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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숨결 8
세계일화와 백초시불모 사이
도비산 부석사(2)
백초시불모에서 모자가 작게 쓰여진 모양이 더 신경을 집중시키게 만든다.
사자문(獅子門)이란 사자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부석사 앞이 동물원 입구일 리는 없었다.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왕권(王權)의 상징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 어느 왕조(王朝)의 궁궐 앞에 서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석사의 사자는 구도(求道)의 길을 가는 선지식을 상징한다.
사자는 용맹스럽다. 목숨을 돌보지 않을 만큼 치열하게 정진 수행하는 것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고 한다. 사자는 한 번에 대개 2-3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많을 때라도 6마리 이상은 낳지 않는다. 작게 낳고도, 애지중지하며 다 기르지도 않는다. 어미 뱃속에서 나와 겨우 눈을 뜰 정도가 되면, 벼랑으로 데리고 가서 떨어트린 다음, 거기서 살아나 기어 올라오는 놈만 기른다. 될성부르지 않으면 아예 도태시켜 버리는 사자의 새끼사육법이 비정한 것 같아도, 거기에는 자식을 백수의 왕으로 기르고자 하는 부모의 의지가 담겨 있다.
불가(佛家)에서 스승이 제자를 받아 드릴 때, 찾아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될성부를 나무를 골라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인재로 키우고 싶은 것이 스승의 마음이다. 그래서 스승은 사자처럼 제자를 훈련시킨다. 잔인할 만큼 냉정하고, 목숨을 돌보지 않는 피나는 수행을 강요하며, 품안에서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고, 가차 없는 할(喝)과 방(榜)을 휘두른다. 치열한 사투를 벌어야 하는 전장(戰場)속에서,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고, 스스로 서야 한다. 깨달음의 길은 적자생존의 서바이벌 게임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고행길이다.
경허스님이 도비산 자락의 부석사라는 사자우리에 머물고 있을 때, 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지만,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속에서, 사자로 살아남은 수좌는 실상 그리 많지 않다. 인중지룡(人中之龍)으로는 단연 만공당 월면선사를 꼽는다. 천장사를 떠났던 월면스님은 온양의 봉곡사에 머물며 일차 견성을 한 후, 마곡사로 옮겨 보임할 때, 만행 중에 들린 스승 경허으로부터. “만법귀일 일귀하처로는 더 이상 나아가기 힘들 터인즉 이제부터는 조주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라! 그리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지으라.”는 말씀을 듣는다. 그런 후 스승은 올 때처럼 또 홀연히 떠나갔다.
월면은 그로부터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데, 좀처럼 진전을 이루지 못하자, 날이 갈수록 경허선사를 경모(傾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무술년(1898) 7월 수소문 끝에 선사가 서산의 도비산 부석사에 계신 것을 알고 찾아 감으로써, 경허와 만공의 부석사시대를 연 것이었다. 월면은 은사에게 날마다 법을 물어, 현현(玄玄)한 묘리를 탁마(琢磨)하여, 마침내 대장부 일대사를 해결한 것이었다. 천장사 시절은 동자승 월면이 맹수같이 사나운 은사 경허를 수족처럼 시봉하며 납의(衲衣)에 때를 묻혔던 시기이고, 부석사는 용맹스러운 사자로 성장한 만공당 월면선사께서 은사를 도와, 함께 인재들을 조련하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산 부석사는 소가 누워있는 모양을 본 따서 전각들을 일렬로 배치한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좌우로 길고, 앞뒤로는 폭이 좁으며, 약간 안으로 굽은 형상이다. 주차장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안양루가 나오며, 그 맞은편에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 옆으로 비껴 있는 소뿔모양의 뾰족한 바위에 부석사라 음각(陰刻)이 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극락전과 심검당, 연못, 정진선원 등등이 길게 퍼져있다. 세로로는 극락전 옆의 부도군을 지나면 얼마지 않아서 갈레 길을 만나게 되는데, 하나는 산신각으로 통하고, 다른 한 길은 만공스님의 수도처였던 만공굴을 향해 뻗쳐 있다.
부석사 극락전에는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전각의 정면과 측면은 모두 3칸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 목조건물이다. 1995년에 극락전을 해체한 다음 복원하였는데, 이때 일제강점기에 수리를 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바 있다. 부석사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은 원래 용봉사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서, 복장(腹藏)에 숙종 15년(1689년) 왕자 균이 태어날 때 서원을 세워 제작한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용봉사는 1905년 풍양 조 씨들이 묘역을 조성할 때 폐사당했던 절이다. 그 후 방치돼 있던 부처님을 부석사로 옮겨 극락전에 봉안하여 현재에 이른다. 아미타부처님은 갸름한 얼굴에 반개(半開)한 눈, 이마에는 백호, 삼각형의 높은 육계는 소라형으로 중심에 계주를 장식하였다. 통견(通肩)의 옷주름은 형식적으로 늘어져 있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둔중한 느낌을 준다. 뒤에는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이 걸려 있다.
극락전 옆으로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을 상징하여 나란히 배치한 심검당과 무량수각이 붙어 있다. 신검당은 경허선사께서 사자문으로 들어온 학인들을 인중용(人中龍)으로 길러내던 선방이다. 그곳에 걸려있는 목룡장(牧龍莊)과 심검당(尋劒堂)이라 되어있는 두 개의 편액은 모두 경허선사께서 직접 쓰신 것들이고, 부석사(浮石寺)라는 목조 현판의 낙관 옆에는 만공선사께서 70세에 썼다는 글귀가 서각(書刻)되어 있었다. 목룡장이란 용을 기르는 곳이라는 말이고, 심검당은 지혜의 칼을 가는 곳이라는 의미다. 사자니 목룡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경허선사께서 부석사에 머무실 때 보임보다는 후학을 양성하는데, 더 많은 뜻을 두었었다는 것을 엿보게 하는 당호명이다.
무령수각 안에는 스님도, 종무를 보는 직원도 눈에 뜨이지 않는데, 다구(茶具)가 갖추어져 있었다. 산속이라 8월 염천(炎天)임에도 무더운 줄은 모르겠으나, 갈증은 피할 길이 없었다. 김동선 회장이 팽주가 되어, 즉석에서 다도를 하는데, 찬물로 우린 차맛이 일품이었다. 씻은 듯 갈증이 해소되자 주인 없는 가운데 객들이 공론을 붙인다. 벽에 만공선사께서 百草是佛母(백초시불모)라 쓰신 것을 서각해 놓은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귀 끝의 母(모)자가 다른 글자에 비해 다소 작게 써져서 부조화스럽게 여겨지는데, 그런 점이 볼 때 마다 母(모)자를 오히려 부각시키는 묘한 여운을 준다. 무슨 뜻인가.
백초란 백가지 풀이 아니라 모든 풀을 이르는 말이다. 불모란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지칭한다기 보다, 모(母)를 성품(性品)으로 의역할 수 있기 때문에, 불모는 곧 부처의 성품을 이르는 말이다. 즉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모든 초목들이 그대로 진리요, 법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어디 그뿐이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 했으니, 인간은 물론 우주에 존재하는 개체들 모두가 부처라는 말이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다. 여래장경에는 일체 중생은 여래장이라 하였고, 열반경에는 일제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처, 곧 여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구비하고 있고, 이러한 불성은 차별이 없는 보편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장사상이다.
불경(佛經)속의 하고 많은 법구(法句) 가운데, 만공선사께서는 어째서 이 글귀를 선택한 것일까. 실상 여래장사상은 일찍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선사들이 되풀이 해온 말이다. 그런데도 만공선사께서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이 말씀을 다시 상기시켜주기 위해 법문도 하셨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세계는 한 떨기 꽃이라는 世界一花(세계일화)와 더불어 먹물로 百草是佛母(백초시불모)라 써서, 승속의 인연 중생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시고는 했었다. 여기에는 새롭지 않다고 해서 가볍게 흘릴 수 없는, 특별한 뜻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게 무엇일까.
경허대선사는 오랜 폐불의 암흑기를 지나면서 꺼졌던 한국선불교의 불씨를 되살려 낸 중흥조(中興祖)이고, 그의 제자 만공은 선을 한국불교의 중심에 올려놓는 기반을 다진 분이다. 경허와 만공은 각별한 사제의 연으로 맺어진 관계이고, 두 선사의 깨달은 경지는 같지 않았지만, 추구하는 바는 스승의 뜻을 제자가 이은 것이기에 동일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래장사상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百草是佛母(백초시불모)는 경허의 것인 동시에 만공의 것이다. 두 스님이 백초시불모를 내걸고 목적한 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백초는 곧 민초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백초시불모는 사람이 곧 부처라는 인즉시불(人(卽是佛)과 통한다. 두 분 선사께서 모든 백성들이 다 부처를 잉태한 어미, 불성을 지닌, 깨달음의 종자(種子)라고 강조하신 싯점에 대하여 유의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두 분이 살다간 19세기 말기로부터 20세기 중엽은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세계 질서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지배되고, 사회적 정의는 강자의 총부리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조선은 빗장을 굳게 닫아걸고 쇄국을 지향한 소수의 특권 지배층들이, 구래(舊來)의 신분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혹한 폭정을 일삼다가, 일제에 의해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는 식민지로 전락한 바 있다. 부처도 될 수 있는 민초들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제국주의의 탄압으로 도탄에 빠져, 인간다운 품위를 상실한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실은 민중을 佛母(불모)로, 세계를 一花(일화)로 표현한 것과는 너무나 떨어져 있었던 셈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멀고도 멀었다.
이 무렵 일제의 탄압과 질곡에도 불구하고 조선 백성들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주역으로 힘을 결집해가고 있었다. 민중의 저항은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의 참혹한 좌절을 경험했어도 꺾이지 않고, 활빈당과 항일의병투쟁으로 이어지다가, 1919년 3.1운동이라는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분출(噴出) 되었다. 그리고 다시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투쟁,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실력양성운동 등으로 다양하게 분기(奮起)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의 저변을 확산시켜 나가고 있었다. 백초시불모의 이념은 이러한 조선민중의 역동성이 여래장사상을 통해 구현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경허와 만공의 여러 행적들은 그들이 폐쇄된 산문(山門)의 토굴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허가 만년에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모습으로 교육 사업에 종사한 것이나, 만공이 일본 총독의 조선불교탄압책을 일갈(一喝)하여 꾸짖으며 거부한 것은, 이들 두 분 선각자의 삶이 역사와 민중을 향해 열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피고름이 나는 문둥병 여인을 따뜻하게 품어준 경허의 행적은, 신음하는 식민지 백성의 고뇌를 자신의 업보로 삼은 보시행이었다. 경허와 만공의 목숨을 건 구도의 열정은 식민지 백성들을 질곡에서 구해내려는 의지와 맞닿아 있다.
경허에서 만공으로 이어진 백초시불모의 이념은 한국 민중의 반봉건 반외세의 사회적 실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우리나라식 여래장사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학의 인내천사상과 대비된다. 경허와 만공선사의 행화 도량이 있었던 예산 서산 공주 부여 일대는 동학사상의 발상지로써, 당연히 동학의 강력한 영향권아래 놓여있던 지역이다. 동학 북접조직의 주요 거점 도시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경허선사께서, 동학이념을 백안시(白眼視)했을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백초시불모는 동학에 고무된 경허와 만공이 불교의 여래장사상을 통해 한국사회발전의 중심 동력인 민초들의 실천적 역동성을 요구한 주문으로 쓰여진 법구다.
한국사회의 변혁은 다수의 서민 대중이 자기성장의 동력을 왜곡당한 채, 사회저변에서 변혁세력의 중심으로 결집되는 양상으로 이루어져 왔다. 한국사에서 민중은 권력에 의한 하강분해의 경험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자기 성장을 이루어 낸, 매우 다이나믹한 역동의 실체다. 이런 배경속에서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이 강력한 포퓰리즘의 전통 위에서 전개되어 왔으며, 백초시불모는 바로 그러한 역사적 특징과 실천을 반영하는 근대적 포풀리즘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민중이 바람에 의해 부침을 거듭하는 민초(民草) 근성을 벗고 불모(佛母)로 표현되는 깨달음의 주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오각성과 자기 해탈의 과정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대중의 자기 발전 없는 역사는 무의미한 시간의 흐름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백초시불모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의 전제가 되는, 인간의 총체적 발전을 지향하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천천히 다시한번 백초시불모를 응시해보니, 거기에는 대의적으로 세계일화를 염원하면서도, 우선은 백초시불모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던 선사들의 고뇌가 피고름처럼 배어있었다. 경허와 만공은 세계일화와 백초시불모 사이에서 아파하며 거친 숨을 몰아 쉴 수 밖에 없었던 선각자들이었다.
차를 마시며 백초시불모에 빠져있던 우리는 각자 흩어져서 도량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자유 시간을 가졌다. 서산 부석사는 가람의 위용이 그리 장대한 편은 아니다. 고찰치고는 의외로 소박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한국의 절은 전각들의 위용보다, 그 절이 놓여있는 공간과의 어울림을 살펴봄으써, 건축미와 진장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石窟庵)은 그 자체보다, 멀리 왜구가 침입해 오는 동해에 대한 조망권을 내다보며, 공간배치 시켰다는 것이 자랑이다. 서산 부석사는 가람의 위용이 영주 부석사에 미치지 못하지만, 절이 놓여있는 공간 때문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운거루에서는 물론 절 마당이나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 등 어디서나 드넓은 천수만의 수려한 풍광이 내려다보인다. 석굴암이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망루 사찰이라면, 서산 부석사는 서해에서 석굴암의 역활을 할 수 있는 위치에다 만들어진 호국사찰이었다. 동해에는 석굴암이 있고, 서해에는 부석사가 있다.
서산 부석사에서 보는 저녁노을이 일품이다. 낙조(落照)가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고즈넉하고 호젓한 절이 부석사다. 아기자기함이 웅장함만 못지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경이롭다. 극락전 앞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들이 잔뜩 걸려 있는데, 여느 절집에서 볼 수 없는 일본식 풍경이다. 일찍이 일본인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임을 느끼게 해준다. 일본인들이 서산 부석사의 관세음보살상을 자기 나라로 가져가서 대마도의 관음사에 모셔 놓았다고 한다. 산신각 양 옆으로 의상대사와 선묘낭자를 기리는 사당도 함께 있다. 중국으로부터 화엄을 전교해온 의상의 흔적을 만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조선 말엽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던 시기를 살다간 선각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찾아가서 머물고 싶은 공간이 서산 부석사다.
그늘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으니, 한여름 폭염속에서도 여유를 부리고 있는 매미소리에 섞여, 거기 어디쯤에서 사제(師弟)가 나누었을 법담(法談)이 시공의 벽을 넘어온다.,
제자 만공이 묻늗다.
“불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스승 경허가 답한다.
"네 눈 앞에 있느니라."
"눈 앞에 있다면 어찌하여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까?"
"너에게는 너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느니라."
"스님께서는 보셨습니까?"
"너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다면, 더욱 보지 못하느니라."
"저도 없고 스님도 없다면, 볼 수 있겠습니까?"
"너도 없고 나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자 누구인고?"
운거루
쇠뿔 모양의 돌에 음각한 부석사 표지석
극락전 심검당 무량수각이 와우처럼 길게 포진해 있다.
목룡장과 심검당은 경허선사의 친필이고 부석사현판은 만공선사가 70세에 쓴 것이다.
현재 부석사 정진선원의 현판은 만공의 손상좌였던 원담당 진성대종사께서 쓰신 것이다.
첫댓글 기다리던 스님의 부석사 순례기를 제일 처음으로 읽는 영광을 누렸군요.백초시불모를 백초가 부처의 어머니 쯤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백초를 민초로 바꾸니, 일제시대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억눌려 살아야했던 선조 부처님들의 아픔이 전해져 오며, 사람이 부처라는 속에 들어있는 부처님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가르침이 새삼 크게 닦아옵니다.
百草是佛母(백초시불모)라는 글귀로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의 전제가 되는, 인간의 총체적 발전을 지향하는 이념이라는 생각까지 이끌어 내신 해월스님의 해설이 참으로 대단하다 생각됩니다.사람이 곧 부처라는 인즉시불(人(卽是佛) 사상도 제게는 참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긴 글이지만 하나하나 소중하여 재차 읽고 하다보니 한참만에 읽기를 마칩니다.해월스님,큰 가르치심 정말 감사합니다.큰스님 되십시오.()
선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가 점점 더 흥미롭게 재미가 있습니다.해월스님의 이야기 속으로 따라 다니다 보니 너무 좋아서 한번은 꼭 가보리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을 자유와 평등으로 이끄는 불교의 진수를 맛보게 해 주시는군요.
그 덥던 날에 스님따라 순례했던 부석사가 그때 본대로, 느낌대로 다시 영화처럼 떠오릅니다. 스님께서 해 주셨던 말씀들을 글로 다시 뵈오니 공부가 복습된 것 같습니다. 세세히 알려주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