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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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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옥, 경희대 사학과 다산학 10호(2007.06) : 55~103
1. 머리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연관, 자연인식 내지 과학기술 사상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충분치 못한 형편이다. 지금까지 자연관이나 과학기술 분야에서 정약용을 다룬 논고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정약용의 자연과학사상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한 연구들이다. 여기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를 부문별로 나누어 시론적으로 정리한 논고로부터, 정약용의 자연인식을 그의 사유체계, 특히 성리학·경학과의 상호 연관 속에서 해명하고자 한 연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최근에는 유가 전통과의 관련 속에서 정약용의 자연세계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종합적으로 구명한 논고가 제출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기예론技藝論」을 중심으로 정약용의 기술관, 기술발전론 내지 기술사상을 분석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대체로 정약용의 자연관이 이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달라졌으며, 도리道理와 물리物理, 윤리倫理와 자연自然의 분리·해체 작업을 통해 물리의 객관적인 재발견을 시도함으로써 기술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요컨대 정약용은 과학기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적 기반을 확립했고, 기술진보의 이론을 확립했으며, 선진기술 도입의 정책체계를 수립하였다는 것이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정약용의 기술발전론이 당시 사회에서 채용되지 못했던 원인을 포함한 역사적 의의에 주목하기도 하였다.
셋째, 마과회통麻科會通과 의령醫零을 중심으로 정약용의 의학론을 분석한 연구가 있다. 여기에서는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실학의 의학론을 근대적인 것으로 평가한 기존의 연구 경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정약용이 서학의 영향을 받은 자연관을 토대로 한의학 이론을 비판하고 기존의 병리관을 재정리했지만, 그것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보았다.
넷째, 정약용의 과학기술론과 서양과학과의 관련성-정약용의 서학수용西學受容, 정약용의 서학관西學觀-을 살펴본 글들이다. 일반적으로 정약용의 과학기술론은 지극히 실용적이었으며, 서양과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정약용의 서양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으며, 그것을 전반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과학기술에 대한 정약용의 기본적인 태도가 상당 부분 소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논의에 들어가면 연구자들 사이에 적잖은 견해 차이가 존재하고, 그러한 이견들은 정약용의 자연관, 자연인식의 전체 구조를 조망하는 데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다. 정약용의 과학사상을 둘러싼 논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크게 대별해 볼 수 있다.
먼저 정약용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정약용이 자연학 내지 과학기술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이것은 유교·주자학의 그것과는 차별적인 태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정약용의 근본 사상이 유교였고, 그가 평생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분야가 유교 경전의 주석이었으며, 그와 비교해 볼 때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빈약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다음으로 이와 관련해서 정약용의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정도, 서양 과학기술이 그의 자연학 관련 논의에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그의 자연학 내지 자연인식의 학문적 연원 문제와도 연관된다. 예컨대 정약용은 이익(李瀷, 1681~1763) 이래의 ‘근기남인계近畿南人系 성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그보다는 이른바 ‘경화사족京華士族’ 내부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북학北學’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은 질문들은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약용의 자연학에 대한 담론을 주자학朱子學 내부의 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반주자학反朱子學, 또는 탈주자학적脫朱子學的 지향을 내포한 새로운 논의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확장된다. 이는 정약용의 논의가 중세적 과학기술론에 머물러 있었는가, 아니면 근대 지향의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가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꿀 수도 있다. 최근 연구에서 “정약용이 수행한 일은 주희의 체계에 대한 수정과 조정이었으며”, 그것은 “유가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원시유학으로 복귀함으로써 진정한 유가 전통을 수복한 것”이었다고 평가한 것은 이러한 논점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이상의 논점들은 궁극적으로 정약용의 과학사상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의 과학기술에 대한 담론을 새로운 자연인식의 대두, 나아가 주자학과는 다른 새로운 사유체계의 모색과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정약용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자연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고, 이전의 그것과는 어떤 점에서 질적인 차별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궁극적 지향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분분한 논란이 야기된 원인은 먼저 정약용 자신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과학기술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논고를 제외하면 자연현상에 대한 정약용의 언급은 그의 여러 글 가운데 산재해 있으며, 논의의 층위도 다양하다. 따라서 연구자는 이를 분석·종합하여 계통화·체계화시켜야 하는데, 이 작업이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과학기술사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으로는 정약용의 과학기술 사상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후기 과학사상에 대한 충분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지 않다는 객관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정약용의 과학사상은 조선후기의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그 의미가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사상과 대비할 수 있는 동시대 학자들의 과학담론, 특히 정통正統 주자학자들의 그것이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근대 시기 학자들의 자연관, 과학기술 사상을 연구하는 기본적인 방법론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전근대 시기 지식인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 다시 말해 학문적 대상으로서 ‘자연’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오늘날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는 데 기인하는 문제이다. 거기에는 자연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도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목적을 위한 관심-예컨대 도리의 자연스러움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들의 자연관, 과학사상을 형상화하여 그들의 사유체계 속에 올바르게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당대의 사상적 맥락에서 그들의 저술을 읽어내는 분석방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정약용의 천문역법론을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천문역법은 ‘관상수시觀象授時’라는 제왕帝王의 임무와 관련하여 유교정치사상에서 중시된 분야였다. 거기에는 ‘천문天文’이라는 국가점성술적 요소와 ‘역법曆法’이라는 천체 운동의 규칙성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전자는 천명사상天命思想, 재이론災異論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중시되었고, 후자는 백성들에게 시간을 부여한다는 사회경제적 필요성과 더불어 왕도정치王道政治(爲民政治)의 표방으로서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정약용의 천문역법론에 대한 고찰은 그의 과학기술에 대한 태도와 함께 정치사상과 과학기술의 관련성, 나아가 그의 전체 사유체계 속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과학사상사에서 정약용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물리物理와 천天에 대한 재인식
1) 도리道理와 물리物理의 분리
정약용은 자신의 학문적 포부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나는 나이 스무 살 때 우주 사이의 일을 모두 취해 일제히 처리하고 일제히 정돈하고 싶었는데, 서른 살 마흔 살이 되어서도 그러한 뜻이 쇠약해지지 않았다. 풍상風霜을 겪은 이래로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일인 전제田制·관제官制·군제軍制·재부財賦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드디어 살펴 생각할 수 있었고[省念], 경전經傳의 전주箋注를 내는 사이에 오히려 혼잡한 것을 파헤쳐 올바른 이론으로 돌이키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정약용의 학문적 중심은 철두철미 유학이었다. 그가 자식들에게 공부 방법을 말하면서 경학經學→사학史學→실학實學(實用之學)의 순차를 제시했던 것은 이와 같은 그의 기본 자세를 잘 보여준다. “효제孝悌에 근본을 두고 경사經史·예악禮樂·병농兵農·의약醫藥의 이치를 관통하게 한다”는 그의 교육 방침은 이러한 기본 자세에서 도출되었다. 효제孝弟를 근본으로 삼고 예악으로 수식하며 정형政刑으로 보완하고 병농으로 우익을 삼는다는 것이 정약용의 학문 종지였다. 따라서 그의 저술 활동 역시 이와 같은 기본 관점 아래에서 수행되었다.
정약용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경학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일반 인민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경세택민지학經世澤民之學’에 주목하였고, 외적을 방어할 수 있는 ‘관방기용지제關防器用之制’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주역사전周易四箋을 비롯한 일련의 경학 관련 저술이 첫 번째에 해당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로 대변되는 경세학經世學 관련 저술이 두 번째에 포함될 것이고, 국방과 과학기술에 관련되는 일련의 저술은 세 번째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시 효제孝弟·예악禮樂, 감형鑑衡·재부財賦·군려軍旅·형옥刑獄, 농포農圃·의약醫藥·역상曆象·산수算數·공작工作의 기술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기술에 대한 정약용의 관심은 실용적인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학문에서 실용實用과 실리實理를 중시하였다. 그가 아들에게 경학 공부를 강조하면서도 고려사高麗史·반계수록磻溪隨錄·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성호사설星湖僿說·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의 책을 읽고 그 요점을 초록하는 일을 그만두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약용의 학문적 관심은 정통 주자학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차이점을 갖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이기론理氣論과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을 중심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에서는 양자 사이의 ‘물리物理’ 개념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에 접근해 보기로 한다. 일찍이 정이程頤는 “격물格物(의 物)은 외물外物인가, 아니면 성분중性分中의 물物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느 쪽이든)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대개 눈앞에 있는 것은 물物이 아닌 것이 없다. 물物 하나하나마다 모두 이理가 있으니, 불이 뜨겁고 물이 차가운 까닭으로부터 군신부자君臣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理이다”라고 하였고, 주희朱熹는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격물의 의미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無不到也]”이라고 해석하면서 “物은 事와 같다”고 주석을 붙였다. 이처럼 주자학에서 이理는 물리物理와 도리道理를 관통하고 있었고, 따라서 격물의 대상 역시 양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주자학자들은 물物이라는 용어를 사事의 의미까지 포괄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들의 논의 속에 등장하는 물리物理는 한편으로 자연물의 속성, 각종 기술의 원리, 나아가 자연계의 운행 원리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리事理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요컨대 그들이 격물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이치는 엄밀한 의미의 ‘물리物理’(사물의 이치, 만물의 이치)라기보다는 ‘사리事理’(사실의 이치, 일의 도리, 일의 이치)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에 비해 정약용이 사용하는 물리物理의 개념은 대체로 자연물의 속성, 기술의 원리, 자연 법칙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가 “수화조습水火燥濕은 물리物理의 같은 바이기 때문에 이치를 논하는 자들은 수화조습은 모든 나라에서 두루 합치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다”라고 했을 때의 물리는 수水·화火·조燥·습濕으로 대변되는 자연법칙이었다. 또 “상고의 시대에 개물성무開物成務와 제기이용制器利用은 모름지기 물리物理에 밝고 수리數理에 통해서 사물의 곡직曲直·방면方面·형세形勢를 소상히 살펴 그것에 적합하게 이용했으며[審曲面勢], 백공百工을 불러 이 직책을 맡게 했다.”고 했을 때의 물리는 공장工匠들의 업무와 관계되는 자연물의 이치였다.
금강산金剛山을 대상으로 물리物理를 말한 것이나, 지리학을 ‘격물리格物理’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천原泉이 구덩이에 가득 찬 다음에 전진하여 사해四海에 이른다”라는 맹자의 발언에 대해서 이것이 맹자가 물리에 통철通徹했음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했던 것 역시 자연물의 원리로서의 물리를 말한 것이다.
정약용은 계신공구戒愼恐懼의 공부방법으로 궁격窮格과 체험體驗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물리物理를 살펴 그 근본을 탐구하고, 도문학道問學으로 그 근원을 소급하여 곧바로 그 밑바닥까지 궁구하는데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격물의 대상은 그야말로 천지만물이었다. “물리物理를 탐구할 때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과 천지수화天地水火의 변화, 멀리 만리萬里의 바깥과 멀리 천고千古의 위에 이 마음을 보내 그로 하여금 궁지窮至하게 한다.”라고 하였듯이 물리 탐구의 대상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한하게 확대될 수 있었다.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주시州試 합격자를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제2장의 과목으로 ‘물리론物理論’을 제시했던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천문天文·역법曆法·농식農殖·기용器用으로서 ‘이치를 밝히는 학문’이면 모두 논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약용의 논의에서 주목되는 것은 천하의 물리를 모두 알아내기 어려우며, 이는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천하의 사물은 무한히 많기 때문에 수술數術에 정밀한 사람[巧歷]도 그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는 없으며, 박식한 사람도 능히 그 이치에 통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인간사회의 원리와 자연계의 법칙을 구분해서 파악하는 관점이 깔려있다. 정약용은 중용中庸 ‘비은장費隱章’의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능하지 못한 바가 있다.”는 구절에 대해 주희가 ‘孔子問禮問官之類’와 ‘孔子不得位, 堯舜病博施之類’로 주석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보기에 인간사회의 제도와 예제, 정치운영과 관련된 일체의 내용에 대해 성인이 알지 못하거나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고, 성인이 알지 못하는 것은 일월日月 운행의 소이연所以然, 성신星辰이 하늘 위에서 움직이는 원리, 대지가 허공에 떠 있으면서도 안정적인 이유 등과 같은 자연계의 이치와 관련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백공기예百工技藝’를 ‘후출유공後出愈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는 새로운 태도 역시 도리와 물리의 분리에 입각해서 도출된 것이었다.
지려智慮와 교사巧思가 있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기예를 습득하여 스스로 자기의 생활을 꾸려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지려志慮를 짜내어 운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교사巧思로써 천착穿鑿하는 것도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천만 명의 사람이 함께 의논한 것을 당해낼 수 없고,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그 아름다움을 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 기예技藝는 더욱 정교하게 되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기예가 더욱 공교하게 되니[世彌降則其技藝彌工], 이는 사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저 효도와 우애는 천성天性에 근본하는 것이며, 성현聖賢의 글에 밝혀져 있으니, 진실로 이를 넓혀서 충실하게 하고 닦아서 밝힌다면 곧 예의禮義의 풍속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는 진실로 밖으로부터 기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요, 또한 뒤에 나온 것에 힘입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필요한 자료와 백공기예百工技藝의 재능은 뒤에 나온 제도를 가서 배우지 않는다면, 그 몽매하고 고루함을 타파하고 이익과 혜택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국가를 도모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강구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 정약용은 효제孝弟·예의禮義로 표상되는 인간학(도덕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백공기예百工技藝로 대변되는 자연학(기술학)을 구분하고 있다. 그는 ‘이용후생에 필요한 자료’와 ‘백공기예의 재능’은 ‘뒤에 나온 제도[後出之制]’에 힘입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이익李瀷 단계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후출유공後出愈工’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약용의 생각은 이용감利用監의 창설로 이어진다.
백공百工의 교묘한 기예는 모두가 수리數理에 근본한 것이다. 반드시 구句·고股·현弦과 예각銳角·둔각鈍角의 서로 들어맞고 서로 어긋나는 근본 이치에 밝은 다음에야 이에 그 법을 깨우칠 수 있다. 진실로 스승에게 배우고 익혀 오랜 세월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끝내 습득해서 취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배후에는 물질의 생산방식, 그와 연관해서 자연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는 관념이 깔려 있었다. 물리物理와 자연학에 대해 진전된 이해를 기초로 기술의 경험 축적을 통해 진보가 일어난다는 관념이 정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정약용은 ‘백공기예’가 수리數理에 근본하고 있다고 파악했는데, 이는 수학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2) 주재천主宰天(人格天)과 자연천自然天의 분리
일찍이 교제郊祭의 대상과 성격을 둘러싸고 역대 주석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정현(鄭玄, 127~200)은 하늘에는 육천六天이 있으며 원구제圜丘祭와 교제郊祭는 각각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왕숙(王肅, 195~256)은 성증론聖證論에서 정현을 비판하면서 천신天神은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교제郊祭와 원구제圜丘祭는 동일한 것이며, 오제五帝란 상제上帝의 보좌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공영달(孔穎達, 574~648)은 주례周禮와 효경孝經 등의 경전을 원용하여 정현의 주장을 옹호했는데, 정약용은 이와 같은 공영달의 주장이 “경전의 뜻을 속여 정현을 비호하려는 것[誣經護鄭]”이라고 보아 「정씨육천지변鄭氏六天之辨」이라는 논설을 작성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는 한편 가규賈逵·마융馬融·왕숙王肅 등의 논지를 ‘당당정론堂堂正論’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와 관련된 논의에서 정약용은 상제上帝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상제上帝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과 땅과 귀신과 사람의 바깥에서 하늘과 땅, 귀신과 사람, 만물과 같은 것들을 조화造化하고, 그들을 재제宰制·안양安養하는 존재이다.
정약용은 이와 같은 상제를 천天과 동일시했다. 그런데 이때 정약용이 말하는 천天은 자연물로서의 하늘[蒼蒼有形之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른바 ‘영명주재지천靈明主宰之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하늘의 주재主宰’를 상제上帝라고 하는데, 이를 천天이라고 일컫는 것은 마치 군주(國君=王)를 국國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았다. 정약용이 정현의 주장을 천제분이론天帝分二論으로 간주하여 일관되게 비판하는 관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약용의 관점에 따른다면 상제上帝란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인데,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로 마치 인간 세계에 오직 한 명의 임금[帝]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위에 계신 임금[上帝]’이란 뜻으로 그렇게 일컫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약용에게 호천상제昊天上帝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것은 영靈과 정情이 없는 유형의 천지를 주재하는 자였으며, 따라서 천지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상제를 섬기는 행위였다.
그렇다면 정약용에게 자연천自然天은 어떤 것이었을까?
저 푸르고 푸른 유형의 하늘은 우리 사람들에게 집의 지붕이나 장막[屋宇帲幪]에 지나지 않으며, 그 품급品級은 토지수화土地水火와 더불어 같은 등급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우리 사람들의 성性과 도道의 근본이겠는가?
이른바 ‘창창유형지천蒼蒼有形之天’은 인간의 본성과는 관계가 없는 객관적 자연물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주례周禮 등의 경전에서 일월성신에 대해 제사를 지낸다고 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정약용은 이것을 일월성신 자체에 대한 제사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신령스러움을 갖추지 못한 자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열성列星은 영각靈覺이 없는 사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월성신에 대해 제사를 올리는 것은 천신天神(天之明神)이 그 운동을 주관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자미원紫微垣의 한 별을 천황대제天皇大帝라 여기고, 태미원太微垣의 다섯 별을 오방천제五方天帝라고 여겨 일월성신에 제사를 올리는 것은 상제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정약용은 주례에 근거하여 제사의 대상이 되는 귀신鬼神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보았는데, 천신天神과 지기地示, 인귀人鬼가 그것이었다. 이 가운데 천신에는 호천상제昊天上帝를 비롯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 사중司中·사명司命, 풍사風師·우사雨師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월성신 이하 천신들은 형질形質이 없는 존재들로서 각각 담당하는 대상이 있었고, 상제의 보좌[臣佐]가 되어 사방에 밝게 늘어서 있으며 각각의 이름과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즉 상제가 군림하면[穆臨] 여러 신령들이 분주히 따르게 되는데[奔屬] 거기에는 하늘[天宇]을 맡아 운행하는 자도 있고, ‘지구地毬’를 맡아 안존安存케 하는 자도 있었다. 천지사방天地四方에 예禮를 드리는 것은 바로 하늘과 땅을 담당하고, 국읍國邑과 주현州縣을 수호하는 천신天神께 예禮를 올리는 행위였다. 요컨대 상제上帝를 섬긴다는 것은 ‘유형지천有形之天’을 섬기는 것이 아니었고, 주례에서 말하는 제사의 대상으로서의 일월성신 등은 모두 ‘무형지신無形之神’이었다. 따라서 일월성신에 제사를 지낸다고 할 때 그 대상은 그것을 맡아서 운행하게 하는 ‘명신明神’이지 유형의 해와 달과 별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정약용의 관점에서 보면 일월성신을 비롯한 천체의 운동을 관찰하고 역법을 수립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요堯 임금이 희화羲和에게 명하여 호천昊天을 공경히 따라 일월성신을 역상曆象하여 삼가 인시人時를 주었다’는 「요전堯典」의 내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정약용은 여기서 호천을 상제의 올바른 호칭으로 보았다. 천지만물은 상제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는데, 일월성신의 운행과 ‘분지계폐分至啓閉’로 표상되는 사계절의 변화는 하늘이 하시는 일 가운데서도 매우 오묘한 것[天縡之玄妙者]이었다. 그러므로 요 임금이 희화에게 명하여 상제를 공경히 따라서 그 직책을 공손히 닦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약용의 논의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먼저 그가 인간의 도덕성과 관련된 주재천(인격천)과 자연천을 구분하고 있었으며, 양자 사이의 직접적 관련성을 부인하였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자연천의 내용은 유일무이한 호천상제昊天上帝의 주관하에 이루어지는 오묘한 현상들로 탐구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때의 자연 탐구는 인간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윤리성과는 무관한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연천은 결코 신앙이나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고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에서 정약용이 인격신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천을 도덕적 실천의 담보자로 분립시키는 한편 과학이 나갈 문을 열었다고 평가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3. 자연천自然天에 대한 새로운 이해
1) 천체관天體觀과 우주생성론
정약용의 자연천에 대한 인식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월성신日月星辰으로 대표되는 천체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일월성신에서 성신星辰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는 논란거리였다. 일찍이 서전書傳의 주석에서는 성星을 경성經星(28수와 衆星)과 위성緯星(五星)으로, 신辰을 ‘일월소회日月所會’로 주천도수를 나누어 12차次를 만든 것이라고 해설하였다. 그런데 ‘신辰’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병존하고 있었다. 서전의 주석처럼 12차를 신辰으로 보기도 했고, 또는 12시를 신辰이라 하기도 했으며, 대화大火의 심성心星을 신辰으로 보기도 했고, 수성水星을 신辰이라고 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각각의 경우를 검토한 끝에 신辰이란 ‘오성지총명五星之總名’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약용은 성신의 성星을 열수列宿·경성經星, 신辰을 위성緯星의 의미로 정리했고, 각종 경전에 등장하는 ‘일월성신’·‘오신五辰’ 등의 신辰의 의미도 일관되게 ‘오위지대성五緯之大星’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한漢·위魏이래로 오위五緯 가운데 수성을 신성辰星이라고 불렀던 것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유문遺文이며, 실제로는 오위五緯가 모두 신성辰星이라고 보았다. 정약용은 서전의 주석처럼 신辰을 ‘일월소회日月所會’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해 방식이 낫다고 평가했다.
정약용이 신辰을 ‘일월소회’로 설명한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한 논거는 역시 경전이었다. 이른바 ‘이경증경以經證經’의 방법이었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에는 “予欲觀古人之象, 日月星辰, 山龍華蟲作會”라는 구절이 있다. 순舜 임금이 옛 사람의 상象을 관찰하여 일월성신과 산룡화충山龍華蟲을 그림으로 그려 옷을 만들었다는 대목이다. 정약용이 제기한 의문은 신辰을 12차로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의 “實柴祀日月星辰”이라는 구절이었다. 정약용이 생각하기에 일월성신이 제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체가 있고, 그것을 주관하는 천신天神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신辰을 12차로 해석할 경우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약용은 12차를 태양의 궤도를 파악하기 위한 표지(日躔之所舍·日躔之表識)라고 정의하였다. 본래 12차는 태양과 달과 오행성의 위치를 관측하기 위해 적도대를 서에서 동으로 12등분한 것이다. 하늘을 12개로 나눈 것은 목성[歲星]의 공전 주기가 대략 12년(11.86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목성이 천구상에서 해마다 다른 위치에 나타나는 현상을 표시하기 위한 구획이었다.
정약용은 북신北辰과 북극北極을 같은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극極’이란 글자가 본래 ‘옥극屋極’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옛날에는 집을 삿갓 모양으로 지었는데 그 중앙의 튀어나온 부분을 ‘옥극屋極’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극은 하늘의 축[天樞]으로 하늘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옥극屋極’과 같은 뜻으로 북극이라 명명했다고 보았다. 북극과 같은 뜻인 북신은 하늘의 축인데 그곳에는 특별한 별이 없기 때문에 ‘신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는 일찍이 소옹이 “땅에 돌이 없는 곳은 모두 흙이다. 하늘에 별이 없는 곳은 모두 신辰이다”라고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북신에 대한 개념 정의를 토대로 정약용은 “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라는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의 구절을 새롭게 해석했다. 이에 따르면 ‘북신거기소北辰居其所’의 의미는 북극 한 점이 자오선상의 진남북의 위치에 정확하게 처하는 것이며, ‘중성공지衆星共之’란 하늘의 축인 북극이 회전함에 따라 뭇별들이 따라서 돌기 때문에 북극과 “함께 운행한다”는 뜻이었다.
정약용은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열요지계별列曜之界別’, 또는 ‘황도지계분黃道之界分’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전통 별자리로 중시되었던 3원垣 28수宿 가운데 28수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정약용이 생각하기에 28수는 여러 별들의 강령綱領이 될 수 없었고, 사방을 구별할 수 있는 표지標識도 아니었다. 이보다 크고 넓은 것으로 북두칠성北斗七星이나 헌원성軒轅星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적도의 둘레가 360도의 허공으로 구획이나 경계[界限]가 없어 ‘지망指望’에 어려움이 있어서 황도 좌우의 28개 별자리를 황도[日躔] 몇 도의 표지로 삼았던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것을 동서남북으로 구분하여 각각 7개의 별자리씩 배분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다만 역가曆家의 편의에 따른 구획이었고, 하늘 위에서 동서남북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약용은 서경의 “星有好風, 星有好雨”의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도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서전의 주석에서는 “바람을 좋아하는 것은 기성箕星이고, 비를 좋아하는 것은 필성畢星이다. …… 생각하건대 별은 모두 좋아하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설명 방식이었다. 정약용은 이러한 해석의 문제점을 28수의 개념 규정과 관련하여 변설하였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28수에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배정할 수 없고, 따라서 이를 오행五行에 분배할 수 없으며, 상극相克으로 그 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와 같은 설명 방식은 천도天道를 속이고 사람들을 우롱하는 극치라고 비판하였다.
28수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은 분야설分野說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었다. 분야설의 핵심은 하늘을 12분야로 나누고 각각에 중국의 구주九州를 배당하여 천문天文과 인사人事의 상호 연관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12분야를 나누는 기준은 별자리였다. 정약용의 비판은 하늘의 별자리에는 고정된 방위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으로부터 시작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28수는 역산가들이 황도 주변에 걸쳐있는 주요한 별자리를 취해서 ‘전도躔度의 표지標識’로 삼은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정약용은 28수가 하늘을 따라 회전하면서 끝없이 순환하는 것이니 동서가 있을 수 없고, 황도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남북 양극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남북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이 별자리들을 청룡·백호·주작·현무라고 하여 동서남북으로 분배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분야설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고, 28수는 어느 한 방위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구주九州의 여러 나라를 각각의 별자리에 맞추고 이로써 재상災祥을 점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었다.
한편 구주설九州說의 이론적 문제점도 지적되었다. 구주설은 추연鄒衍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공邛·엄弇·융戎·기주冀州 등은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니, 아홉 구역의 구체적인 경계는 상세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우공禹貢의 구주九州는 대지 전체로 보면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이니 오악五嶽으로 대지 전체를 편안하게 하려는 것도 어렵다고 보았다. 요컨대 28수로 대표되는 12분야는 전체 하늘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중국만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분야설은 근본적으로 불합리한 학설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천체를 포함한 천지만물의 생성과정에 대해 정약용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자연학의 차원에서 이에 대한 명확한 논의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다. 먼저 「태극도太極圖」의 우주생성론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이다. 전통적으로 성리학자들은 「태극도」에 제시된 ‘태극太極→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를 만물생성의 차서次序로 이해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여기에서 사상四象을 천天·지地·수水·화火로 해석함으로써 그 나름의 독창적인 해석을 보여주었다. 이는 ‘화火·기氣·수水·토土’의 사행설四行說을 주장한 서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천天·지地·수水·화火 네 가지가 다른 사물과 섞이지 않고 스스로 형상을 만드는 물체라고 간주하였다. 팔괘는 이와 같은 사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었다. 예컨대 하늘이 불을 밀면 바람이 되고, 불이 하늘을 가르면 우레가 되며, 물이 땅을 깎으면 산이 되고, 땅이 물을 두르면 못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천天·지地·수水·화火의 상호 작용으로 풍風·운雷·산山·택澤이 만들어지는 과정, 이것이 바로 사상으로부터 팔괘가 만들어지는 경로였다.
이렇듯 정약용은 양의兩儀를 천지天地로 간주했으며, 하늘은 불과 합쳐져서 하늘이 되고, 땅은 물과 더불어 땅이 된다고 보았다. 하늘에서 유성이나 혜성이 나타나는 것은 불의 증거이고, 땅에 습기가 섞여 있는 것은 물이 충만해 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선천先天의 기원[胚膜]이라 할 수 있는 태극이 갈라져 천지天地가 되고, 천지天地가 펼쳐져 천지수화天地水火가 되며, 천화天火가 교섭해서 풍뢰風雷가 되고, 지수地水가 결합하여 산택山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역에서 말하는 ‘사상생팔괘四象生八卦’의 의미였다. 요컨대 태극이란 천지수화天地水火의 모태[胚胎]이며, 일월성신이나 초목금수와 같이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형상形象들은 변화[變敓]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주희가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말한 “하늘이 음양陰陽·오행五行으로 만물萬物을 화생化生함에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理 또한 부여하였다”는 설명 방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음양이란 본래 체질體質이 없고 다만 명암明闇이 있을 뿐이니 만물의 부모가 될 수 없으며, 오행이란 만물 가운데 다섯 개의 사물에 불과한데 다섯 개로 만물을 생성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한편 정약용은 주역의 태극을 북신北辰으로 해석하는 마융馬融의 견해에 찬성하기도 하였다. 고경古經에서는 극極을 ‘혼륜명재지기混淪溟滓之氣’나 ‘충막현묘지리沖漠玄妙之理’로 명명한 적이 없으며, 그것은 ‘옥극屋極’과 마찬가지로 중간이 융기되어 사방을 끌어 모은다는 뜻이라고 보았다. 정약용은 사물이 생성되는 방법은 무수하지만 그 실상은 오직 하나라고 생각했다. 수박[西瓜]이 처음에 만들어질 때 그 크기가 조[粟]와 같이 작은데 그것이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꼭지[蒂]로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늘어나 원형을 이루고, 다시 수렴되어서 화제花臍(꼭지 반대쪽의 오목한 곳)가 되며, 실하고 팽팽해져 커다란 수박[大瓜]이 되는 현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천지가 창조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북신北辰은 수박의 꼭지와 같은 것으로 점차 펴져서 원형이 되었다 수렴되어 남극이 된다는 것이다.
2) 좌선설左旋說의 지지와 우행설右行說 비판
정약용은 “천체는 지극히 둥근데 좌선左旋하여 그치지 않고, 땅의 형체는 둥글어서[渾圓] 빙 둘러서 가면 다시 돌아온다”고 하였다. 이는 물론 천체운행론에 초점을 둔 이야기는 아니었고, 하늘과 땅에는 동서東西의 구별이 없으며 따라서 오행五行을 방위에 배당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정약용이 하늘은 좌선한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하늘 위에서 운행하는 각종 천체들의 운동 방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에 대한 정약용의 논의는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정조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제출되었다. 정조의 질문은 전통적인 좌선설左旋說과 우행설右行說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으며, 주희가 시전詩傳의 주석에서 역가曆家의 우행설을 채택한 이유를 묻는 형식이었다. 정약용은 먼저 자기 자신이 우행설의 경우 고법古法과 금법今法을 물론하고 의심한다고 고백하였다. 이는 주희가 시전의 주석에서 우행설을 채택한 것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면서 당시 통용되고 있던 시헌력의 우행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었다.
시헌력의 우행설은 일월오성천日月五星天이 모두 우행右行하는데, 종동천宗動天이 ‘혼호지기渾灝之氣’로 이들을 끌고 서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좌선左旋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이향이대동異嚮而帶動’이었다. 정약용은 천하의 사물은 상리常理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사물은 다른 종류라도 같은 정情을 가질 수 있으므로 다른 사물과의 비유를 통해 이치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우행설을 입증하기 위해 동원된 것은 맷돌과 개미[磨蟻], 배와 사람[舟人]의 비유였다. 정약용의 설명에 따르면 개미와 사람의 경우 전족前足과 후족後足, 좌족左足과 우족右足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맷돌이나 배에 붙었다 떨어졌다 할 수 있어서 다른 곳을 향하면서도 맷돌이나 배와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異嚮而帶動]. 그러나 일월오성천의 경우에는 종동천과 붙었다 떨어졌다 할 수 있는 장치가 없으므로 ‘이향이대동異嚮而帶動’할 수 없다고 보았다. 나아가 물레[紡車]의 비유에 대해서도 적합성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비판하였다. 요컨대 정약용은 종동천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월오성천은 모두 그 본래의 운동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左旋]이라고 보았으며, 빠르고 느림으로 인해 발생하는 진퇴의 차이는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이와 같은 정약용의 논의는 「종동천변宗動天辨」이라는 논설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시경강의보다 뒤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논설에서는 좌선과 우선이라는 용어가 혼동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논지는 앞서 살펴본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정약용은 종동천이란 전통적인 중국의 천문이론에 비추어 볼 때 ‘태허太虛’를 의미한다고 보았으나 그 실체는 부정하였다. 그는 물레[軠車]의 비유로 종동천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논의에 대해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로 몇 가지 문제점을 들었다. 앞의 시경강의 내용과 비교해 볼 때 추가된 것은 종동천의 운행 속도 문제였다. 정약용은 태양의 운행 속도는 총탄보다 수만 배 빠른데, 종동천의 높이와 크기는 태양천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만약 종동천이 존재한다면 그 운행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를 것인데, 형체가 있는 사물 가운데 이러한 이치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요컨대 정약용은 종동천宗動天이란 없으며 칠요천七曜天은 본래 좌선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3) 일월식론日月蝕論
정약용은 여러 곳에서 일월식의 기본 원리에 대해 언급하였다.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되고, 땅이 해를 가리면 월식이 된다,”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되고, 땅이 태양을 중간에서 막으면 월식이 된다,”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되고<일식은 합삭合朔 때 발생한다>, 땅이 해를 막으면 월식이 된다<월식은 보름 때 발생한다>”는 등의 발언이 그것이다. 이는 이익李瀷 이래 근기남인계의 일월식론日月蝕論을 계승한 것으로 그 이론적 배경은 서양의 일월식론이었다. 다음과 같은 정약용의 설명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日食이 된다. 대개 일천日天은 위에 있고 월천月天은 아래에 있는데 합삭合朔 때에 해와 달이 교회交會하여 동서東西의 도수가 같고 남북南北의 도수가 같게 되면(南北同道의 잘못-인용자) 달이 해를 가린다. 그러나 반드시 해와 달과 사람의 눈이 일직선상에 있어야 그 (일日)식食을 볼 수 있다. 땅이 중간에서 해를 가리면 월식月食이 된다. 대개 달은 본래 빛이 없고 햇빛을 받아 빛나게 된다. 보름 때 달과 땅과 해가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땅이 햇빛을 가리면 사람은 땅과 해를 등지고 월식月食을 볼 수 있다.
정약용은 해와 달이 모두 지평선 위에 있는데도 월식이 발생하는 경우를 들어 위와 같은 월식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의에 대해 이때 지평선 위에 보이는 달은 실제의 달이 아니라 지평선 아래에 있는 달이 적기積氣에 비춰서 떠오른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춘추春秋에 보면 노魯 은공隱公 3년에 “己巳, 日有食之”라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이것을 재이와 관련하여 해석하면서 날짜만 기록하고 초하루라고 하지 않은 것은 초하루가 아닌 다른 날에 일식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예전 학자들 가운데는 합삭 때가 아니라 초2일이나 그믐에 일식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보고, 이를 군주의 행위가 폭급暴急한가 나약懦弱한가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었다. 이는 일식을 군주와 관련된 재이로 여기는 전통적 입장에서 제기된 논의였는데, 하휴(何休, 129~182)는 그와 같은 담론의 대표자였다. 정약용은 이른바 이일식二日食이나 회일식晦日食과 같은 현상은 모두 역법의 오류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라고 보았다.
이처럼 정약용은 일식이 결코 재이[灾變]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일월식은 그것이 발생하는 원리가 분명하며, 발생 시각도 미리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재변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요堯 임금이 다스리는 때라고 해서 줄어들거나 걸桀 임금이 다스리는 때라고 해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옛날의 성현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거나 시정時政을 허물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옛날에는 역법이 상세하지 못하여 이것을 미리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식이나 월식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놀라서 천변이라 여기고 당시의 정치에 허물을 돌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약용은 일식과 월식이 본래 전도躔度가 있어 그 발생 시각을 미리 알 수 있으므로 재변災變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식救食의 의식만은 장엄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외천畏天’·‘사천事天’의 일종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일식과 월식을 재이로 생각하는, 이른바 ‘음양구기지설陰陽拘忌之說’에 입각한 전통적 재이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천인분이天人分二의 철학적 기초 위에서 과학적 인식과는 별개로 정치사상적 의미에서만 일월식의 가치를 논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이수광(李睟光, 1563~1682)→허목(許穆, 1595~1682)·윤휴(尹鑴, 1617~1680)→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근기남인계의 학문적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도리道理와 물리物理의 분리, 인격천人格天(上帝天)과 자연천自然天의 분리, 나아가 인간학人間學과 자연학의 분리라는 사상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4. 실용實用 중시의 역법론曆法論
1) 기삼백朞三百·선기옥형론璿璣玉衡論
일반 유자儒者들이 전통 천문학을 공부할 때 가장 먼저 부딪치게 되는 개념은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요순堯舜으로 대표되는 역대 성왕의 천문역산학(=曆象)을 이해하는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유교 정치사상의 요체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정약용의 관점을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약용은 기삼백의 문장을 ‘기윤지리朞閏之理’를 논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1년 사계절의 길이와 치윤법을 뜻한다. 정약용은 고법古法은 ‘파분석리破分析釐’해서 어리석은 자가 깨닫기 어려운 반면 금법今法은 간명簡明해서 1/4일의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1일=96각刻의 시헌력時憲曆 체제에서 1각을 15분分, 1분을 100초秒로 분할함으로써 계산의 편리함을 추구했다는 뜻이다. 정약용은 동서양 치윤법의 차이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의 치윤법이 태음태양력 체제 하에서 전통적으로 ‘오세재윤五歲再閏’의 방식을 취한 반면, 서양은 태양력 체제로 윤달을 두는 방식이 아니라 4년에 한 번씩 윤일閏日을 넣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의 역법에서는 우수雨水 후 5일경에 윤일을 둔다고 하면서 오랜 시간이 흐르면 또 하루의 차이가 발생한다고도 했다. 대체로 양력에서 우수는 양력에서 2월 19일경이므로, 정약용의 언급은 태양력에서 2월 말에 윤일을 두는 방식을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약용이 이러한 동서양 ‘기윤지법朞閏之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이치가 동일하다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추산하는 방법은 각각 다르지만 자연의 정해진 수치는 똑같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정약용의 관점은 비록 방법론상의 차이는 있더라도 동일한 자연물을 대상으로 관측을 통해 계산해내는 수치와 그를 바탕으로 제작되는 역법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정약용은 신법역서新法曆書(新法算書=西洋新法曆書)를 인용하여 서양의 치윤법을 설명했다. 신법산서에서는 “서법에서 1년은 365 1/4일이므로 매 4년마다 나머지가 하루를 이룬다. 이에 인하여 윤일을 두니 100년 가운데 평년[整年]이 75번이고, 윤년이 25번이다. 모두 36,525일[365.25×100=36,525]이다”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이것이 주비산경周髀算經에서 365일을 경세經歲라 하고, 1/4일이 4년 동안 쌓여 하루가 증가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또 1588년(萬曆 16)에 제곡第谷(Tycho Brahe)이 측정한 춘분시각과 그 이전인 1488년(弘治 1)에 서역西域의 백이나와白耳那瓦가 측정한 값을 서로 비교하여 세실을 정했는데 그 값이 365일 23각 3분 45초였다는 사실, 그것을 회회력回回曆과 비교해 보면 소여小餘가 분초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회회력법의 ‘분초지수分秒之數’가 서법西法과 같지는 않지만 그 세실歲實은 반드시 합치된다고도 하였다. 아울러 서양의 의파곡(依巴谷, Hipparchus, 100~170 B.C.)이 관측한 수치가 원대元代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이 수시력授時曆에서 제시한 삭책朔策(朔望月의 길이)인 29일 5305분 93초와 분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소개한 다음 정약용은 ‘몽학지사蒙學之士’라도 세실歲實의 일각분초日刻分秒의 수치를 알고 이것을 가지고 계산을 미루어 가면 2년 반마다 윤월을 계산해 넣거나, 또는 4년마다 윤일을 배치하는 데 번거로움이나 의혹이 없을 것이며, 난해한 부분에 애쓸 필요도 없으리라고 단언했다. 이는 세실값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한 달의 크기는 역법 계산에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요전」에서 1년의 날짜 수만을 말하고 한 달의 날짜 수를 제시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위에서 정약용이 인용한 신법산서의 내용과 그에 대한 평가는 청淸의 학자 진혜전(秦蕙田, 1702~1764)이 오례통고五禮通考에서 제시한 견해였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서법의 세실을 주비산경의 내용이나 회회력과 비교한 것은 진혜전의 견해였다. 그는 서양의 천문역산학이 본래 주비산경의 영향을 받았고, 뒤에는 회회력에 근본하였으며, 그들 스스로는 측험測驗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 학문의 요체는 근본한 바가 있는 것이고, 다만 뒤에 측험했을 뿐이라고 보는 입장에 서 있었다. 정약용은 일찍부터 서건학(徐乾學, 1631~1694)의 독례통고讀禮通考와 그것을 계승한 진혜전의 오례통고 등의 책을 참조하고 있었다. 기삼백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정약용은 진혜전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세차歲差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진晉의 우희虞喜가 세차법을 수립했는데, 대략 70여 년이면 1도의 차이가 나고, 2천 백여 년이 경과하면 30도에 이르러 달이 바뀐다고 하였다. 이는 중성中星의 변화와 연관되는 문제였는데, 태양의 궤도가 위치하는 별자리를 관찰해보면 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경성의 움직임은 매우 미세하지만 세월이 오래되면 그 오차가 쌓여 별자리의 변화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정약용이 28수로 대표되는 경성 역시 준거로 삼을 수 없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서경書經 선기옥형장璿璣玉衡章의 “在璿璣玉衡 以齊七政”이란 구절에 대해 전면적인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종래 선기옥형을 혼천의로, 칠정을 일월오행성으로 해석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선기옥형론은 “선기옥형은 하늘을 본뜬 천문의기가 아니고, 칠정은 일월오성이 아니며, 일월오행성은 가지런하게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그는 선기璿璣를 자[尺度]로, 옥형玉衡을 저울[權秤]로, 정政을 바르게 한다[正]는 의미로, 칠정七政을 「홍범洪範」의 팔정八政과 같은 종류로 파악했다. 요컨대 성왕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사를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동률도량형同律度量衡’과 같은 사업이 가장 급선무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선기옥형에 대한 정약용의 새로운 견해는 “협시월정일協時月正日”에 대한 해석과도 관련이 있었다. “在璿璣玉衡 以齊七政”의 ‘제齊’자와 마찬가지로 기존 해석에서는 ‘협協’과 ‘정正’의 의미 또한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보았다. 즉 “사계절과 달을 맞추어 날짜를 바로잡는다”고 해석하여 군주가 제후들의 잘못된 역법을 고쳐준다는 의미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이러한 설명에 반대하였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가지런하게 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세歲·일日·월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약용에게 “협시월정일協時月正日”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지구설의 원리에 입각해 남북의 위도에 따른 절기시각의 차이와 동서의 경도에 따른 일출·일몰 시각의 차이를 교정해 주는 일이었다. 즉 순舜 임금이 “협시월정일”했던 이유는 사방의 절기의 조만과 일출입 시각에 차이가 있으므로 이것을 살펴 역법의 지역적 차이를 개정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2) 역법관曆法觀과 역상개혁론曆象改革論
정약용은 ‘치력명시治曆明時’로 대변되는 역법을 ‘신성지소무神聖之所務’로 정의하였다. 그것은 논어論語 「요왈堯曰」의 ‘역수曆數’에 대한 해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주희는 “하늘의 역수曆數가 네 몸에 있다[天之曆數在爾躬]”라는 구절에 대해 역수란 제왕帝王이 서로 계승하는 차례로서 이것이 세시歲時와 절기節氣의 선후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다고 해석하였다. 정약용은 이러한 주희류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역수란 그야말로 역상수시曆象授時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고시대에는 오직 신성神聖한 자만이 역상曆象을 다스렸고, 역수曆數를 관장한 사람이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역수의 직책이 네 몸에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혼돈했던 옛날에는 역법[曆紀]이 밝혀지지 않았고, 신성의 커다란 지혜가 아니면 그 직책을 담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직무를 맡았던 자가 대통大統을 계승했다는 주장이다. 정약용이 이와 같은 판단을 내린 근거는 역시 경전이었다. 그에 따르면 ‘역수曆數’란 표현은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등장하는데 이때의 역수는 분명히 ‘치력명시지정治曆明時之政’을 가리키기 때문에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정약용은 지리地理와 비교해 볼 때 천문역법은 그 대강이 밝혀졌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천문역법의 대상이 되는 천체의 경우 사람이 직접 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늘은 매우 높고 범위가 광대하며 형체도 아득하게 멀어서 지교智巧로써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눈을 들어 보면 천체의 절반가량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별들의 위치와 궤도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점성술을 부정하고 역대의 천문지天文志와 오행지五行志에 수록된 각종 재이 기록에 대해서 증험된 바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은 천체의 운행에는 일정한 도수가 있어 어지럽힐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한漢·진晉 이래로 역易을 역법曆法으로 해설하려는 경향, 다시 말해 역曆과 역易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역법曆法의 원리가 역易에 있다고 보는 견해는 문제가 있었다. 정약용이 보기에 역도易道는 ‘상象’일 따름이었다. 예컨대 12벽괘辟卦가 사시四時를, 중부中孚·소과小過괘가 양윤兩閏을 상징하며, 건乾·곤坤 두 괘가 천지를 상징하고 나머지 62괘가 ‘오세재윤五歲再閏’(5×12+2=62)의 원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약용은 역易이 역법曆法을 본뜨고 있다면[以易象曆] 말이 되지만, 거꾸로 역법曆法이 역易을 본뜨고 있다고 하면[以曆象易]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역법이란 해와 달과 오행성의 기록이니,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사시가 어그러지게 되는데 어찌 역易을 본떠서 역법을 만들 겨를이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정약용은 역대 개력改曆의 역사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헌원軒轅과 제곡帝嚳 이래로 역법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니, 한대漢代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역법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정약용은 그 원인을 세차歲差와 세실歲實의 문제에서 찾았다. 세차로 인해 일월성신의 도수에 변화가 일어나고, 역법에서 설정한 세실과 실제 1회귀년 사이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어 이것이 쌓이면 오차가 발생하게 된다. 역법이 아무리 정밀해진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오차의 발생은 필연적이고, 이에 따라 역법은 개정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개력의 방향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정약용은 기예技藝의 역사적 진보를 이야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역법 역시 시대의 경과와 더불어 발전해 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우리나라 역대 역법의 변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1799년(정조 23) 정조는 동문휘고同文彙考와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추려 따로 한 질의 책을 만들고자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이듬해 그의 서거로 거행되지 못하다가 순조년간에 사대고례事大考例라는 이름으로 다시 추진되었다. 이 책의 편찬을 주관한 사람이 바로 정약용의 제자 이청李田靑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의 증언에 따르면 이 책의 범례凡例·제서題敍·비표比表·안설案說 등은 모두 그 자신이 작성한 것이며, 동문휘고와 통문관지를 산삭하고 보완하는 것도 그의 자문에 따라 결정했다고 한다. 사대고례에는 「역일고曆日考」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서문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대 역법에 대한 정약용의 인식을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역일曆日은 예로부터 중국의 역법을 사용했다. 백제는 송의 원가력元嘉曆을 사용했고, 신라는 문무왕文武王 때 대나마大奈麻 덕복德福이 당에 들어가 인덕력법麟德曆法을 얻어와 시행하였다. 고려 초에는 당의 선명력宣明曆을 사용하다가 충선왕忠宣王 때 원元의 수시력授時曆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본조本朝에 이르러 홍무洪武년간 이후로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하다가 순치順治년간에 시헌력時憲曆으로 바꾸어 시행하였으니, 지금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이와 같은 변천 과정을 거쳐 온 당시 조선의 역법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역대 성왕들은 모두 역법에 밝았는데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貴族]은 이것을 비루한 일이라 여기고 있으며, 오직 하급 관료의 족속들[官師諸族]만이 이 기예를 익히고 있으니 나쁜 습속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천문역법을 주관하는 관상감의 주요 업무가 중인 계층의 하급 관료들에 의해 전담되고 있던 현실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약용이 제시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양반 사대부들이 천문역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도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문신文臣 가운데 나이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역법을 다스리는 여러 책을 익히게 하고, 칠정七政의 교식交食과 능범凌犯의 수치를 능히 계산할 수 있는 자는 관상감觀象監 도정都正으로 삼도록 허용하며, 한번 이 직책에 제수된 자는 모든 청요직淸要職에 (진출하는데) 장애가 없도록 한다면,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진신대부縉紳大夫 가운데 능히 역법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나올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상감의 전문 기술자를 북경에 보내 서양의 천문역법 기술을 배워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관상감觀象監에서 2인, 사역원司譯院에서 2인을 선발하여 이용감利用監의 학관學官으로 삼고, 이들을 북경에 보내 공부하게 하고 그 실적을 정조政曹(吏曹와 兵曹)에 보고하여 동반東班의 정직正職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을 주자는 주장이었다.
한편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관상감觀象監의 직무를 정리하면서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중시되었던 지리학地理學·명과학命課學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역서曆書에 그와 관련된 내용 대신에 절기시각, 일월식 시각, 일출·일몰 시각 등을 기재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당시 역서에는 날짜에 따라 제사祭祀·혼인婚姻·출행出行·침자針刺 등 일상생활의 길흉을 점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정약용은 이런 일체의 내용을 삭제하고 그 대신 「하소정夏小正」과 「월령月令」에서 왕정王政의 좋은 내용을 뽑아 절기에 따라 편입하고, 아울러 고금의 각종 농서와 의서를 참조하여 구곡九穀·백과百果·제약諸藥의 파종·모종·채취에 대한 내용을 절기와 지역의 차이를 고려하여 기재하는 것이 ‘대천리물代天理物’, ‘경수인시敬授人時’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강조하였다. 현재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에 수록되어 있는 「임자세제도태양출입주야시각壬子歲諸道太陽出入晝夜時刻」과 「임자세제도절기시각壬子歲諸道節氣時刻」은 이러한 관점에서 1792년(정조 16) 각도의 일출·일몰 시각과 밤낮의 길이 및 각도의 24절기 시각을 도표화해 정리한 것이다.
일찍부터 정약용은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천문역법의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는 명대明代 모원의茅元儀가 주창한 점운占雲·점기占氣의 방법을 비판하면서 천문역법을 공부하는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천체 관측을 통해 기후 변화를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 “천체 관측을 통해 천재天災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사실 태양을 제외하면 천체 현상과 기후 변화를 직접적으로 대응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약용의 관점은 재이설災異說에 입각해 천문 현상에 주목했던 종래의 방식과는 일정한 거리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5. 맺음말
정약용의 학문적 중심은 유학, 그 가운데서도 경학이었다. 그는 경학 연구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천문역법론을 개진하였다. 그것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정리되는데 하나는 전통 천문역법론에 대한 비판과 수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 천문역법의 수용을 통한 절충·보완 작업이었다. 일월성신에 대한 새로운 정의, 분야설分野說을 비롯하여 음양오행론을 중심으로 한 전통 천문역법론에 대한 비판, 우주생성론의 수정, 선기옥형론璿璣玉衡論의 재해석 등이 전자에 속하는 것이라면, 서양 일월식론日月蝕論의 적극적인 도입과 기삼백론朞三百論에서 보이는 서양 역법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후자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연학 탐구의 바탕이 되었던 것은 인식론상의 변화였고, 그 중심에는 물리物理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유학의 핵심 주제였던 인간의 도덕성과 관련된 주재천主宰天(人格天)을 자연천自然天으로부터 분리시켰고, 그 연장선상에서 물리에 대한 객관적 탐구의 논리 근거를 마련하였다. 아직 자연학을 자신의 학문적 중심으로 설정하는 단계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실리實理와 실용實用의 차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였고, 천문天文·역법曆法·농식農殖·기용器用 등의 ‘명리지학明理之學’을 탐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끝으로 정약용이 자신의 천문역법론을 구성하는데 활용했던 지식과 정보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그의 자연학 내지 과학사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는 데도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역대의 경학 자료를 들 수 있다. 거기에는 한대이래 청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주석가들의 수많은 저서가 망라되어 있다. 정약용은 그에 대한 취사선택과 비판·보완 작업을 통해 그 나름의 독자적인 경학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것은 천문역법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여겨진다. 특히 이 분야에서는 서학 도입 이후 명·청대, 특히 청대 학자들의 각종 주석서의 내용과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기존 연구에서 지적되어 온 바와 같이 서학의 영향이 고려되어야 한다. 정약용은 10대 후반 이후 이가환(李家煥, 1742~1801)과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영향 하에 이익李瀷의 유저遺著에 대한 학습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서학서에 접하게 되었다. 또 그와 평생 학문적 동지이기도 했던 중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이미 1780년대에 이벽(李檗, 1754~1786)과의 교유를 통해 ‘역수지학曆數之學’을 전수받고 기하원본幾何原本을 탐구하였다. 당시 정약용이 관심을 기울였던 서양의 과학기술은 천문天文·역상曆象·농정農政·수리水利 등의 분야였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천주교 신앙이 정치적 문제로 비화된 이후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젊은 시절의 학습 내용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정약용의 논의에서 서양 과학과 관련된 내용을 추출해내고, 그것이 그의 전체 경학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검토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다.
아울러 ‘근기남인계 성호학파’의 학문적 연원 속에서 정약용의 천문역법론을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정약용과 혈연적·학문적·정치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던 이가환은 당대 천문역산학의 대가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과 금대전책錦帶殿策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그의 논의를 일별해 보면 많은 부분에서 정약용과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자는 서학 수용 문제에서도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었다. 일찍이 이가환은 「천문책天文策」에서 서양의 청몽기설淸蒙氣說을 주장하였는데, 이것과 서학의 관련성이 문제되면서 1795년(정조 19)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가환에게 편지를 보내 몽기설의 전거로는 속석束晳 이외에도 한서漢書 경방전京方傳의 내용을 거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왜 이런 것들에 의거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이는 이가환과 정약용이 일찍부터 서양의 천문역산학을 수용하면서 반대파의 정치적 공세에 대비하기 위한 방도로 중국의 역대 전적에서 그 기원을 찾고자 노력했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정약용의 천문역법론은 역대의 경전 주석에 나타난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근기남인계 성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당시까지 도입된 서양 천문역산학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수정·보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작업은 경학의 일종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경학을 통한 주자학의 비판과 극복이라는 정약용 나름의 특징적 학문방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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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문天文’이라는 국가점성술적 요소와 ‘역법曆法’이라는 천체 운동의 규칙성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전자는 천명사상天命思想, 재이론災異論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중시되었고, 후자는 백성들에게 시간을 부여한다는 사회경제적 필요성과 더불어 왕도정치王道政治(爲民政治)의 표방으로서 중요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