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주인이 따로 없이 누구나 오면 주방보조
호두밥 잣비지…, 그들 삶도 자연을 꼭 닮았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인 지난 9일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을 찾았다. 도시의 눈은 낭만을 챙기기도 전에 흙탕물로 변했지만 한적한 안성면은 고요한 ‘눈의 나라’였다.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큰 밀짚모자를 눌러쓴 앳된 김정현(21)씨가 안성우체국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기자를 반갑게 맞는다. 김씨는 자연건강밥상 관련 책을 3권이나 쓴 장영란(51)씨의 딸이다.
앉자마자 쏟아지는 질문들, 시험에 들게
덕유산 자락에서 사는 이들 가족의 특별한 겨울밥상을 찾아 길을 나섰다. 장영란씨와 남편 김광화(53)씨는 1998년 두 자녀를 데리고 귀농해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고 있다. 귀농 전에는 칼질도 제대로 못하던 도시여자였던 장씨는 자연이 선물하는 먹을거리에 눈을 뜨면서 프로 요리사 뺨치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앉자마자 질문이 쏟아진다. “겨울에 먹으면 안 되는 게 뭔지 알아요?”, “그럼 여름에는 뭘 먹어야 하죠?” 장영란씨가 기자를 시험한다. “겨울은 추우니깐 냉한 음식을 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얼추 맞았다. 다행이다. 냉한 오이나 토마토, 풋고추 같은 음식은 추운 겨울에 우리 몸과 잘 맞지 않는다고 장씨가 말한다. 장씨 옆에서 호두를 까고 있던 남편 김씨가 핀잔을 준다. “멀리서 왔는데 질문부터 하나?” 호호~하하~, 웃음 몇 방울이 식탁에 떨어진다.
“우리 집에 오면 우리 가족 먹을 걸 손님이 만들어야 돼요.” 장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작은 용기와 방망이가 기자 앞에 당도한다. 장씨가 까고 남은 호두 부스러기를 빻으라는 주문이다. ‘에라, 하지 뭐’ 다짐하고 손목을 프로 주부처럼 돌리는데 부스러기들이 그릇 밖으로 튀어나간다. 운명을 아는지 미숙한 이의 손놀림에 기대어 탈출을 시도한다.
잘게 부서진 호두 부스러기는 장씨의 첫 번째 음식, ‘호두밥’의 재료다. 그는 멥쌀과 찹쌀을 약 9 대 1의 비율로 섞고 물을 붓는다. 밥솥 안은 바닷물이 살짝 스며든 콩돌해변처럼 찰랑찰랑 변한다. 그 위로 낙지 1마리가 세게 검은 물을 뿜는 것처럼 간장이 뿌려지고 그 사이로 고소한 호두 부스러기가 투하된다. “호두처럼 천연기름이 있는 것이 추운 겨울에 우리 몸에 좋아요.” 장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밤, 배, 잣, 희한하게 한 글자인 식재료가 우리 몸에 딱”
이번에는 물에 불렸다가 말린 애호박이 등장한다. 통통했던 애호박은 쪼그라들어 초라한 몰골이다. 장씨는 냉장고에서 멸치, 다시마, 표고버섯, 무, 노가리를 넣어 푹 끓인 육수를 꺼낸다. 그는 모서리가 낡은 오래된 믹서기에 이것들을 넣어 돌린다. 들깨 1컵 당 육수는 약 3~4컵 되는 양이란다. 몇 번을 숟가락으로 뒤집으면서 돌리는데 어찌나 손놀림이 가벼운지 힘을 전혀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들깨는 속절없이 본래의 모습이 사라진 채 물컹하게 변해서 마른버짐 핀 것처럼 안쓰러운 애호박 위로 곱게 뿌려진다. 겨울나무처럼 추워 보이던 애호박오가리는 서서히 기를 펴고 날갯짓을 준비한다. ‘애호박오가리나물’은 두 번째 음식이다. 자작자작 끓인 뒤에 간장으로 간을 하면 끝이다. 간단하다.
“이제 잣비지 만들어볼까요?” 장씨는 냉장고에서 또 뭘 꺼낸다. 다시마다. “다시마는 콩과 같이 먹어야 좋아요. 콩에 없는 게 요오드 성분인데 다시마에는 많죠. 된장찌개 할 때도 꼭 같이 넣어요.” 콩을 불릴 때 다시마 여러 장을 넣어 불린다. 장씨는 다시마의 알긴산이 탱탱한 아기 엉덩이살처럼 불어 오른 콩들 사이로 끈적끈적 본능을 마구 휘두를 때쯤 콩과 다시마를 분리한다. 깔끔하게 정리된 국산 잣이 ‘으흠, 이번에는 내 차례야’ 하고 거들먹거리면서 도착한다.
“잣을 넣는 이유는 우리 어머니들이 비지에 돼지고기를 넣는 것과 같아요. 식물성 천연지방을 넣는 거죠.” 장씨는 이미 한차례 시범을 보인 재빠른 손놀림으로 콩을 한번 간 뒤에 잣을 넣는다. 3번 더 간다. “우리 집은 여름 콩국에도 잣을 넣어요. 콩은 우리 몸과 참 잘 맞아요. 유전자가 같다고 할까.” 장씨의 설명이 끝나자 김씨가 옆에서 거든다. “밤, 배, 잣, 희한하게 한 글자인 식재료가 우리 몸과 잘 맞지요.”
“몇 마리냐고 묻지 마세요, 늘었다 줄었다 그래요”
뚝딱뚝딱 거실과 붙은 주방에서 요란스럽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덩치 큰 녀석이 방에서 나온다. 올해 15살인 장씨의 아들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한창 식욕이 왕성한 남자아이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을까? 채식 위주의 식탁에 만족할까? “닭과 토끼를 키워요. 매일 아침에 달걀을 수거해서 먹지요.” 장씨가 말한다. 아들은 “몇 마리냐고 묻지 마세요. 잡아먹으면 줄고 병아리 낳으면 늘고 그래요.” 장판을 타고 웃음이 번진다.
잣비지의 재료들은 깍둑썰기한 양파까지 올라가 불판 위로 향한다. 신병훈련소에 갓 입소한 어리둥절한 신참 군인처럼 기자는 장씨가 주문하는 대로 불판 앞으로 갔다. 주방보조라, 나쁘지 않다. 기자에게 떨어진 명령은 잣비지가 눌어붙지 않도록 나무주걱으로 냄비 바닥을 앞뒤로 긁는 것이다. 마감에 쫓기는 편집장처럼 왔다갔다 냄비를 긁는 동안 솔솔 고소한 냄새가 파도처럼 음악처럼 코끝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집의 맛을 내는 간장도 독특하다. 서리태 1컵, 다시마 2~3장, 물에 불린 표고버섯 4~5장을 함께 끓인 물에 집에서 담근 간장을 섞어 1번 정도 더 끓였다가 식히면 완성이다. 척척 만들어진 자연밥상이 떡하니 차려진다. 호두밥, 잣비지, 애호박오가리나물, 도라지나물과 김치. 상 위에는 빠른 속도로 담백하고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도시의 상처럼 개성이 강하고 지나치게 뜨거워 불편한 열정이 이 집 밥상에는 없다. 비지는 씹히는 알갱이의 맛이 재미를 주고 나물은 들깨의 투박한 정이 도시의 맛에 굳어버린 혀를 깨운다. 쫀득한 밥은 씹는 내내 툭툭 튀어나오는 호두 부스러기 때문에 즐겁다.
굴 즐긴 카사노바는 바람둥이…먹는 것 보면 사람을 안다
식탁에선 정겨운 대화가 이어진다. “누나 도끼 필요해, 땔감 자르다가 부러졌어.” “벌써 사왔는데, 엄마가 알려줬어.”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도와 음식을 만들었다. 하루 두 끼로 소식을 하는 요즘, 한 끼 제작은 남매의 몫이다. 장씨의 아들은 11살 때 <식객>을 읽고 가양주가 궁금해서 직접 만들기도 했단다. 모내기 때와 가을 타작 할 때 그의 가양주는 요긴하게 쓰인다. 권주가가 이어진다. 술꾼인 기자가 마다할 리 없다. “으흠, 향긋하고 뒤끝이 깨끗한 게 훌륭하네요.”
후식은 호두곶감말이와 생강차다. “서까래에 걸려 있지요. 따서 한번 해보세요.” 노련한 주방보조로서 마지막 할 일이 남았다. 안방 창문을 열고 주렁주렁 걸린 곶감을 따서 씨를 빼고 호두를 차곡차곡 넣어 접는다. 요리 프로그램에서 본 것처럼 도마에 칼을 고정하고 칼날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말아 넣은 호두가 튀어나가지 않게 썰었다. 쉽지 않다. “뽕~” 무슨 소리인가! 장씨의 건강식을 먹은 도시의 기자가 내지르는 방귀소리다. 부끄럽지 않다. 그들의 자연건강식에 동화되는 과정이다.
19세기 미식가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은 그의 저서 <미각의 생리학>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음식은 음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정력에 도움이 된다는 굴을 식탁에 자주 올렸던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는 바람둥이의 삶을 살았고, 제철 채소와 과일로 소식을 했던 헬렌 니어링은 평화롭고 검소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장영란씨의 소박한 밥상은 그 자체 그들의 삶이다.
무주=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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