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성군 김포 유당공 파종회(회장:배영민)에서는 지난 3월 19일 (일) 오전 11시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양곡2로 25 유당공 파종회 소유건물인 배원빌딩 3층 종중회의실에서 유당공 파종회 임원(이사)회의를 개최하였다.
주된 안건은 경덕사 대제 및 칠산재 대제 참석의 건과 양촌읍 석모리 1061번지 진입로, 주차장 300평, 건물 55평 허가의 건과 신축공사 견적서 선정 및 양촌읍 구래리 221-1, 221-2 종중선산을 보다 종중회를 위하는 종중수익사업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지하게 안건이 결의되었다.
또한 이미 출연한 무열사 건립 헌성금과 종중회관 건립비를 각각 출연한 것을 무열사 건립비 헌금 1,000만원으로 합쳐 무열사 건립 헌성비에 기록하기로 결의되었다.
이날 참석한 파종회 임원(이사)들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종중회의가 진행되었으며, 종중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안건을 토의하면서 결의하였으며 시간과 세월을 무작정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계획되고 보람된 종중일로 하나하나 채워가는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이번 임원(이사)회의는 정말 보람되고 즐거운 하루였다.
학생(學生)과 처사(處士)에 대하여
배 영 민
경주배씨 김포 유당공파종회 회장
경주배씨 대종회 부회장
경주배씨 분성군종회 부회장
(주)하나향료 대표이사
<서론>
‘생(生)’은 삶을 뜻하는 ‘소우(牛)’자와 ‘한일(一)’자가 합쳐진 것으로 소가 외나무다리를 걸어가는 것은 위기의 연속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 학생(學生)이란
유가(儒家) 유교의 학설, 학풍 등을 신봉하고 연구하는 학자나 유파의 도를 닦는 선비인 유생(儒生)으로서 생전에 벼슬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존칭이라고 하였다.
2) 처사(處士)란
거친 세상살이의 어려움에 벼슬을 하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서 묻혀사는 선비, 유교적인 교양을 갖춘 선비 또는 벼슬을 주었는데도 사양하고 벼슬 받지 않고 벼슬을 하지않은 조용히 초야에서 계셨던 분에 대한 존칭이라고 하였다.
<본론>
1) 학생(學生)
학생(學生)은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향교, 사학, 성균관에 소속된 유생과 전의감(典醫監) 등에 소속된 생도로서 공부하는 자의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품계가 없는 분을 가리켰다.
공부하는 분의 학생 개념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실려있는 고려의 과거사적(科擧事蹟)에 성균학생과 과거급제자의 전력으로 기재되어있는 것을 보면, 과거응시때 전력으로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과거에 응시하고 유생의 전력은 유학(幼學)으로 일원화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대체적으로 학생과 유학은 혼칭되면서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인조 연간의 호패사목(號牌事目)을 보면 “유학(幼學)은 서울이면 모학학생(某學學生)이라 쓰고, 성균관 하재생(下齋生)은 성균학생이라 쓰며, 지방이면 교생 혹은 액외교생(額外校生)이라 쓴다”고 하니 유학의 범주가운데 학생은 서울의 사학(四學) 유생과 성균관의 하재생을 가리켰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각국의 고문서나 실록의 기사에서는 학생과 유학이 서로 혼칭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진사(進仕)나 교생을 학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학생은 유생, 생원, 진사, 생도 등 각 학교에 소속되어 있는 유생을 통칭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학생과 유학이 학교의 유생을 가리키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한편, 학생은 무품자(無品者)를 가리키는 개념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17세기 이후에는 ‘생칭유학, 사칭학생(生稱幼學, 死稱學生)’의 관습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습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미 학생이 생사에 관계없이 무품자의 직역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고문서 상에서 군사조직인 정병이나 별시위 등이 학생을 병칭하거나, 실록의 기사에서 정병이나 별시위 혹은 부방(赴防)을 자원하는 학생에게 8품이나 9품의 품계를 내려주었으며, 충순위로서 나이 50세에 찬 자 가운데 학생은 7품의 산관직을 제수한 사실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무품자로서의 학생의 의미는 군사 조직 외에도 내시부(內侍府)와 내수소(內需所) 등의 관서 뿐 아니라 송골(松鶻)을 잡아 바치는 등의 공로에 대한 상격에서 무품자인 학생에게 품계를 제수한다고 하는 제 규정을 통해, 학생은 품직자에 대한 무품자를 가리키는 용어였던 것이다.
무품자로서의 개념이 유학이 아닌 학생에 적용됨으로써 살아 생전의 유학이 죽으면 학생을 칭하는 관습이 생겨날 수 있었다. 김장생(金長生)도 “무관(無官)으로 죽은 자는 학생이라 칭하지 않으면 다른 칭호가 없으니, 부득이 학생으로 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에 따라 조선후기에 서인 신분에까지 가례가 깊숙이 파급되어 실천되면서 무관자인 일반 서민들도 죽으면 위패에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라 쓰는 관습으로 확대되었다.
2) 처사(處士)
조선 중기인 16세기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인해 중앙관직으로 출사를 단념하고 고향에서 사림(士林)을 지방에 은둔하게된 선비들이 형성되었다. 이들 선비들은 다양한 용어로 불리게 되었는데 처사뿐만 아니라 거사(居士), 유일(遺逸), 은일(隱逸), 일사(逸士), 일민(逸民) 등으로 불렀다. 이중 처사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하며 지방의 은거하는 선비를 상징하는 호칭이 되었다. 특히 당시 북인(北人)으로 분류되어 중앙정치에 참여하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처사라고 호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처사는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혹은 세상밖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살며 일반사회를 멀리하던 선비를 일컬었으며 벼슬을 주었는데도 사양하고 벼슬 받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서 돌아가신 분에 대한 존칭이라고 하였다.
처사는 무슨일이 있어도 세상에 나가지 않는데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불러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다. 처사중에는 신선과 같은 경지에 이르는 인물도 있어 세상사를 예측할 수도 있으며 신비한 영약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 덕망과 학식이 높아 타인의 의논 상대가 되어주는 처사
태주부 수령 화경춘은 공명정대하여 권세 있는 이들에게 굽히는 일이 없지만, 오직 태주 선거현의 처사(이름은 가운임)만은 흠모하여 따랐다. 큰일이 있으면 몸소 찾아가 의논하고 결정을 하니 부중이 말하되 화공이 웃는 것을 보고자 하면 반드시 선거현에 찾아가라 했으니 그 공경하고 사모하는 정도를 가히 알 정도였다.
나) 부귀공명에 뜻이 없어 은둔하며 학문에 힘쓰는 처사
집안이 본래 청빈하였을 뿐 아니라 문장과 덕행으로 세상에 그 빼어난 기상이 알려지자 조정이 특별하게 국자박사의 벼슬을 제수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처사의 뜻과 기개가 맑고 고상하여 명리(名利)를 원하지 않았고 옛날 상산에 은거한 은사들의 자취를 따라, 세상에 나서지 않고 은거하였다. 세상의 일들을 끊고 고향에 살며 은거의 기쁨을 노래하고 주역을 극진히 연구하여 하늘의 이치와 운수를 알아내는 듯하였다.
성품이 세상일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속을 노닐며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았다. 성리지학을 힘써 연구하며 어머니를 지성으로 받들었다. 성정이 호방하고 맑고 깨끗하여 진실로 청정한 은사라······(후략)
다) 청빈하고 수려한 처사
한 장자가 머리에 갈포로 만든 두건을 쓰고 몸에 평복을 입고서 자기의 손을 잡고 머리를 어루만지며 엄숙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위엄있는 기상과 수려한 용모는 자연의 빼어난 기운을 띠었고, 부드러운 얼굴에서는 봄바람이 이는 듯 하니······(후략)
라) 만물의 운행을 뜻대로 할 수 있는 신의 경지에 오른 처사
처사는 계곡 가운데에 한가로이 살며 학을 춤추게 하고, 거문고로 세월을 보냈다. 부귀영화를 헌신 보듯이 하고, 나귀를 타고 천하를 유람하며, 가끔 돛단배를 타고 천하를 두루 유람하였다. 깊은 산중에서 사나운 짐승을 만나도, 처사가 노래 한 곡을 부르면 이리 같은 짐승도 쫓겨 달아났고, 만경창파에 풍랑이 심하여, 배가 뒤집힐 듯 하다가도 처사가 글을 지어 읊으면 물결이 고요해 졌으니, 문장과 덕행이 이러하였다. 또한 용모와 풍채 해와 달과 같고, 예의를 갖출 때는 준엄하여······(후략)
마) 황제가 공경하고 흠모하는 처사
백경은 현명한 군자였다. 상서(백경의 사촌동생)를 애중히 여기고 또한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다. 백경의 행실과 맑은 도덕은 돌아가신 공의 자취를 이어 한치도 예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천자가 여러 번 높은 직책으로 불렀으나 생각한 바가 있어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진실로 요나라 때의 은사인 허유와 소부의 행적을 따르는 것이었다. 천자가 공경하여 호를 운수선생이라 하시고 사림의 으뜸으로 삼으실 만큼 존중하셨다.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 모두 왕공 보다 그를 더욱 우러러보았다.
이때 홍치 황제께서는 등극하시면서부터 검박함을 숭상하시어 궁중의 후비들의 의복에 비단과 수로써 장식하지 못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덕과 밝은 정사를 펼치니 진실로 요순과 같은 세월이었다. 승상 정공은 젊으신 임금을 도우며 세상을 밝히고 천하의 능력 있는 사람을 제대로 대접하여 정사가 한결같이 빛나고 치세가 나날이 새로웠다. 다만 성심에 거리끼는 바는 유상서의 재덕과 충효를 잊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황제는 유상서가 세상에 뜻이 없음을 아시고 또한 병이 깊어 조정에 와서 일을 보기 힘들다는 것을 짐작하시었으나 쉽게 단념하지 못하시어 부르심이 끊이지 않았다. 황제께서 그의 뜻이 견고한 것을 아시는 고로 끝내 벼슬길에 나오지 않을까 깊이 염려하여 매양 신하들을 대하실 때마다 유생의 어짊을 이르시고 오래 보지 못함을 일컬으시며 눈물이 용포에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그 뛰어난 재주를 칭하실 때마다 안색이 어두워지며 탄식하시고 흐느끼시니 사모하심이 이처럼 지극하시어 이 모습을 보는 이는 감격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생을 아는 이들은 황제의 은혜를 가벼이 여기지 말고 한 쪽으로만 치우친 생각만을 고집하지 말라 하였고, 상서를 모르는 자는 바로 임금을 따르지 않는 필부의 죄가 중한데 천자가 죄를 주지 않으니 나라의 체통을 떨어뜨리는 것이라 하여 죄를 주자는 의논이 성행하였다. 유공이 괴로이 상서의 벼슬하기를 권하고 친척과 벗들이 설득하고자 하나 듣지 않으니······(후략)
<결론>
학생(學生)과 처사(處士)중에서 학생(學生)은 유생(儒生)으로서 생전에 벼슬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존칭으로서 가장 훌륭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처사(處士)는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살던 선비 혹은 세상밖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살며 일반사회를 멀리하던 선비로서 벼슬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벼슬받지 않은 분을 지칭하는 존칭으로서 쓰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앞으로 후손들이 벼슬을 하지 못하시거나 하지 않으신 조상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사료된다.
벼슬을 못하시거나 벼슬을 하지 않으신 돌아가신 부(父)의 지방을 통상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다수 쓰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현고처사부군신위(顯考處士府君神位)”라고 쓰여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학생(學生) 또는 처사(處士) 중 후손들이 벼슬을 못하시거나 벼슬을 하지 않으신 돌아가신 조상님에 대하여 어떠한 말이 더 조상님을 위하는 말인가는 생각하고 돌아가신 조상님께 효도하는 길인가를 감히 제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