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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과 목회철학에 의한 리더십
강사 : 김유수 목사
대단히 반갑습니다. 굉장히 지금 제가 곤욕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이럴 줄 알고 몇 번 사양을 했는데 너무 사양하는 게 인사가 아닐 것 같아서 마지못해 대답을 했던 게 참 곤욕스럽네요. 제 평생에 이렇게 곤욕스러운적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 하면 저도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차피 여러분께서는 제 이야기를 들으러 오신 것이 아닌 줄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하 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러 왔지 제 이야기를 들으러 여기오신 분 별로 없을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주강사는 아니지만 보조강사지만, 피차 고민하고 생각하고 몸부림치면서 때로는 가슴앓이를 해 가면서 때로는 왜 내가 목회자가 되었나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아픔을 다 가지고 왔기 때문에 같은 목회의 동역자로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런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온 누리가 있었기 때문에 아마 7년 동안 같이 협력하는 꾸준히 했던 교회이기 때문에 한 번 이야기 좀 해라 그래서 저를 여기 세워 주신 것 같습니다.
여기 교안은 14쪽인 것 같습니다. 제가 적긴 적었는데요, 너무 한 쪽으로 강의할 수도 없는 거구요, 그래서 제가 두서없지마는 좀 생각된 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리더쉽(leadership)'에는 세 종류가 있다는 이야기를 제가 봤습니다. 하나는 태어나는 리더십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보스기질. 어디 가든지 리더십을 발휘하는,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그런 리더십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또 하나는 아주 좋은 모델을 만나 가지고 그 모델을 열심히 따라가는 그런 리더십도 있다고 그랬습니다. 또 하나는 열심히 자기 자신을 훈련해 가지고 좋은 리더십을 갖게 되는 그런 지도력도 있다고 그랬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를 따로따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만들어진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선택으로 예정된 자로서 부름을 받고 나도 모르는 순간에 우리는 지도자가 된 것을 믿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를 순간에 지도자가 되어 있더라구요. 세상의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 있다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제가 이것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지도력에 대한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한 게 아니라고 하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우리는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들, 구약에는 유태인만 성직자가 될 수 있었고 그 다음에는 레위 지파만 성직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구약적으로 말하면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는 데,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예정 가운데서 선택되고 부름 받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지도자가 되어 있음에 저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지도자를 찾고 있더라구요. 준비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찾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만들어내신 분이시지 준비되어 있는 사람, 남이 다 갖추어 놓은 사람을 픽업(pickup) 해 가지고 쓰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다 부르셨습니다. 데리고 3년 동안 옆에 두시고 보호하시고 가르치심으로 인해서 훈련시켜서 마지막에는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권세까지 줘서 보내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도자라는 어떤 정체감, 긍지, 자신감을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야 리더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땅에서 최고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만큼 뛰어난 리더의 모델이 없지 않습니까? 다시 공부할 필요가 업고요,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만 열심히 본받고 따라가면 주님 닮은 유능한 지도자가 될 것을 믿습니다. 또 하나는, 이미 우리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목사가 하루아침에 됩니까? 제가 여기서 강의할 필요도 없이 목회에 대해서는 다 여러분 일가견이 있고 다 전문가지 않습니까? 다 지금훈련 받고 있고요.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해 주심에 대해서 너무너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리더쉽의 목회는 예수 그리스도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고 말씀으로만 있습니다. 저는 한참 고민하다가 이 세상에서 실제 내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내가 본받을 수 있는 모델의 교회를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고 여러 교회를 찾기 시작을 했습니다. 많이 돌아봤습니다. 그러면서 7년 전에 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온누리와 관계가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제 나름대로 공부를 해 보았는데 정말 온누리교회는 가장 성서적인 교회가 되려고 노력하는 교회, 물론 완전한 교회는 아니지요, 그러나 가장 성경적이고 사도행전적인 교회, 바로 그 교회가 되려고 몸부림치고 노력하는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 온누리교회를 카피(copy)하면 좋은 교회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카피하기 시작했습니다. 표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작품은 표절하면은 나쁜 것이지마는 복음은 많이 표절할수록 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성경을 카피해서 그대로 쓸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를 그대로 카피해서 우리의 교회로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온누리교회를 저의 목회의 모델로 생각하고 카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카피한 게 건축이었습니다. 제가 부임한 교회가 교회를 건축해야되기 때문에 건축위원과 장로님들과 전국 교회를 돌아다녀 봤어요. 마지막 결론이, 온누리교회를 많이 모델로 삼아 가지고 교회를 지어봅시다, 그러고 막 비디오를 찍고 사진을 찍고요, 계속 와서 보고, 그렇게 카피를 했습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인들이 저희 교회를 좀 자주 온 편입니다. 와서 보면요, 물론조금 다르긴 다르지만, 너무 온누리교회에 온 기분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일 줄은 모르겠습니다마는, 광주에서 가장 온누리를 닮은 교회가 어느 교회냐, 이렇게 물어보면 어느 교회라고 말하겠습니까?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월광교회일 거라고요. 저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온누리를 닮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분들이 광주 월광교회 그러면 아주 온누리 교회를 빼다 박은 너무너무 닮은 교회라고 이런 이야기를 제가 종종 듣습니다. 전 그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성공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건축을 카피를 했습니다.
본당 모양이라든지 강대상 구조라든지, 아주 비슷하게 했습니다. 왜냐 하면 나중에 보니까 하 목사가 생각하는 목회 관념이나 철학이나 비전이 은연중에 비슷한 것입니다. 친구라고 하는 것은 그냥 된 게 아니잖아요. 서로 같은 점이 많아야 친구가 되지 않습니까? 건물을 카피를 했고요.
그 다음에 교회관을 카피를 했습니다. 저도 목사 된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20년 동안에 딱 두 교회를 섬겼습니다. 경기도에서 한 교회를 9년 섬겼고요, 광주에 내려가서 만 10년째 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거듭나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자라났고, 평생 교회를 섬기다가 죽을 목사입니다.
막상 "당신이 섬기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당신이 선택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생각은 있는데 정리가 안 되어 있더라구요.
여러분, 교회를 한 마디로 말하기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렵더라구요. 가정이 그렇게 중요하고 익숙하지만, "가정이란 무엇인가?" 물어보면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겠어요? 여기에 나오는 대답이 천태만상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고 물어보면, 아주 가깝게 알지만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 주님에 관한 말씀이 너무 많고.
제가 교회에 대한 관심을 두고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몇 번을 읽은 지 모르고요, 제가 책을 지금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만, 제 나름대로 내가 생각한 교회가 뭔지, 목회 현장에서 느끼는 교회가 뭔지를 한 번 정리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도전을 하 목사에게서 받았고, 또 하나는 짐 그레험목사님이 쓰신 <잠자는 권위를 깨우다> 그 책을 누구 권유로 보게 되었어요.
그 책을 보면서 또 한 번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평생의 목회를 하면서 사랑하는 내 성도들에게 우리 교인들에게 담임 목사의 교회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목회 철학이 이것입니다, 뭔가 이야기를 해 줘야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교회론을 정립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얻어진 결론이, 저의 교회로는,'교회는 어머니다', '교회는 어머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나는 어떤 목회자가 되면 되겠습니까? 어머니 같은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론을 카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목회 철학을 카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잘못 봤는지 모르겠지만 하 목사의 목회철학은 지성적인 목회가 아니라 영성적인 목회를 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IQ 목회가 아니라 EQ, CQ, 요즘 달리 말하면 HQ 목회를 말합니다. 성령 목회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면은, 어떤 분이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한국에서 뜬 현대 신세대 목회자 가운데 사인방이 있지요, 사인방. 누구누구십니까?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 그 다음에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 그 다음에 홍정길 목사님, 그 다음이 또 누구죠? 바로 여기 계신 분, 하용조 목사님. 이렇게 사인방을 이야기합니다. 그분들을 놓고 특성적인 이야기를 하시는데 아주 잘 평가하신 것 같아요. 옥한흠 목사님은 아버지적인 목회를 한다는 거예요. 부성적인. 그런 감을 가지고 설교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옥한흠 목사님은 오로지 뭘 하지요? 제자 훈련. 가르치고 훈련하는, 부성적인. 하 목사님은 어떤 스타일의 목회입니까? 이 분도 똑 같이 제자 양육을 시작하다 한계를 느끼고 어디로 돌아갔습니까? 성령목회로 돌아가셨어요. 92년도입니까? 하와이에서 DTS 훈련받고 와서 하 목사님의 목회 스타일이 바뀌었죠. 그때부터 직접 성령 집회를 오늘까지도 하신 분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영성목회입니다.
그래서 하 목사님의 목회는 어머니적인 목회라는 거예요. 옥한흠 목사님은 설교를 듣는 그대로 쓰면 그대로 설교집이 됩니다. 지성적인 설교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들으면 굉장히 은혜가 됩니다.
굉장히 은혜가 되고 가슴에 막 파고들어요. 여러분, 목사를 울린 그 메세지는 보통 메세지가 아니잖아요. 저도 목사지만 보통 이야기 가지고, 강심장이 돼 가지고, 보통 말 가지고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런데 펑펑 울어요. 아마 이런 세미나를 여러 차례 오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 우리는 머리는 너무 발달되어 있지만, 감성이 메말라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투성이입니다.
여러분, 감성이 메말랐을 때 상처를 너무 쉽게 받습니다. 치유는 우리 목회자들이 먼저 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상처들이 많습니다.
감정들이 다 메말라 있습니다. 그런데 하 목사님은 가장 중요한 것을 캐치(catch)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성령적이고요. 그래서 그 분은 사람의 가슴을 만질 줄 압니다. 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굉장히 직설적이거든요.
아주 노골적으로 말해요. 그래도 그 설교에 교인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성적인, 나무라더라도 아버지가 나무라면 자식이 큰 상처를 입지만 어머니가 나무라는 것은 별로 상처가 안 되거든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 별로 상처가 안 돼요. 아버지가 때릴 때는 도망가지만 어머니가 때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어머니를 꽉 끌어안아 버리지요. 달라요. 이런 그 특별한 목회의 철학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 목사님은 이 성령목회 하다가 성령은 기도 없이는 안 된다, 하 목사 할 이야기를 제가 다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그런데 저는 뭘 카피했나 그것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설교는 기도 없이 준비도 잘 되는데 성령에 관한 설교는 기도 없이는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 목사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 회의는 새벽 기도 끝나고 하기로, 당회도 새벽 기도 끝나고 하기로, 이렇게 다 결정을 하셨대요.
저도 이것을 카피해 가지고 그대로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도 매주 화요일은 안수 집사님들이 새벽기도 때 나와서 찬양하고 새벽기도 끝나면 바로 가서 기도회를 갖습니다. 수요일에는 장로님들이 다 나와서 찬양하고 그리고 새벽기도 끝나고 같이 공동체로 기도합니다. 목요일에는 권산님들이 다 나와서 찬양하고 전체적인 새벽 기도 끝나면 기도실에 가서 함께 모여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금요일만은 각 기관별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지시한 것이 아니라 임직자를 모아놓고 "온누리교회가 이렇게 한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해 보지요." 저희 교인들이 참 좋아요. 싫으면서도 따라오시거든요. 그래서 해 보자고 해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마는, 그렇게 이런 모든 모습들을 저희들이 해 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목회 방법을 제가 카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는 하 목사님 목회는 아주 재미있는 목회입니다. 흥미진진하게 목회를 해요. 우리 사람들이 이왕이면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즐겁게 하는 겁니다. 기분 좋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을 보면 참 너무너무 순수하더라구요. 너무너무 순수해요. 하고 싶은 것 하도록만 지시해 주면요 너무너무 신나합니다. 밤 12시가 지나도 소용없어요. 막 준비하고 그러고도 신나합니다. 제가 12시까지 시간을 재다가 막 너무 떠드니까 올라가서, 우리 동네 이웃 사람들도 생각을 좀 해야 되지않겠느냐고, 자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럽니다. 이왕 할 것 재미있게. 교인들에게 아부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교인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즐겁게 해 주고, 이왕에 해 줄 것 교인들에게 기분 좋게 해 주면 교인들이 너무 좋아한다구요.
사실 우리 못지 않게 교인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 바치겠다고 각오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헌신하려고 각오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세월이 가면서 문제 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건 상대적입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즐거운 목회, 축제, 그러니까 저희들도 축제를 많이 합니다. 지난 7월 달에 우리도 비전축제를 했거든요. 새벽기도도 해 보고, 매 주일 저녁마다 돌아가면서 기관별로 축제도 해 보고, 찬양축제도 해 보고, 각 위원회 별로 우리도 비전이 있습니다. 온누리교회 12000비전이 있죠? 우리는 교회가 사이즈가 좀 작으니까2200이라고 하는 비전이 있습니다. 다 카피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주제로 해 가지고 각 위원회 별로 나와서 하는데 제가 상상할 수 없는 아이디어들이 나옵니다. 앞으로 2010년, 10년 후에는 우리 월광교회가 어떤 교회이겠느냐,10년 후를 미리 당겨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각 위원회별로, 뭐 선교위원회, 전도위원회, 관리위원회, 교육위원회, 운영위원회, 사회위원회, 다 위원들이나 와서 보고를 하는데요, 축제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고, 웃고.
여러분, 목사가 설교를 하면 굉장히 부담을 주지마는, 자신들이 와서 하니까 하나의 축제가 되더라구요. 그리고 우리 어린아이들도 선교여행을 중국으로 떠나고, 청년들은 또 일본으로 떠나고, 저와 우리 선교위원장은 중국을 탐방을 하고, 오면 또 슬라이드나 비디오를 매일 저녁 보여주면서 같이 나누고.
제가 우리 교인들에게 그러지요.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지만 그러나 이 선교에 대해서는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 안습니까. 가랑비에 맞아도 속옷이 젖는다고, 계속 듣다 보면 우리 마음이 선교로 불타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씀을 드리면 교인들이 막 다 같이 웃지요. 이러면서 같이 이 축제들, 예배의 축제, 모든 축제, 이런 것을 해 가고 있습니다. 예배도 카피합니다. 비디오로 계속 보면서 들으면서 합니다.
세례식을 온누리에서 하는 것을 보고 제가 깜짝 놀랬어요. 94년도이니까 꽤됐습니다. 바로 저거야. 그래서 저희 교회도 세례식을 하는데, 온누리보다 더 잘해요. 왜냐, 더 발전시키니까. 그렇게 카피해서 하는데,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완전히 축제입니다.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축하하고 축제하고 그러니까 세례 받은 분들이 다 펑펑 울어요. 가서 축복기도 해 주고 그러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또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더 귀한 것은, 프로그램을 카피했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카피한 게 '일대일 양육'이었습니다. 제가 일대일 양육을 시작한 지가 한 6년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일대일 양육 지도자 교육만큼은 제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목사님들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같이 하고 있습니다. 수요일 오전에는 여성지도자를 데리고 계속 훈련하고 있고, 끝나면 또 시작하고 시작하고요. 목요일 날 새벽에는 남성들 지도자를 모아놓고, 제가 한 3개월씩 계속 하고 있습니다. 6년 동안 서둘지 않았습니다, FM식으로. 이것도 우리가 뭐 간증집도 만들고 다 하는데,미안한 이야기로 온누리 못지 않도록 우리 한 번 잘해 보자고 해서 열심히 하는데, 양육 된 자가, 6년 동안에 한 400명을 양육해 냈고, 양육된 사람 중에서 다시 지도자로 재교육한 사람이 현재 한 150명됩니다. 150명 가운데서 거의 80%이상이 지금 계속 양육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하급수적으로 이제 이렇게 확대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카피하는 것은 부부사역, 부부학교. 얼마 전에 아버지 학교를 호남지역에서는 최초로, 바로 우리 권 주임 목사님이 4주간 내려와 가지고 아버지 학교를 했습니다. 남성집회를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집회도 한 번해 봤습니다. 이런 모든 프로그램을 제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이렇게 한 번해 봅시다." 그러면 훈련된 평신도들이 맡아요. 우리 부목사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모든 행사에 구경꾼들입니다.
한 예를 들면, 지난번에 가정축제, 어버이 주일에 가정축제를 했는데, 온 교인들이 아침부터 오후까지 교회에 와서 같이 하루종일 축제를 하는데, 목사가 강단에 딱 한 번 섰습니다. 제가 섰습니다. 그것은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서.
딱 한 번 서고, 그 나머지 모든 프로그램은 평신도들이 다 진행합니다. 아주 잘합니다. 그날 다른 교회에서 왔던 분이 그러더라구요. 월광교회는 목사가 안 보인다구요. 다 평신도들이 하니 목사가 안 보인다구요. 바로 그겁니다.
유능한 일꾼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이렇게 해서, 이런 축제들을 저희들이 이렇게 해 가지고 우리 교회화하는 것이지요. 똑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교회체질에 맞도록 이렇게 해 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전도단에서 했던 '킹스키즈'라고 하는 건데, 이것을 온누리는'요셉학교'라고 그러지요? 제가 온누리를 보고 우리도 해야 되겠다고 해서 하는데, 작년부터 시작해 가지고 2기 수료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너무 좋아하고 있습니다. 헌신자학교를 지난번에 1기를 마쳤습니다. 1기는 임직자,우리가 먼저 하자, 그래서 우리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들이 거의 95%가 참석을 했습니다. 한 시간 결석하지 않고. 이렇게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좋은 것은 다 카피해 보려고요. '미주칼'도 한 번 했고요. 예, 이런 것들을 저희들에게 카피를 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마음에 확신을 하는 것은, 우리 목사님들이 너무 자신감이라고 그럴까요, 눈치, 어려우니까, 그런데 좀 자신감을 가지고 좀 배짱을 가지고 그러고 목회를 해야 되지 않을까. 저는 하 목사를 보고서 그것도 하나 배웠습니다. 소신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받아들이실 지 모르겠는데, 우리 고민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에 리더십이 있습니까? 리더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세상도 지금은 리더십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불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교회도 리더십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목사님 말 잘 안 듣지요. 장로님들이 목사님 말에 고분고분합니까? 잘 안 듣지요. 참 어렵죠. 그래서 오히려 이제는 교인들을 왕자병에 걸리게 만들고 공주병에 걸리게 만듭니다. 권위가 없습니다. 저는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권위는 대단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엘리가 아버지 됨의 권리를 포기했을 때 타락한 엘리의 자식들이 변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다시 한 번 권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신권위를 회복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권위를 회복하고, 소신을 가지고, 어떤 철학을 가지고, 좀 배짱을 가지고, 할 것은 꼭 하고, 설득할 것은 설득하고, 기다릴 것은 좀 기다리고, 이렇게 가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충 이런 정도로 제가 조금 말씀을 드리고, 제가 나눠드린 교안의 이야기를 요약을 하겠습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또 여러 책을 보면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잭 볼슨이 쓴 <기로에 선 남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잭 볼슨이 유명한 가정 전문학자인데, 우리 남성의 모델을 예수님으로 보고, 남성과 여성에 관한 요절을 전부 뽑아 가지고 비교를 해 보니까요, 주님의 성품 가운데 남성적인 성품과 여성적인 성품을 보니까 50%, 50%예요. 반, 반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여성적인 요소, 남성적인 요소를 같이 비교한다면 50%, 50%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교회들이 너무 지나친 여성적인 목회로 갔을 때도 아버지 없는 편모슬하에서 자라는 교회인이 될 것이고, 너무 부성적인 목회를 하면은 포용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없이 엄한 아버지 밑에 자라서 상처만 잔뜩 입고자라는 그런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많이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 보게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생각하기는,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아마 우리 기독교 초기에는 우리 선배 목사님들은 부성적인 목회보다는 모성적인 스타일의 목회가 가깝지 않겠는가, 저 나름대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랑목회였죠, 헌신목회였죠. 교인들을 감싸고,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순간엔가 한국 기독교는 굉장히 부성적인 목회 스타일로 가지 않았는가, 제나름대로 진단을 해 본 것입니다. 굉장히 권위적입니다. 아버지는 권위적입니다. 전통적입니다. 의식적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입니다. 그리고 지시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이 말을 잘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지요. 눈앞에 있을 때는 아버지 앞에서 자식이 힘이 없으니까 고분고분하지만, 돌아서면 생각 없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라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어느 분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는 것 같습니까? 어머니지요. 우리는 음식 먹는 맛의 습관부터 시작해서 어머니의 영향력을 많이 받습니다. 곤고하고 어려울 때 가장 누구를 먼저 생각합니까? 어머니는 우리 마음의 고향이지 않습니까. 어머니잖아요. 영향력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강압적으로 교인들에게 영향력을 줄려고 했을 때 점점 교회는 힘들어지고 어려워지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이게 밸런스가 맞으면 참 좋겠는데 이게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21세기는, 모든 분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21세기는 강한 것보다는 부드럽고, 지시적인 것보다는, 설교적인 것보다는 서로 상호 커뮤니케이션, 대화적이고, 독단적인 것보다는 협력하고. 그리고 21세기는 굉장히 과학적이지만, 과학적일수록 사람의 의식은 이성적인 것보다는 감성적일 것이다, 영성적일것이다, 이렇게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왜냐, 20세기는 너무나 과학주의고, 합리주의고, 이성주의로 흘러왔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 21세기는 그것을 뛰어넘는 영성적으로 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목회도 영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모성적인 목회가 되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요즘 목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치유', '상담', 이런 말을 많이 쓰게 되지 않겠습니까? '커뮤니케이션', 이런 말이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실 여러분, 예수님의 리더십을 한 번 공부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커뮤니케이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위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고 사랑하면서 함께 나누었던 모습들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게 되었고요. 성경에 보면은, '내가 너를 낳았느니라', '내가 너를 품었느니라', 이런 말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너를 먹였느니라', '내가 너를 등에 업었느니라', 이런 모성적인 표현이 성경에 굉장히 많더라구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호칭 가운데 '아돈하이'라는 호칭이 있습니다. 그 '아돈하이'라는 말의 뜻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어머니의 젖무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용어랍니다. '어머니의 젖가슴'. 일찍이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돈하이' 할 때는 누구를 상상했습니까? 히브리 사람은 이성적인 호칭으로 하나님을 부르기보다는 감성적으로, 생활용어로 하나님을 많이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돈하이' 할 때는 바로 '어머니의 젖가슴'이라고 하나님을 부르게 됐습니다. 또 하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품, 이 '자비'라고 하는 말이 '레함'이라는 용어입니다. 이'레함'이라는 언어는 여성의 '자궁'이라는 단어에서 나오는 용어라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 가운데 모성적인 표현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니까 여성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부를 만도 하지요? '어머니' 이렇게 부를 만도 하지 않습니까. 이런 성품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칼빈 선생이 <기독교 강료> 제 4권의 서론 부분에 바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어머니는 누구이겠는가? 그건 교회일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라는 호칭 속에서 가장 교회가 무엇인가를 많이 배울 수 있는 용어일 것이다.' 칼빈 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셨더라구요. '왜냐 하면 교회는 교회를 통해서 태어나고, 교회의 젖가슴을 통해서 젖을 빨고, 교회의 양육과보호를 통해서 자라난 사람만이 천사에 이끌려서 천국에 갈 것이다.' 그 말은 교회 밖에는, 어머니 품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칼빈 선생이 교회를 어머니라고 이렇게 정의한 것을 보게 됐습니다. 칼빈 선생 그 이전에 어거스틴이 교회를 어머니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이렇게 정립을 해 보면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23장에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너희를 암탉이', 수탉이 아닙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제 품에 안듯이 내가 너희를 몇 번이나 안을려고 했더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수탉이 아니고 암탉, 모성적인 사랑으로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이런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갈릴리호숫가에서, 요한복음 21장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해 씁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은 뭐예요? 부성적인 표현보다는 상당히 모성적입니다. 베드로를 끌어안고 사랑하는 모성적인 주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으면서, 그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성경적으로요 나름대로 정리가 됐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 이제 종합합니다. 오늘 이 교 안에 있습니다마는, 모성적인 목회에 어떤 특징이 있겠는가. 이거는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하고 지도자론 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정말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목회를 성경적이고 바르게 하면 목회자의 권위는 바로 서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머니에게서 가장 첫째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지아비를 잘 섬기는 것이 어머니의 첫째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만나야 내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좋은 아버지, 정말 좋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는 그 지아비를 위해서 일평생을 목숨을 바쳐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위대하십니까?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목박히기 이전에 아버지 하나님께,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하듯이. 저는 그것을 열녀목회라고 이름을 지어봤는데, 열녀, 옛날에 열녀 있지 않습니까, 열녀비 있고 말이지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은혜 하나님을 사랑하고. 왜 바울 사도가 위대합니까? 바울사도가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려면은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기의 모든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다 헌신하고 드렸을 때에 거기서 권위가 서는 거지요. 어머니 됨의 권위가 서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자랑할 게 없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서서 말하기 때문에 뭐가 좀 잘한 것같이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해 볼려고 노력한 것뿐이지요. 저는 교인들 앞에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 진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저 나름대로 확신합니다. 목회 회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섬기신 삼위 하나님 앞에, 옛날의 우리어르신들의 열녀와 같은 마음으로 내 목숨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목회는 보다 더 쉬워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요, 여성의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자녀를 출산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이것은 성경적으로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아시겠습니다만. 옛날에 여인이 결혼을 해 가면 언제까지 가족으로 취급하지 않는고 하니, 아들을 낳아야 정식으로 가문의 가족으로 인정을 합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면은 칠거지악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 원리를 제 목회에 그대로 적용을 해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디에 신경을 쓰지요? 전도에. 열심히 전도해서 새 신자를 훈련하고 양육하는, 여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저희교회는 전도대가 두 개가 있습니다. 그 분들은 방학이 없습니다. 여름도 없고 겨울도 없습니다. 매주 화요일 매주 목요일마다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고 그리고 전도하러 나갑니다. 제가 바쁘면 못 나가지만요 의도적으로 제가 같이 따라나갑니다.
여러분, 전도 하나로 목회에 성공한 분 한 분 계세요. 여러 분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분이 누굽니까? 김인종 목사. 이 분은 얼마 전에도 저희 교회에 오셔서 세미나를 하셨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더라구요. 복음에 대한 아주 열정이 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여러분, 윌러크로키처치나 세들백의 목회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시크옵 시크옵(seek of,seek of), 새 신자,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는 누구를 위한 예배입니까? 기성교인들은 수요일날 모이고요 주일 예배는 새 신자를 위한 예배입니다. 완전한 새 신자 예배입니다. 새 영혼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교회가 반드시 성장할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왜 힘을 잃어버립니까? 새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목회가 힘을 잃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자식을 낳지 못하면 조상 앞에 죄인이 되지요. 대단히 미안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숫자적으로 질적으로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와 교회 앞에와 교회를 세운 우리 선배 앞에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교회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의 현대 교회가 어떻게 하면 전도해서 그 영혼을 세울 수 있겠는가, 여기에 아주 굉장한 관심과 많은 에너지를 투자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그 부분에 관심을 쓰게 됐습니다.
세 번째로는, 자녀를 낳기만 한다고 부모 노릇합니까? 부모 노릇하려면 자녀를 양육해야 되지요. 그래서 열녀목회, 출산목회, 세 번째는 무엇이겠습니까? 양육목회를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양육을 해 보니까요, 여러분 다 알고 계시지만, 너무너무 좋은 게 참 많습니다. 목회를 제가 한 게 아니라 양육 자들이 다해 주시더라구요. 목회를 다 상담해 주지요. 직접 목사에게 찾아오기 힘든 부담스러운 상담이 참 많습니다. 오히려 상담하고 도망간 교인이 있어요. 나중에 창피하니까. 어지간한 영적인 문제는 모르지만 그 나머지 문제는 거의 다가 양육자가 커버(cover)를 합니다. 어려울 때 찾아가 세워주고, 신방해 주고, 이렇게 목회를 거의 해 줍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희가 지금 선교를 지향하는 교회입니다 마는, 많은 사역들을 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헌신자학교도 하고요, 이걸 다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임직자를 중심으로 해서 양육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온누리에서 제일 자신 있게 카피한 것을 하나 이야기하라고 그러면, 저는 양육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도 계속 해 나가고 있고요. 사람은 태어났다고 사람되지 않고 길러야 사람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요 양육하지도 않고 훈련시키지도 않고 이용해 먹고 부려먹었더라구요. 전혀 훈련되지 않은 사람에게 짐만 맡깁니다. 그러니까 시행착오 많이 일으켜요. 기진맥진하다 그만두는 교인들 많고, 도망가 버린 교인도 많고요.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훈련하고 양육해서 일을 맡기셨더라고요. 조금 더디 가더라도. 그래서 저는 양육을 서둘지 않고 있습니다. 좀 더디 가더라도 철저히 훈련해서 훈련된 사람에게 잘할 수 있도록 일을 맡깁니다. 성도가 양육하고 또 양육하고, 이런 목회의 방법을 취하고 잇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에게 중요한 것은 살림하는 것이죠. 어떤 시인이 여성예찬론을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제가 기억합니다. '여성은 살림꾼이다. 살림꾼이라는 말은 살리는 일, 살려내는 일에 전문가라는 뜻이 살림꾼이다.'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더라구요. 저는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목회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살려내고 회복하는 일이지요. 재정이 어려우면 결국은 목회자를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시험을 당하면 결국은 모든 사람은 목회자를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골고루 일을 맡기고 일이 제대로 되어 가는지 안 되어 가는지 골고루 보살피는, 그래서 목회자는, 지도자는, 리더는 직접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주변의 사람을 격려하고 맡기고 잘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그게 리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살림, 교회 행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저 돌아보면서.
저는 전체 교인들 신방을 못하니까 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든지 문제 있는 가정만 찾아다니면서 세워주고 이렇게 해 가고 있고, 모든 살림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는 섬김이지요. 희생, 사랑, 섬김. 역시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보여준 표본인데요, 목회자가 교인들을 섬겼을 때 교인들이 목회자를 사랑하고 섬기지 않겠습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만, 이 정도 하고요.
자기 발전을 위해서 끊임없이, 부단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저의 옆에 있는 동료들을 보면은요, 참 머리도 있고 재능도 있고 똑똑하고 얼마든지 목회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힘든 친구들이 있습니다. 제가 보면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왜냐 하면 목회에 전념하지 아니하고. 저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지마는, 전념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목회에 전념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여러분, 여러 가지 취미도 좋고 운동도 좋고 다 좋지만, 한국에서 목회에 나름대로 앞서가고 있고 우리의 표본이 된다고 하시는 분들 한 번 보십시오. 모든 분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 목회 하다가 병이 들었고 한두 번씩 다 쓰러진 분들이지 않습니까. 지난 번 어떤 우리 모임에서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목회를 열심히 하고 있고 하 목사님도 열심히 하는데 뭐가 다르냐 이거예요. 그래서 여기 교안에도 써 있습니다마는,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하더라구요. "나는 열심히 하고 있고, 하 목사는 목숨을 걸고 목회를 하고 있다." 그 차이래요, 그 차이. 제가 자꾸 하 목사님을 높여 드리는 것 같습니다마는, 제가 사실대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 목사님은 당뇨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혈압이 있지요. 그 다음에 또 뭐가 안 좋지요? 간이 안 좋지요. 이미 그 분이 영국을 건너가실 때는 다시 목회를 시작할 수 없도록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분이시지 않습니까. 이러한 분이 지금 일한 것 보세요. 초인적이에요, 초인적. 지금도 인슐린 계속 맞아가면서, 어디서 그 힘이 나오겠습니까? 사람은 죽을 각오를 하면요 나도 모르는 에너지가, 가능성이 우리 속에서 나오지 않을까. 목숨을 걸고. 깡패 두목도요 체격이 크다고 두목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싸움질을 잘해서가 아니라 싸울 때마다 목숨 걸고 싸우면은 다 도망간 대요. 깡패는, 싸움의 전문가는 딱 잡아보면 안답니다. 이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지 대충 싸우는지 딱 잡아보면은 싸움꾼은 안대요. 적어도 깡패보스가 되려면요 싸울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목회 사역을 하면서 한 번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보면은, 전능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못할 것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최고의 리더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책을 보고 여러 가지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마는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고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제가 참고적으로 여러분 다 보셨겠지마는, 리틀포오드라는 분이 쓴 책이 있지요. <변화를 일으키는 리더십>, 그렇습니까? 그 책을 보면 저는 참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아서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아주, 얇은 책도 아닙니다, 잘 정리가 돼 있습니다. 리더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정체감,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얼마나 강조합니까. 빌라도가 "네가 왕이냐?", 주님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렇다, 내가 왕이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나는 이것을 위해서 태어났고, 나는 이것을 위해서 살아났고, 나는 진리의 증언한 자라. 내가 왕이다! 여러분, 목사이십니까 ? 여러분, 목회자이십니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목사입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체감이지요. 내가 누구냐 이거지요.
그 다음 예수님만큼 소명감이 투철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할 일을 그렇게 뚜렷이 아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소명감이 분명하십니다. 주님은 비전으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비전으로. 주님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백 번 이상 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비유가 하나님의 나라, 모든 말씀의 결론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자나깨나 꿈을 꾼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누구의 마음 속에 심어줍니까? 제자들의 비전으로, 자기의 비전을 제자들의 비전으로 다 심어줍니다. 대화하고 설교하고 양육하면서. 그리고 예수임은 자기의 모든 권한, 권세, 능력을 100% 누구에게 위임해 줍니까? 제자들에게 그대로 100% 위임해 줍니다.
여러분, 성도들에게 일을 맡기셨으면 믿어주십시오. 믿어주라 이 말이에요.
좀 실수를 하더라도 믿어주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을 보고, 이 믿음 없는 자들아, 완악한 자들아, 그러고 책망하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명령하기를, '가라 너희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면 귀신이 물러갈 것이고 소경이 눈을 뜰 것이고 독을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고 뱀에게 물려도 죽지 않을 것이고' 이런 말씀을 주님이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그들에게 자기의 권한을 100% 위임을 해 주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이런 모습 속에서 진정한 리더가 어떤 모습인지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설교하시기보다는, 답을 주시기보다는, 뭐 하셨어요? 주님은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답을 스스로 찾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답을 주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문제는 주고 답은 그 본인이 스스로 찾도록 하는 것이 그것이 바른 교육법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더라구요. 일단 선택된 자기 제자는, 주님만큼 자기 제자를 철저히 보호하신 분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비난하면 막아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그렇지요 ? 제자들이 잘못했을지라도 그 잘못을 추궁하는 바리세인들에게 엄히 나무라지요. 철저히 보호해 줍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에게 생명을 바치고 충성하고 싶은, 그 분 앞에 내 모든 목숨을 다 바치고 싶은 사도들의 순교적인 신앙이 거기서 나온 것이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고, 제일 앞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선택된 지도자요, 훈련된 지도자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지도자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할렐루야!
하루를 목회하더라도요, 제가 또 이렇게 말씀할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좀 도전적인 목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통의 원리에 잘 길들여진 목회자보다는 성경에 의해서 새로운 원리를 창조해 나가고 그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키도록 만들어 가는 창조적인 목회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환경에 지배를 받는 목회자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는 지도자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돈에 영향력을 받는 지도자가 아니라 사명과 목표에 살아가는 그런 지도자,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지도자가 진정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지도자이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제 나름대로 해 보면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