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례 글 올립니다.
우선 지난 3월 29일 17시 해운대 달맞이 언덕 킹덤 호텔에서 저의 60번째 생일 축하 행사에 직접 참여해 주신 밀초 중 고향 친구 19명, 부산고 동기생 친구 18명, 해대 동기생 친구 10명 대학원, 도선사 친구 10명, 기명회 회원 8명, 일신회 회원 8명, 해우회 및 기타 선후배님 11명, 마누라 교회 친구 5명 우리 가족 10명 등 모두 99분들에게, 그리고 시간 관계상 참여는 못 했지만 축전이나 문자 메시지 등 관심을 갖고 축하를 해 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아울러 혹시 부담 줄까 봐 제가 연락도 드리지 못한 많은 지인들께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자합니다.
기존의 일반적인 행사 방법을 지양하고 저만의 새로운 기획을 시도한 결과 몇 친구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았느냐고 자꾸 물어 왔습니다.
실망스럽겠지만 처음부터 글쓰기, 기획, 프로그램 등 전부 나 혼자 했으며 말 솜씨 어눌하고 세상 살이 서투르다고 늘상 핀잔 받는 나는 학생 시절에도 컨닝 한번 해본 기억이 나지 않고 가식이나 허식을 싫어하며 있는 그대로 살아 가는 게 나의 인생관일 진대 주위의 오해가 답답할 뿐입니다.
행사 프로그램 등 어느 하나라도 나 자신의 눈 높이에 맞추었고 다시 말하면 오직 나와 내 친구들만을 위한 행사가 되게끔 초점을 맞췄으며 쌍둥이 큰 딸의 마술 놀이와 과수원 밭 내 친구 이성철의 축하노래 "목련화" 가 단연 돋보였습니다.
가족 소개 시 내 누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걸 옆 눈으로 얼핏 봤습니다.
나의 유년 시절, 울 엄마 젖 먹이 떼어 놓고 유성 모직 돈 벌러 가실 적에 누나는 날 업어서 키웠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 사라호 태풍 홍수 때엔 누나는 날 등에 업고 삼랑진까지 떠내려가서 날 구했으며, 중학시절엔 꽁 보리밥 도시락 싸기가 싫어 점심 시간 굶고 있으면 누나는 늘 감자 도시락 갖고 중학교까지 찾아왔던 기억이 선합니다.
부산고 땐 누나는 방직 공장 취직하여 나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나는 교통 비가 떨어지면 언제나 전포동 누나집 찾았고 매형한테 버스비 얻고 또 누나는 버스정류소까지 바래다 주면서 구깃구깃 접은 헌 지폐 한장 내 손에 꼭 쥐어 주곤했읍니다.
지금은 내 20년 넘은 전자 시계를 보더니만 백화점 비싼 시계 하나를 선물해 주셨건만 나는 숫기가 없어서 고맙다는 말한마디 못하고 대신에 프로그램중에 내 친구 김순자 선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서정주의 “ 국화 옆에서 ”를 낭송해 주었습니다.
“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나는 어떤 축하객에게도 정신적, 경제적 시간적인 피해를 주기 싫었으며, 저 자신을 위해 진실하게 축하를 해줄 만한 하객만 약 100명 한정 해서 그룹 별 일정 분배하여 부담 줄가 봐 그것도 간접 연락 했으며 또한호텔 연회장 테이블이 10개 밖에 안 되기도 했습니다.
호텔 담당 과장 왈 자기들 전문가 보다도 계획과 실행이 치밀하고 뛰어 났다고 과찬하면서 참고용 자료라면서 전부 가져갔습니다.
좋은 계절과 적당한 시간에, 전망 뛰어난 호텔, 진행자의 말솜씨, 프로그램 내용, 연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하객들의 똑같은 수준 등, 이모든 요소들이 한 꼭지점으로 수렴하여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가 쓴 글도 나와 수준이 같은 친구들에게는 자기들의 일인 양 가슴에 와 닿고 감동적이라 했습니다.
우리 마누라 재빠르게 숫염소 한 마리 사 주었고 저의 숨은 재능에 놀랐다고 했으며 3 주정도는 고분고분 공손했으며,걸맞는 대우를 좀 받았으며 그리고 해성 해운에서는 싱가폴 선박 추적 수배하여 내 잃어 버린 무전기 찾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어쩐 일인지 3 주 동안 심하게 앓으며 고통 받았고 인하대 병원, 안락동 내과병원, 동래 김백순 이비인후과 그리고 부산 백병원을 전전하며 정밀 검사도 받고 치료도 받았으나 스트레스성 몸살이라고 했으며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저는 축의금이나 꽃 등 부담스런 선물은 전부 사양했으나 발송 인이 없는 꽃 바구니 하나 배달됐기에, 무척이나 궁금했고 당황스러웠읍니다.
제 이름도 제대로 간수 못하는 어리벙벙한 나같은 후배 도선사가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마누라한테 유추 해석했으나 , 아련히 머릿 속 스쳐 지나 가는 상념하나, 지금은 손자들이 두 서너 명은 됐음 직한 아득한 먼 옛날 40 여년 전의 단발 머리에', 세라 복 입었던 샤론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어두운 밤 비 속에, 먼 곳 벚꽃 나무 밑에서 호텔 불빛 응시하면서 안타까와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무척 안타깝습니다. 나는 학교 졸업 후 첫 바다 나간후 오랫 동안 그리고 너무 늦게 귀향했습니다.
2008년 4월 10일
인천항 도선사 안 창 수
첫댓글 창수야, 그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