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 인물2
김수을(金洙乙) 호- 一竹 . 1916-1986. 현경면 오류리 오류동. 김해인)
공은 유당 태호의 차남으로 태어나 완석 頑石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일찍이 사람의 도리를 깨우쳤다. 광주고보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대학을 수료하였다 (다른 자료에는 광주고보 재학 중 독서회 사건으로 퇴학당했다고 기록되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공은 학식과 덕망으로 많은 사람에게 기대를 받았으나 일신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머무르며 생활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주민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고 광복 후에는 소작농 폐지를 추진하고 스스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농지를 주민들에게 무상분배를 하는 등 앞서가는 농민 개혁운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민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익히게 하여 민주시민으로서 역량을 키워 준 선각자였다. 독립촉성무안군부지부장을 맡아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질서를 확립하였고 주민들의 자치 기구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역할을 하였으면서도 공은 일체의 공명심을 버리고 더 이상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자 곧 바로 모든 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들어와 은거하였다. 하지만 마을의 발전과 지역의 육영사업에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앞장섰다. 현경북초등, 현경중 그리고 현경고의 육성회장을 맡으면서 지역 학생들의 면학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교육기자재 확보에 노력하였다. 특히 면 단위 지역으로는 드물게 <경운장학회>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을 맡아 어려운 환경의 학생들에게는 등불이 되어주었다. 마을에서는 새마을지도자가 되어 농촌근대화의 시범마을을 조성하여 앞서가는 선진마을을 만들었다. 공은 어떠한 권력이나 금력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민주적으로 처리하여 주민들의 존경과 격려를 받았다. 또한 병들고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에게는 한없는 온정을 베풀었으며 힘 있는 자로부터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이러한 공의 행적 때문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새운 공적비에 ‘공의 일생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삶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애방(金愛芳. 1648-1711. 호-湖隱, 현경면 해운리 해운동. 김해인)
원래 해운동 마을은 창녕조씨의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조씨들의 무덤만 10여기가 잔등이란 곳에 있으며 일년에 한번씩 신안군 지도 사람들이 시제를 모시러 온다고 한다. 이 마을은 김씨들의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애방으로 나주 시랑동에서 세거하다가 가정이 어려워 이곳으로 왔다. 공은 문장이 뛰어나고 덕이 높아 주위에서 칭송을 받았는데 주변 마을의 인재를 불러다 가르치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았다.
김약휘(1623 - ?. 자-문중. 망운면 탄도리 탄도. 김해인)
공은 병자호란을 피하여 함평군 나산면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분수를 지켜 자연과 벗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 이전에도 사람이 살았다고 하나 기록은 없다.
김여서(金汝瑞. 자-지의, 선조 代. 삼향읍 남악리 신흥. 김해인)
남악리 신흥마을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여서다. 공은 영암군 서호면 화소에서 세거하였다. 아버지인 濟가 임진왜란 때 수문장으로 고하도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였으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공은 오랜 기간 동안 시신을 찾으려 동분서주 했으나 찾지 못하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시신을 영산강변 나불도에서 찾았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시신은 전혀 부패하지 않고 금방 별세한 모습이라 사람들은 전부 놀랐다고 한다. 시신은 이곳 오룡산에 안장하였는데 부친의 묘를 이곳에 쓰면서 1500년대 말에 이곳으로 와 정착한 것이다. 이후 후손은 안동 마을로 분가하게 된다.
김영배(金英培. 김해인)
모친인 밀양박씨께서 고질병인 해수병으로 오랫동안 앓고 계셨다. 공은 해수에 좋다는 눈 위의 꿩과 얼음 속의 물고기를 잡아 드리는가 하면 오동나무를 다려 기름을 짜서 드리는 등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임종이 다가오자 단지를 해서 받들었으나 끝내 눈을 감으셨다. 공은 묘 앞에 굴을 파고 밤낮으로 꿇고 앉아 자신의 불효함을 한탄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개 한 마리가 나타나 공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중에도 홀로계신 아버지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이후 주민들은 공의 효성을 생각하여 마을에 효자각을 지었다.
김영학(金永鶴. 자-화진. 호-난저. 1831-?. 청계면 월선리 중화. 김해인)
공은 충신 김세상의 9세손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언제나 집안을 먼저 생각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송균을 다려 먹기를 원하니 한 겨울이어서 아버지의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래도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할 수 없어 산에 올라가 소나무 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공의 기도가 통했던지 소나무에서 송진이 나와 채취할 수 있었다. 공은 소중하게 송진을 모아 아버지의 바람대로 끓여드렸더니 효험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병이 워낙 깊어 위급해지자 단지를 하여 아버지를 구하고자 했으나 하루를 연명했을 뿐이다. 공은 시묘살이도 지극한 마음으로 모셨는데 가끔씩 호랑이가 나타나 공의 주변을 돌다가 가기도 하였다. 이로한 공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집안사람들은 삼강문을 건립하여 충신 김세상, 열부 현풍곽씨, 효자 김영학을 모셨다.
김우경(자-이신, 1505 - ?. 현경면 송정리 하수장. 김해인)
하수장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는 김해김씨 창녕조씨 파평윤씨가 이 마을을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의 첫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우경이다. 벼슬은 장사랑이었으나 학문은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족보에 ‘文學鳴世-학문으로 세상을 울린다’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공은 나주 세지면에서 세거하다가 조정이 어지럽고 群賢이 화를 입으니 벼슬을 버리고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공은 耕讀 두 글자로 집안의 준칙으로 삼고 후세의 교육에 힘썼다.
김원각(현경면 용정리 새터. 김해인)
‘새 터’라는 마을명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 마을인 용정에서 분가해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는 이 마을에 장수 황씨들이 먼저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황부자 터로 불리는 곳이 있는데 ‘행복한 고구마’의 저장창고가 있는 자리이다. 1700년대 초 용정에 살던 김해김씨 김원각씨가 이곳으로 옮겨 와 새로이 정착하여 김해김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용정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데는 이유가 있었다. 용정마을은 원래 김씨들의 집성촌인데 아무런 말도 없이 마을 뒤에다 무안읍의 도산마을 무안박씨들이 묘를 써 버린 것이다. 마을 사람도 아닌 타지의 사람이 마을 뒤에다 묘를 쓴다는 것이 말이 되냐며 항의를 했으나 묵살되자 화가 나서 이 마을로 옮겨버린 것이다.
김응린(金應麟. 자-기보. 김해인)
공은 병사 만추의 후손이고 엽의 아들로 용력과 기질이 빼어났다. 갑자란(1624,이괄의 난)에 금남 정충신을 따라 안현에서 적을 쳐부쉈다. 진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김응무(金應武. 자-선서. 김해인)
공은 감사 응률의 후손이고 수문장 영호의 아들이다. 광해군 12년(1620)무과에 급제하였다. 갑자란(1624:이괄의 난)에 前 봉사로서 임금을 공주로 호가하였다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하늘이 김응무을 내어 나의 주석신이 되게 하였도다.”하고 상으로 의복과 홀(笏), 편(鞭)등을 내렸다. 진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죽은 뒤에 한성판윤을 증직 받았다.
김재진(金載振. 자-行敏, 1609-1670. 몽탄면 약곡리 박실. 김해인)
공은 영광군 불갑면에서 세거하였으나 병자호란 등 당시의 혼란을 피하여 깊숙한 산골인 이곳 박곡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시류에 흔들리지 아니하며 덕을 기르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김종(金琮. 1558-1622, 자-龍孫, 호-湖隱. 해제면 만풍리 신만. 김해인)
만풍리 신만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김해김씨 김 종이다. 공은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선비로서 영광군 육창면에서 세거하다 임란 이후 이 마을에 들어왔다. 공의 행적에 대하여 김해김씨 족보를 보면 ‘임진란에 벼슬을 버리고 집안에 칩거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 잡았다. 이후 다시 한양으로 가지 않고 오로지 경서를 섭렵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뒤 승무동으로 부르는 김해김씨 선산에 공의 묘가 있다.
김종현(자 - 경천, 호 - 송은. 청계면 월선리 중화. 김해인)
선생은 청계면 월선리 중화마을 입향조이며 임란공신인 김세상의 십세 손이며 효자 난저공 김영학의 아들이다. 천품이 박아하고 총기절인하여 경학에 깊고 성리에 밝았으며 시부와 사서에 능하였다. 갑오동요이후로 벼슬에는 뜻하지 않고 임천을 소요자적하면서 세상의 어지러움을 개탄하였다. 선생의 학문에 대한 명성이 높아 그의 도학과 문장을 찬양한 문집인 송은실기가 간행되었다. 아들 재환(호 - 막헌)의 유지로 손 정호(호 - 성암)가 월선리 중화마을에 송은당을 세워 후손들이 보존하여 오면서 선생의 유덕을 기리고 있다.
김준희(선조대. 운남면 동암리 원동암. 김해인)
운남면 원동암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준희다. 김준희는 선조 代 사람으로 영암에서 살았으나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영산강변의 잦은 왜구의 출몰에다, 이러한 왜구를 토벌한다 하여 관군의 출입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이주 한 곳이 이 마을이다.
김지학(金志學. 자-학경, 호-완석. 1866-1925. 현경면 오류리 오류동. 김해인)
공은 학문이 높은 유학자로 1866년 1月 4日에 현경면 오류리 오류동에서 치순의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8세 때에 척양의 일이 당시의 여론을 거슬렸다 하여 지도로 귀양 가 있는 중암 김평묵선생을 찾아가 글을 배웠고 만년에는 송사 기우만과 교유하며 학문의 깊이를 인정받았다. 1898年 봄부터 마을에 있는 오류정사에 머물러 지내니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배우는 자가 아주 많았다. 정사 뒤의 땅을 정리하여 여러 학생과 함께 단을 쌓고 중암 선생을 제사지내고 김오남․홍손지 공도 배향했다. 그리고 기송사 공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하여 단 아래에 비를 세워 평소에 다하지 못한 정성과 스승에 대한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1925년 1月 3日에 別世하였으니 享年은 60세였다. 완석유고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年이 지나 문인 김시호가 주관하여 그의 시문 가운데 중요한 것만을 모아 9卷4冊으로 편찬․간행하였다.
김창순(金昌珣. 자-덕칠, 호-죽헌. 1855-?. 현경면 오류리. 김해인))
공은 본성이 온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 부친께서 병상에 눕게 되었을 때는 자식의 도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뒤뜰에 기도단을 마련하고 조석으로 부모님의 안녕을 빌었다. 상중에는 시묘살이를 하며 생존시에 부모님을 모시는 것과 같이 하였다. 이러한 공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지역 유림들의 추천으로 마을에 효자각을 세웠다.
김현주(金顯周. 자-군선, 호-선암, 영조대. 청계면 복용리 대곡. 김해인)
청계면 복용리 대곡 마을의 형성은 300여 년 전에 장자산에서 일부 주민이 현재의 마을 뒤 동암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대곡마을로 옮겨 와 살면서 비롯되었다. 원래 이곳에는 담양 田씨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살지 않고 묘만 일부 남아있다. 이후 김해김씨와 남평 문씨 그리고 최씨 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김해김씨의 입향조는 김현주로 나주 백구촌에서 세거하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로 왔다.
김화두(자-영삼, 1850-1922. 현경면 오류리 신정. 김해인)
현경면 신정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화두이다. 공은 보부상으로 경남 창원에서 이곳에 왔다가 지형을 살펴본 뒤 안주할 만한 곳이라 여겨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김희두(1861-1933. 자-사겸, 호-농은. 현경면 외반리 조암. 김해인)
조암 마을의 김해김씨 입향조는 김희두(1861-1933. 자-사겸, 호-농은)로 무안읍 고절리에서 들어왔다. 마을 입구에 있는 효자각의 주인이다. 공은 학문이 도저하고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아버지의 병환이 심해지자 단지를 해서 회생케 하였다. 또한 어머니의 병환 시에는 쉽게 구하기 어려운 박쥐와 다람쥐를 잡아 어머니께 드림으로서 병환을 낫게 하였다. 이후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시묘 살이를 하여 주위에 칭송이 자자했다. 그 후 향인이 그 갸륵함을 기리기 위해 비각을 세워 주었다. 현재도 그의 효자각이 마을입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