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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호 2006여름 |
북방계 희귀 고산식물의 전시장
글ㆍ사진 | 현진오(이학박사, 동북아식물연구소장)
환경부 멸종 위기 종 11종 등 보호 대상 식물 가장 많은 국립공원
북방계 희귀 고산식물의 전시장

고산구슬붕이
설악산국립공원에는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 환경부가 지정,관리하는
64종의 멸종 위기 야생식물 가운데 연잎꿩의다리·깽깽이풀·한계령풀· 노랑만병초·홍월귤·기생꽃·가시오갈피나무·솜다리·솔나리·자주솜대·
털개불알꽃 등 11종류가 분포한다. 설악산이 분포의 남방한계선이 되는
북방계 식물로는 비늘석송·눈잣나무·가는다리장구채·숲개별꽃·바람꽃· 흰인가목·장백제비꽃·금강봄맞이·만주송이풀·봉래꼬리풀·난장이붓꽃 등
희귀식물이 대거 생육하고 있다.
글·사진 | 현진오(이학박사, 동북아식물연구소장)
1995년이 저물어 갈 때쯤 문순화·송기엽·이경서 선생 등 내로라하는 생태사진가들이 서울에 모여 설악산 식물을 촬영해 식물사진집을 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해에 세 분이 공동으로 발간한 <한라산의 꽃 designtimesp=16660>의 편집을 맡았던 인연으로 나도 여기에 동참할 수 있었다. 원로 식물학자 이영노 박사께서 뒤를 봐주시기로 해서 더없이 든든한 출발이었다.
이듬해인 1996년, 이른 봄부터 몇 차례에 걸쳐 세 분과 함께 설악산 현장에 다녀온 후부터 직장생활 때문에 시간 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다른 분들이 여름에 몇 차례 가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밖에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분들은 주로 평일에 움직였는데, 나는 직장에 매인 몸이어서 매번 참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 아니 정말 바빠서 대의를 그르칠 지경이었다.
초가을이 되자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다른 분들은 며칠 전에 다녀온 터였으므로 혼자서라도 촬영에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계령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중청봉에 올라 산장에서 하루를 잔 뒤 화채능선을 조사하기로 계획했다. 당시 화채능선은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자연휴식년제로 묶여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해 봄 이미 관리사무소에 우리의 계획을 알려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인적 없는 화채능선을 혼자 간다고 생각하니 으스스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막상 대청봉을 지나 화채릉으로 들어선 후에는 수많은 초가을 꽃이 반겼고 그것들을 찍는 데 정신이 팔렸기 때문에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톱잔대를 비롯한 여러 잔대 종류, 투구꽃 무리, 개쑥부쟁이·참산부추·산구절초 등이 이어지며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북방계 ‘큰잎쓴풀’ 1996년 처음 발견
점심 무렵이 되었을 때, 숲을 벗어나 바위지대를 지나는데 눈길을 끄는 식물이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식물이었다. 꽃부리가 4갈래로 깊게 갈라져 4장의 꽃잎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꽃빛깔도 푸른빛이 도는 자주색으로 특이했다. 꽃부리 갈래에 꿀샘이 있는 등의 특징으로 보아 쓴풀속에 속하는 식물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확하게 어떤 종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 큰입쓴풀
현장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자료를 뒤져 보았더니 놀랍게도 큰잎쓴풀이었다. 함경북도의 무산·백두산·포태산·개마고원 등지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북방계 식물로 그때까지 남한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식물이었다.
큰잎쓴풀을 혼자 찾아냄으로써 1년 동안 설악산 식물을 함께 촬영하기로 했던 세 분께 누가 될 뻔했던 상황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 촬영한 큰잎쓴풀 사진은 1997년 2월에 빛을 본 <설악산의 꽃 designtimesp=16676>에 당당하게 설악산 식물로 실렸으며, 이보다 조금 앞서 1996년 말에 출판된 이영노 박사의 <원색 한국식물도감 designtimesp=16677>에도 실려 국내 최초로 사진을 공개했다.
봄을 기다리는 우리를 감동시키고도 남을 만한 변산바람꽃이라는 식물과의 귀한 인연도 설악산에서 맺은 적이 있다. 변산바람꽃은 봄꽃이지만 2월부터 꽃을 피우며, 깊은 산속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이다. 더욱이 꽃은 지름이 2~3cm나 되어 크고, 흰색으로 수수하면서도 화려하여 추위를 이겨 내며 봄을 기다리는 우리네 정서와 딱 맞아떨어진다. 2월 초순 제주도에서 피기 시작하여 2월 중순에는 내장산에서 피고, 아무리 추운 설악산이라고 하여도 3월 20일경이면 피므로 채 봄이 오기 전에 피고 지는 꽃인 셈이다.
이처럼 일찍 피는 바람에 식물학자들조차 오랫동안 이 식물에 주목하지 못했다. 너무 일찍 꽃이 피므로 관찰하고 채집할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변산바람꽃’ 변산보다 더 먼저 발견돼
변산바람꽃은 전북대학교 선병윤 교수에 의해 1993년에야 발견되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변산바람꽃이라는 이름도 이때 처음 발견된 장소가 전라북도 변산반도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첫 발견 이후 한라산·토함산·마이산·내장산·선운산 등지에서 추가로 확인되어 베일에 가려졌던 분포지역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남부 지방과 중부 이남의 서해안과 동해안 등 비교적 따뜻한 곳에서 발견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동해안을 따른 분포로 경주 토함산 이북으로는 훌쩍 뛰어넘어 설악산의 동해 쪽 사면에서 자란다.
속초에 살고 있는 산악사진가이자 자연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성동규 선생이 설악산에도 변산바람꽃이 자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도바람꽃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갈 뿐,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성 감독도 여러 해 동안 설악산 식물을 촬영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는 변산바람꽃이 세상에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여서 변산바람꽃이 자라는 곳으로는 변산반도 외에 마이산·돌산도·제주도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지금처럼 동해안을 따라 경주에서도 자란다는 사실조차 모를 때였다. 그러니 제주도와 서남부 지방에만 자라는 식물이 설악산에 뚝 떨어져 살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99년 3월 20일, 설악산을 찾았다. 이맘때는 대청봉에 흰 눈이 쌓여 있을 시기여서 꽃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설악산 동쪽 사면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성 감독은 설악동 부근의 어떤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어 새싹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곳에서는 현호색 종류와 노루귀가 이미 꽃봉오리를 달고 있었고, 활짝 핀 변산바람꽃도 있었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고, 뒤이어 누군가 옮겨 심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개체수가 많았고, 또 조금 떨어진 다른 곳에서도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생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성 감독이지만, 이날 들려준 이야기는 내게 매우 흥미로웠다. 대충 이런 것이었다.
“오래전에 변산바람꽃을 발견하고, 너도바람꽃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한 식물학자에게 문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몇 해 후에 다른 학자가 전라북도에서 발견하여 한국 특산 신종으로 발표했다. 내가 문의했던 학자는 그것을 새로운 것으로 확신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더 이상 연구를 진행하지 못해 신종 발표를 다른 학자에게 넘겨 주고 말았다.”
성 감독의 제보를 받은 식물학자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신종으로 발표했더라면 변산바람꽃이 아니라 ‘설악산바람꽃’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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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① 배암나무 ② 난장이붓꽃
설악산에는 950여 종류 고등식물 분포
설악산은 한반도의 가장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 중앙부에 자리 잡은 산으로 남한에서는 한라산·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속초시·인제군·양양군·고성군 등 4개 시·군에 걸쳐 있다. 편의상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인제 쪽을 내설악, 동해 쪽을 외설악, 그리고 오색과 양양 쪽을 남설악으로 구분한다.
해발 1,708m의 주봉 대청봉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을 이루며 미시령에서 대청봉까지 뻗어 있는 북주릉, 대청봉에서 귀청봉(1,578m)을 거쳐 안산(1,430m)을 잇는 서북릉, 권금성과 화채봉(1,320m)이 있는 화채릉, 가리봉(1,519m)을 품은 서릉 등이 설악산의 뼈대 구실을 하며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천불동계곡·백담계곡·흑선동계곡·십이선녀탕계곡 등 깊고 긴 계곡들을 빚어내고 있다. 경관이 빼어나고 동물상과 식물상이 풍부해 1965년 천연기념물 제175호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래, 1970년에는 제5호 국립공원, 1982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생물권보존지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식물학자들이 조사한 것에 의하면 설악산에는 950여 종류의 고등식물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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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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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한계령풀 ② 세잎종덩굴 ③ 바람꽃
이는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4,000여 종류의 식물 중 25%쯤에 해당하는 것으로 1,800여 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제주도 한라산이나 1,500여 종류가 자라는 지리산에는 못 미치지만 오대산이나 치악산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희귀식물의 수로 말한다면 설악산은 한라산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가치가 더 높을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다. 설악산에는 그만큼 귀중한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다는 것인데, 그 원인은 여러 가지다.
첫째, 북한에서 자라는 식물이 설악산까지 내려와 자라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북방계 식물이라고 부르는 이들 식물은 백두산·금강산 등 북한 지방에 분포하는 식물들로 남한에서는 설악산에서만 볼 수 있다. 설악산의 높은 위도와 고도가 빙하기 때 남하했던 북방계 식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고, 또 백두대간이 식물의 이동 통로 구실을 해줌으로써 많은 북방계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식물로는 비늘석송·눈잣나무·두메오리나무·가는다리장구채·숲개별꽃·바람꽃·흰인가목·홍월귤·장백제비꽃·금강봄맞이·만주송이풀·봉래꼬리풀·난장이붓꽃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설악산은 이들 분포의 남방한계선이 된다.
한편 설악산까지 올라와 자라는 남방계 식물도 있는데 설설고사리·모데미풀·사람주나무·때죽나무·변산바람꽃·지리대사초 등이 그것이다. 설악산에 분포하는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은 모두 한반도 내에서 분포의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것들로 다른 곳에서 자라는 같은 종의 식물보다 보존 가치가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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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③
④ 
① 가는다리장구채 ② 장백제비꽃 ③ 금강초롱꽃 ④ 산솜다리
능선 환경이 고산식물 자라기에 적당
설악산에 희귀식물이 많이 자라는 두 번째 이유는 높은 바위 봉우리와 능선이 희귀 고산식물의 보고가 되기에 알맞은 환경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청봉 일대를 비롯하여 북주릉·서북릉·화채릉·서릉 등이 높은 능선을 이루고 있으며, 더욱이 이들 능선에는 암반이 노출된 곳이 많고 어떤 곳은 고산초원지대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런 곳에 많은 고산식물이 자라고 있다.
설악산 고산지대에는 80여 종류의 고산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눈향나무·사스레나무·참바위취·산오이풀·들쭉나무·월귤·만병초·기생꽃·등대시호·한라송이풀·자주쓴풀·댕댕이나무·배암나무·땃두릅나무·분홍바늘꽃·한라송이풀·두메잔대·솔체꽃·다북떡쑥·산솜다리·바위솜나물·자주솜대·금강애기나리 등이 설악산을 대표하는 고산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설악산 식물의 중요성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한국특산식물이 많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특산식물은 407종류로 알려져 있는데 설악산에서는 이 중 65종류가 자란다. 또 우리나라 안에서도 설악산에만 자라는 설악산특산식물도 15종류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악산의 한국특산식물은 한라산의 75종류에 다음가는 것으로, 설악산보다 덩치가 큰 지리산의 42종류보다 많다.
설악산에서 자라는 한국특산식물 중 몇몇을 꼽아 보면 금강소나무·설악눈주목·모데미풀·요강나물·갈퀴현호색·금강제비꽃·터리풀·노랑갈퀴·산앵도나무·금강봄맞이·참배암차즈기·만리화·털댕강나무·금마타리·금강초롱꽃·정령엉겅퀴·자주솜대·금강애기나리 등이다. 이들 한국특산식물은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식물자원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희귀한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사라질 위험이 크다.
우리나라에서의 멸종이 곧 세계적 멸종을 뜻하므로 많은 사람의 관심과 특별한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 설악산에는 2005년 제정된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 환경부가 지정해 특별 관리하는 64종의 멸종 위기 야생식물 가운데 11종류가 자라고 있다. 연잎꿩의다리·깽깽이풀·한계령풀·노랑만병초·홍월귤·기생꽃·가시오갈피나무·솜다리·솔나리·자주솜대·털개불알꽃 등이 그것이다. 이 역시 한라산을 포함한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