자리를 지키는 무인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검은 장포를 입고 은빛 가면을 쓴 사내였다.
가면인은 두 번째 명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열어서는 안 될 것을 열었군.”
무혁이 철검을 들었다.
“당신이 무영객이오?”
은빛 가면인이 웃었다.
“오늘은 그렇다.”
“어제는 누구였소?”
“네가 존경하던 사람일 수도 있지.”
“내일은요?”
“네가 가장 믿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의 시선이 남궁소연과 당소혜, 백리운에게 차례로 머물렀다.
서로를 의심하게 하려는 말이었다.
그러나 네 사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남궁소연이 무혁의 오른쪽에 섰다.
당소혜는 왼쪽 통로를 막았다.
백리운은 뒤에서 두 명부와 연비화를 지켰다.
철무광은 무혁의 반걸음 앞에 장도를 세웠다.
무혁이 말했다.
“얼굴을 훔쳐도 그 사람이 살아온 선택까지 훔칠 수는 없소.”
은빛 가면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천하제일귀검객이라는 허명에 취했구나.”
“나는 그 이름을 믿지 않소.”
“그러면 무엇을 믿느냐?”
무혁의 철검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내 곁에 선 사람들을 믿소.”
은빛 가면인이 손을 들었다.
마흔 명의 무인이 동시에 병기를 세웠다.
적운곡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
같은 시각.
무림맹 총단에서 유천백은 검은 봉투 하나를 받았다.
봉투 안에는 짧은 문장만 적혀 있었다.
두 번째 명부가 열렸다.
무영객이 적운곡으로 들어갔다.
유천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준비하라.”
문밖의 호위가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적운곡.”
“맹주께서 직접 가실 일입니까?”
유천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탁자 위의 검을 집으려는 순간 소매가 조금 올라갔다.
오른손 손목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오래된 반달 모양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유천백은 흉터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소매를 내려 흔적을 가렸다.
“십팔 년 동안 피했으니 이제는 대답해야겠지.”
그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 말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림맹주 유천백도 적운곡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제15화 ― 「오늘의 무영객」에서 계속**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