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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의 또 다른 문화
신금숙
우리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쯤 이었다
그리 어둡지 않았다. 여기는 우리나라보다 늦게 어두워진다고 했다
공항 직원들의 약간은 험상 굳은 듯한 표정들이 다른 동남아지역 공항에 비해 으스스한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사회주의 분위기의 잔재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공항 안에도 바깥에도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한산한 분위기였다.
공항에서 우리가 임대한 숙소까지는 택시로 4~50분 거리였다. 늦은 시간이라 택시 기사가 택시비 흥정을 하는 듯했다. 기사가 영어가 전혀 안되니 아들과 핸드폰 앱으로 소통을 했다. 우리의 숙소는 블라디보스토크 역 근처의 일반 주민들이 거주하는 동네 가운데 있는 방2개짜리 아파트였다.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라 그런지 간결하고 깨끗했다. 깔끔한 침구류와 간단한 조리 기구, 세면도구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주인의 세심함과 친절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여행객이 머물고 간 흔적이 남아있어 더 편안했다. 정갈하게 정리해서 남겨 놓고 간 참기름, 초고추장, 고춧가루, 등 양념 종류와 한글표시의 나무젓가락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들과 자유여행을 하게 되면서 이렇게 개인의 가정집을 숙박업소로 등록해서 렌트 해주는 여행자 숙소를 자주 이용하게 된다. 호텔처럼 획일적이지 않고 북적이지 않아 아주 쾌적하고 편안히 지낼 수 있어서 좋다.
주인 없는 친척집에 잠시 머무는 것 같은 쾌적한 여행을 하게 된다. 주택가의 개인집을 빌려 쓰는 개념이라 그 나라 주거문화와 일반 주민들의 생활 모습도 아주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있어 좋은 점이다.
여행 2일차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역 근처를 중심으로 주변을 도보로 둘러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은 연해주의 행정중심지라고 한다
면적은 서울의 절반 정도이며 인구는 90만정도로 전면 개방 된 것은 1992년도 구 소련이 해체 된 이후부터 라고 한다.
거리는 유럽풍의 오래 된 건축물과 외국영화에서 보았던 조금은 을씨년스럽지만 매적적인 유럽 분위기의 느낌이었다. 서양 사람들이 많다는 것 말고는 우리나라 7~80년대 분위기쯤으로 느껴졌다.
거리에는 오가는 인파도 많지 않았지만 대로변이라도 쇼 윈도우가 화려하게 오픈되어 있다거나 휘황찬란한 간판이 있는 곳 별로 없었다. 튼튼하고 우직한 건물이 상가라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을 파는 곳 인지 금방 알 수가 없었다. 이 곳은 영어를 거의 안 쓴다고 한다.
거리의 간판도 모두 러시아말로만 되어 있다. 하루 종일 다녀도 백화점이나 상점 간판에 영어를 같이 써 놓은 곳은 볼 수가 없었다.
상가나 레스토랑 직원들도 영어를 전혀 쓰지 않다고 한다.
근례에는 여행객이 늘면서 유명한 레스토랑 몇 곳에서는 서빙하는 직원들만 약간의 영어를 쓴다고 한다.
메뉴판도 모두 러시아 말이라 아들이 핸드폰 통역기로 소통을 하였다.
레스토랑 직원들과는 언어 소통도 안 되고 미소 없는 무표정이지만, 친절하고 성실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카페나 레스토랑은 안으로 들어가면 밖에서 주는 느낌과 다르게 아주 조용하고 쾌적하고 조급한 감이 없어서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편안히 즐길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거리에서 본 상가에 불빛이 없는 것은 그 곳은 아주 추운 지방이라 바깥 공기를 무조건 차단해야 하니 창문도 출입문도 최소 화 해서 작게 되어 있었고 벽은 두껍고 창문들도 두꺼운 이중창에다 밤낮으로 커텐을 치고 있으니 불빛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출입문이 두껍고 무거워서 여성이나 노인에 대한 배려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문을 열어 주는 게 기본 매너라고 한다
우리가 묵고 있는 아파트도 지어진지 15~6년은 되었을 것 같았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니 튼튼하고 두꺼운 이중 창문에 대문도 이 중으로 두 개였고 외벽의 두께가 50Cm도 넘을 정도로 벽이 두꺼웠다. 아파트 공동 계단에 스팀이 작동하고 있어 아파트 공동현관 출입구만 들어오면 바깥 공기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훈훈하였다
집집마다 브라인드와 두꺼운 커텐이 이 중으로 쳐져 있어서 실내에 들어가면 24시간 전등을 켜야 했다 .
그래서 호텔이나 상가, 아파트 들이 견고한 건물만 서있고 밖에서는 불빛이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에 비해서 거리 분위기 전체가 침울하고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두꺼운 벽과 완벽한 바깥 공기가 차단으로 밖의 날씨는 쌀쌀하지만 집안으로 들어가면 훈훈해서 난방이 필요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은 시베리아횡단 시발점 이라고 했다.
그래서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에 서면 시베리아횡단을 꿈꾼다고 했는데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에는 이곳에서 그 횡단 열차를 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역 주변이 한산했다. 간간이 중국인 단체 여행객도 있고, 15~6명의 단체의 우리나라 여행객도 보였지만 모두 한산한 모습들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분주하나 조급하지 않은 현지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흡연 인구가 많은 탓인지 이면 도로 골목이나 피로티 구조 아래 층과 같은 건물 귀퉁이에서 남녀 가리지 않고 모여서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자유분방한 유럽인들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대로변은 철저히 금연구역인 듯 길거리에 오가며 담배 피우는 모습은 전혀 볼 수 가없었다.
넓은 대로이거나 작은 도로이거나 횡단보도나 신호등이 많지 않았다. 물론 오가는 인구도 많지 않지만 길을 건너려면 횡단보도나 지하도를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참 감동적인 것은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이던 무단횡단을 하는 곳이던 사람이 건너겠다는 의사표시로 한쪽 발만 도로에 내려놓으면 달리던 자동차들은 일제히 멈추어 정지를 했다. 운전자가 미처 못 보았을 때에는 급정거라도 해서 멈춰주었다. 자유여행이라 시내를 걸어 다니며 신기하기도 하고 감동적이어서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무조건 먼저 지나가고 보자고 보행자를 위험하게 하는데...
여기는 주 5일제가 전체적 시행되는 곳이라 그날은 토요일이라 오가는 현지인은 별이 없어 모든 곳이 한적하고 조용했다.
이곳의 달력은 토요일 일요일이 모두 빨간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평일은 집중해서 일하고 주말은 무조건 쉬는 완전히 개인의 시간이라고 했다.
그런 점은 유럽다웠고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 현지인들은 얼굴에 웃음이 없고 서로 눈을 보며 이야기하는 일이 없었다. 길거리를 다닐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동네에서 어린아이들을 봐도 무표정이다. 미소가 없는 근엄한 표정들이었다. 처음에는 상대방을 경계하는 습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중에 아들이 설명해주기를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을 보고 웃지 않는 것이 이곳 문화라고 했다. 특별히 자기와 가까운 사람하고 있을 때 말고는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고 했다.
상대방을 보고 웃으면, 비웃거나 조롱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저 사람이 왜 웃을까’ 하는 고민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미소를 자주 남발하면 진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 친한 사람과 대화할 때 말고는 거의 눈을 처다 보거나 하는 시선 자체를 주지 않는 무표정 이었다. 눈을 오래 본다거나 하면 도전적이라 이미지를 준다고 한다.
마침 우리나라 5일 장 같은 재래시장이 서는 날이라 둘러보기로 했다.
생산자 직거래 인 농부, 어부 같은 분위기위 사람들이 각종 야채 과일과 그 나라 전통 반찬, 수산물, 벌꿀 등 여러 가지 품목을 좌판이나 리어카 등 각자가 편한 자리에서 팔고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요즈음 건강식품으로 인기 있는 차가버섯이 아주 흔한 듯 많았다. 개인이 갓 구워 나온 아무것도 넣지 않은 바게트 빵이 달지 않고 참 고소하고 맛있었다. 빵을 파는 중년의 아저씨도 시선을 어디다 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인데 얼굴 보니 선해 보였다.
자기 물건을 많이 팔려고 호객행위를 하거나 하는 분주한 모습들이 아니였다.
전통시장에서도 모두가 조용히 물건만 사고 팔 뿐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에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에도 그의 무표정이었지만 바디랭기지로 무엇을 주문하면 신속하고 친절하게 응대하는 모습이 가슴을 따듯하게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근엄한 듯 한 모습들이 가끔은 멋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이 삼 일 지나자 그 분위기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상대방 감정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내 용무의 본질에만 충실하면 되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미소는 상대방에 대한 가벼운 인사와 예의로 알고 있지만
미소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과 이번에 3박4일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을 하면서 참 우리와 많이 다르다고 느낀 것은 서양이라 그런 것일까.
물론 짧은 기간 동안이라 수박 겉 핣기에 불과한 시간이고 유럽의 끝자락이라고 하지만 다른 동남아 사람들에 비해 이곳 사람들은 조급해하지 않는 정신적인 여유가 부러워 보였다.
나도 이번 여행에서 돌아가면 내 스스로의 조급함부터 조금씩이라도 고처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며칠 되지 않아 또 그 틀에 들어가 있었다.
생각 바꾸기
신금숙
오늘도 나는 출근길에 지하2층으로 곧 바로 내려간다.
한번 생각을 바꾸고 나니 출근 때마다 주차장에서 차를 찾는 번거로움에서 없어져 매일 매일 기분이 가볍다.
이 삼 년 전에만 해도 어제 저녁에 퇴근하면서 차를 어디다 주차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지하1층과 2층을 헤매고 다니는 일이 잦았었다.
삼, 사십 대 때에는 그런 허당같은 일은 없었고,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어느 때 부터 차를 둔 곳이 생각이 나지 않아 차를 찾아 헤매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처음에는 일이 많아 머릿속이 혼란해서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횟수가 거듭 되면서 내 스스로에게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주차 한 곳을 머릿속에 한 번 더 확실하게 입력을 하고 차를 세워 두었지만 그 이튿날 아침에는 그 사실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 아파트에서 주차한 위치를 매일 사진을 찍어 놓을 수도 없는 일.
주부의 아침 출근 시간은 집안 일 때문에 전쟁 치루 듯 쫓기게 집을 나서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떤 날은 2층에 주차한 것으로 생각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2층까지 내려갔다가 차가 없어서 다시 1층으로 올라 와야 할 때도 있었다.
그 황당함과 울고 싶은 절망감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어느 때부터 내가 행한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건망증이 시작된 듯 하였다. 단기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이제는 내 스스로의 의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감이 나를 막막하게 했다.
그 것은 그 순간에 주어진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나이에서 오는 내 머릿속의 뇌가 퇴화되어서 일어나고 생각을 하니 참으로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던 말들이 생각났다.
왜 이리 잘 잊어버리고 깜빡 깜빡하는 모르겠다는 푸념들이었다.
그게 드디어 나에게도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조금 안도가 되었던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연배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에 조금 위안이 되기는 했지만 우울하고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이 들어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생물학 적 변화이니 그냥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 의지와 관계없이 깜밖 거림이 진행되어 간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이 왔다
전에는 그냥 당연히 자연스러웠던 일들이 이제는 한번 두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상대방과의 약속, 특히 누구에게 잠시 라도 무엇을 빌리고는 까마게 잊어버리는 실수를 몇 번 경험하고 난 뒤부터는, 혹여 내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으면 말해 달라고 미리 사정하고 빌린다.
이제는 내가 나를 못 믿는 허무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출근을 하면서 차 주차한 곳이 생각나지 않아 차를 찾아
다니는 일은 내 스스로 한심스럽고 힘이 빠지고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내일은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 이튿날이 되면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모임에서 내 푸념을 듣던 한 친구의 한마디가 그 후의 나를 편하게 해줬다.
“선배님 그럴 때에는 무조건 지하2층에다 주차 하세요” 였다
나는 왜 냐고 묻지도 않았다.
평소에 쾌 명석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저 말을 할 때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나는 무조건 지하2층에 주차를 했다.
처음에는 습관이 안 되어 있어서 조금 불편했다.
지하1층에 빈 공간이 있음에도 한 층 더 내려가야 하나, 하는 갈등과 한층 더 걸어올라 오고 내일 아침에 그 만큼 더 내려가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그래도 매일 아침마다 차를 어디다 주차했는지 몰라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서 좋았다. 매일 아침 출근 때마다 반복하던 머릿속의 갈등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지하2층에 주차를 하면서 좋은 점을 생각해서 내서 내 스스로 합리화를 시켰다.
우선 나보다 바쁘고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1층 공간을 비워서 양보하니 좋은 일이고, 한 층을 더 오르내리며 걷는 운동량이 널어나게 되니 좋은 점이고, 겨울에는 지하2층이 1층보다 춥지 않아 차 안이 훈훈하고 여름에는 시원해 좋은 점 등 등 순 기능이 생각 할수록 많았다.
무엇보다도 출근 시간에 차를 찾아 해매는 허무한 일의 반복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 한번 바꾸니 매일 출근하면서 머릿속에 부질없는 갈등 하나가 없어져 마음이 가볍고 상쾌하다.
양자강 황토물 위에서
신금숙
얼마를 잤는지 깊은 잠에서 깨어 침침한 방 커텐을 재치니 붉은 흙탕물 위에서 배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창 밖의 가파른 바위 절벽에 145km라는 거리 표시가 눈에 들어 온다 .
중국 쓰찬 성 의창에서 중경으로 가는 기점을 표시 해 놓은 듯 하다.
이번 여행은 육지가 아닌 강물위에서 지내는 여행이라 기대감 호기심 나를 설레게 했다
강물이라 파도가 없어 유람선이 흔들리지 않아 이동하는 줄도 모르고 호텔 같은 유람선 객실에서 여행의 첫 밤을 곤히 보낸 것 같다.
유람선은 빠른 속도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중경공항에 도착하여 점심식사 후 기차역으로 가서 고속열차를 타고 의창으로 이동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를 선택한 것이다. 고속열차는 4시간정도 소요되는데 기차여행으로 중국 광활한 자연 경관을 보는 것도 또 다른 경험 이었다. 이 구간은 터널만 10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거의가 악산이라 바위를 뚫어 터널을 만든 것이다
삼박사일을 유람선에서 숙식을 하며 오전 오후 하루에 두 곳 정도 유람선이 기항지에 정박하면 내려서 관광지를 유람하고 다시 유람선에 승선하여 식사를 하는 등 시간적 여유가 있는 쾌적한 여행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았다.
우리가 탄 크루즈에는 한국인은 이십여 명이었고, 독일인 가족 단위 두 팀 정도이고 나머지는 중국 여행객이었다. 중국인들도 가족 단위가 많았다. 지금까지 봐 왔던 중국인들과 달리 조용하게 여행을 즐기는 듯 했다.
우리가 식사 하고 잠자는 시간에 유람선이 이동을 해서 식사 중에도 자연 경관을 보며 식사하는 즐거움이 리브 크루즈의 매력인 것 같았다.
한 밤에 선상 라운지 벤치에 누워서 맑은 하늘에 수많은 별을 보는 것도 얼마만인지 옛날 어릴 적 고향 생각이 났다
말로만 듣던 양자강의 주변은 희귀하고 웅장한 기암괴석과 높은 절벽, 수려한 경관과 어울어져 있고 중간 중간 벼랑위의 민가들이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했다.
강 양쪽에 깍아 지른 높은 벼랑은 하늘을 처다 보듯 해야 끝이 보였다.
절벽위에 보이는 길이 차마고도 라고 했다
그 절벽 높이가 1000m에서 1500m로 너무 오래 보면 목 디스크가 온다고 했다.
마치 아이들이 모래 틈에서 물고랑을 깊이 파 놓고 물을 흘러 보내는 듯 했다.
양쯔 강은 세계에서 세 번째 긴 강으로 그 길이는 6300Km이고 강 너비는 300m에서 500m라고 한다.
우리가 이동하는 중경까지는 700여Km인데 마지막 4시간동안 버스로 이동하는 구간 빼고는 삼박사일 동안 양자강 물 위에서 지낸다.
아침에 눈 뜨면 흙탕물 위에 떠있는 것이다
강물은 완전 혼탁한 붉은 황토물이였다. 우리나라의 사나운 산사태 났을 때 볼 수 있는 물색이라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양자강 물은 겨울에만 푸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황토물이라고 했다.
가끔 중국을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자연 경관도 웅장하면서 수려하고 공공건물의 규모나 그 크기에 놀라고 기가 질린다. 물론 국토 면적 자체도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큰 대륙이지만 그 역사성이나 보존성을 보면 할 말을 잃게 한다. 그게 사회주의 였어서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 그 규모에 놀랐던 것은 삼협 댐이었다.
물론 인공 댐이었는데 이 댐을 건설하기 위하여 139만여 명의 주민을 이주시겼고
17년간의 걸쳐 완공한 종합수리공사 였다고 한다.
댐 높이가 185m이며 상류의 정상 수위는 175m 댐 전체 넓이는 2309m이고 댐 두께가 밑 부분은 최대 폭 130m이고 윗부분은 댐 너비가18m라고 한다. 만 톤 급 이상의 배들은 선박갑문으로 통하여 이동하고 3000톤급 배는 선박엘리베이터에 물을 채워서 오르내린다고 하니 눈으로 보지 않고는 그 규모가 짐작이 안 갔다.
총 건설비용이 한국 돈으로 35조원이 들었다고 한다.
만리장성과 같이 A급 관광지가 되어 있었고, 만리장성 축조 이래 2300여년만의 큰 공사였다고 한다.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 삼협 댐은 일급 보안지역으로 반경 100km이내에는 어떤 물체도 비행이 금지 되어 있다고 한다. 사방에 네 곳의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가이드 말로는 이 100Km반경 내에 들어오는 비행 물체는 무조건 격추한다는 것이다. 공정 과정이 세계 초 일류 1급 기술진으로 4개국에서 참여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안을 매우 중요시한다고 한다.
중국정부의 최대 난적이 양자강 범람이었는데 이 삼협 댐 건설로 인하여 빈번하던 홍수는 없어 졌다고 한다. 백년에 한번 올 수 있는 대 홍수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어 주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 한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설 초기에는 이주민 문제, 양자강수로, 지진유발, 역사유물수몰, 등 여러 문제의 도전이 있었고, 지금도 환경 문제, 생태계 문제는 의견이 분분해 사회 문제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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