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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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이야기의 끝부분에 김삿갓의 금강산 시가 잠깐 나온 김에
김삿갓에 대해 아주 조금만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한시를 가장 재미있게 쓴 사람이 바로 김삿갓일지도 모릅니다.
김삿갓이 누군지는 아시죠? 술집 웨이터 김삿갓 말고 진짜 김삿갓.
홍경래의 난 때 반군에 투항했던 할아버지 김익순을 과거 시험장에서 무섭게 꾸짖고 나서
그것을 견디어낼 수 없어,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방랑의 길로 나선 아웃사이더.
삿갓으로 세상과 단절하고, 재치와 해학, 날카로운 풍자로 세상을 희롱했던 시대의 반항아.
그의 세계로 잠시 여행을 떠나 봅니다. 콰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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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竹彼竹化去竹(차죽피죽화거죽)
이게 도대체 뭘까요? 此는 이 차, 竹은 대 죽, 彼는 저 피, 化는 될 화, 去는 갈 거.
그래서 이걸 합친 구절의 풀이는, "이런此 대로竹 저런彼 대로竹 되어化 가는去 대로竹"
한자의 음과 뜻을 뒤섞어 장난스럽게 만든 구절입니다. 이보다 더 심한 말장난도 있습니다.
柳柳花花(류류화화)
누가 돌아가셨다고 알리는 부고장이랍니다. 柳는 버들 유, 花는 꽃 화. 근데 이게 무슨...??
글자 그대로 "버들, 버들, 꽃, 꽃", "버들버들 떨다가 꼿꼿해졌다"는 말이죠.
김삿갓의 시(그의 모든 글을 다 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는 이외에도,
글자를 파자(破字)하여 만든 시, 한자를 우리 음으로 읽다 보면 야릇한 욕설이 되는 시, 한글로 쓴 한시, 한글 한자 섞은 시, 풍자 비판하고 야유, 조소하는 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화답한 시 등등 벼라별 재미있는 시가 다 있습니다. 물론 정통적인 시들이 더 많지만.....
한번은 어느 환갑 잔치에 갔더니 대접이 시원치 않아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彼坐老人不似人(피좌노인불사인)
(彼는 저 피, 坐는 앉을 좌, 似는 같을 사)
= 저기 앉은 늙은이는 사람 같지 않은데
膝下七子皆盜賊(슬하칠자개도적)
(膝은 무릎 슬, 슬하膝下의 자식이라고 하죠. 皆는 모두 개, 盜는 훔칠 도, 賊은 도적 적)
= 슬하의 일곱 아들 모두가 다 도둑놈
아니, 아무리 대접이 시원치 않았기로서니 이렇게까지 함부로 욕을 해도 되는 겁니까? 더구나 잔치자리인데. 하여 좌중이 싸늘해졌음은 물론, 이제 곧 두들겨 맞고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김삿갓, 조용히 다음 두 구절을 두 번째와 네 번째 자리에 끼워 넣었습니다.
何日何時降神仙(하일하시강신선)
(何는 어찌 하, 어느. 時는 때 시, 降은 내릴 강, 강림한다고 하죠.)
= 어느 날짜 어느 시에 신선께서 내려왔나
竊取天桃善奉養(절취천도선봉양)
(竊은 훔칠 절, 取는 취할 취, 가지다. 桃는 복숭아 도, 천도天桃는 하늘나라에서 수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복숭아로, 먹으면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한다고 하며,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훔쳐먹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善은 착할 선, 잘하다. 奉은 받들 봉, 養은 기를 양)
= 하늘에서 천도 훔쳐 지성으로 봉양했네.
참으로 기가 막힌 반전입니다. 순서에 맞춰 바꿔서 한 번 읽어보세요. 어찌 되는지.
저기 앉은 늙은이는 사람 같지 않은데
어느 날짜 어느 시에 신선께서 내려왔나
슬하의 일곱 아들 모두가 다 도둑놈
하늘에서 천도 훔쳐 지성으로 봉양했네.
바로 턱 아래까지 왔던 주먹이 맥이 스스르 풀리며, 땅에 엎드려 절하는 손바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은근히 욕할 건 다 하면서도 환갑 잔치를 빛내는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낸 이 솜씨. 그 집 아들들은 김삿갓에게 한 상 잘 차려 내왔을까요?
매사 이런 식이니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릴 만도 합니다. 김삿갓이 어느 집을 찾아갔더니 주인이 하인을 시켜서 없다는 핑계를 대더랍니다. 그래서 썼다는 낙서 한 구절.
鳳飛靑山鳥隱林(봉비청산조은림)
(鳳은 봉황 봉, 전설 속의 상서로운 새. 飛는 날 비. 靑은 푸를 청, 鳥는 새 조, 隱은 숨을 은, 林은 수풀 림)
= 청산에 봉황 날아오르니 새들은 숲속으로 숨고
龍登碧海魚潛水(용등벽해어잠수)
(龍은 용 용, 역시 전설속의 상서로운 동물. 登은 오를 등, 碧은 푸를 벽, 海는 바다 해, 魚는 물고기 어, 潛은 잠길 잠)
= 푸른 바다에서 용이 오르니 물고기들은 물 속으로 숨는구나.
평범한 새나 물고기에 지나지 않는 인간들아. 나 김삿갓은 용이요 봉황이니라 !! 그런데 나 김삿갓을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
분노의 일갈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론 이런 글도 있습니다.
人到人家不待人(인도인가부대인)
(到는 이를 도, 도착하다. 待는 기다릴 대, 여기서는 대할 대, 대접할 대)
= 사람이 사람의 집에 찾아 왔는데 사람 대접을 하지 않으니
主人人事難爲人(주인인사난위인)
(主는 주인 주, 事는 일 사, 難은 어려울 난, 爲는 될 위)
= 주인의 인사가 사람답지 못하구나.
사람 人 자를 여섯 개나 넣어서 푸대접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묘미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김삿갓이 이렇게 맨날 장난 비슷하게 재미있는 시만 쓴 건 아닙니다. 아래는 김삿갓이 어느 가난한 집에서 죽 한 그릇을 대접받으면서 쓴 시라고 합니다.
四脚松盤粥一器(사각송반죽일기)
(脚은 다리 각, 松은 소나무 송, 盤은 소반 반, 粥은 죽 죽, 器는 그릇 기)
= 네다리 소나무 소반 묽은 죽 한 그릇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雲은 구름 운, 影은 그림자 영, 共은 함께 공, 徘는 노닐 배, 徊도 노닐 회, 배회한다는 말)
=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어리는구나
主人莫道無顔色(주인막도무안색)
(莫은 말 막, 하지 말라는 뜻. 道는 길 도, 여기서는 말할 도. 顔은 얼굴 안, 무안색無顔色은 볼 낯이 없다, 미안하다. 가난하여 죽에 쌀알도 넣지 못하고 멀겋기만 해서 미안하다는 말)
= 주인이여 미안하다 말하지 마시게
吾愛靑山倒水來(오애청산도수래)
(吾는 나 오, 愛는 사랑할 애, 靑은 푸를 청, 倒는 거꾸로 도, 來는 올 래)
= 청산이 물에 거꾸로 비친 모습 나는 좋다오
어때요, 좋지 않습니까? 시에서 멋과 여유가 팍팍 묻어나오지 않나요?
어쩌면 아픈 사연을 품고 스스로 그것을 감내하면서 살아온 사람이라 오히려 이런 여유가 가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길어졌군요. 좋은 음식 아껴먹듯이 좀 아꼈다가 다음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