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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과 하강의 그네타기
-김옥전시인 평론-
현대사회의 복잡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다양한 경험과 사유를 통해 새로운 시를 쓰도록 요구하고 있다. 현대 이전의 시가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에 그쳤다면 현대의 시들은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상상 속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대상을 감각적으로 되살리거나 상상하도록 하여 미적 아름다움을 공감하려는 이들이 시인인 것이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인간의 상상력은 이미지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변형하고 나아가 이미지가 없는 상상력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시인은 사물에 말을 걸고 사물의 대답을 이미지화하려는 노력을 거듭한다. 사물과의 소통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려 는 것이다. 이때 얻어지는 이미지는 시인의 체험뿐만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형상화된 것들이 총체적으로 재현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이미저리들 중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는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각각 대립 항에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서로에게 묶여 조화를 이루며 때로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신이라는 나라에 가기 위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체온이 끓어오르고 있어요
이렇게 온몸에 불을 붙여 상승하다 보면
언젠간 재만 남게 되겠지만
뭐, 어때요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접근하는 방식인걸요
범접하기엔 차마 먼 빙벽처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은 굳게 닫혀 있군요
평생을 치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당신을
지축(地軸)이라 불러도 될까요
고독이라 불러도 될까요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는 천공(穿孔)속의 당신
당신이라는 나라에 닿기 위해
나 오래전부터 화려한 분신을 꿈꾸었지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불을 품고 살았지요
틈을 보여주세요
화려한 분출을 보여드릴게요
김인숙 -마그마-
웰렉(Wellek)과 워런(Warren)이 이미지가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이 아닌 과거의 감각상, 혹은 지각상 체험을 지적으로 재생하는 것, 특히 기억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했듯 김인숙의 [마그마]는 지각상 체험을 통해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김인숙의 [마그마]는 첫 행부터 ‘당신이라는 나라에 가기 위해/온몸에 불을 붙여 상승하는’상승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당신’으로 지칭되는 시적 대상에게 가기 위해 시인은 내면으로부터 ‘온몸으로 끓고’있다. 마치 상승을 준비하는 불사조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시가 끓어올라 분출하는 상승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하여 시가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를 전망하거나 시인이 지향하는 ‘당신’이라는 대상에게 가 닿는다고 할 수 없다. ‘언젠간 재만 남게’된다는 것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재’는 소멸하고 사라지는 하강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미래를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그녀의 자세는 언어의 숲을 헤매며 시어를 찾아다니는 시인의 접근방식과 다르지 않다. ‘불꽃’은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타고 남은 재는 다시 기름이’되는(한용운 <알 수 없어요 중>) 순환의 논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듯이, 상승하는 것들과 하강하는 것들은 끝없는 반복과 재생을 통해 조화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이에 비해 시적 대상인 ‘당신’의 태도는 싸늘하다. ‘빙벽’이며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굳게 닫혀’있으며 ‘동요하지 않’고 ‘열리지 않는 문’이다. 지축(地軸)이라고 표현할 만큼 요지부동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오름을 그만둘 화자가 아니다. 그렇게 쉽게 그만둘 것이라면 ‘~요’라는 밝고 친근한 문체를 사용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화자에게 있어 ‘당신’은 평생이 걸려도 좋을 끓어오름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타 죽더라도 ‘평생을 치받’으며 ‘분신’을 위해 ‘불’을 품기로 한다. 여기서 화자의 시선의 깊이가 나타난다. 그 시선은 일관되게 싸늘하고 냉정한 대상으로부터 ‘고독’을 본 것이다. 대상이 냉정으로만 일관했다면 화자는 끓어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대상의 모습에서 고독을 발견해 내고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천공’으로까지 의식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자는 대상의 ‘고독’을 ‘천공穿孔’ 속에 떠 있는 상태로 표현한다. 입구도 없으며 출구도 없는 천공의 상태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公’의 상태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지향하는 것들은 모두 ‘공公’일지도 모른다. 결국 하강의 이미지인 ‘빙벽’, ‘재’, ‘고독’, ‘분신’ 등은 평생을 치받는 상승이미지 ‘불’, ‘치받음’, ‘분출’들과 맞닿아 ‘공公’이라는 상태로 합일될 것이다.
주목하고 싶은 또 다른 부분은 ‘화려한 분신’과 ‘화려한 분출’이라는 역설적 화법이다. 한 번 타 올라버리면 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화자는 ‘틈’만 있으면 분신을 하려고 한다. ‘분신’은 하강 이미지이고 ‘분출’ 상승 이미지의 시어이다. ‘분신’은 보통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반면 ‘분출’은 타인을 태우는 기능을 한다. 화자가 이렇게 상반되는 의미의 ‘분신’과 ‘분출’을 모두 시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든 종국에는 ‘화려한’완성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극과 극에 선 이미지들의 조화가 자기희생적인 화자의 사랑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미지화가 잘 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비를 좋아하지만/오늘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 놀/이를 끝낼 수 있게 ......이렇게 말하면//비가 내린다//창문은 골목 끝까지 떠나간 시간을 열어놓고/한 장씩/바닥에 찍힌 너의 발자국을 걷어와, 가지런히/너를 쌓아올리는 이 놀이에서/비가 와,/뚝뚝 빗물을 흘리는 뒷모습으로 거기/네가 일어서는데//고요가 죽은 빗소리를 주렁주렁 소사나무에/목매달도록//순서를 기다리는 꿈이 잘린 몸으로 밤의 보를/받치는데//조금 더 멀리 갔으면,/네 키보다/더 큰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겠다, 젖을까/봐/되돌아오지 않았다면,//뒤돌아/미처 걷지 못한 발자국이 어스름 매미소리처/럼 무너지는 것을 지킬 일은 없었겠다//그러나 쌓을수록 너는 지워지네/바닥에 음각으로 찍힌 발자국은//포갤수록 사라지는 풍경의 마술//화석에조차 발자국은 갇히지 않는다 여름, 소/사나무 숲 가운데 이 어두워지는 놀이에서/한 가지 일은 그리워 하는 것/다른 한 가지는, 잊는다//비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내리지 않았으면......하는 오늘은, 비가 내리고/먹구름 뒤에서/너는 젖은 이마로 올해도 휩쓸려가지 않은 하/류의 비닐 뭉치나 내리치는 것일 텐데/벼락이여,/아마도 슬픔은 밥 냄새 같은 것이었을까? 가/을 어디쯤에선//낙엽이 타다 비를 맞을 것이다//
신용목 -소사나무 숲의 여름-
신용목 시인을 깊은 사유의 서정시인, 난해한 시를 논리적으로 쓰는 서정시인이라 부르고 싶은 것은 자칫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쉬운 서정시와 소통 부재를 몰고 올 난해 시를 조화롭게 융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 역시 하강이미지와 상승이미지가 서로를 끌어안고 극과 극으로 빠지려는 감정의 상태를 조절하고 있다. 시 속에는 ‘비’, ‘뚝뚝’, ‘목매달도록’, ‘무너지는’, ‘지워지네’, ‘어두워지는’, ‘먹구름’ 등의 슬프고 우울한 시어들이 등장하여 시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어둡게 한다. 그러나 행간에 걸쳐있는 시어들과 다하지 못한 줄임표들이 감정을 조절하는 휴지부의 역할을 해 준다.
1연과 2연에서 화자는 ‘놀이’를 끝낼 수 없게 하는 것이 ‘비’라고 말한다. 과연 화자는 ‘놀이’를 끝내고 싶을까,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라는 걸까 의심하는 동안 그렇지 않다고 진술하는 부분을 만난다. ‘조금 더 멀리 갔으면’ ‘큰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으나 ‘젖을까/봐’ 그만 두는 부분이 그렇다. 그만둔다는 것은 ‘놀이’를 계속하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로 인해 ‘매미 소리처럼 무너지는 것을 지키’는 슬픔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조차도 감내하겠다고 마음 먹은 화자는 다 하지 못한 놀이를 쉰다. 이렇게 됨으로써 ‘너를 쌓아올리는’(상승이미지)일의 출발점이었던 ‘지워지는’(하강이미지)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결합은 ‘그리워하는 것’과 ‘잊는 것’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놀이’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날마다 ‘그리워하는’일을 새로 시작하지만 ‘잊는’것은 선택하지 않을 화자다. 때문에 ‘네 키보다/더 큰 이야기를 만들’무렵에는 비라고 하는 일시적 단절의 매개체가 등장한다.
한 장 한 장 낙엽을 줍듯 대상과의 시간 또는 발자국을 회상해 볼 때 여지없이 ‘비가’ 온다. ‘너를 쌓아올리는’ 일이란 너를 지워야 하는 슬픔을 동반하고 있기에 ‘쌓아올리는’일과 ‘비’가 같은 시간에 화자의 사유를 간섭하게 하여 쌓아 올리는 일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상승과 하강의 밀고 당기기, 추억 쌓기와 그만두기의 대립을 통해 화자의 내면적 갈등을 읽는다. ‘화석’으로라도 남기고 싶으나 ‘갇히지’ 않고 떠나는 ‘발자국’을 그리워하거나 잊으려는 화자의 고통이 깊다. 그러나 화자는 그 고통에 빠져 감정을 소실하지 않는다. ‘비’가 와서 ‘놀이’를 끝내는 일을 유예시킴으로써 ‘쌓을수록’ ‘지워지’고, ‘포갤수록’ ‘사라지는’ 마법 같은 절망과 고통의 숲을 빠져나와 스스로 어두워진다.
어두워지는 놀이는 1연(비를 좋아하지만/오늘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 놀/이를 끝낼 수 있게~)을 변형하여 표현한 10연(비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내리지 않았으면......하는 오늘은, 비가 내리고~)에서 ‘벼락’으로 내리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함으로써 정서를 환기시킨다. ‘벼락’이라는 ‘비’보다 더 큰 이미지의 슬픔은 시간을 여름에서 가을로 전이시키고 있다. 한 계절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계절로, 내년으로 이어질 ‘놀이’, 여름의 그것이 푸른 발자국을 좆는 것이었다면 겨울의 ‘놀이’는 ‘낙엽’이 비를 맞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화자는 어두워지면서도 ‘놀이’를 계속할 것이다. ‘슬픔’은 ‘밥’냄새임을 알기 문이다. 그에게 ‘밥’이 육체적 본능이듯 ‘슬픔’은 내면적 본능인 것이다. 그래서 늘 슬픔에 허기진다. 배부르게 슬퍼하고도 슬픔은 또 그리움을 자극한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뭇잎 줍듯 쌓아 올린 그것이 가을 낙엽으로 수북이 타더라도 또다시 비가 내려 슬픔에 허기지게 할 것이다. 그렇게 상승하는 것들과 하강하는 것들이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흩어졌다 모이면서 화자의 놀이에 함께할 것이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마야 여인들은 회로 칠한 강물에 몸을 던지고
사라진 것들의 안부를 찾기 위해
악사의 활은 바지랑대 위에서 목을 다듬었지
한쪽 귀를 자른 사내가
자신이 그린 밤을 강파르게 채색하고 있다
고독한 이름들은 밀밭에서
절망과 마주한 제 귀를 읽느라 자주 어두워진다
시위를 거머쥔 달팽이관이 문을 열면
공명판은 푸른 물길을 허공에 풀어 놓을 것이다
도무지 막막했던 시간들을
답답하고 먹먹한 하늘 가운데 풀어놓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 본 적이 없는
사내가 신성한 음을 만지며
긴 활을 자신의 옆구리 깊숙이 찔러 넣고 있다
살아남은 자의 정오를 지나서 찾아올
그 누군가를 오래 오래 따스하게 품어 보고 있다
한석호 -첼로가 있는 밤의 시제-
신화와 회화 그리고 음악 등 예술의 모든 영역을 넘나드는 상상력의 변주는 한석호 시인의 서정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시인의 상상력은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와 사유들의 거침없는 관계 맺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연상 작용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거기에 이 시가 갖는 특별함을 더하자면 하강-상승-하강-상승의 순서로 이미지가 교차적으로 순환된다는 점이다. 마야의 여인들이 몸을 던지고(하강), 바지랑대 위에서 목을 다듬고(상승), 자주 어두워지고(하강) 푸른 물길을 허공에 풀어(상승)놓는 사유는 고뇌하는 것들을 ‘따스하게 품어’주면서 귀결된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몸을 던지’는 마야 여인들의 하강이미지를 통해 희생정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누구나 상승을 꿈꾸는 세상에서 스스로 하강하는 이들이 있기에 ‘사라진 것들을 안부를 찾기 위해/바지랑대 위에서 목을 다듬’는 악사의 활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편 이 시는 시어의 인접성을 중심으로 상상력을 확대해 나간다. 1행에서 4행까지의 상황과 5행부터의 상황은 시어가 가져다주는 하강이미지 즉 절망, 고독, 죽음, 밤 등과의 연결고리를 통해 5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마야 여인들을 위해 활을 켜는 고독한 풍경에서 한쪽 귀를 자른 사내 -고흐라고 여겨지는-를 떠올린 것은 시인만이 갖는 상상력의 과감한 변주이며 깊은 사유에서 오는 것이다. 한쪽 귀를 자를 정도로 자신의 존재증명에 목말랐던 고흐, 고흐들은 ‘자아 찾기’라는 명제를 두고 ‘절망과 마주한 제 귀를 읽느라 자주 어두워’진다. 평생을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증명, 때문에 세상은 어두울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그러나 ‘자신과 마주한 절망’은 이대로 끝이 아니다. 달팽이관이 열려 절망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귀’는 ‘달팽이관’으로 확대되고 들을 준비가 끝난 공명판과 시위는 푸른 물길을 허공에 풀어놓음으로 이미지를 상승시킨다. 비로소 고독한 이들이, 절망의 강에 몸을 던진 이들이 ‘답답하고 먹먹한 하늘’에 풀어 놓은 합일과 소통의 자리에서 답답하고 먹먹한 마음을 풀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막막하고 불안한 존재들이기에 더욱 따스해질 수 있는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 본 적이 없는’ 그 ‘사내’는 화자이며 고흐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임을 화자는 알고 있다. 때문에 온 몸이 울음이 될 수 있고 온 몸이 공명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내’는 마치 신의 노여움을 달래려는 마야 여인처럼 ‘신성한 음을 만지며’ ‘긴 활을 자신의 옆구리 깊숙이 찔러’넣는다. 이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울리는 울음의 언어들을 한 편의 시로 탄생시키려는 시인의 자세와 다르지 않다. 마음 속 음을 고르고 줄을 만져 ‘누군가를 오래오래 따스하게 품어’주려는 따뜻한 모습은 하강과 상승의 이미지를 끌어안고, 상상과 현상을 조화롭게 하여 불안한 한 세상을 건너는 길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 한다. 요즘 시인들은 독자의 눈에만 맞춰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감상주의 시만 쓴다고. 또 어떤 이들은 말 한다. 현대의 시는 시인자신들만의 잔치이며 그들은 감각의 기형화에서 오는 소통의 부재를 하나의 시류 인 냥 착각한다고 말이다. 두 가지 지적에 겸허하게 수긍하면서 다시 한 번 시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해 본다. 그리고 ‘시는 영원한 진실 속에 표현된 삶의 이미지이다’라고 말 한 셸리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그런 방법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하여 그려진 언어의 회화다’라고 말한 루이스의 말에서 대답을 찾는다. 위에서 소개한 세 편의 시는 충분히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고 있었으며 시인들 또한 그러한 자세로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진실 되고 깊이 있는 삶의 이미지를 만나게 된 독자들의 마음이 이렇듯 철렁 내려앉고 뭉클하게 아픈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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