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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한일전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는 이태호. 옆에 최순호(14번)의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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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감스럽게도 1986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선 한 경기도 출장을 못하셨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벨기에전에서 약 20분 정도 밖에 뛰지 못하셨지요?
많이 아쉬웠습니다. 선수라면 누구나 다 월드컵 무대에서 뛰고 싶으니까요. 더구나 그 때 컨디션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수 기용은 감독의 절대적 권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지요.
- 1986년 월드컵 때는 마라도나를 직접 보셨겠군요.
네. 정말 축구를 잘 하더군요!(웃음) 한국이 첫 게임에서 아르헨티나와 붙었을 때 마라도나를 처음에 발 빠른 김평석 선배가 마크했습니다. 그런데 안되더라구요. 그 다음으로 허정무 선배님이 마크하기 시작했는데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라도나는 정상적인 수비로는 도저히 마크가 불가능했어요. 그 때부터 우리 팀이 좀 터프하게 했죠.
마라도나가 개인기만 좋은 게 아니라 대단히 빠르더라구요. 키는 작지만 몸이 워낙 단단해서 몸싸움에도 안 밀리구요. 말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축구를 잘 하더군요.
- 대표팀 시절에 최순호 감독님과 호흡이 잘 맞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순호랑도 호흡이 잘 맞았고, (변)병주하고도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대표팀에서 같이 뛰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았지요. 예를 들어 변병주가 오른쪽 측면에서 센타링 해줄 때 볼이 어디로 올지 감을 쉽게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순호도 마찬가지구요.
- 고려대 졸업하신 후 1983년에 대우에 입단하셨지요?
입단한 후 그 해에 수퍼리그(현 K-리그)가 창설이 돼서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제가 유공으로 갈 뻔했었어요. 대우와 계약하기 전에 유공에서 좋은 조건에 제의를 해왔거든요. 그런데 제가 고려대 4학년 때 대우로부터 한 달에 30만원씩 후원금을 받 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도의상 유공으로 갈 수가 없었지요.
- 당시 대우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레알 마드리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호화 멤버였습니다.
그때 멤버 좋았지요. 조광래, 박창선, 박종원, 유태목, 김강남, 김성남, 장외룡, 이춘석, 정해원, 강신우, 변병주가 있었으니까요. 거의 대표팀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우가 1984년, 87년, 91년에 정규 리그 우승을 차지했어요. 저는 1984년 베스트 11에 선발이 됐고, 90년 준우승 했을 때도 베스트 11과 모범상을 수상했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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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가 당시에 다른 구단과 비교해 시스템이 잘 정립 되었나요?
제 생각엔 그때 대우가 국내팀 중엔 가장 선진 시스템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외국 감독도 불러온 거 아니겠습니까. 김우중 회장께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거든요. 저희는 편하게 운동을 할 수 있었어요. 유니폼도 다른 팀과 비교하면 세련된 디자인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 당시 대우팀을 맡았던 엥겔, 비츠케이 감독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십시오.
엥겔 감독은 1990년 시즌, 비츠케이 감독은 1991년 시즌에 대우 감독을 했는데 솔직히 엥겔, 비츠케이 두 감독 모두 저하고는 안 맞았습니다.
두 분 모두 ‘힘의 축구’를 구사하는 지도자였거든요. 엥겔 감독의 경우 처음엔 안 맞다가 나중에는 좋아져서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연락을 주고받고 했는데, 비츠케이 감독하고는 사이가 굉장히 불편했었어요.
당시 제가 대우 주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츠케이 감독은 저를 기용을 안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아예 출전 엔트리에서 제외를 시키더라구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1990년에 대우가 준우승했을 때 제가 베스트 11에 선발이 됐고 모범상까지 수상을 했는데 기용을 안하는 겁니다. 비츠케이 감독이 헝가리 사람이라서 그런지 체격 크고, 힘 좋고, 빠른 선수를 선호하더라구요. 그러니 저의 플레이가 마음에 안 들었겠지요. 선수 기용 문제는 감독의 고유 권한이긴 하지만 당시 정말 속이 상했습니다.
당시 코치가 조광래 선배님이셨는데, 저를 많이 위로해 주셨어요. 1991년에 대우가 우승을 했습니다. 그런데 구단에서 비츠케이 감독과 재계약을 안했어요. 왜냐하면 비츠케이 감독은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과도 호흡이 그다지 맞질 않았거든요. 선수들과 그다지 편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 저하고 가장 안 맞았지요. 아무튼 그때가 선수 생활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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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멤버를 자랑했던 옛 대우 시절 (맨 앞줄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선수가 이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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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에 입단한 뒤에 미드필더에서 센터포워드로 전향했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장운수 감독님께서 권유를 하셨습니다. 그 무렵 대우에 확실한 골게터가 부족했다고 보신 거 같아요. 어느 날 장운수 감독님께서 “야! 태호야. 다음 게임에 나가서 30분 정도만 센터포워드로 뛰어봐라!”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다음 게임에 포워드로 출전을 했는데 그날 제가 잘했습니다. 그 때부터 자연스럽게 센터포워드가 된 거지요.
- 중앙 공격수치고는 체격이 작은 편이었는데 그 단점을 어떻게 극복 하셨는지요?
아시다시피 제가 체격도 작고 스피드도 빠른 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체격이 큰 상대편 중앙 수비수들과 정면 승부를 벌일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각적인 플레이를 해야했습니다. 저는 상대 수비수들보다 예측을 빨리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볼이 오기 전에 ‘볼이 오면 어떻게 트래핑을 하고 볼을 어디로 쳐놓을까’ 이런 것을 미리 생각해 두는 거지요. 그러면 상대 수비수들과 굳이 몸을 부딪히지 않아도 됐거든요. 그리고 저는 전방에 있으면서 수비수들과 골키퍼의 움직임, 그리고 골문 어느 쪽이 비어있는 지를 수시로 곁눈질로 체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볼을 잡으면 그 비어있는 쪽으로 슛을 때리곤 했지요.
저의 주특기가 스크린 플레이였는데 저는 유달리 수비수 등을 잘 지었습니다. 그리고 볼 컨트롤 능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는 누가 마크를 하더라도 골을 터뜨릴 자신이 있었죠.
- 미드필더와 센터포워드 중에 어느 쪽을 더 좋아하셨어요?
솔직히 저는 미드필더가 더 좋았어요. 센터포워드보다 미드필더가 경기 중에 볼을 더 많이 터치하고 더 많이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체력이 강한 편이 못되기 때문에 감독님들이 봤을 때는 센터포워드가 더 낫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한쪽 눈이 실명인 상태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날짜도 기억합니다. 1987년 4월 4일 전기리그 개막전 포항제철과 경기할 때 다친 겁니다. 당시 대구시민운동장 잔디 상태가 울퉁불퉁 몹시 안좋았어요. 포철의 남기영이 저를 마크했는데, 후반전에 하프라인 부근에서 제가 볼을 받으려는 순간 볼이 갑자기 튀어 올라 오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볼에 머리를 갖다댔는데 기영이가 모르고 제 눈을 걷어찬 겁니다. 물론 기영이는 전혀 고의성이 없었어요. 기영이는 볼을 차려고 했던 거니까요.
잠시 후 오른쪽 눈에서 뭐가 마구 쏟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통증도 심했구요. 저는 눈알이 터진 줄 알았어요. 바로 병원에 가서 응급 처치 받고 영남대 병원으로 옮겨갔지요.
- 원래 시력은 좋으셨나요?
제 시력이 2.0이었어요. 눈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 날 다친 후에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시신경이 크게 손상됐기 때문에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수술은 못하고, 침을 맞아봤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 후 더 이상의 치료는 받질 않았어요.
눈 다치고 나서 두 달 후에 볼을 차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볼이 잘 안보였어요. 볼이 두 개로 보였거든요. 그래서 헛발질도 하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후기 리그 개막전인 LG전에서 제가 해트트릭을 기록했어요. 그 날 비가 많이 내렸는데 대우가 4대1로 이겼습니다. 정말 감격적이었지요. 전기 리그 개막경기에서 눈 다치고, 후기 리그 개막 때 해트트릭을 기록한 거니까요.
- 눈 부상 외에 다른 큰 부상을 당한 적은 있으십니까?
고대 4학년 때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코뼈가 부러진 적이 있습니다. 그 날 제가 프리킥으로 득점을 올린 후 얼마 안 되서 상대 선수와 부딪치면서 코를 다쳤는데, 그 때문에 코 수술을 했어요. 그 외에 다른 큰 부상은 없었습니다. 축구 선수들은 발목이나 무릎 부상을 많이 당하는 편인데, 저는 비교적 그쪽 부위에는 다치질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편이었지요.
- 현역 시절 까다롭거나 두려웠던 수비수는 누구였습니까?
제가 발이 빠른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빠른 수비수들이 불편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박경훈 선수 같은 타입 있지 않습니까. 그런 스피디한 수비수들이 조금 까다로웠어요. 반면에 파이터 스타일의 수비수들은 상대하기가 편했습니다. 그런 타입의 수비수들은 쉽게 벗길 수가(제칠수가) 있었거든요.
- ‘한국의 게르트 뮐러’와 ‘외눈 골잡이’라는 별명을 갖고 계셨는데,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셨습니까?
당연히 ‘한국의 게르트 뮐러’가 마음에 들지요. 뮐러는 워낙 위대한 선수잖아요. 뮐러야 말로 진정한 골게터지요.
- 어릴 때 혹은 현역 시절 때 국내/외 선수 중에 좋아했던 선수나 본받고 싶어한 선수는 누구였나요?
저는 1960~70년대 브라질 스타였던 가린샤에게 큰 흥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선수 경기 모습을 많이 보진 않았는데 소문을 들어보니까 딱 제가 원하는 기술 축구를 했더라구요. 저는 페인팅 잘하는 선수들을 좋아하거든요.
국내 선수 중에서는 조광래 선배님의 플레이를 좋아했습니다. 미드필드에서 공격수들에게 넣어주는 패스가 참 깔끔했어요. 매우 지능적으로 축구를 했죠.
- 후배 선수 중에서 감독님과 비슷한 플레이를 한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는 이기근, 최문식, 윤상철이 저하고 비슷한 플레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선수들 모두 힘과 스피드 보다는 감각적으로 볼을 찼던 선수들이지요. 이 가운에 특히 윤상철의 스크린 플레이가 대단히 좋았습니다.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역시 황선홍이구요. 저는 선홍이가 1988년 대표팀에 처음 들어왔을 때 큰 재목이 될 걸로 예상을 했습니다. 선홍이는 정말 훌륭한 공격수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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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고 감독으로 활동 중인 이태호 감독 ⓒ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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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초반에 은퇴하셨죠.
1992년에 했습니다. 구단에서는 몇 년 더 뛰어주길 바랐는데 은퇴를 하는 게 낫겠더라구요. 그래서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은퇴 후 1995년부터 98년까지 3년간 동의대 감독을 했지요. 동의대 감독을 그만둔 이후로 브라질로 3개월 단기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1980년대 인기 여성 스포츠 전문가셨고 대학 선배였던 이향렬 씨가 계셨는데 무척 친하게 지냈어요. 그분 추천으로 브라질의 지코 축구 학교로 연수를 갔는데, 비록 3개월 밖에 연수를 하진 않았지만 그 기간 동안 유소년들 가르치는 방법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정말 체계적으로 잘 운영이 되고 있더군요.
-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많았겠습니다.
당연하죠. 배우는데 욕심이 많은 편입니다. 유럽이나 남미에 가서 프로팀 선수들이 특히 시즌 개막 한 달 정도를 앞두고 어떠한 훈련을 받고 또 어떻게 선수들이 몸을 만드는지 등을 보고 또 배우고 싶어요. 시즌 개막 한 달 전이 선수들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거든요.
사실 그런 건 단기 연수로는 불가능하고 최소 1, 2년간 그쪽 클럽 스태프의 일원으로서 참가를 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거지요. 그런 분야에 관해선 수원 삼성의 차범근 감독님이 정확히 알고 계실 겁니다.
- 대전 시티즌 수석 코치를 하신 후 감독으로 부임을 하셨는데 당시 팀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요?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수석코치로 김기복 감독님을 모신 후, 제가 감독으로 부임을 하게 됐는데 재임기간 동안 팀 성적이 많이 안 좋았던 게 사실지요. 그 때 제가 마음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팀 성적이 안 좋으면 가장 속상한 사람은 감독이거든요. 그 무렵 제가 팬들한테 비난을 많이 받았는데 비난의 수준이 도가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술집에서 전술을 짠다’, ‘벤치에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린다’는 등의 어이없는 비난들이 쏟아졌어요. 나중에는 한 쪽 팔에 마비가 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팬들이 비판을 하는 건 좋은데 도가 지나쳐서는 곤란합니다.
- 2001년에 FA컵 우승하셨잖아요. 그 때 정말 감격적이었죠.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지요. 그 날 김은중이 결승골을 넣어서 포항을 1-0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기쁨이란 건 아무도 모르죠. 한마디로 2001년 대전의 FA컵 우승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예요.
- 김은중 선수가 눈 부상이 있다는 걸 감독님도 모르셨습니까?
저도 몰랐습니다. 은중이가 말을 안했으니까요. 아마도 일부러 말을 안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눈을 다쳐봐서 아는데, 한 쪽 눈으로 축구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은중이가 이겨냈다는 건 정말 대단하고 기특한 거예요.
- 프로팀 감독을 하시다가 고등학교 감독하시기가 결코 쉽지 않으실텐데요.
사실 어려운 점이 꽤 많습니다. 시설 면에서도 그렇고, 투자 면에서도 그렇구요. 프로 선수들은 대부분 완성된 선수들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 몇 가지만 집어서 지도하면 돼요. 그러나 고등학교 선수들의 경우엔 아직 배울 게 많은 나이라서 세세한 부분까지 다 가르쳐줘야 됩니다.
그렇지만 보람은 더 커요. 어린 선수들이라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이거든요. 그걸 보면 정말 뿌듯하지요. 무엇보다 저는 선수들에게 먼저 예의를 중시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나서 축구를 해야 돼요. 우리 선배님들이 늘 말씀하셨지만 축구 선수 이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 신한고 선수들 가르치실 때 어디에 주안점을 많이 두십니까?
제가 현역 시절 테크니션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술 쪽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신경 써서 지도를 하고 있어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아기자기한 기술 축구를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비교적 젊은 감독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선 제가 직접 나서서 기술 시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전 시티즌 감독할 때도 공격수들에게 스크린 플레이 같은 건 제가 직접 시범을 보여줬거든요.
- 고등학교 선수들이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는 게 낫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프로로 바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축구를 하려면 프로에 가는 게 백번 천번 낫다고 봅니다. 우선 프로팀에 가게 되면 좋은 시설에서 운동을 할 수가 있잖아요. 그리고 프로에는 좋은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영양 관리도 제대로 시켜주고요. FC서울의 백지훈을 비롯한 몇 몇 선수들이 일찌감치 프로에 입단했는데, 그 선수들이 만일 대학팀에 갔다면 이렇게 빨리 성장하진 못했을 겁니다. 프로하고 대학하고는 천지 차이예요.
존경하는 지도자는 어느 분이십니까?
故 조윤옥 감독님과 박영환 감독님이십니다. 두 분 감독님께는 축구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그래서 늘 감사하고 있지요.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점심, 저녁 식사까지 맛있게 대접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어린 고등학생 선수들 잘 지도해 주십시오. 내일 경기 잘 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다음날 벌어진 경기도 교육감배 중,고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신한고가 능곡고를 5-0으로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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