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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해당 항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
[개론] 라카인족 (=아라칸족) : 미얀마 서부의 불교도 소수민족
(사진) 2010년 미국 뉴욕의 라카인족 공동체가 전통 물축제 행사를 하는 모습.
라카인족(Rakhine, ရခိုင်လူမျိုး, 라까잉족)은 이전에 '아라칸족'(Arakanese)으로 불렸던 미얀마 거주 민족(ethnic group)으로서, 미얀마 서부 해안의 좁고 긴 형태의 해안지방 라카인 주(Rakhine State: 구-아라칸 주[Arakan])에서 오늘날 다수 인구를 형성하고 있다. 라카인족은 미얀마 총인구의 5.53% 정도를 차지하지만, 정확한 인구조사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카인족은 방글라데시의 남동부 지방에도 살고 있는데, 특히 치따공 행정주(Chittagong Division)와 바리살 행정주(Barisal Division)에 많이 거주한다. 방글라데시의 '치따공 구릉지대'(Chittagong Hill Tracts)에 거주하는 아라칸계의 한 집단은 적어도 16세기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는데, 이들은 마르마족(Marma people) 혹은 모그족(Mog people)이라 불린다. 이들 아라칸계 후손들은 아라칸족이 세운 왕국이 치따공 지역을 장악했던 시대 이래로 그 지역에서 살아왔다. 아라칸계 후손들은 북쪽으로 인도의 뜨리뿌라 주(Tripura state)에 이르기까지 산재해 있다. 그 거주 역사는 아라칸족의 왕국이 현재의 뜨리뿌라 지역에까지 힘을 떨쳤던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이러한 인도 북동부 지역에서는 아라칸계 후예들을 '모그족'이라 부르는데, 인도 역사서에서는 방글라데시에 거주하는 아라칸계 후예를 '마르마족'이라 부르고, 여타 아라칸인들을 '마그족'(Magh people, Mogh)이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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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 화
아라칸족(=라카인족) 대부분은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 테라와다 불교)를 믿는데, 버마족(Bamar), 샨족(Shan), 몬족(Mon)과 더불어 미얀마 내에서 불교를 믿는 4대 민족에 속한다. 아라칸족은 자신들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고따마 붓다(Gautama Buddha: 부처)의 가르침을 따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아라칸인의 문화는 미얀마 최대 민족인 버마족과 유사하지만, 인도 문화의 영향력 면에서는 버마족보다 더 많이 받았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러한 특성은 아라칸족 거주지가 버마족 거주지보다 인도 아대륙(Indian subcontinent: 남아시아 아대륙)에 더욱 가깝고, 아라칸 산맥(Arakan Mountains)을 통해 미얀마 본토와 단절된 지리적 고립 때문일 것이다. 인도 문화의 흔적은 문학, 음악, 요리 등 아라칸 문화의 여러 측면에 남아 있다.
(동영상) 라카인족의 현대적 결혼식.
2. 언 어
아라칸어(Arakanese language)는 미얀마의 주류 언어인 버마어(Burmese language)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일반적으로 버마어와 상호 의사소통성(mutual intelligibility)도 갖고 있다. 아라칸어는 "유성음 ㄹ"/r/ 발음을 보존하고 있는데, 버마어에서는 이것이 "야"/j/ 발음으로 바뀌었다. 현대의 아라칸 문자(Arakanese script)는 기본적으로는 표준적인 버마 문자(Burmese script)와 동일하다. 그러나 웨탈리 시대(Waithali, Vesali, Wethali)의 비문에서는 당시 아라칸 지역에서 사용되던 라카운나 문자(Rakhawunna script)도 발견된다.(주1)
주1 : Vesali Coins in Sittwe and Mrauk-U Archaeological Museum; The Ananda Chandra inscriptions (729 A.D), at Shit Thaung Temple-Mrauk U; Some. / Sanskrit Inscriptions of Arakan, by E. H. Johnston; Pamela Gutman (2001) Burma's Lost Kingdoms: splendours of Arakan. Bangkok: Orchid Press / Ancient Arakan, by Pamela Gutman; Arakan Coins, by U San Tha Aung; The Buddhist Art of Ancient Arakan, by U San Tha Aung.
3. 라카인의 역사
* 보다 상세한 역사는 '라카인의 역사'(History of Rakhine) 항목을 참조하라. |
(지도) 서기 400년 무렵의 세계지도. ☞ 확대 지도 바로가기
3.1. 다냐와디 왕국
아라칸의 전설에 따르면 라카인족의 역사는 기원전 3325년에 시작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줄만한 고고학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라카인족 다수는 티벳-버마 어족(Tibeto-Burman languages)의 한 한 종족으로서, 서기 10세기경부터 아라칸 지역에 들어온 최후의 민족 집단이다."(Pamela; The Lost Kingdom, Bangkok, 2002, p.5). 이후 아라칸족의 여러 왕국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서쪽으로는 갠지스 삼각주(Ganges Delta, 벵갈 델타[Bengal Delta])에서부터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 에이야와디 델타)의 네그라이스 곶(Cape Negrais)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떨치기도 했다.
(연표) 아라칸 왕국들의 연대표.
다냐와디(Dhanyawadi, Dhaññavatī)는 깔라단 강(Kaladan River)과 렘요 강(Le-mro river, Lemyo river) 사이의 산등성이 서쪽에 위치했던 고대 왕국이다.
다냐와디는 벽돌로 만든 성벽이 4.42㎢ 면적을 9.6km 길이에 걸쳐 불규칙하게 둘러쳐진 성이었다. 성벽 바깥에는 넓은 해자가 있었는데, 현재는 토사에 뒤덮였거나 논으로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남아 있는 벽돌 성곽은 산등성이를 따라 설치돼 있는데, 서쪽으로부터의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의 내부에도 유사한 성곽이 있어서 왕궁을 보호했다. 왕궁의 면적은 0.26㎢이다. 그리고 왕성 자체도 또 하나의 성벽으로 이뤄져 있다.
항공촬영 사진을 보면 다냐와디를 중심으로 관개수로와 저수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3.2. 미야우 왕국
미야우(Mrauk-U, 므라우)를 도읍으로 한 미야우 왕국(Kingdom of Mrauk U)은 몽 소 몬(Mong Saw Mon: 1380~1433, [재위] 1429~1933) 왕이 개국한 아라칸족의 마지막 독립왕조로서, 불교의 주요한 거점이었고, 아라칸족 세력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왕국이다. 미야우 왕국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눠진다. 그것은 초기시대(1430~1530: 제1황금기), 중기시대(1531~1638: 제2황금기), 말기시대(1638~1784: 제3황금기)이다. 미야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 왕국에 불교가 정착했었음을 보여주는 합리적 추론을 가능케 해준다.
16~17세기 사이의 미야우 황금기는 영국의 튜더 왕조(House of Tudor: 1485~1603), 인도의 무갈 제국(Mughal Empire: 1526~1857), 현 태국 지역의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kingdom: 1351~1767), 현 미얀마 지역에 위치했던 인와 왕국(Inwa kingdom, 아와 왕국[Ava kingdom]: 1364~1555), 퉁구 왕조(Taungoo Dynasty: 1510~1752), 한타와디 왕국(Hanthawaddy Kingdom: 1287~1552)과 동시대였다.
미야우는 국제도시였다. 30km 길이의 성벽으로 방어했고, 해자와 운하로 구성된 복잡한 망을 갖고 있었다. 왕궁은 도시 중심에 자리잡았는데, 마치 "아시아의 아크로폴리스"(Asian Acropolis)인 것처럼 주변 지역보다 우뚝 솟아 있었다. 운하와 개울로 이뤄진 수로망은 베네치아(Venezia, Venice)를 닮은 것으로 유명했다.
미야우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고고학적 유적군 중 하나이다. 유물로는 비문, 불상, 붓다의 풋프린트(foot-print), 거대한 파고다(pagoda: 불탑) 등이 포함되는데, 후대에 건설된 탑 끝은 고대 인도의 굽타 제국(Gupta Empire: 321~550) 양식과 동일했다. 황금기의 미야우 도심에 있던 수많은 사찰과 불탑은 백성들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도 그 흔적들은 남아 있다.
(사진) 미야의 불탑들은 그 신비로운 형상으로 유명하다.
3.3. 역사적 유적
[라카인 신화까지 포함한다면] 243명의 아라칸 왕들은 5108년의 기나긴 역사를 가진다. 가장 오래된 유물은 "뚱뚱한 수행자"(Fat Monk)의 모습을 조각한 석상인데, 여기에는 [고대 인도의 문자인] 브라흐미 문자(Brahmi script)로 "싸짜까 빠리바자까 지나"(Saccakaparibajaka Jina)라고 적혀 있으며, 그 연대는 기원 후 1세기 경까지 올라간다. 저명한 고고학자 에밀 포르크함메르(Emil Forchhammer)가 발견한 고대 비문은 나가리 문자(Nāgarī script)로 쓰여졌다. 이 산은 살라기리(Salagiri: [역주] 娑羅山[?] - 범어 'saalaa'는 '학교'나 '회당'의 의미가 있음)라고 불리는데, 약 2500년 전 위대한 스승(=붓다)이 방문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 산의 동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법륜상을 새긴 석상이 발견됐고, 1923년 건립된 '미야우 박물관'에 소장돼있다. 살라기리 산에서 발견된 이 부조는 서기 4세기경 벵갈계 힌두(Bengali Hindus) 왕국의 국왕 짠드라 수리야(Chandra Suriya)가 세운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1986년에는 조각이 새겨진 붉은 사암 석판 5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석판들은 1923년에 발견된 석판 1개와 같은 유형이다. 여기에는 붓다의 일생(탄생, 성도, 초전법륜, 열반)을 상징하는 수하독생상(Bhumispara-mudra), 사문유관상(Kararuna-mudra), 법륜상(Dhammacakra-mudara), 열반상(Mmahaparinibbana-mudra)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조각들은 라카인 지역의 불교 전래 최초기의 증거들을 제공해준다. 붓다의 생애나 여타 내용들은 앞서 설명한 대각성자(=붓다) 상을 공양했던 다냐와디 왕조 짠드라 수리야 왕의 모습을 반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들을 연구한 저명 학자들은 대각성자 상이 산다 수리야 왕 시대의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지도) 오늘날 라카인 주의 위치.
웨탈리(Waithali, Vesali: 788~1018) 도시의 창건자이기도 한 드완 짠드라(Dvan Chandra) 왕은 서기 327년경 웨살리 파라기리(Vesali Paragri) 산에 불상을 조성하면서 헌정 비문을 빨리어(Pali)로 다음과 같이 새겼다.
"여래께서는 법(法, 현상)들이 원인에서 일어난다고 하셨고, 또한 그 소멸도 설하셨다."(ye dhamma hetuppabhava / Tathagato aha / tesan ca yo nirodho / evamvadi Mahasamano)
불상은 하나의 돌로 조성됐고, 웨탈리 최초기의 불상이기도 했다. 예 담마 헤뚜(Ye Dhamma Hetu, [산스끄리뜨어] Ye dharmā hetu)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
이들 법들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이니,
여래께서 원인을 설하셨다.
붓다께서는 원인에 관해 가르치셨고,
원인들에 의해 일어난 효과를 가르치셨고,
그 소멸에 관해서도 설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수행자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이 게송은 상좌부 불교의 정수로 여겨지는 것으로서, 웨탈리 지역에서 상좌부 불교가 번창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웨탈리의 외교관계, 특히 세일론(Ceylon: 스리랑카)과의 관계가 불교 전래에 중요한 역할이 됐을 것이다.
이 지역 비문들은 브라흐미 문자로 된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아라칸어(라카인어), 쀼어 등으로 새겨졌다. 현재 시테타웅(Shitethaung)에 보존 중인 아난다짠드라(Anandachandra)의 웨탈리 비문들은 그 연대가 서기 729년까지 소급되어, 불교 전래의 최초기에 관한 적절한 증거가 되고 있다. E. H. 존스턴(E. H. Johnston) 박사는 짠드라 왕조(Chandra dynasty) 초창기라고 신뢰했던 시대의 왕들 명단을 분석하기도 했다. 서쪽 면 비문은 총 72행 51개의 게송을 통해 아난다짠드라 왕의 선조 통치자들에 대해 묘사했다. 각 면들은 각 왕들의 이름과 통치시기를 기록하여서, 아난다짠드라 왕 이전 시기의 통치자들로 여겨진다. 고고학은 라카인 지역의 여러 곳에서 오랜 세기 동안 무시돼왔던 많은 수의 불탑과 금석문을 찾아냈고, 이 지역에서 불교가 얼마나 번성했었는지를 보여준다.
정방형 비문은 탄드웨(Thandwe, Sandoway)의 제후 몽 카리(Mong Khari: [통치] 1433~1459)와 몬족 제국의 국왕 라자티랏(Razadarit, Rachathirat: [재위] 1384~1421)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을 라카인어로 기록했다. 이 비문은 파레인(Parein)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인 한 산성에서 발견됐다. 한 석판은 힌두 벵갈리 계통 왕인 짠드라 수리야(Chandra Suriya)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대스승(=붓다)이 다냐와디에 왔었다는 '살라기리 전통'의 보다 대담한 주장도 담고 있다.
3.4. 라카인에서의 불경 결집
라카인 역사에서 중요한 행사는 웨탈리의 황금산(golden hill) 정상에서 열렸던 '불경 결집'(Convention of the Buddhist Council)이었다. 이 사건은 서기 638년 담마위자야(Dhammawizaya) 왕의 후원으로 개최됐고, 라카인과 세일론 양국의 공동 노력으로 진행됐다. 이 역사적 결집에는 세일론과 라카인 왕국에서 각각 일천 명 씩의 승려들이 참석했다. 이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화려한 불탑과 사찰들이 건설됐고, 그 목적은 빨리어 대장경(Tripitaka)을 새기기 위한 것이었다.
웨탈리 이후 서기 818년, 렘로 왕조(Le-mro dynasty: 818~1430)가 핀사(Pyinsa)를 건설했다. 렘로 왕조의 대왕인 밈인프루(Mim-Yin-Phru)는 불교의 지원에 관심을 가졌고, 847년 800명의 아라한(Arahant, 阿羅漢)을 초청해 라카인 지역의 2번째 불경 결집을 행했다. 라카인의 사서들은 당시 빨리어 대장경과 빨리경전 주석서(Atthakatha: 아타까타)를 황금 판에 새겨서 봉안했다고 전한다.
라카인 지역에 상좌부 불교가 도입된 이래로 이 신앙이 방해를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금석학과 고고학적 발견을 신뢰할 경우, '예 담마 헤뚜' 비문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상좌부 불교가 주류적 신앙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라카인 지역의 불교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왕실의 후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3.5. 건축물
라카인의 사서들은 미야우 왕국에 600만개 이상의 사원이 번창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그러한 사찰들은 미야우의 황금기에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에밀 포흐하머 박사는 자신의 저서 <아라칸>(Arakan)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미야우의 사찰들에서 발견되는 내구성, 건축학적 기술, 장식물 등은 당시 이라와디 삼각주(Arrawaddy) 지역의 수준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다."
사찰 건축과 불상에 나타난 불교예술은 왕국의 성쇠와 궤를 같이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치타웅 파고다'(Chitthaung pagoda) 사원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두케칸타인 사원'(Dukekanthein temple)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금화와 은화도 미야우 시대의 귀중한 유산이다. 동전 주조의 전통은 웨탈리 왕조에서 시작됐는데, 5세기 무렵부터 화폐를 주조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동전들은 한 가지 액면가 뿐이다. 동전에는 국왕의 칭호와 즉위년도가 기록돼 있다. 1638년 이전에 제작된 동전 앞면에는 라카인어로 적혀 있고, 뒷면에는 페르시아 문자와 나가리 문자로 적혀 있다. 외국 문자들이 적혀 있었다는 것은 라카인 왕국이 이웃국가들이나 아랍의 상인들을 쉽게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현재가지 발견된 동전은 은화 23종과 금화 2종이다. 즉위한 왕들은 모두 동전을 발행했다. 성벽, 성문, 거주지, 사찰 터, 요새, 산성, 해자 역시 오늘날의 라카인족에게는 귀중한 유적이다. 당시의 호사스런 저택의 유적인 돌무더기도 라카인 영광의 시대를 말해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사진) 8세기 니띠찬드라(Nitichandra) 왕이 발행한 은화. 한쪽 면에는 해와 달의 상징이 그려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도문화권에서 상서로움의 상징이었던 슈리와스타(Shrivatsa: 길상문양)가 그려져 있다. [영국박물관 소장] ☞ 확대사진 바로가기
미야우 왕국이 "파고다의 땅"(Land of Pagodas)이라고 불리는 데는 이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유럽인들은 미야우를 "황금도시"(The Golden City)라고 불렀다. 라카인의 전성기는 곧 미야우에 관한 자부심이었다. 미야우의 주민이 되는 것은 완벽한 만족도를 동반했다. 역사는 이 도시의 초창기에 있었던 일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3.6. 외세의 침입
라카인 왕국은 여러 차례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몽골족, 몬족(Mon), 버마족(Bamar), 포르투갈의 침략을 받았고, 1784년 버마족 국가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 꽁바웅)의 왕 보도파야(Bodawpaya: 1745~1819, [재위] 1782~1819)가 보낸 왕세자 타도 민소(Thado Minsaw: 1762~1808)의 군대에 최종적으로 몰락했다. 타도 민소는 요마 산맥(현 아라칸 산맥)을 넘어와 라카인을 병합했다. 마하무니 붓다(Mahamuni Buddha) 불상 등 라카인 왕국의 종교적 보물들은 약탈당한 후, 오늘날 미얀마 중부지방으로 옮겨져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다. 이후 수십 년 간 라카인족은 버마의 정복에 저항했다. 접경지역들에서 처음으로 라카인 반군을 지휘한 것은 응아탄데(Nga Than Dè)였고, 마지막 지도자는 친비얀(Chin Byan)이었다. 이들은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와 버마 사이에 고민거리를 만들었다. 1826년 '제1차 영국-버마 전쟁'(First Anglo-Burmese War)에서 버마족이 패하고, '얀다보 조약'(Treaty of Yandabo)에 따라 라카인은 영국에 넘겨졌다. 이후 시트웨(Sittwe, 구-아짭[Akyab])가 라카인의 새로운 행정 수도가 됐다. 1852년 행정구역 개편 때 라카인주는 하-버마(Lower Burma)에 포함됐다.
3.7. 독립운동
라카인 지역은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할 당시 다양한 반군들의 거점이었다. 그 중 라카인족 출신 승려 우 오타마(U Ottama)와 우 세인다(U Seinda)가 이끌던 반군이 특히 유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버마 침공 및 점령(1942~1945) 하에서 라카인은 자치권을 허용받았고, '아라칸 방위군'(Arakan Defense Force)이라는 독자적인 군대도 가졌다. 1945년 초 '아라칸 방위군'은 연합국으로 붙어서, 일본에 대한 적대적 자세를 취했다.
3.8. 버마 연방의 독립 이후
1948년 라카인주는 버마 연방(Union of Burma)으로 편입됐다. 1974년, 네윈(Ne Win: 1911~2002) 정권은 새로운 헌법에서 '라카인 행정구'(Rakhine Division)에 '주'(state) 지위를 부여했지만, 군사정권이 전국적인 전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의미 없는 움직임으로 여겨졌다. 오늘날 라카인족은 대부분 라카인주에 거주하며, 에이야와디 지구(Ayeyarwady Region)와 양곤 지구(Yangon Region)의 일부 지역에도 거주한다. 그리고 방글라데시 남부 및 인도에서 소수의 라카인족이 살고 있다.
[역자 후기] 라카인족은 자신들의 고향과 정반대 방향인 미얀마 북부의 카친주와 남동부의 카인주에 라카인족을 대변하는 복수의 무장반군 조직을 키우고 있고, 최근 모국 땅(?)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향후 라카인족 무장반군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는대로 이 게시물에 링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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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론] 로힝야족 (로힝자족, 로힝가족) : 미얀마 서부의 무슬림 소수민족"(번역: 크메르의 세계 201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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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현재 라카인 지역에서 로힝야족 탄압의 선봉은
(1) 버마족 중심인 미얀마 정부군과 더불어..
(2) 이 지역 주류인구인 라카인족 민병대
입니다만...
각종 보도들이 라카인족에 관해선 별로 보도를 안하고
단순히 "로힝야족 대 미얀마 불교도"라는 단순한 구도만 전하고 있죠..
그래서 라카인족에 관한 내용을 연구하기로 합니다..
라카인족도 자기 민족 역사를 5천년이나 됐다고 하니,
한국이나 베트남처럼 환빠들이 넘쳐날듯합니다.. ㅠㅠ
라카인주는
무슬림 로힝야족 120만명(최근 50만명 탈출)과
불교도 라카인족 240만명 가량이 살던 지역입니다만..
최근 완전히 지옥으로 변했죠..
기타 8천명 정도의 힌두교 로힝야족도 사는 모양인데요..
이번에 미얀마 정부군이 그들이 로힝야족 반군에 처형됐다고 대대적인 선전 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