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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포지방으로의 출발
예로부터 경기지방과 내포지방 사이에 넓직하게 드리워진 아산만은 산맥보다도 더 큰 장막으로 작용하여 이 만을 건너면 경기지방과는 완연히 다른 왠지 느릿하고 푸근한 향토색이 풍겨온다.
우선은 눅진한 사투리가 정겹다. 『옛날엔 그래도 괘안찮었슈- 이따시 되는 우럭두 펄떡 펄떡 잽히구유- 망뎅이 같은 거는 잡지두 않었슈-』하며 말끝을 길게 늘이는 사투리가 너울 너울 다가선다.
같은 충청도라도 예로부터 큰 길목에 해당되는 대전, 천안 쪽은 사뭇 서울 말씨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예산, 홍성, 당진, 서산, 태안 등으로 대표되는 내포지방은 큰 길목에서 비켜 있을 뿐 아니라 경기지방과는 아산만으로 차단되어 있어 내륙으로는 등을 돌리고 바다를 안고 있는 형세가 된다. 포구 안쪽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내포(內浦)가 썩 어울리는 이 지역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포지방은 일찍이 육로로 통하는 서울 쪽 보다는 해로로 통하는 인천 쪽으로의 왕래가 빈번하여 인천에 유독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게 되어 인천시민중 내포지방 사람들의 비중이 높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요, 지리학자였던 이중환도 우리 나라 최초의 과학적 지리서로 꼽히는 『택리지』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년 전의 이 지역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내포(內浦)라는 이름은 가야산 일대에 자리한 열 개 고을을 일컫는 말이다. 지세가 나라의 한 구석에 막혀 끊기었고, 또 큰 길목에 해당되지도 않으므로 임진, 병자의 두 차례 난도 이곳을 비켜갈 수 있었다. 이 곳의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면서 넓다. 또한 물고기와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이러한 연고로 내포지방은 수도권에서 가까우면서도 그 영향권에서 소외되어 뒤안길에서 느껴지는 적적함이 배어 있는 곳이지만 그만큼의 인정과 향수가 살아 있어 즐길만한 호젓함이 된다. 또한 이 땅의 육지에는 내포평야와 천수만 간척지의 쌀, 예산의 사과, 가야산의 산채, 서산의 마늘과 생강으로 대표되는 풍요가 있다면 바다에는 안면도의 대하, 간월도의 어리굴젓, 서산의 낙지탕과 꽃게장으로 화답하는 풍요가 어우러져 나그네의 발걸음을 슬며시 바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아산방조제, 삽교방조제가 건설되어 수도권과의 교통을 편리하게 해주고 지리적 대변혁을 예고하는 서해대교가 건설 중이어서 이 지역에 경제적 생기가 기대되는 동시에 맑은 풍경과 펑퍼짐한 인정의 퇴색이 염려되기도 한다.
2. 선조들의 땀내음 시큼한 공세리
경기와 충청을 잡아 잇는 아산방조제를 건너면 바로 조선시대 조운(漕運)활동의 중심지였던 인주면 공세리(貢세里)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은 내포지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번거롭고 판매원들의 무표정과 손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우동가락을 마주해야 하는 휴계소보다 옛사람들의 체취가 정다웁고, 운치 있는 여행길의 고마운 쉼터가 된다.
이 공세리(공진창)는 마을 이름이 설명해 주듯이 조세로 걷은 쌀을 보관하고 한양으로 운반하던 조운활동의 요지로서 아산, 당진에서 공주, 청주 등에 이르는 인근 40여 고을의 세곡을 관리한 전국 9대 조창(漕倉-주변 지역에서 세곡을 모아 보관하는 창고)중의 하나였다. 이 곳에는 조선 중종18년(1523년) 세곡의 운반을 위하여 80여간의 창고를 짖고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주재시키고 조운선 15척을 배치하였는데 점차 활발해져 60여척의 배가 드나들고 세곡이 마치 산과 같이 쌓였으며 600여호에 3000명에 이르는 인구가 북적거리던 곳이라는 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고증하고 있다. 또한 마을 중앙의 인주농협 입구에는 아담하나마 자못 볼륨있는 석축과 몇 개의 해운판관비가 호박넝쿨과 더불어 당시를 실증하고 있다. 이 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석축을 쓰다듬노라면 400여년 전 옛사람들의 체온이 손바닥으로 느껴져 온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빈번한 세곡선의 침몰 등 배를 통한 쌀 수송의 부작용이 커져 영조38년(1762년)에 해운판이 폐지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어 공세리는 차츰 세월 속으로 묻혀져 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도 해운교통의 요지로서의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천주교 전래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1822-1846)이 부근의 당진군 우강면 사람이요, 1894년 프랑스 신부 성 에밀리오는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에 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회를 고딕양식으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기도 하다. 이 천주교에서 아산 방조제 쪽을 내려다보면 광활한 논이 펼쳐지는데 이는 원래 갯펄이었던 곳이 방조제 건설과 함께 형성된 간척지이다. 과거에는 삽교방조제 쪽으로 달리는 34번 도로변까지 망둥이와 게들의 영역으로 바닷물이 오르내리던 곳이었다.
● 조선시대의 조운(曹運)제도
조운제도는 토지에 과세된 조세를 쌀이나 특산물 등 현물로 거두어 배를 이용하여 중앙으로 운반하는 제도로서 고려시대부터 실시되어 조선중기 이후 더욱 활발하게 이용되던 제도이다. 당시의 환경에서는 배를 이용한 물자의 교역이 가장 경제적이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1751)에서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다.
물자를 옮기는 방법은 신농(神農) 성인(聖人)이 만든 법인데, 이러한 법이 없다면 재물이 생길 수 없다. 그러나 물자를 옮기는 데 있어서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 불편하므로, 온 나라 장사치는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는다. 그러나 목적한 곳이 멀면 노자는 많이 허비되므로 소득은 적다. 이러므로 배에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 못하다.
이러한 연유로 실시된 조운제도는 거두어들인 세곡을 일단은 한곳에 모아 보관할 필요가 있었는데 한양의 용산과 서강의 창고를 경창(京倉)이라 하였으며 각 지방의 주요 조창은 춘천(소양강창), 원주(흥원창), 충주(가흥창),아산(공진창), 옥구(군산창), 영광(법성창), 나주(영산창), 창원(마산창), 삼랑진창 등인데 이 조창들은 자연히 물자교류가 활발해져 지역 상업의 중심지로서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송량의 증대와 세곡선의 침몰, 그리고 근대적인 육상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그 기능과 규모가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하천의 유수량이 계절에 따라 차이가 크고 겨울에 결빙하는 등 자연조건의 불리함에 의해 근대적 교통수단으로의 발달이 어렵게 되었다.
3. 삽교 방조제를 지나며
공세리에서 작은 역사의 뒤안길 산책을 즐긴 뒤, 차를 몰아 삽교방조제를 건너다가 잠시 차를 멈추고 방조제 밖의 막힘 없이 펼쳐진 갯펄를 한 번 보면서 시야를 머드팩 해보는 것도 눈 건강에 좋을 성싶다. 삽교방조제는 길이 3360m로 1976년12월부터 1979년10월까지 약 3년간 연인원 33만 6천명을 동원하여 건설한 대역사였다. 이 막대한 노력을 들여가면서 이 방조제를 건설한 목적은 무엇일까?
우선은 교통로의 확보이다. 만약 이 방조제가 없었다면 당진까지 약 40㎞를 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방조제를 통하여 40㎞를 4㎞로 줄이는 축지법을 써서 내포지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방조제는 단어 뜻 그대로 바닷물을 막는 목적이 있다. 삽교천이나 아산만 부근의 농토는 사리가 되면 바닷물에 잠겨 극심한 염해를 입게 되는데 이를 막고자하는 것이다. 더욱이 간척지 조성이 용이해져 톡톡한 농토확장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한 방조제 안쪽의 물은 담수화 되어 인근 당진, 아산, 예산, 홍성 등 4개면 22개 읍.면 지역의 약 2만5천㏊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홍수 조절 능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많은 효과는 조수가 드나들면서 묵묵히 수행해왔던 생태계 균형이나 폐수정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 이어야하는 것을 건설 당시에는 크게 실감하지 못하였다.
어쨋거나 이 삽교방조제는 우리 나라 근대화의 마무리라 할 수 있고 어쨋거나 우리 나라 근대화에 공헌이 지대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이 방조제의 개통식을 마치고 총성과 더불어 생을 마감해야 했던 역사의 한 획처럼 그렇게 그어진 방조제이기도 한 것이다.
4. 내포지방의 지리적 위치
내포지방은 서울을 중심으로 본다면 지리적으로 외진 지역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부여, 공주가 중심이었던 백제시대로 본다면 중국과 최근접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해안 지형이 포구발달에 유리하여 대 중국 해상교역에 있어서 매우 유리한 지리적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통일을 이룬 통일신라도 수도는 경주였지만 당과의 친분관계로 인하여 경주가 서울이라면 내포지방은 부산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정도의 지위를 유지하며 대당교역의 주요 루트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나라에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고 돌아온 최치원이 서산태수로 임명된 것이 이를 고증하고 있으며 당진(唐津)이나 아산만 쪽의 한진(漢津)이라는 지명도 이와 관련되어 자못 의미가 깊어진다.
이 지역의 예사롭지 않은 불교문화 또한 이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의 미소』라 극찬되는 백제후기(6세기 중엽)의 서산 마애삼존불상, 지금은 폐사지만 남아 있지만 신라시대 화엄10찰의 하나로 꼽혔던 보원사, 건축의 모범이라 일컬어지는 수덕사 도 백제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등 대 중국 교역의 중심지로서 걸맞는 알토란같은 불교 문화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5. 덕산장이 완연하다.
자! 이제 우리는 당진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합덕과 고덕을 거쳐 내포의 가슴이라 할 가야산에게로 가기 전에 옛 보부상들의 자취가 살아 있는 덕산에 들러 장터 국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자 한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으흐흐, 이놈이 이래봬도 정승.판사 자제분으로 팔도감사 마다하고
돈 한푼에 팔려서 각설이로만 나섰네
······
품바 품바 잘한다.
한 일자 들어봐 일월이 성성 해성성
밤중 밤중 오밤중 덕산장이 완연하다.
그 옛날 덕산 장에서 불리워 지던 각설이 타령이다. 내포지방은 어찌 보면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상권이 외부와 복잡하게 얽혀 있지 않아 모식적인 상권의 범위를 살펴보기 쉬우며 지금까지도 제법 향토색 있는 정기시장이 서고 있기도 하다. 이를 반영하듯 덕산에는 아직도 보부상 조직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면사무소 뒤뜰에는 딴 곳에서 보기 어려운 보부상 유품 전시장과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기념비각이 있다. 전시장에는 패랭이, 청사초롱, 빨간 보자기, 철종 때부터 사용되던 도장 등 20여종의 보부상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보부상은 보상(褓商-봇짐장수)과 부상(負商-등짐장수)이 합쳐진 말로 보상은 주로 고가품인 금, 은, 의류, 포목 등을 보자기에 사서 다녔고 부상은 주로 소금, 토기, 목기 등을 지게에 지고 다녀서 생긴 이름이다. 보부상 조직의 효시는 고려말 백토(白兎)장군이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들을 모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운 것으로서 이후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시 적진을 뚫고 양식을 조달해 주는 호국적 활동도 하였으나 조선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종되어 독립협회에 테러를 가하는 둥 상업세력의 부정적 생리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제 덕산의 장터를 돌아보고 온천에서 냉·온탕을 넘나들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내포지방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수덕사로 넘어가 보자.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며 특히 대웅전은 건축의 모범으로 꼽히는 건축물이다. 이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1308)에 건립되어 약 700년이 된 목조건물로 노스님의 화두와도 같이 간결하고 의미심장한 감명이 스며 있는 절집 이다. 이 대웅전에 대한 안내를 유흥준 교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국보 제49호. 덕숭산 남쪽에 자리잡은 수덕사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건물로 현존하는 다섯 채의 고려시대 목조건축 중 하나로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된 것이다. 정면3칸, 측면4칸의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조용한 가운데 단정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며 불당으로서의 근엄함을 잃지 않고 있다. 건물의 모든 결구는 필요한 것만으로 최소화시키고 여타의 장식을 배제하였으며 기둥과 창방의 연결고리인 공포장치는 단순한 가운데 힘이 넘치며, 마름모꼴 사방연속무늬의 창살은 이 집의 정숙한 기품을 더욱 살려준다. 특히 이 건물의 측면관의 면분활은 안정과 상승의 조화를 절묘하게 보여주며 거의 직선으로 뻗은 맞배지붕의 사선은 마치 학이 내려앉으면서 날갯짓하는 듯한 긴장이 살아 있다. 배흘림기둥에 기둥과 기둥사이가 비교적 넓게 설정된 것은 백제계 건축의 특징으로 생각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지붕골이 조금 높고 길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건물 외벽에 별도의 단청을 가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림보다 더 큰 조형효과를 자아낸다. 내벽에서는 1934년 대대적인 해체수리공사 때 아름다운 야생화를 담백한 채색으로 그린 것이 발견되었다.
수덕사 아래에서 우리는 산채정식으로 저녁식사를 즐기고 수덕여관에서 1박을 할 것이다. 수덕여관은 최근 우리 전통적인 회화를 가장 탁월하게 현대적으로 접목시킨 『군상』으로 유명한 이응로 화백의 본부인께서 운영하던 업소로 그 뒤뜰에 너럭바위가 있는데 거기에 고암 이응로의 문자 추상이 새겨져 있어 뜻밖의 명작을 대할 기회가 있기도 하다.
● 정기시장의 성쇠와 상설시장의 형성
정기 시장은 대개 5일 간격으로 농촌지역에서 농.축산물이나 지방 특산품을 거래하던 시장으로 주로 보부상과 객주(물품운송, 보관, 매매를 주로 하는 상인)를 중심으로 교환이 이루어 졌다. 이러한 정기시장은 상업적 기능 뿐만 아니라 농촌사회의 정보교환 및 사교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한때는 전국에 약 1500여 개의 정기시장이 있었으나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정기시장의 성쇠와 상설시장의 형성을 다음과 같은 4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A단계: 예전에 시골에는 인구밀도도 낮고 경제적으로 구매력이 약하여 한 장소에서 상인들이 필요로 하는 최소고객수(최소요구치-이익을 남기기 위한 최소한의 고객수)가 확보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초기 단계에는 방물장수 등과 같이 고을 고을로 돌아다녀야만 수요자를 찾아 최소고객수를 만족시켜 이윤을 낼 수가 있었다.
B단계: 점차 인구밀도가 증가하고 구매력도 높아져서 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최소고객수를 만족시킬 수가 있는 단계로 진행된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아 주기적으로 이동하면서 구매력을 축적시키는 한편 새로운 수요를 따라 이동하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정기시장이 형성된다. 이 단계에서 소비자들은 주로 걸어서 이동하게 되는데 그 한계를 약 4㎞로 잡았을 때(재화의 도달 범위- 일정상품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정기시장의 상권은 반경 4㎞의 원이 되며 정기시장은 그 만큼의 간격을 두고 형성된다고 할수 있다.
C단계: 인구밀도가 점점 높아지고 교통은 점차 발달하여 재화의 도달 범위가 확대되어 작은 정기시장이 좀 더 큰 정기시장으로 흡수되면서 정기시장의 수가 줄어든다.
D단계: 교통이 획기적으로 발달하고 수요가 크게 늘면서 이동할 필요 없이 매일 장을 열어도 충분히 최소요구치가 확보되어 하나의 커다란 시장이 상설화 된다.
6. 해미읍성을 지나 가적운하로
일찍 기상하여 덕숭산을 올라가 보자. 덕숭산은 해발 580m로 아늑하고 덕을 느낄 수 있는 산이다. 아침 산책으로는 약간 무겁지만 그렇다고 산행으로 마음먹고 진지하게 대할라 치면 다소 가볍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홍성 일대의 경관은 자못 호방하다. 1:5만 지형도를 가지고 올라가 일대를 개관해 보는 것도 지리답사로 의미 있는 일이다.
자! 아침을 먹고 우리는 해미읍성으로 가보고자 한다. 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1491)에 쌓은 성으로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성으로 가장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본래 이 성은 토성이었으나 성종 때 석성으로 개축했으며 평지성이라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성벽 밖에 깊은 웅덩이를 파고 물을 흐르게 하여 이중 방어벽을 구축했다. 또 성 둘레에 줄기에 가시가 돋아있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조성해 탱자나무성이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내포지방은 백제시대이래 중국의 산둥반도와 직통으로 통하던 무역의 요충지로서 해안의 지형이 복잡하고 배가 접근하기 용이하였다. 이러한 조건은 또한 한가롭고 풍요스러운 이 지역의 약탈자의 접근도 용이하게 하였다. 특히 왜구의 노략질이 끊이질 않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쌓아올린 성이 해미읍성으로 한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위치하였다. 둘레가 2㎞, 높이가 5m로 임진왜란 직전에는 이순신장군이 근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대원군 이후 천주교신자들의 순교지로 80여년간 무려 1000여명이 처형되었으니 역사의 흐름 앞에 망연 곤혹스러움이 느껴지며 힘이 빠지기도 한다. 성안에는 1973년까지만 해도 민가 160여 채와 초등학교, 관공서가 있는 실생활의 터전이었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들이 흘린 피 앞에 숙연한 마음을 가지고 읍성을 뒤로한 채 태안으로 건너가다가 선조들이 흘린 땀내음 시큼한 가적운하를 둘러본다. 가적운하는 서산시와 태안군의 경계로 활용되며 팔봉중학교를 끼고 북쪽으로 오라가면 그 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태안반도 제1의 어항인 안흥은 삼남지방의 세곡을 한양으로 수송하던 조운선의 주요 기항지였으며 군사적 요충지 였는데 그 앞바다의 안흥량(安興梁)은 유난히 조류가 빠르고 험하여 세곡을 수송하던 배가 자주 침몰하였다. 본래 이 바다의 이름은 난행량(難行梁)이었는데 사고가 계속 나자 평안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안흥량(安興梁)으로 바꿀 정도 였다. 그리하여 이 가적운하를 건설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가적운하는 가로림만과 적돌만을 연결한 것으로 그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가적운하는 그 길이가 약 3㎞로 고려 인종12년(1134)에 시작하여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직전까지 비록 단속적이기는 하지만 실로 400여년간 수 천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운하공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기반이 화강암이라 당시의 기술과 장비로서는 역부족으로서 악전고투 끝에 거의 끝낸바 있으나 실제 배의 통과가 어려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 자취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열악한 환경에서 극심한 노동에 시달렸을 선조들의 땀방울이 자못 안타깝게 느껴진다.
7. 산촌(散村)이 한가로운 태안반도
태안반도 일대를 여행하다 보면 서해안 지역의 보편적인 경관과는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서해안의 다른 지역은 일반적으로 평야가 펼쳐지고 논을 배경으로 집촌(集村)이 어우러지는데, 태안반도 지역은 우선은 평야가 적고 높지는 않지만 구불구불한 능선의 구릉이 연이어져 밭농사가 탁월하고 드문드문 산촌(散村)이 한가롭게 흩어져 있다. 마치 강원도의 어디쯤 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집촌(集村)의 형성 원인 및 특징 |
산촌(散村)의 형성원인 및 특징 |
* 집약적 토지이용이 이루어지는 곳 |
* 조방적 토지이용이 이루어지는 곳 |
이 일대에 산촌이 발달하는 이유는 우선 구릉성 산지 지역으로서 평지가 적고, 밭농사 위주의 지역으로서 협동작업의 필요성이 적으며 비교적 지하수개발이 용이하여 구릉지를 개간하여 가며 드문드문 가옥이 입지하기 때문이다. 생강, 마늘, 수수, 옥수수, 고추 등이 물결치는 구릉지와 더불어 넘실대는 모습은 아늑한 향수를 일깨운다.
8. 금북정맥의 끝 안흥
태안반도는 아름답다. 동해바다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우선은 해안선이 마치 호랑이 발톱과도 같이 날카롭다. 해안선이 복잡하다는 이야기는 지형이 순탄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산맥의 개념에 의하면 이 지역으로는 어떠한 산맥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산맥의 개념에 의하면 호랑이의 형상인 우리 땅에 있어서 백두산을 기점으로 동쪽으로 내달린 등줄기의 산맥을 백두대간이라 하고 서쪽을 남북으로 구분하는 중부권의 가장 큰 산줄기를 금북정맥으로 잡고 있는데 이 산맥이 바로 내포를 지나 태안반도로 이어지며 그 끝인 안흥에서 급하게 바다로 빠져들고 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서해안의 다른 지역보다 배가 접근하기 쉬웠고 중국 산둥 반도와의 지리적 위치가 가까워 일찍이 대 중국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사신들도 이 지역을 통하여 즐겨 출입하였는데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명나라에 과시하고 싶어서 안흥성을 쌓고 그 안에 호화로운 집을 약 300여호 지었는데 그의 의도대로 명나라에는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오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비교적 뚜렷이 이 성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그 안에 몇 채의 집이 아직도 자리한다.
일본인들의 산맥개념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우리 선조들의 산맥의 개념인 산경표를 몸소 더듬어 실증하여 민족적 정기를 되찾으려는 사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열병을 앓고 있는 산악인들이 있는데 이들 중 최은희 대원의 시 『바이러스』를 소개한다.
백두의 특사를 받은 정맥 바이러스가
밤하늘 우주의 빛을 모아 원을 그려 놓고
서해의 땅 끝 안흥진에 도착했다.
정맥군은 사명을 걸고 그의 숨결 같은 능선에
귀 기울일지어다.
가시나무에 상처를 묻히고 핏빛 열정으로
허공을 박차 걸어야할지어다.
발자국 소리 솔잎 사이로
신바람 타고 휘달릴지어다.
그 바람이 온 누리에 감염되는 날
시간은 과거로 거슬러가 있고
우리는 배달겨레의 흙냄새를 맡고 있으리
한반도를 크게 남북으로 구분하는 금북정맥을 마감하는 태안반도 일대에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산재해 예쁜 추억 만들기에 적합하다. 조선 초기 중국의 사신을 전송하기 위하여 "수중만리 무사항해"를 노래한 것이 유래가 되어 『만리장벌』이라 부르게 된 만리포 해수욕장, 천리포 수목원이 있어 산 교육장이 되기도 하는 천리포 해수욕장, 예쁜 해옥으로 유명한 파도리 해수욕장, 중국상인들이 내왕하며 질그릇 수출이 많아 분점포라 불리웠던 학암포 해수욕장, 이 밖에 아담하고 애뜻한 신두 해수욕장, 꾸지나무꼴 해수욕장, 구멍바위 해수욕장 등이 오순도순 숨어 있다. 자! 이제 우리는 안흥항에서 나오면서 연포(戀浦)해수욕장에서 연인을 그리워하는 가슴을 달래며 안면도로 향하고자 한다.
● 산경표에 대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의 개념은 1903년 고토분지로 라는 일본인 지리학자가 우리 나라의 자원수탈을 위하여 14개월 동안 지질 및 광상조사를 한 뒤 조선의 산악론 및 지질구조도를 발표한 이후 정착되어 현재까지 별 의심없이 이어져 왔으며 그 산맥에 의거하여 여러 상관론이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태백산맥을 축으로 갈비뼈 모양의 쭉쭉 뻗어간 아이러니한 모습의 산맥의 개념은 땅속의 지질구조에 입각한 가상의 선에 불과하며 이 선에 기준을 두고 우리 나라의 지형, 문화, 풍습, 역사를 어거지로 끼워 맞추어온 우리는 이제 부끄러움을 고백해야할 시기가 온 것 같다.
그러면 이 이전에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산맥의 개념은 없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 땅의 산줄기에 대해서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산경표』가 그것이다. 1769년 신경준은 영조의 명을 받아 『여지편람』을 편찬하였는데 여기에 그 동안 축적되어온 산줄기에 대한 지리 정보들을 정리한 산경표가 실려 있었다. 이후 일제가 우리의 산맥의 개념을 왜곡시키자 우리의 사라져 가는 고유문화를 보전,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 광문회에서 다시금 산경표를 정리하였다. 그러나 결국일제에 의해 호랑이의 개념이었던 우리의 국토를 토끼의 개념으로 격하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태백산맥이 도입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태백산맥 개념의 산맥이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가 1985년 이우형이 산경표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참고하여 대동여지도를 복간함으로서 문제를 제기하여 점차 확산 되어가고 있다
산경표의 중심에는 백두대간이 있다. 민족의 자존심인 백두산에서 휘달려 지리산으로 뻗어 내린 백두대간을 일제가 토막을 낸 것이다. 또한 산맥이라면 연속되는 산줄기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한 산맥은 불연속적이고 하천에 의해 잘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산경표에 의한 산맥은 연속적이다. 그리고 강이 산맥을 가로지르지 않는다. 대동여지도의 발문에 나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산이 곧 분수령이다)이 곧 우리 선조들의 지형 이해의 기본적인 개념인 것이다. 산은 융기, 화산 등의 내적영력에 의해 스스로 높아진 것이 있고 하천의 침식에 의해 상대적으로 높아진 산이 있다. 즉 물을 스스로 가르는 산과 물에 의해 갈라진 산으로 나눌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산이 분수령 이라는 전제를 해치지 않는다. 따라서 산맥은 듬성 듬성 놓여 있는 눈에 띄는 산의 연결이 아니라 물을 가르는 분수령의 연속적인 흐름이어야 한다.
산줄기는 높낮이가 변화무쌍하므로 찾아 잇기가 쉽지 않으나 물줄기는 그 자체가 눈에 그대로 드러나므로 산줄기를 그리려면 물줄기를 먼저 그리고 그 물줄기의 분수령이 산줄기인 것이다. 두 줄기 산 사이에는 반드시 물줄기가 있고 물줄기 양옆에는 반드시 두 줄기 산이 있는 법이다. 이러한 원리가 대동여지도와 산경표 작성의 원리요 우리 선조들의 지형 이해의 근간인 것이다. 이에 비해 산맥이 드믄드믄 눈에 뜨이는 산의 연결이라는 기존의 개념은 얼마나 대중없는 것인가?
문화는 수영을 잘하고 등산을 어려워한다. 같은 유역은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고 큰 산줄기는 문화를 가른다. 큰 산줄기는 교통의 장애, 기후의 구분, 언어의 차단막, 풍속, 음악, 건축, 음식의 개성이 구분되는 경계선의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대충 그은 가상선에 의거하여 각 지역성을 파악하는 것은 큰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제의 산맥의 개념인 태백산맥의 개념보다 우리 고유의 백두대간의 개념이 월등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산경표는 백두산을 기점으로 지리산까지 국토를 세로 질러 백두대간을 그리고 각 분기점을 잡아 1개의 정간과 13개의 정맥을 그린 후 정맥 사이에 강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다.
9. 유리구슬 목걸이 같은 해수욕장들의 축제마당 - 안면도
안면도는 본디 육지와 연결된 길쭉한 반도였으나 해상 교통로의 안전과 단축을 위하여 조선 인조16년(1638년)에 운하를 팜으로서 섬으로 떨어져 나갔다가 1970년대 말 다시 교량을 건설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안면도는 폭이 평균 5㎞, 직선 길이는 남북 약 24㎞인데 비하여 해안선의 길이는 직선길이의 약 10배인 약 240㎞에 달하는 대단히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다. 해안선이 복잡한 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안고 있어서 가히 해수욕장들의 축제가 열린 듯 어깨를 마주하고 모래사장이 이어지며 얕은 구릉성 산지가 이어져 밭농사와 축산업도 행해지고 있다.
자! 태안에서 603번 도로를 따라 안면도로 들어가 보자. 소나무숲 야영장이 일품인 몽산포 해수욕장, 드넓은 백사장에서 경주용자동차가 내달리는 청포대해수욕장을 지나 연육교를 건넌다. 연육교를 지나 약4㎞ 쯤 가다보면 흰 모래밭이 유난히 인상적인 백사장 해수욕장이 펼쳐지는데 특히 이곳은 연면도의 특산인 대하의 집산지로 유명하다. 연이어 삼봉, 기지포, 안면, 두여, 밧개, 방포, 꽃지 해수욕장 등 유리구슬 목걸이처럼 해수욕장이 이어진다. 실제로 이 해수욕장의 모래들은 유리를 만드는 원료인 규사로서, 그 유명한 안면도의 규사는 바로 모래사장 그 자체인 것이다. 바닷가의 모래언덕은 규사로 자원의 가치가 있으나 한편 이의 채취로 인하여 빼어난 관광자원이 훼손되는 측면도 있다.
방포해수욕장 옆에는 젓개포구가 자리하고 있는데 각종 생선회를 싸게 즐길 수 있으며 바다낚시 배의 기항지이다. 인근에는 천연기념물 제 138호인 모감주나무 군락을 즐길 수 있는데 원산지는 중국으로 까만 구슬 모양의 열매가 열리며 이는 염주를 만드는데 쓰인다고 한다. 꽃지해수욕장 앞에는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가 그림처럼 떠 있는데 이 바위를 배경으로 하는 낙조는 가히 황홀경으로서 항시 사진작가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노출을 보정하고 순간포착을 노력하는 곳이다. 이 할미바위 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1,150여년 전 신라 흥덕왕때 청해진에 거점을 두고 해상활동을 펴나가던 장보고는 이 안면도(견승포)에도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승언이라는 사람을 관할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승언은 아름다운 이 견승포에 부임된 것을 기뻐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데 승언에게는 미도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극진히 사랑하여 언제나 함께 생활하였다. 승언 부부는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승언은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이별하여 늠름하게 출정하였다. 그러나 승언은 세월이 흘러도 소식이 없었다. 미도는 안타까운 마음에 날마다 바위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보며 하루해를 보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위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미도는 마침내 할머니가 되어 바위에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할미바위라 이름 짖고 이 일대를 승언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황홀한 낙조와 애뜻한 사연이 녹아있는 바다를 호젓이 바라보려니 어느덧 별 빛이 모래 속으로 쏟아져 스민다. 우리는 이 곳에서 심호흡을 하며 하루밤 유하고자 한다.
10. 철새들의 군무 장엄한 - 천수만
상쾌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근의 승언리 소나무 군락지를 산책하며 바다 내음과 솔 내음을 즐겨 본다. 안면도는 한때 고려시대에는 섬 전체가 방목장이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인공적으로 소나무를 심어 왕실의 관을 짜는 데에만 쓸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묻에서 떨어져 고립되었던 것이 소나무들이 보전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자! 이제 온몸을 우리 나라 순수 혈통을 지니고 있는 소나무의 향으로 흠뻑 적시우고 천수만으로 달려가자. 천수만을 메꾸어 간척지를 조성할 당시만 해도 일반 사람들은 갯벌의 효용과 생태계의 균형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천수만의 갯벌은 가히 세계적인 보물창고였고 호수와도 같이 평온하고 아늑한 만은 물고기들의 산란장으로서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천수만 간척지의 최대 효용은 말할 것도 없이 농경지의 확장이다. 1984년 거대한 폐선을 이용한 물막이 공사가 완공되고 난 후 이일대의 해안 매립 면적은 15,593㏊였고 농경지 개발 면적은 8,006㏊에 이르러 당시 서산군은 전국 최대의 논면적을 가지게 되었다. 농토에서 염분이 많이 제거된 요즈음 이 간척지에서 나오는 쌀이 우리 나라 식량 문제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최근 물막이 공사로 만들어진 간월호(A지구 방조제)와 부남호(B지구 방조제)의 염분농도가 줄고 담수화 됨으로서 피라미, 물새우, 미꾸라지 등 많은 물고기와 수서생물이 풍부해져 국내 최대의 철새도래지로 자리매김 되기도 하였다. 시베리아의 추운 겨울을 피하여 남하한 철새들이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일제히 비상하여 환상적인 군무를 연출해 내는 일종의 숨막히는 감동이다. 탐조 여행의 백미는 수천, 수만 마리의 가창오리들이 하늘을 뒤덮는 모습이며 황새, 백조, 고니 등 희귀 조류를 감상하는 기회를 누릴 수도 있다.
안면도에서 천수만을 가로지른 방조제를 타고 내달리다 보면 중간에 간월도가 있는데 A지구 방조제와 B지구 방조제의 중간 연결 고리로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잠시 머무르며 키조개나 붕장어를 구워먹고 특히 이곳의 특산품인 어리굴젓 한 통을 기념품으로 살만하다. 이 어리굴젓은 특히 다른 지방의 굴보다 색깔이 거무스름하고 알이 작으며 물날개가 많이 돋아 있어 양념이 골고루 묻어 발효가 잘되며 바위에서 자라난 석굴의 상태가 아니라 바위에서 떨어진 토굴의 상태에서 체취 된 것이다. 이 간월도에는 간월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무학대사가 이 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어느 날 달을 보고 홀연히 깨우쳐 암자의 이름이 간월암이 되었다. 간월암은 바다로 둘러 싸여 밀물 때는 섬으로 분리되며 썰물 때는 뭍으로 이어져 매우 이색적인 풍광을 대할 수 있다. 낙조를 배경으로 떠 있는 간월암은 사진작가들의 인기 피사체일 만큼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보너스로 간월암보다도 더욱 환상적인 경치를 즐기려면 방조제를 지나 남쪽으로 진행하여 대하로 유명한 남당리 라는 포구에 가서 죽도(竹島)로 가는 배를 섭외하여 10분만 가면 죽도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이 외진 섬은 정기항로가 없는 외지지 않았으면서도 외진 곳으로 깜짝 놀랄만한 태초의 풍광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화산으로 형성된 7개의 섬이 머리에는 작은 대나무를 이고 어깨동무를 하고있는 이 섬들은 우리 나라 어디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감추고 싶은 풍경이 펼쳐진다.
자! 이제 홍성, 예산을 지나 아산의 외암리 민속마을을 둘러보고 포근한 가정으로 가 안기고자 한다. 외암리 마을은 예로부터 강씨와 육씨 등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조선 중엽 명종(1534∼1567)때 장사랑 벼슬을 지낸 이정(李珽) 일가가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서 예안 이씨의 세거지로 되면서 점차 반촌의 모습이 갖추어 졌다. 마을 이름 또한 말을 거두어 먹이는 곳이라 하여 '오양골'로 불리웠으나 숙종 때 경연관을 지낸 이정의 6대손인 '외암'이간(李柬)선생의 호를 따서 '외암마을'로 바뀌었다. 설화산에 등을 기대고 마을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세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안쪽의 골목길을 따라 마을을 한바퀴 돌다보면 마치 옛 성벽 사이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돌담과 함께 마을 구석구석 냇물이 흐르는 것도 독특하다. 마을의 배산인 설화산이 품고 있는 불기를 누르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전체가구 60여호 남짓되는 이곳은 박제되어 있는 형태가 아니라 실제로 주로 예안 이씨들이 아직도 생활하는 마을로서 특별히 주민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양반집 중에는 영암댁, 송화댁, 참판댁으로 불리우는 기와집 10여채 가운데 중요 민속자료 제195호로 지정되어 있는 참판댁이 대표될 만 하다. '참판댁'은 조선말 참판벼슬을 지낸 퇴호 이정열이 고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집으로 충청도 지방의 양반집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참판 댁에서는 연뿌리로 만든 연엽주를 맛볼 수 있기도 한데 고종의 진상품이었다고도 한다.
이제 우리는 내포지방의 2박3일의 여행을 마치고 그리운 집으로 향하고자 한다.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큰 교통로에서 비켜있어 나름대로의 개성을 유지하고 있는 내포지방은 포근한 여행지로서 도시에서 찌든 우리들의 피로와 향수를 달랠 수 있어 고마운 답사처 이다. 이제 서해안 고속도로가 완공되어 도시화의 물결이 수위를 높여 밀려올 때 자연이 살아있어 신선한 호흡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진행을 기원하며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꾸벅 꾸벅 자연에 순응한다 .
● 반짝이는 모래알의 비밀
파도에 일렁이고 발가락 간지르는 고운 모래들. 이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위가 깨져서 자갈이 되고 그것이 다시 부서져서 모래가 된다. 이러한 모래들은 주로 하천을 통하여 바다로 운반되어 퇴적된다. 우리 나라의 산은 화강암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 돌은 석영, 장석, 운모가 많이 들어 있다. 그래서 화강암이 부서져서 각각 석영, 장석, 운모의 모래알갱이로 되는 것이다. 여기에 동식물의 잔해, 조개껍질 등이 섞여서 낭만의 모래사장을 이루는 것이다.
돋보기로 가만히 모래를 들여다보자. 우선은 투명하고 작은 각이 여러 개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둥굴둥굴한 알갱이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석영이다. 이 석영이 유리의 원료가 되는 것이다. 석영은 유리와 성분은 같지만 내부구조가 다르다. 유리는 깨진 면이 조개껍질 모양의 무늬가 나타나는데 석영은 육각기둥 모양의 결정을 하고 있어 그런 무늬가 없다. 석영은 매우 단단하고 잘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 모진 파도에도 견디어 끝까지 남는 끈질긴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파도가 심한 해안일수록 약한 성분들은 모두 달아 없어지고 상대적으로 석영이 많이 남아 있게 된다.
운모는 육각형의 아주 얇은 필림이 여러장 겹쳐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파도에 이리 저리 쓸려 다니다 보면 한 꺼풀씩 쪼개져 나간다. 이 운모는 황금 빛 광택이 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이 사금이 아닐까 하는 기대와 흥분을 갖기도 한다. 이 운모는 가벼워서 물에 잘 뜬다. 특히 밤중에 운모들이 달빛에 반짝이며 파도와 함께 일렁이는 모습은 자연이 연출하는 또 하나의 신비로운 장관을 이룬다. 이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가 일어서면 황금색의 운모가 온몸에 뒤덮여 마치 금부처가 되는 기분을 즐길 수 있다. 우리는 모래로 찜질도 하고 모래성을 쌓기도 한다. 이 모래 안에 이러한 비밀이 있는 것을 연인에게 쌀짝 귀뜸해 주자.
[출처] 아산군 인주면의 비밀|작성자 달빛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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