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맨 처음 통째로 읽은 개인 시집은……, 무엇이었지. 잠시 생각의 방향을 소년 시절로 돌려본다. 가물가물하다.
중학교 시절의 公州……, 처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살던 公州는 늦가을 버드나무에 매달린 벌레집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수저를 놓고 30분도 안되어 배가 고프던 하숙집, 중학교 2학년초의 하숙집은 언제나 적막했다. 거리에는 5원만 줘, 하고 여기저기서 손을 벌리던 소년 깡패들로, 하숙집에는 터무니없는 배고픔과 공허로 가득했다. 따라서 오직 활자만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나의 친구였다. 공주에서도 한참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던 시골 출신인 나는 이들 폭력적인 억압이 싫고 두려웠다.
내 유일한 친구인 활자들……, 하지만 활자들은 황금알만큼이나 귀했다. 과자봉지로 썼던 낡은 신문지, 군고마를 쌌던 묵은 잡지, 그것들 위로 기어가던 활자들만으로도 때론 행복했다. 더구나 이들 활자들이 시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아예 환장했다. 화장지로 쓰던 신문지 조각 따위에 실려 있던 시 나부랭이에조차도 나는 감동했다.
그 무렵 내가 좋아하고 따르던 막내 고모는 공주국립결핵요양원의 간호사였다. 이 예쁘고 맑던 백의천사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뽀얀 피부, 화사한 낯빛의 젊고 아름답던 간호사……,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서독으로 떠났다. 파독 간호사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막내 고모의 기숙사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은,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게로 왔다.
염무웅이 책임 편집한 신구문화사 판 한국문학전집, 안병욱의 수필집 {행복의 미학}, 김형석의 수필집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 그리고 노란 표지의 소월 시집 {못잊어}(소월 시집으로는 성문각에서 발간한 붉은 색 표지의 영어 대역본도 있었다), 그밖에 정태시가 편집한 {愛誦英詩 101選} 등등.
오래지 않아 이들 책은 내 손가락에 묻은 때로 해서 점차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나는 학교 앞 형설서점의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형설서점에선 1주일에 5원씩을 받고 만만한 책을 빌려주곤 했다. 이곳에서 빌려 읽던 책들 중엔 {괴도 루팡}, {십오소년 표류기}, {톰소여의 모험}, {시이튼 동물기}, {피노키오} 따위의 소년 문학 작품들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또한 학교의 도서관에 읽던 청소년 잡지 {학원}, 명랑소설 {얄개전} 등도 잊을 수 없다.
이들 책 중에도 나를 가장 오래도록 사로잡았던 것은 막내 고모가 남겨준 소월 시집 {못잊어}였다. 이 시집에 실려 있던 촉촉하고 슬픈 시들은 나를 감상의 늪 속으로 던져 넣기에 충분했다. 끊임없이 읽고 또 읽던 이 시집……,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도 몇 줄씩 시 비슷한 낙서를 하고 있었다.
내가 최초로 시 비슷한 것을 쓴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제목은 {돗자리}……, 어머니가 혼수로 해온 낡은 돗자리를 보고 저절로 우러나는 마음에서 쓴 것이었다. 이런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니!
그렇게 세월이 갔다. 대전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열 번 스무 번이나 읽은 신구문화사 판 {한국문학전집}에 진력이 나 있을 무렵이었다. 아니, 박종화가 쓴 {임진왜란}을 읽고 그 방대한 지식에 기가 질려 있을 무렵이었다. 내 손엔 함석헌이 번역한 칼릴지브란의 {예언자}, 또 다른 {소월시 전집} 등이 들려 있었다. 지금은 출판사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소월시 전집}은 내 손으로 돈을 주고 산 최초의 시집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늦가을이었던가. 나는 {소월시 전집}을 천천히 해체하기 시작했다. 소월의 시 같은 무엇을 쓰고 싶었지만 언제나 범람하는 감상을 드러내기에 급급했고, 그래서 나는 소월의 시에 내 무딘 칼을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선 나는 두툼한 노트 한 권을 샀다. 그런 다음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단어들을 품사별로 나누어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휘들을 분류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소월 시의 부사들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당시의 내게는 소월 시의 매력이 오직 현란하고도 섬세한, 아련하고 치밀한 부사의 활용에서 오는 것처럼 보였다.
김소월 이후 나를 사로잡은 것은 김광균이었다. [와사등] [외인촌] 등 그의 시들이 펼쳐내는 모던하고 선명한 이미지들이 나는 좋았다. 님의 행방을 쫓고 있는 만해의 시들도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영랑의 시들도, 미당의 시들도, 목월, 지훈의 시들도, 그리고 한하운, 김현승의 시들도 나를 깊이 빨아들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고,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안 드는 대학에 들어갔을 땐 나도 시인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 이래로 몰래몰래 썼던 시들은 벌써 몇 권의 노트를 이루고 있었다. 대학에서 만난 김현승 선생님의 영향도 컸다.
김현승 선생님께 듣던 현대시 강의는 터무니없이 나를 고무시켰다. 이내 시인이 되고도 남을 듯 싶었다. 김현승 선생님의 강의는 거대한 파도였다. 서정주에 대한 뿌리깊은 애증, 박인환에 대한 터무니없는 혐오……, [목마와 숙녀]를 강의하던 무렵의, 그리고 6·25 전쟁 중 서정주의 삶을 말하던 무렵의 김현승 선생님의 열띤 목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정지용의 시를 낭송하면서 목이 메이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선생님의 강의는 그분의 괴팍한 성미와 함께 이른바 시인 기질(?)에 대한 묘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 마디로 신비했다. 물론 이런 환상이 말 그대로 환상에, 치기에, 감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학의 도서관 구석구석에서는 무수히 많은 시집들이 처박혀 있었다. 오직 나를 기다려 거기 그렇게 처박혀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정지용의 {지용 시선}, 김기림의 {기상도}, 오장환의 {병든 서울}, 그리고 임종국 선생이 편집한 {이상전집} 등……, 이들 시집은 야금야금 빨아먹기 좋은 알사탕이었다. 해방 이후에 간행된 여러 시인들, 곧 김종삼, 박용래, 노천명, 전봉건, 김용호, 김규동, 박재삼, 이형기, 김구용 등등의 시집을 빌려와 자취방 구석에 싸놓고 읽는 일도 더없이 즐거웠다.
그럴 무렵이었다. 민음사에서 '오늘의 시인총서'가 간행되기 시작했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김춘수의 {처용}, 이성부의 {우리들의 양식}, 정현종의 {고통의 축제}, 강은교의 {풀잎}, 박용래의 {강아지풀}……,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기획된 이들 시집은 나를 끝없이 서정의 열락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물론 이들 시집은 내 보잘것없는 감성으로는 완전히 다가가기에 어렵고 힘든 면도 없지 않았다.
이들 시집 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진지하게 잡아끌던 시집……, 은 이성부의 {우리들의 양식}이었다. 이 시집은 한참 활동 중인 평론가 김종철의 해설을 앞머리에 싣고 있었다. 편집도 참신했지만 우선 녹색을 바탕으로 한 장정 자체가 새롭고 산뜻했다. 시린 지성과 뜨거운 감성이 하나로 용해되어 있는 이 시집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언제나 내 마음은 서늘하면서도 홧홧했다.
시인 이성부는 내겐 하늘같은 은사였던 김현승 선생님의 수제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분이 피붙이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어렵고 힘들게 가까워진 김현승 선생님은 간간이 이성부의 시들에 대한 파편적인 칭찬을 내비치곤 했다. 그때마다 이성부 시인은 [우리들의 양식}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흑백사진 속의 시원하고 반듯한 이마로 내게 다가왔다.
이성부의 이 시집은 그의 대표작 [벼]로 모두(冒頭)를 장식하고 있었다. 유년시절 이래 벼농사를 짓는 농촌에서 성장해온 내게 이 작품 [벼]는 그야말로 새로운 상징의 하나이고 관념의 하나였다. 언제나 남들보다 늦되고 철이 없던 나로 하여금 이 시는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의미를 거듭해서 되씹게 했다. '나와 사회', '나와 국가'의 의미에 대해 좀더 본격적인 반문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이 시는 첫 문장부터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 하여 민중적 연대감을 표현하고 있다. 아니, 남의 양식이 되어야 하는 존재의 바른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어우려져/기대고 사는 삶", 곧 공동체적 연대의 삶은 이 시를 읽던 무렵 이미 내 청춘의 중요한 의지가 되어 있었다. 아, 덧없는 공동체적 연대감이라니!
물론 이 때의 내 이런 의지가 오직 이 시에 의해서만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시집으로는 이른바 '창비시선'의 시리즈들로 간행된 신경림의 {농무},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 등, 그리고 '문지시선'의 시리즈들로 간행된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의 시집 등도 중요한 자극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 신대철의 {무인도를 위하여}는 줄곧 나를 칠갑산의 달빛 속으로 끌고 다녔다. 김지하의 {황토} 또한 공동체적 삶의 의미를 거듭 되묻게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랬다. 하지만 이와 관계없이 이성부의 시 [벼]가 보여주는 생명의 참 모습은 내게 모범이 되고도 남았다. 시인은 벼와 관련하여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표면의 내포로만 보면 이 대목은 추수 때가 되어 가을의 들판을 떠나가는 벼의 심리를 담고 있다. 시인의 마음에 비추어 보면 가을 들판을 떠나면서 벼는 무엇보다 먼저 "넓디 넓은 사랑"을 세상에 바치고 있다. 사람들의 양식이 되는 것을 시인은 여기서 "넓디 넓은 사랑"을 바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이미지는 이 시의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이 피묻은 그리움,/이 넉넉한 힘……."으로 은유되고 있다. 섬세한 병치(竝置)를 통해 벼를 가리켜 "넓디 넓은 사랑", "피묻은 그리움", "넉넉한 힘"이라고 말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때마다 곧바로 나는 나도 "넓디 넓은 사랑", "피묻은 그리움", "넉넉한 힘"이 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젊었다. 갓 스물을 넘은 나이였다. 따라서 벼처럼 사랑이 되고, 그리움이 되고, 힘이 되고 싶은 마음은 이내 나를 달뜨게 했다. 그랬다. 나는 그 어둡던 밤의 세월을 사랑으로, 그리움으로, 힘으로 살고 싶었다. 밤의 세월……, 가파르게 치달아가던 유신 독재를 이런 낡은 비유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온 세상이 캄캄하던 밤이었을 때 이성부의 시는 그렇게 내게 한 가닥 불빛이었다.
이성부는 이처럼 계속되어가던 밤의 세월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한 적도 있다.
밤이 한가지 키워주는 것은 불빛이다.
우리도 아직은 잠이 들면 안 된다.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비롯되는
싸움, 떨어진 살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아직은 똑똑히 보고 있어야 한다.
쓰러져 죽음을 토해내는 사람들의 아픈 얼굴,
승리에 굶주린 그 고운 얼굴을
아직은 남아서 똑똑히 보아야 한다.
아직은 어린 나이였고, 그래서 나는 이성부 시의 대상이 감추고 있는 추상이나 관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밤이 한가지 키워주는 것은 불빛이다."라는 이 시 [밤]의 한 구절은 그 자체로 가슴 떨리는 놀라움이었다. 한가지 불빛을 키워주는 데 기여하는 배경일 뿐인 밤……, 적어도 당시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어떻게 이 어둡고 캄캄한 밤을 저처럼 냉정하게 노래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밤이 어둡고, 싫고, 두렵고, 답답하고……, 그래서 미칠 것 같은 마음일 뿐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은 잠이 들면 안 된다.", "남아서 똑똑히 보아야 한다."고 침착하게 말하고 있었다. 시인의 이런 말로 하여 나는 얼핏 뜨거워지면서도 얼핏 차가워질 수 있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시인은 "밤이 마지막으로 키워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다시 한번 공동체적 연대감을 강조하고 있다. "끝없는 형벌 가운데서도/우리는 아직 든든하게 결합되어 있다./쉽사리 죽음으로 가면 안 된다"라고 사랑을 노래하는 그의 시들은 거듭해서 내 언어와 사유를 단단한 망치질로 담금질해갔다. 역설적으로 그에게서 밤은 "어떤 더러움도 아름답게 껴안는" 시간이었고, "어떤 패배를 다른 승리로 이어주는"([눈뜬 밤) 때이었다.
{우리들의 양식}을 간행하던 무렵 이성부의 시는 일정한 정도 추상을 끌어안고 있었다. 더러는 모더니즘의 전통적 기교와 수사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뿌연 안개 속에서도 산마루 위로 고개를 쳐드는 그의 시의 아침 태양은 밝고 화사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그의 시는 과도할 정도로 분명한 사실 세계는 거부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아직은 젊었던 내가 이들 시의 엷은 비의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시간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산화시킨다. 그렇다. 그 동안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성부의 이 시들 이외에도 수많은 시가 씌어지고, 읽혀 왔다. 나 자신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시를 쓰고, 또 발표해왔던가.
내가 밑줄을 긋고 읽으며 마음을 갈고 닦던 시들 역시 부침하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 나라의 바위는 붉고, "붉은 바위는/나를 눌러/강변에 눕혀 버"리고 있다. 30년 전처럼 크게 힘겹지는 않지만 아직도 붉은 바위에 가위눌려 나는 "눈을 떠 그대 얼굴 볼 수가 없"([적벽])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