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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동의어 희빈장씨, 장옥정 다른 표기 언어 張禧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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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사망
1701(숙종 27)
국적
숙종
본관
인동(仁同,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요약 장희빈은 유례없이 악독한 경국지색의 요부로 알려져 있지만 숙종의 여인이자 경종의 어머니로서 당쟁과 환국으로 얼룩진 치열한 권력투쟁의 도가니 속에서 사랑과 고통, 갈등과 희망을 한 몸에 품었던 역사의 희생자였다.
목차
접기
1. 중인 역관의 딸, 신분상승을 꿈꾸다
1. 양반의 첩이 되느니 후궁이 되겠다
1. 인현왕후의 등장, 역사의 라이벌전이 시작되다
1. 인현왕후의 폐출, 장희빈의 시대가 열리다
1. 갑술환국, 남인정권과 장희빈의 몰락
1. 무고의 옥, 나락으로 떨어지다
숙종의 치세는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 국정안정과 왕권신장을 노리는 임금의 잦은 환국정치로 인해 정국이 요동쳤다. 그 과정에서 숙종의 여인 인현왕후 민씨와 장희빈, 최숙빈의 뒤얽힌 관계는 영조 대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두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신분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중인계급의 성장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고 있던 그 시기에, 장희빈은 중인 역관의 딸이자 천민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국모의 자리에 올랐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녀의 비극적인 삶은 남인과 서인의 치열한 정쟁 속에서 안정기에 접어든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 천재지변으로 인한 국가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숙종시대의 엄중한 상황과 굳게 맞물려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복합적인 정국을 무시한 채 장희빈을 그저 어진 조강지처를 음해하고 온갖 궁중에서 음모와 암투를 야기한 요부로 매도하고 있다.
중인 역관의 딸, 신분상승을 꿈꾸다
장희빈은 1659년(효종 10년) 정9품 사역원 봉사로 재임하던 역관 장형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 어릴 때 이름은 옥정이다.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의 처갓집 여종이었는데, 장형의 본처 고씨에게 맏아들 장희식을 얻었고, 그녀가 요절하자 윤씨와 재혼하여 1남 2녀를 얻었다. 9살 많은 언니와 오빠 장희재 뒤에 태어난 막내가 장옥정이었다.
옥정은 어머니가 천민이었으므로 모계를 따르는 종모법에 따라 역시 천민 신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특했던 그녀는 어머니에게 결코 천민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녀가 10살이었던 1669년(현종 10년) 1월 12일, 아버지 장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숙부 장현이 형의 가족을 거두어 보살펴 주었다.
인동 장씨는 조선 대대로 역관의 명가였다. 《통문관지》에 따르면 장희빈의 조부 장응인은 문필에 능하고 중국말을 잘해서 벼슬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뒤를 이어 20여 명의 역관이 나왔는데 사역원 수석합격자도 7명이나 되었다. 당시 역관들은 사행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장현 역시 ‘국중 거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갖추었고, 효종 대에는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 받기까지 했다.
일찍이 장현은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이 청나라 사신으로 갈 때 수행한 인연으로 이른바 삼복(三福)으로 불리던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과 친해졌다. 이들의 소개로 남인들과 가까이하면서 장현은 자연스럽게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양반의 첩이 되느니 후궁이 되겠다
장옥정은 성장하면서 뛰어난 미모를 갖추어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소문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그녀는 주어진 운명대로라면 양반의 첩실이나 될 팔자였다. 평소 자신의 신분을 증오했던 장옥정은 그와 같은 평범한 길을 거부하고 모험을 선택했다. 대궐에 들어가 최고의 여인이 되든지 이름 없는 궁녀로 음지에서 죽든지 양단간에 결판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사통하고 있던 우의정 조사석에게 부탁하여 동평군 이항에게 줄을 댄 끝에 어린 딸을 자의대비전의 나인으로 들여보냈다. 이는 장희빈을 격하하려는 서인 출신 사관들에 의해 씌어졌으므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조사석이 일정 부분 그녀의 입궁에 간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동평군 이항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소생인 숭선군 이징의 아들로 어머니가 조사석의 사촌누이였다. 이들은 모두 남인과 가까운 사람들이고,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 조씨는 두 차례의 예송 과정에서 자신을 무시했던 서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장옥정이 근무했던 대왕대비전은 임금이 매일 조석으로 문안 드려야 하는 곳이었으므로 아리따운 그녀의 자태는 자연히 숙종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향후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듯 미인계를 획책한 남인 일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숙부 장현의 재력이 더해지면서 그녀는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장옥정이 21세의 나이로 화려한 미모를 발산하던 1680년(숙종 6년) 10월 26일,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으로 방황하던 숙종은 평소 눈여겨보던 장옥정에게 승은을 안겼다. 드디어 신작로가 열리는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바람둥이 숙종의 뒤에는 차마 거역할 수 없는 어머니 명성대비 김씨가 있었던 것이다.
서인 가문 출신이었던 명성대비 김씨는 숙종이 어린 탓에 인평대군의 장성한 세 아들이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했다. 그리하여 친정아버지 김우명에게 그들이 궁녀들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모함하게 했다. 이른바 홍수의 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숙종과 남인 신료들의 조사 결과 무고로 밝혀졌다. 그로 인해 김우명이 위기에 몰리자 명성대비는 과감하게 정청에 들어가 통곡함으로써 숙종으로 하여금 복창군과 복평군을 귀양 보내게 만들었다.
그처럼 숙종을 위해 자신의 체면조차 돌보지 않았던 명성대비는 장옥정이 아들의 총기를 흐려 남인의 재집권을 조장할 수 있음을 알고 불문곡직 대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런 어머니의 단호한 조치에 숙종은 입도 한 번 벙긋하지 못했다. 졸지에 오갈 데 없어진 장옥정을 숭선군 이징의 부인 신씨가 돌봐주었다. 그녀의 가치는 임금의 총애가 식지 않는 이상 언제라도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현왕후의 등장, 역사의 라이벌전이 시작되다
1681년(숙종 7년) 5월 2일, 서인의 핵심이었던 민유중의 딸이 숙종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장희빈의 라이벌 인현왕후 민씨의 등장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국모가 된 민씨는 내명부를 점검하던 도중 장옥정의 퇴궐 사실을 알고 순진하게도 숙종에게 그녀의 입궁을 요청했다. 승은을 입은 궁녀가 오랫동안 민간에 머무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데 그 말을 전해들은 명성대비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용문
내전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니,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에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오.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아무리 왕비라도 이와 같은 시어머니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장옥정의 입궁은 불발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683년(숙종 9년)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자 궐내에 비상이 걸렸다. 일찍이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도 같은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아들의 용태를 걱정하던 명성대비는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목욕재계한 다음 천지신명께 아들의 완쾌를 빌었다.
하지만 도가 지나쳐서 그만 병석에 눕더니 12월 5일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명성대비의 죽음과 함께 오매불망하던 숙종과 남인들은 쾌재를 불렀다. 장옥정이 재입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686년(숙종 12년) 12월 10일, 숙종은 명성대비의 국상기간이 끝난 지 불과 닷새 만에 장옥정을 입궐시켰다. 형식적으로는 자의대비와 인현왕후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숙종은 그녀를 위해 창경궁 북쪽에 취선당이란 별당을 지어주었다.
그때부터 장옥정은 천부적인 교태를 무기로 젊은 왕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어리고 순진한 중전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숙종의 총애가 한층 깊어지면서 장안의 한량이었던 장씨의 오빠 장희재도 벼락출세하여 포도부장으로 특채되었다.
이듬해인 1684년(숙종 10년) 외척 김석주가 세상을 떠나자 숙종과 서인들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서인 가문 출신의 중전 인현왕후는 그 무렵 숙종의 외면으로 회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남인이 지지하는 장옥정은 언제라도 회임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새삼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서인들은 그녀를 퇴출시키기 위해 궁리를 거듭했다.
1686년(숙종 12년)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이 숙종에게 재이(災異)를 두려워하고 수성(修省)에 힘쓸 것을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장옥정을 내쫓으라고 간했다. 그러자 숙종은 그녀에게 종4품 숙원(淑媛)을 내리고 노비 100구를 하사했다. 이에 경각심을 느낀 인현왕후는 숙종의 애정을 분산시키기 위해 미인으로 알려진 김창국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다. 그녀는 입궁하자마자 종1품 귀인이 되었지만 숙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인현왕후의 폐출, 장희빈의 시대가 열리다
1688년(숙종 14년) 정2품 소의(昭儀)로 책봉된 장옥정은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한 수를 날렸다. 그해 10월 28일 왕자 윤(昀. 경종)을 낳았던 것이다. 총애하던 후궁으로부터 그토록 소원하던 왕자를 얻은 숙종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인들은 환호했고 서인들은 의기소침했다. 한데 그 순간 서인들의 패착이 이어졌다.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사헌부의 지평 이익수가 장옥정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입궐하던 윤씨의 가마를 빼앗아 불태우고 종들을 구타한 뒤 궐 밖으로 쫓아냈던 것이다. 분개한 숙종은 이익수와 그의 명에 따른 사헌부 금리와 조례를 내수사로 보내 장살해 버렸다.
윤씨에 대한 모욕은 곧 장소의에 대한 모욕이며 임금에 대한 불충이었다. 서인들의 행각에 경각심을 느낀 숙종은 이듬해인 1689년(숙종 15년) 1월 11일 왕자를 원자로 정호하고, 생모인 장소의를 정1품 희빈에 책봉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과시했다.
이에 따라 장희빈의 본가에도 행운이 닥쳤다. 아버지 장형에게는 영의정, 조부 장응인에게는 우의정, 증조부 장수에게는 좌의정 벼슬이 내려졌다. 평범한 중인 집안에 벼슬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중궁도 아닌 후궁의 3대까지 증직한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장차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기 위한 숙종의 정지작업이었다.
이례적인 숙종의 조치에 이조판서 남용익을 필두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 영의정 김수흥, 영돈령 김수항 등이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정비인 인현왕후가 아직 21세로 젊은데 국본을 서둘러 확정함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기사환국이라는 철퇴였다.
원자정호 문제로 촉발된 기사환국의 조치는 신속하고 철저했다. 숙종은 서인 신료들을 모조리 파직한 다음 남인이었던 권대운, 목래선, 김덕원을 정승으로 임명했다. 이어서 예전부터 미워하던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 보낸 다음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했다. 김수흥과 김수항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 그렇듯 서인들을 일거에 축출한 숙종은 그해 5월 2일 5월 2일 왕비 민씨를 폐출하여 사가로 내쫓았다. 그날 숙종은 비망기를 통해 이렇게 명했다.
인용문
성종 때 폐비된 윤씨의 죄는 단지 투기에 있었는데 오늘날 민씨의 죄는 윤씨보다 더하고, 그녀에게 볼 수 없었던 행동까지 겸했다. 그러므로 폐비하여 서인으로 삼아 친정으로 돌려보내니 예관들은 이 내용을 종묘에 고하라.
왕명이 떨어지자 인현왕후 민씨는 소교를 타고 요금문(曜金門)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연도에 유생들과 백성들이 몰려들어 통곡했다. 그날 숙종은 예조의 청에 따라 그녀와 가례 때 사용했던 교명 ・ 책보 ・ 장복 등을 모두 모아 승정원에서 불태우게 했다. 5월 4일에는 정식으로 중궁을 폐한다는 내용의 교서를 반포했다.
폐출의 절차가 마무리되자 숙종은 5월 6일 드디어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다는 전교를 내렸다. 그와 함께 중전 장씨의 아버지 장형에게 옥산 부원군(玉山府院君)을, 그의 아내 고씨에게는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을 추증하고, 장씨의 생모 윤씨를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봉했다. 이어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포도대장에 임명되었고, 시중에서 면포를 팔던 외삼촌 윤정석은 사포 별제란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인 1690년(숙종 16년) 6월, 숙종은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이 끝나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10월 22일에는 장씨의 책봉례를 치렀다. 그리하여 천출이었던 장희빈은 일국의 국모로서, 장차 국왕의 모후로서 거칠 것이 없는 신분이 되었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미천한 여종의 딸이자 궁녀가 당대에 왕비로 책봉된 예는 장옥정이 유일했다.
갑술환국, 남인정권과 장희빈의 몰락
인현왕후가 폐출된 뒤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점차 식어갔다. 그녀는 나이 서른이 넘어 미색이 퇴조한 데다 중전으로서의 존재감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전은 사대부가의 오랜 교육과 경험을 바탕으로 궁인들에게 왕후로서의 모범을 보이면서 내명부를 통솔하는 자리다. 하지만 중인 가문에서 자라난 장희빈에게 그런 리더십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장희빈에게 실망한 숙종은 밤마다 궐내를 배회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폐출한 인현왕후의 단아하지만 엄숙한 행동거지가 눈에 어른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숙종은 인현왕후의 시녀였던 나인 최씨가 왕비의 생신을 맞아 몰래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이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얼마 후 숙종은 착하고 순종적인 최씨를 후궁으로 들어앉혔다.
그러자 질투심이 폭발한 중전 장씨가 그녀를 끌어다 매질까지 했다. 하지만 숙종의 마음은 최씨에게 돌아선 지 오래였다. 왕의 마음이 바뀌자 은인자중하고 있던 서인들이 기지개를 켰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일세.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닐더니제철 가면 어이 놀까 제철 가면 어이 놀까.
김춘택, 한중혁 등은 민간에 이처럼 왕비 장씨를 폄하하는 참요를 퍼뜨렸다. 이 노래에서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 장다리는 중전 장씨를 상징한다. 숙종에게 장다리 같은 장씨의 품에서 오락가락하지 말고 미나리 같은 인현왕후를 되찾으라는 뜻이었다.
소론인 김만중은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어 간접적으로 왕비 장씨를 공격했다. 이 소설은 명나라의 유현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다시 맞아들인 다음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이다. 기이하게도 인현왕후 민씨와 중전 장씨의 운명은 이 소설과 흡사하게 전개된다. 김춘택은 그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면서 한문으로 번역까지 했다.
사씨남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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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숙종 20년), 서인들의 수상한 책동을 탐지한 우의정 민암은 이번 기회에 서인들을 완전히 제거할 요량으로 숙종에게 민씨 복위세력에 대한 척결을 종용했다. 하지만 숙종의 조치는 그들의 기대와 정반대였다. 숙종은 민암이 자신을 속이고 옥사를 확대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남인 중신들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의 서인이 대거 발탁되었다. 이른바 갑술환국이었다.
조정이 서인 일색으로 채워지자 폐비에 대한 처분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1694년 4월 예조에서는 《예기》에 ‘제후가 부인을 내칠 때에는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부인의 예로써 행한다.’라는 조항을 들어 사가에 있는 폐비를 별궁에 모시자고 청했다. 그러자 숙종은 내관을 보내 그녀의 안부를 알아보았는데, 외부와 고립된 채 속죄하고 있으며 마당에 풀이 무성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숙종은 그녀에게 손수 편지를 써 사과했고, 입궁한 뒤에는 부모의 작위를 모두 회복시켜 주었다. 반면 중전 장씨에 대한 처분은 명료했다. 왕후 책봉의 옥보를 부숴버린 다음 희빈으로 강등하여 취선당으로 쫓아냈던 것이다.
그해 4월 17일 장희빈에게 오빠 장희재가 보낸 언문편지가 파문을 일으켰다. 포도대장이었던 장희재가 암암리에 폐비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빌미를 잡은 의금부에서 그를 대역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소론 측 대신 남구만이 반대했다. 세자의 외삼촌을 처벌하면 그 여파가 세자에게까지 미칠 것이라며 종사의 안정을 위해 극형만은 면케 해달라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장희재를 제주도에 귀양 보내는 선에서 처결을 마쳤다. 그러나 이 일에 연루된 숙부 장현과 장찬에게 절도 유배형을 내리고, 장희빈의 조상 3대에 내렸던 벼슬도 회수했다.
장희빈은 매정한 숙종의 처사를 원망하면서 인현왕후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무기는 세자의 생모라는 지위 하나뿐이었다. 한데 그해 9월 20일 최숙의가 왕자 이균을 낳자 장희빈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남인의 몰락, 자신의 추락과 함께 왕세자의 입지마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렇듯 궁지에 몰린 장희빈은 최후의 자충수를 두게 된다.
무고의 옥, 나락으로 떨어지다
한순간에 국모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온 뒤 절치부심하던 장희빈의 운명은 조용한 가운데 비극으로 치달았다. 1696년(숙종 22년) 7월, 장희재의 가노 업동이 이의징의 아들 이홍발의 명을 받아 목검을 차고 있는 나무 동자 인형 두 개와 세자의 나이와 이름이 새겨진 나무 조각 하나를 장희빈의 선영에 묻었다. 그런 다음 병조판서 신여철의 종의 호패를 훔쳐다 그곳에 떨어뜨려 서인들이 벌인 일로 꾸미려 했다.
그로 인해 사건을 신고한 강오장을 비롯하여 채제윤, 김성적, 윤종서 등이 국문을 받았다. 의금부에서 엄중하게 수사한 결과 남인 측의 음모임이 밝혀지자 이홍발을 비롯한 남인 일파가 된서리를 맞았다. 업동은 군기시 앞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으로 조정 안팎이 시끄러워지자 장희빈은 더욱 고립되었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다. 중전이 죽으면 언제라도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씨는 시녀들에게 매일 중전을 감시하게 했고, 궐내에 무당을 불러들여 중전에 대한 저주의식을 행했다. 또 중전이 거처하는 대조전과 통명전 주변에 저주용품을 묻었다.
그런 장씨의 일념 탓이었는지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한 뒤부터 원인 모를 병에 시달렸다. 그녀는 결국 1701년(숙종 27년)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바야흐로 재기의 기회가 왔다고 여긴 남인 일파의 행 부사직 이봉징은 장희빈이 한때 중전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다른 후궁과 복제를 달리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장희빈에게 특별대우를 한 다음 중전으로 복위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숙종은 상소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그를 전라도 지도에 위리안치 시켜 버렸다.
남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인현왕후의 죽음은 기회가 아니라 파국의 시작이었다. 그때까지 장희빈의 저주 행각은 궐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세자의 생모라는 위세에 밀려 아무도 숙종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인현왕후 민씨가 숨을 거두자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최숙빈이 숙종에게 저간의 사정을 고해 바쳤다.
그 동안 장희빈의 포악한 성정에 신물이 났던 숙종은 내관들에게 취선당 일대의 수색을 명했다. 곧 장희빈의 거처인 취선당 근처에서 중전을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었고, 중궁 주변에 묻어두었던 죽은 새, 쥐, 붕어 등 각종 저주용품들이 속속 발견되었다.
대노한 숙종은 장희빈 일문에 대한 대대적인 척결을 개시했다. 그해 9월 23일 밤 숙종은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장희재와 장희빈을 모시던 궁녀 영숙의 처형을 명했다.
인용문
중전이 병에 걸린 2년 동안 장희빈은 한 번도 문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칭할 때 중궁전이라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라고 했으며 요사스럽다는 말까지 했다. 또 취선당 서쪽에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매양 2, 3인의 비복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흉악한 저주의식을 행했다.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이틀 뒤인 9월 25일, 숙종은 드디어 비망기를 내려 장희빈의 자진을 명했다. 그러자 영의정 최석정이 세 차례나 차자를 올려 세자를 위해 어명의 철회를 청했고 판중추부사 유상운, 윤지선, 서문중 등 소론 신료들까지 합세했다. 14세의 세자 이균도 부왕에 글을 올려 생모의 구명을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0월 3일, 숙종은 인현왕후를 감시하고 저주의식에 동참한 장씨의 시녀 숙정 ・ 숙영 ・ 축생 ・ 오례 ・ 자근례 등을 친국한 다음 군기시 앞길에서 참형에 처하고 노비 철생은 당현에서 죽이게 했다. 또 이수장과 정이 ・ 신월 ・ 순례 ・ 열이 등 장씨가 부리던 무당과 시녀들을 모조리 형조에 이송해 처벌토록 했다.
10월 10일, 드디어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 43세였다. 그녀는 어쨌든 세자의 생모였으므로 숙종은 예조에 명하여 상례를 간략히 치르게 하고 관을 선인문 밖으로 내보냈다. 10월 27일에는 호가호위하던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군기시 앞에서 목이 잘렸다.
장희빈의 시신은 1702년(숙종 28년) 1월 양주 인장리에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년)에 불길하다는 이유로 광주 진해촌으로 이장되었다. 장희빈의 대빈묘는 1960년대 초 도시개발의 광풍에 밀려 고양시 서오릉 경내로 이전되었다.
희빈 장씨 묘(禧嬪 張氏)
서오릉 내에 위치한 희빈 장씨의 무덤(대빈묘)
ⓒ KoreanHistoryWriter/wikipedia | CC BY-SA 3.0
얼마 후 숙종은 중신들에게 명하여 후궁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국법을 고쳐버렸다. 당시 그가 장희빈에게 얼마나 환멸감을 느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어서 숙종은 세자를 명분으로 장희빈의 구명을 요구했던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 소론 중신들을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리하여 정국은 서인 중에서도 노론의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무녀가 관련되었으므로 무고(巫蠱)의 옥(獄)이라고 부른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훗날 생모의 경쟁자였던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 이금을 무척 아꼈고,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쟁 속에서 그를 지켜주었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기 소론 급진파로부터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아 이인좌의 난을 겪었고, 장희빈이 그랬던 것처럼 매흉과 같은 저주의식을 통해 장남 효장세자를 잃었다.
실로 장희빈의 도전은 비인간적인 신분제도에서 촉발된 개인적인 야심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녀의 종착지는 남인과 서인들의 권력다툼과 남편 숙종의 왕권강화를 향한 의지, 사랑과 영광을 독점하려던 여인들의 집착이 고루 뒤섞여 만들어진 어둠의 도가니였다.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