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러가는 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
"......"
더 이상,
아무 말이 없는 그 애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돼버린 나.
"..널, 가지라고?"
한참만에,
가까스로 그 애를 보며 묻는다.
"응??너 콧물 나"
묻는 말엔 아랑곳 않고
입고있던 윗도리를 잡아당겨
내 코 언저리를 쓱쓱 문질러주는 녀석.
"됐어. 하지마"
"우리 강원도에서 두 밤 잤어.
이제 죽는 날까지 다섯밤 남았어."
"콧구멍 아퍼. 하지마."
"남은 다섯밤 동안 우리 열심히 사랑하자."
"......."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 대화 탓에
가슴이 먹먹해온다.
우리라니.
너와 내가, 우리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가까운 사이야?
너랑 나랑,
그래. 죽으러 오기 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치자.
3월이긴 해도 일단은 같은 반이니까.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갑자기 사랑을 해?"
빨갛게 불어터진 눈으로,
콧물이 줄줄 흐르는 입술로.
이사랑을 향해 그렇게 묻는다.
"넌, 아무하고나 사랑이 돼.?"
"........"
내 질문에,
코에 박박 와 닿던 이사랑의 손가락이 멈춘다.
..너와 내가 마주본다.
"..니 이름이 아무하고나야?"
"....."
"니 이름이 아무하고나면
난 아무하고나 사랑이 돼."
뭐야. 그런 말 같지 않은 말이 어딨어.
"다섯밤동안 하고 싶은 거 다해보자고 했잖아.
사랑은 너랑 할거야,이별"
이별.
그 애가 불러주는 내 이름은
내 것 같지가 않아.
그래서 가슴이 쿵 떨어진다. 정말 쿵, 하고.
말라가는 눈가를 세차게 문지르며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나.
그 애에게 붙들린 왼손이 보인다.
이사랑의 눈도 내 왼손에 향해있다.
이윽고 입을 여는 그 애.
"하나부터 셋까지 셀께.
그 안에 내 손 안 뿌리치면
나랑 사랑해야 돼. 너 싫어도 나 가져야돼."
..말도 안 돼.
그 애의 고집스런 표정에 질려버려서,
으.
붙잡힌 손목에 힘을 준다.
안 빠져.
이사랑이 되게 세게 잡고있어서.
"나 셋까지 셀께."
"...으"
"센다..셋."
셋.?
하나 둘 다 건너뛰고, 그냥 셋.?
"..곧장 셋부터 말하는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어. 너 손 못 뺐다."
"그런게,"
"몰라몰라 아아아. 나 여자친구 생겼다-"
듣기 싫다는 듯
양손으로 귀를 누른 채 앞서 가버리는 이사랑.
뭐야.
..멍청히 서서 그 애가 놓아준 손목을 내려다본다.
빨갛게, 손가락 자국이 선명한 손목.
..이.
"이사랑."
".......응?"
순간적인 내 부름에
씩 웃으며 걸음을 멈추는 그 애.
"이사랑"
"응"
"이사랑."
"...응."
남은 다섯밤 동안
나 너한테 사랑 받아도 되는 거야?
이런 거지같은 나에게
니 사랑을 다 줘버리면.
남은 다섯 밤이 너한테 너무 엿같지 않겠어?
"........"
"......"
너와 나 사이의 침묵.
불러놓고도 아무 말이 없자,
이내 나를 두고 혼자 걷기 시작하는 이사랑.
그 애의 걸어가는 등을 본다.
"......"
..어쩐지, 웃음이 나.
찔끔찔끔, 이사랑의 등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 걸음은 조금씩 빨라진다.
앞서 걷는 그 애가
등 뒤로 내밀어준 오른 손.
그 오른손을 향해 달린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 손이 그 오른손에 닿고나면,
마주보는 너와 나.
아니.
마주보는 우리.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얼굴로
그 애를 쳐다보면,
"이래도 되는 거야."
라고, 그 애는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또 다시 되뇌인다.
그래. 이래도 되는 거야.
이래도 되는 거야.
나도 사랑 받을 수 있는 거야. 하고.
어쩐지.
웃음이 자꾸 나.
그래서 말라붙은 눈물이 다시 솟는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을 수 있게 돼서.
웃음이 자꾸 나서.
..그래서 눈물이 다시 솟는다.
......
/ PM12:00
민정이네 민박집.
"허, 지금 그러구 마실을 간다고.?
그 옷으로?그 차림으로?..허허허허허."
"......아저씨. 우리, 이상해요?"
"이상하냐고.고작 이상하다는 말로
지금 내 눈앞의 자네들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자네들은, 한양에서 광대놀음하던 그지떼..웁."
"됐어. 내 여자친구를 모욕하다니..
아아아!!!!이쁘다!!!!!!"
민박집 아저씨의
입을 꽉 틀어막으며
날 향해 목청을 돋우는 이사랑.
입이 틀어막힌 후에도,
나와 이사랑의 우스꽝스러운 차림을
걱정스럽게 번갈아 훑어 내리는 아저씨.
역시, 이건 좀 심한가봐.
"여자친구야, 가자"
캉캉치마.
그래, 캉캉치마를 펄럭이며
내게 손을 내밀어주는 이사랑.
정말 작정하고 망가지는구나.
짝짝이 부츠.
그리고 펄럭대는 커플용 캉캉치마.
내 치마는 초록색.
그 애 치마는 빨강색.
"저기. 우리 꼭 신호등 같애."
"응. 기분 좋다."
아니. 기분 좋으라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
"....나도 꼭 이렇게 커플 옷 입어야 돼.?"
어렵게 꺼내놓은 그 말.
단호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는 이사랑.
"이제 우린 하나야. 옷도 똑같이 입어야 돼"
남은 다섯밤 동안,
이런 옷을 너와 맞춰 입으라고.?
난 신들린 듯 바람에 펄럭대는 치마 자락을 꾹 쥐곤,
벙찐 얼굴로 이사랑을 본다.
"아. 치마 되에게 불편하다.
바람이 숭숭 들어와.
여자애들은 맨날 이거 입으려면 싫겠다"
어설픈 걸음걸이로
부츠를 따각거리며 걷는 이사랑.
젖소무늬 바지다음은 캉캉치마라니.
다섯밤동안,
얼마나 더 예측불허의 의상을 선보일지.
휴. 숨을 내쉬며
그 애를 본다.
그리고 이내 그 애의 손을 잡고
함께 걷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동안,
이사랑이 언젠가 했던 말처럼
도둑질도 해보고
초인종 누르고 달아나기도 해보고
사람도 죽여보고
사랑도 해보고.
다 하러 떠난다. 지금 우리.
그러니까, 두 손 마주잡은 우리 두 사람.
.....
..차가운 바람이랑 마구 뒤섞여서
공기 중에 먼지처럼 흩어지는 나와 너의 목소리.
아. 여자친구야. 우리 규칙 같은 거 만들까?
응?무슨 규칙..?
우리 매일 이렇게 손잡고 다니기.
..좋아.
그리고 자기 전에 입술끼리 인사하기.
..뽀뽀 말이야?
응. 잘자라는 인사대신.
..그것도 좋아.
응. 그리고.
그리고.?
..다섯밤 뒤에도,
상대방한테 죽음을 강요하지 않기.
죽으라는 말. 죽어버리라는 말. 하면 안 돼.
..그건, 왜.?
사랑하는 사람한테 죽어버리라는 말 들으면
정말 죽고싶어질 거 같거든.
....그렇구나.
매일 손놓고 다녀도 좋아.
뽀뽀 같은 거 사실은 필요 없어.
하지만 마지막 약속은 꼭 지키기야.
죽어버리라는 말은 절대 하면 안돼.
그럼 우리 사랑얘기가 너무 슬퍼지잖아.
마지막회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해.
둘이 함께 손 꽉 잡고 말없이 죽자.
악에 받쳐서, 서로한테 넌 어서 죽어버리라고 소리치지 말자.
..좋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정말?....장담해.?
응. 장담해. 우리 이야기. 마지막회는 해피엔딩으로 하자.
좋아. 이별.
..응.좋아.이사랑.
..그래. 좋아.
..좋아.
.......
........
그 날,
우리 두 사람이 걷던 그 골목길을 잊지 못한다.
그 날,
우리 두 사람이 했던 약속을,
난 잊지 못해.
서로에게 죽음을 강요하지 않기.
우리의 마지막회가 해피엔딩이 될 수 있도록,
악에 받쳐서 넌 어서 죽어버리라고 소리치지 않기.
절대, 그 말만은 하지 않기.
절대로.
........
......
.\.
.......
/ 병원. 707호.
'이사랑. 난 너,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아니야.
'이사랑. 안 죽을 거야.?
난 너. 너같은 거. 그냥 죽길 바래.'
..아니야. 사랑아.
아니야.
"아니야....."
번쩍.
눈을 떴다.
몇 번이나 아니야, 아니야.
잠꼬대를 주절거리다, 간신히 깨어난다.
차가운 병실 안.
이사랑의 침대 위로
희미한 스탠드 하나만 달랑 켜져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꿈이라서.
그 날의 꿈을 꿨다.
조용히 날 응시하던 이사랑의 젖은 눈에 대고
죽어버리라며 소리치던 그 날.
"...아니야. 아냐..다 거짓말이었어"
나 자신에게 혼잣말을 중얼이며
잠든 이사랑의 손을 가만 쥐어본다.
..차다.
"...잘자. 사랑아."
가만히 올려다본 시계는
12 : 44.
이사랑의 고른 숨소리를
두세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책가방을 매고 병실을 나선다.
잘자 이사랑.
나 내일 또 올게.
내일은 삼분카레 데워 먹으면 안 돼.
내가 도시락 싸 올게.
타악-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
.....
/ 그날 새벽. 두시 오십분.
"야 이 기집애야.이 정신나간 기집애야.
너 허구헌날 이렇게 늦게 다니는 이유가 뭐야.
나 엿 먹일려고 작정을 했어 얘가."
벌써 한시간 째.
같은말을 반복하는 이모와.
그 옆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이모부.
"으이구.갈데 없는 거 데려다
옷 해 입혀,밥 해 먹혀.학교 보내줘.
그랬으면 고마운줄을 알고 속이나 썩이질 말아야지.
너 내일부터 아홉시 정각에 들어와.!!어!"
"..응."
"이 기집애.응이 뭐야.응이!!
어른한테.!!!!!네라고 해야지"
"..응."
"...으이그.이것아. 저녁은.!!먹었냐?"
"...모르겠어. 먹은 거 같애."
"..쯔쯔. 얼른 들어가 자빠져 자 이년아"
이모의 그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얼른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온갖 잡동사니가 헤쳐모인 방안에,
쪼그린채 드러눕는다.
한참을 뒤척이다,
눈을 감아버렸다.
"..쟤 언제 내보낼 거야.?"
이모부의 한숨 섞인 목소리.
들려온다.
난, 눈을 감고 엄마 생각을 한다.
"..그래두 쟬 어떻게 내보내.
아직 스무살도 안 된 애를..데리고 있어야지."
"..학교는. 학교 계속 보낼 거야.
데리고 다니면서 장사라도 시키든가."
"길거리에서 쟤 데리고 속옷을 팔어, 내가?
쟤 그런 거 못해. 죽은 지 엄마 닮아서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하참"
......
....
이모랑 이모부 목소리.
"이사랑...보고싶다."
이사랑의 이름을 중얼이며
그 두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끙끙 앓는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하얀 먼지를 뒤집어 쓴
커다란 짐가방.
일년전 강원도로 죽으러 가던 때.
그때 썼던 가방.
엄마 죽구,
이모 집 들어오던 날.
이 방 구석에 쳐박아버린 가방.
부스스 일어나 다시 가방을 집어든다.
그리고 그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도시락통이랑 교복이랑
옷가지 몇 개를 챙겨 넣어둔다.
이모부 목소리가 들려올때마다
꾹 깨문 입술사이로,
이사랑의 이름을 작게 뱉어보면서.
......
........
/ 다음날.
"그게..그게 뭐냐?"
원광고등학교. 교무실.
어이가 없는 듯 나를 바라보는 담임.
정확히 말하자면 담임의 시선이
내 손에 쥐어진 거대한 짐가방에 머물러있다.
"가출했냐?"
"......이거. 자퇴서에요."
"..야 임마. 선생님이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 못해.? 왜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새벽같이 학교엘 왔는지.
..너 정말 어디 죽으러 가냐?"
"...이거, 자퇴서에요."
자퇴서라구요.
담임 앞으로
대충대충 작성한 자퇴서를 들이댄다.
이 학교에서 달아나지 않고,
자꾸자꾸 괴롭힘 당하고
자꾸만 괴로워져서.
그걸로 이사랑에 대한 내 죄값을
조금이나마 치루려고 했어요.
근데 지금은 힘들 거 같아요.
그냥 병원 간이 의자에 앉아서,
이사랑 다 나을때까지 지켜보다가.
그러다가 나, 그때 가서
또 다른 방법으로 죄값 치를려구요.
학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난 교과서 살 돈 두 없어요.
"..저. 그럼 가보겠습니다."
얼떨떨하게 자퇴서를 받아든 담임 앞에,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곤,
그대로 뒤돌아 선다.
걷는다.
계속 걷는다.
..중앙현관.
부지런히 등교한 애들 몇과 마주친다.
실내화를 탕탕 소리내며 갈아신고
나를 지나치는 그 애들.
다신 볼일 없겠지만, 잘 있어.
잠시 멈칫했던 걸음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학교 욕심 내지 말고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고개를 휘저으며 더욱 빠르게 걷는다.
그리고,
그때였다.
바닥으로 꺼져 들어갈 듯 무겁던 가방이
한순간 가벼워진게.
우뚝 서서,
뒤를 돌아본다.
"........."
저 애.
..빨아 입지 않은 걸까.
아님, 아침댓바람부터 누군가와 싸우고 등교한 걸까.
흙투성이가 된 교복차림.
더러운 그 교복차림으로,
그 애가, 김채원이.
내 커다란 가방을 붙잡은 채 놓지 않는다.
"......"
"...."
rlawkrrk-_-@hanmail.net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Reu en Reua
https://cafe.daum.net/ReuenReua
최신글 보기
|
인기글 보기
|
이미지 보기
|
동영상 보기
검색
카페정보
Reu en Reua
브론즈 (공개)
카페지기
부재중
회원수
6
방문수
0
카페앱수
0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퍼온소설♥.
스크랩
.\.죽으러가는 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8
이뿌니유나a
추천 0
조회 2
06.10.22 16:59
댓글
1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출처:
아름다운 소설♡
원문보기
글쓴이:
왕기대
댓글
1
추천해요
0
스크랩
0
댓글
이뿌니유나a
작성자
06.10.22 17:39
첫댓글
퍼온소설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
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
율
환
자
환
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첫댓글 퍼온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