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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4)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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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4:1-12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 설교>
솔로몬의 행각에 모인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두 번째 설교를 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을 고쳐준 기적을 공개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주목하여 보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경계한 뒤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합니다. 세 가지 핵심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종, 곧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예언한 ‘고난받는 종’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14).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지만, 예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었습니다. 이 말은 고난 겪을 아무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이십니다(15). 즉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신 분을 거부하고, ‘너희가’ 끝내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는 내용입니다.
비록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한 일이라도 그들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9절)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을 고쳐주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16절)이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치유의 ‘기사와 표적’을 통해 속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주목하는 유대교 지도자들>
그러나 이 베드로의 설교는 예루살렘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1~3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그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명실공히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들의 최고 우두머리가 ‘대제사장’입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은 6절에 명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안나스와 가야바였습니다. 본래 대제사장직은 한 명이어야 하는데, 이 두 사람을 동시에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로마제국으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은 안나스가 자신의 사위인 가야바에게 표면적으로는 대제사장직을 물려 주었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명목상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지만 실권자로서의 대제사장은 여전히 안나스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족목요일에 체포되셨을 때에, 제일 먼저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서 심문을 당한 후에 가야바에게 보내졌던 것을 보더라도 우리는 안나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요18장).
‘성전 맡은 자’는 성경 아래쪽 주(註)난을 살펴보면, ‘경비대장’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경비하는 총책임자로 대제사장 다음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의 고위직을 모두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도, 경비대장도 모두 사두개인이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당시 유대인 중에는 네 가지 주요 당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Sadducees)와 바리새파(Pharisees), 에세네파(Essenes)와 열심당(Zealots)이 그것인데, 그 중에서도 사두개파에게 모든 권력과 재물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신앙은 다분히 현세주의적 성향을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였습니다.
<두 사도를 잡아들인 두 가지 이유>
1) 이들은 자신들이 음모를 꾸며 죽인 ‘예수의 이름’이 깨끗이 잊히길 원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직접 잡아들인 사람들이고(눅22:52),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했던 장본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유대 사회에, 그곳도 성전에서 다시 회자되는 것 자체가 그들을 불편하게 했을 것입니다.
2) 그리고 자신들이 부인하는 ‘부활’을 증거하는 것을 못마땅히 생각하였습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2절)
그들의 신앙은 다분히 현세주의적이어서,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인정하였습니다.
훗날 바울이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이러한 차이를 거론하여 그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행23장). 신기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어찌 된 일인지 마음을 합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손익계산에 따라서 행동하는 이기적인 정치적 집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다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 절(4절)입니다.
4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들은 체포되었으나 그들이 전한 말씀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을 체포한다고 해서 말씀까지 체포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선포된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믿는 자가 많으니…약 오천이나 되었다’는 말이, 성령강림절 때의 ‘삼천 명’(행2:41)처럼 당일에 믿어 신도가 된 사람들 숫자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초대 교회의 신도들이 ‘오천 명’으로 늘어났다는 이야기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포된 말씀으로 인해 믿는 자들이 더욱 생겨났다는 사실입니다.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면 24살 젊은 나이에 조선에 와서 8개월 만에 순교한 루비 캔드릭(Ruby R. Kendrick, 1883-1908)이라는 여선교사의 비석이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에서 파송된 감리교 선교사인데 아쉽게도 한국에 온 지 8개월 만에 급성맹장염에 걸려 수술했지만 소천하고 말았습니다. 그분 묘비 상단에 보면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나에게 천 개의 목숨이 있다 해도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치리라”(“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이토록 놀라운 부흥이 있기까지 그냥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 이런 꽃다운 청년들, 수많은 선교사와 신앙의 선조들의 땀과 피가 쏟아져서 세워진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또한 어떤 권위로도 말씀의 능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입에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고전1:21b “...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전한 말씀이 어떤 역사를 일으키게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고’ 말씀을 담대히 증거하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재판이 열리다>
체포될 당시에 이미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재판은 그다음 날 열리게 되었습니다.
5~7절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유대인들에 대한 중요한 재판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열립니다. 우리나라의 ‘대법원’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산헤드린 공회’의 멤버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는 세 부류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관리들(the rulers)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들 중에서 현직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역할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지만, 실제 출신 당파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는 일에 사두개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산헤드린 전체의 공식적인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였다’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안나스’ 문중이 ‘산헤드린 공회’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올바른 재판이 가능하지 않은 구조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 외에도 다른 제사장 문중의 대표 인물들이 이 자리에 참석하였는데, 요한과 알렉산더가 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제사장과 산헤드린 회원들이 모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 일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처형하던 때에 버금가도록 베드로와 요한이 만들어낸 소동(?)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묻는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여기에서 ‘이 일’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걸인’에게는 어떤 자비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민중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죽인 ‘예수’로 인해, 자신들에게 어떤 불이익이 올까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베드로와 요한이 무슨 능력으로 그 일을 행했는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닙니다. ‘왜 예수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느냐?’, ‘왜 자신들의 이익을 훼손하려 드느냐?’고 협박하는 질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사실 산헤드린 법정에서 당대 최고의 권력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문을 받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은 우선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주눅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산헤드린 법정은 얼마 전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곳입니다. 그들 또한 예수님처럼 그렇게 처형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사실은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날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8~10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먼저 그들의 질문을 교정하여 줍니다. 이 사건을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사람에게 아주 유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이 뭡니까? ‘지금 너희는 백성의 종교지도자라고 하면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 하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일어났다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는 것이 당연한데, 이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관심도 없고 자기들 이익만 생각하느냐’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분명한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베드로는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그 사람을 고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예수님이 그를 고치셨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전에 공회 문 앞에서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대답입니다. 공회 한복판에서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이토록 담대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가 본문 8절에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므로 주어지는 ‘권능’이 베드로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눅12:11-12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장차 베드로와 요한 등 제자들이 당할 고난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고난은 당연히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방법은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방법은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께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의 대답은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사가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누구나 그와 같은 권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든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많이 가지지 못했다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기만 하면 베드로처럼 누구나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하여 권능을 받도록 힘써 기도하십시다.
<구원받을 다른 이름은 없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 이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히 증언합니다.
11~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너희가 예수님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천히 여기고 심지어 핍박하여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셔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가장 귀한 기초석으로 사용하셨음을 증언하였습니다(시편 118편 인용).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말씀을 선포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구원의 의미>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salvation)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대목을 함께 찾아서 읽겠습니다.
눅19: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도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잃어버린 자를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사랑하여 죄를 범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본래의 자리에서 잃어버린 상태에 빠진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회개함으로써 본래의 자리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이요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을 때, 하나님과의 원수 된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바울 선교사는 늘 예수의 이름을 자랑하였습니다.
그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이리며 찬양하였습니다(함께 찬양 부르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