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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제 2 인생
김주일
나는 어린 시절에도 사업이 꿈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는 공무원이나 기업체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대학을 경제학과에 지원하였다.
군복무를 마친 후 아버지가 하시던 잠수기선 사업을 물려받았으나 삼년 동안 사회의 각종 부조리와 공무원들의 부당한 일 처리 등을 보고 이러한 부조리를 바로 잡으려면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일찍 결혼을 하여 딸 2명이 태어났으나 가족을 책임질 직장도 없고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잠수기 사업도 사양길에 접어들자 1966년 2월에 나는 풍선배(잠수기선)를 타고 강원도 양양군까지 미역채취 작업을 하려 갔다. 그러나 약 2개월 동안 적자로 고생만 했고 가는 곳 마다 경찰관과 수산계 직원들의 트집에 억울함을 느끼며 마음에 울분이 쌓였다.
음력 5월 단오날, 나는 강릉 단오제 구경을 가서 동아일보에 방첩대 군무원 공채 모집공고를 보고 고향에 있는 식구들도 모르게 바로 서울에 가서 군무원 공부를 한 결과 5급 갑(서기) 시험에 합격하였다.
합격과 동시에 홍릉교육대에서 한달 간 정보, 보안, 수사 등에 대한 교육과 실습을 통하여 실무교육을 받았다. 첫 부임지는 대구태백공사였으며 거기서 다시 포항 분견대로 발령을 받았다. 포항읍장을 거쳐 초대시장까지 역임하신 처백부님께서 죽도동에 방 한 칸을 내어주셨고 그곳에서 고향을 떠나 두 딸과 더불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아내는 시집살이 4년만에 해방되어 너무 좋아하였다. 처백부께서는 직장을 옮기지 마라고 충고하셨다. 공무원은 정직하게 소임만 다하면 월급은 먹고살 수 있게 나오니 욕심을 부리면 고생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구룡포 파견대 책임자로 4년간 근무하면서 항상 전투복 차림으로 관내 순찰과 대간첩 작전에 출동하여 현장분석과 작전부대 지휘관 작전 계획 조언 등이 내 일과였다. 그 때는 울진삼척 사건 외 간첩 침투사건이 빈번하였다.
1970년 대구본부로 복귀하여 근무하다가 폐결핵 진단을 받고 치료를 위해 대구 통합병원에 파견 근무를 하면서 결핵 치료를 받았다. 대구통합병원에서는 군의학교와 간호사관학교를 담당하였는데 매월 1회씩 토요일 마지막 시간에 보안교육을 했는데 수강생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의무사에서 병이 완치되고 5관구사령부에 파견되어 근무 중 생각지도 않은 사표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불복하고 계속 출근하다가 당시 사령관인 강찬성 비서실에서 중앙정보부나 국영기업체에 입사시킨 뒤에 사표 수리를 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한달을 쉬고 나니 사무실에 나가기가 싫어 휴양 겸 쉬고 싶다며 사표수리를 부탁하여 1973년 7월에 퇴직하였다.
당시 동서가 수도경비사령관이었고 방첩부대장 강창선과는 육사 8기 동기생이었기에 사표가 반려되고 직장 알선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식구들을 데리고 내려가니 그 때 큰 딸은 국민학교 5학년이었고, 둘째 딸은 3학년이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니 옛날 살던 큰 집은 아버지가 팔고 잠수기선도 매도하고 내가 샀던 점포집에 온 식구가 이사하여 점포가 폐업이 될 정도로 기울었으며 논 1500평만 겨우 남아있었다.
나의 퇴직금과 전세비로 점포에 새로 물건을 해 넣고 나머지 돈을 미역양식업에 몽땅 투자하였는데 손해를 보고 나니 살길이 막막했다.
여러 가지로 궁리 끝에 아버지에게 농사철에 다시 소를 사 주기로 하고 집에서 키우던 소를 팔아 줄 것을 요구하였다. 소 판돈 15만으로 면소재지에 담배창고를 빌려 내부수리를 하고 당구장 허가를 받아 당구장을 개업했다. 당시 그 면소재지에 처음 생긴 당구장이라 젊은이들의 유일한 놀이 장소였으므로 성업을 이루었다. 퇴직 당시 내 월급이 정보비와 활동비를 포함하여 80000원 정도였는데 당구장 수입이 매일 최하 7만원에서 15만원이었다. 전기세와 점포세 등 경비를 제외하고 몽땅 저축하니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한 것이 후회되었으며, 3개월만에 아버지에게 시장에서 제일 좋은 소를 사드리고 농비와 동생들 학비까지 지원하게 되었다.
또 그 때 저축한 돈으로 마을 중심지에 대지 150평 초가 2동을 당시 100원에 구입하였다.
74년 여름, 경주시 양남면 지경리에 코오롱 기업에서 사원들의 하계휴양소를 개설하였는데 지경리에 사는 나의 처남과 마을 유지가 하계휴양소 매점권을 나에게 30만원을 받고 그 권리를 넘겨 주었다. 74년 여름 첫 장사에서 1개월만에 순 이익금이 120만원이었다. 74년 1년간 당구장과 매점을 운영하여 800만원을 저축하였다.
75년 3월에 동서인 정보사령관이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으나 전화로 축하만 하고 과거 직장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었다.
76년부터 내 고향에는 월성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준비 중이라 나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었다.
큰 딸이 중학생이 되자, 아내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대도시에 나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식구들만 대도시에 보내기로 마음먹고 아내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내는 서울 언니집에 가서 의논하고 오겠다고 서울을 다녀왔다. 그 후 서울 처형이 급히 전화가 와서 갑자기 서울에 빨리 올라오라고 하면서 동서가 찾는다고 했다.
동서집에 간 아내는 아마 내가 취직을 거절할 것이니 몰래 발령을 내면 책임감이 있어 근무를 잘 할 것이라고 아이들을 위해 취직을 부탁하였다. 동서는 8년간 나의 근무 성적과 행적을 알고 좋아하였기에 나를 믿고 지시하여 본의 아니게 다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소급 발령시 4급(주사)로 우대하였으나 그 때까지는 사업에 정신이 팔려 근무에 별 의욕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가족의 요구를 받아들여 군무원 생활을 부산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아내의 생각대로 안정된 직장생활로 가정도 비교적 순탄하게 꾸려나갔으며, 자식들도 별 탈 없이 성장해주었다. 딸 셋은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를 졸업하였고, 막내아들은 성균과대학을 졸업한 후 현재 시나리오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1995년 10월에 막내딸까지 결혼을 시키고 나니 이제는 가족을 위해 살았던 내 삶을 접고 내 자신을 위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 33년간의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명예퇴직을 하였다.
퇴직하고 나니 평소 알고 지내던 기업체 대표들이 같이 일해보자고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어 미련없이 부산을 떠나 혼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내려가 축양장 사업을 하기 위해 재직 중에 매입한 바닷가 쪽 논 1800평 중 언덕 450평이 미등기 되어 있었으나 그해 11월부터 12월까지 마지막 특별조치법으로 등기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언덕 밑에 있던 논 350여평이 건축이 가능하게 되어 3500원에 매입한 땅을 평당 370000원에 매도할 수 있게 되어 3억 이상의 재산을 늘리게 되었다.
논 한 필지를 팔아서 길가 논에 대지 280평 건평 145평의 3층 건물을 짓고 부산에 살던 집은 전세를 놓았다. 고향에 정착하니 둘이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부산집과 시골집에서 나오는 월세와 연금 등으로 노후에 약간의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995년 동네 어촌계의 간사지매립 허가동의서를 받지 못하여 축양장사업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하였다. 그리고 지방시의원 선거에 출마를 권유받아 출마하였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낙선한 후에는 주변에서 다음에는 지원할 테니 준비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다시는 혼자서 주민을 짝사랑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새로 지은 집 앞 논 350평에 포도나무 50그루와 복숭아나무 50그루를 심어서 3년만에 포도는 100상자 이상 수확하게 되어 이웃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1998년 2월부터 경주박물관대학에 등록하여 매주 수요일 오후에 2시간씩 유명 교수 등을 초청하여 강의를 듣고 일요일에는 전국의 유적지 답사를 다녔다. 6개월만에 수료하고 또 다시 연구반에 등록하여 2년간 박물관대학을 다니면서 박물관회 회원이 되었다.
박물관회원이 되면 전국 어디서나 유적발굴현장에 출입할 수 있는 회원증이 주어지며 발국현황의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유럽여행기
김주일
나는 국내 유적지는 2000년 2월부터 2년간 매주 일요일 경주박물관 답사 전담강사의 인솔로 전국에 산재된 유적지를 다녔다. 그 후 미주지역과 유럽을 답사할 생각으로 준비하던 중 아내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여러 곳에 전이되어 수술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기 않고 서울에 있는 암전문 한방병원에 가서 월 500만원을 병원비를 내고 암 치료를 받았다. 그후 호전된 아내는 울산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5년간 투병하다가 2011년 2월에 생을 마감했다.
5년간 병간호에 지쳐있던 나를 위로하기 위해 대한항공 기장인 셋째 사위가 유럽여행 티켓을 주었다. 유럽 6개국 10박12일의 일정으로 떠나게 되었다. 대한항공 왕복 항공비는 대한항공에서 기장 가족 자격으로 무료로 받고 나머지 경비는 막내사위가 지불하였다. 일종의 효도관광인 셈이다. 나는 여행준비로 카메라와 멸치, 고추장 등을 간단하게 꾸렸다.
2011년 11월 3일 오후 1시,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11시 30분간 비행하여 11월 4일 아침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하이텔버르그에 도착하여 카르데오 도이다리 앞에서 내려 1400년 전에 조성한 델베르그성을 모르올을 타고 올랐다. 성안에는 22만 리터 용량의 포도주 통이 있었고, 성내 박물관에는 옛날의 의료기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하이텔버르그는 라인강이 시내 중앙에 흐르고 있고 시내 대학로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었다. 하이델버르그대학에서 노벨수상자가 8명이나 나왔다는 유명한 교육의 도시이다. 여기서 아름다운 산악도시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6시간을 갔다.
인스부르크는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에 15000년전에 건립한 전통가옥이 즐비했고 외관을 현대식으로 수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스부르크는 겨울에 스키로 유명한 도시이며 산에는 가을인데도 벌써 눈이 덮혀 있었다.
2738개의 동판에 금을 입힌 황금 지붕과 외벽의 화려한 꽃무늬가 독특한 헤블링하우스와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 등 시내관광을 하고 산쪽에 위치한 휴양도시에서 투숙하였다.
11월 5일, 이태리 물의 도시 베니스로 갔다. 베니스는 본섬 8개와 118개의 인공섬을 450개의 다리로 연결시켜 놓은 아름다운 항구였다.
인공섬은 백양목을 바다에 심어 돌과 흙으로 채워 15세기에 만든 섬이다.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극찬한 산마르코광장과
성마르코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산마르코성당, 죄수들이 한숨을 지으며 건넜다고 전해지는 탄식의 다리를 유람하며 베니스의 명물 낭만의 콘도라를 탔다. 아름다운 베니스에서 1박을 하고 피렌체에 도착하니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고 불리우는 두오모성당이 우리를 반겼다.
지오또가 설계한 84m 높이의 이오토종탑은 우리를 압도하였고 중앙에 위치한 시뇨리마 광장과 단테의 생가를 관람한 후 로마로 이동하여 1박을 했다.
여행 6일차 아침은 비가 내렸다. 그러나 로마에서 바티칸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비가 그쳐 날씨가 화창했다.
바티칸 박물관과 초대 교황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성베드로성당,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는 시스티나예배당을 관람하고 원형극장 콜로세움은 밖에서 사진만 찍었다. 고대 로마의 중심지인 포로로마노와 트레비 분수와 베네치아 광장에 있는 여러 조각품 들을 둘러보았다.
트레비분수는 다시 한번 로마에 오고 싶은 소망을 갖게 했다.
로마 중심가에서 한식으로 중식을 한 후 1인당 60유로를 더 내고 시내투어를 하면서 진실의 입 판테오신전 등을 관람했다.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국민의 900명이 시민권자이며 성직자만 산다. 우리나라의 정진석 추기경이 시민권자이며, 김수한 추기경도 사망전에 바티칸의 시민권자였다. 바티칸에는 300명의 현지인과 100명의 스위스근위병이 살고 있다.
바티칸광장에서 교황이 내다본다는 작은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도모성당이 노아의 편죽모양으로 건축되었다하여 모형도를 나무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로마를 둘러보면서 우리 불교문화 유산과 기독교문화유산을 비교해 보았다.
유럽의 아름다운 조각품들은 소재가 대리석으로서 처음에는 찰흙처럼 물렁물렁해서 섬세한 머리카락까지 표현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져서 지금은 깨어지지 않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조각품인 석굴암의 석불 등은 화강암으로서 잘못 조각하면 전체가 떨어져 나가버리기 때문에 얼마나 조심하고 정성을 다해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유럽은 건물도 대리석으로 건축하여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더욱 단단해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건축물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목조건물이 많았던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많은 유물들은 유럽이나 다른 나라의 예술가들이 감히 흉내 내지못할 우수한 것들이 많으니 정말 자랑스럽다.
11월 8일, 로마에서 폼페이로 갔다.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는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도시 전체와 2만 여명이 화산재에 묻혀 있다가 17세기 중반에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아직까지도 발굴중인 도시이다.
4층짜리 벽돌집이 있고 현대 사우나 이상의 내부로 구성된 공동목욕탕과 대리석 도로판 등을 보니 당시의 화려한 도시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당시의 문란한 성생활을 보여주는 사창가로 향하는 표시돌에 성기모양이 조각되어 방향을 표시하고 있었으며, 사창가 방에는 춘화도가 여러 개 남아 있었다.
길거리 곳곳에 있는 공동우물의 수도꼭지 등은 당시 폼페이 인들의 우수한 문명과 건축 수준 등을 보여줘 여행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화산재가 6m를 뒤덮고 용암이 이르러 폼페이는 멸망했지만 2000년전에는 화려한 도시였음에 틀림없다.
폼페이에서 소렌토항으로 이동하여 유람선으로 절벽 위에 세워진 카프리섬으로 갔다.휴양지로 유명한 카프리섬 선착장에는 호화로운 보트가 여러 대 정박하고 있어 이곳이 세계적인 휴양지임을 뽐내고 있었다.
카프리섬 정상에 올라서 둘러보니 저 멀리 바다 건너 나폴리항 뒷산이 보였다. 사진을 찍고 내려와 유람선을 타고 나폴리항으로 갔다.
세계적인 미항이란 나폴리항에 도착하니 해가 져서 그 진면목을 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웠다.
11월 9일 로마에서 피사로 이동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이로 꼽히는 피사의 사탑을 보았다. 원통기둥 모양의 흰 대리석 건물이 1350년 시모네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탑이 기울어진 이유는 모래로 된 약한 지반에 토대를 3m 밖에 세우지 않아서라고 한다. 탑 위에 올라가는 것은 인원이 제한되어 교대로 올라갈 수 있으나 우리 일행은 보는 것으로만 만족했다.
피사에서 밀라노로 갔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의 거리를 거닐고,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고딕양식의 아름다운 도오모성당을 보았다. 밀라노는 상업공업의 중심지로 이탈리아의 경제적 수도라고 할 수 있다.
11월 10일 알프스의 호수마을인 인트라겐으로 이동하여 산악열차를 타고 해발 3454m의 융프라우요흐에 등정하였는데 만년설에 덮힌 정상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현기증에 힘들었다. 몇 번 적응하니 고산병이 가라앉았다. 하산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다.
다음날 조식후 율루즈역에서 열차를 타고 파리로 향하였다. 3시간 30분만에 파리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본 것이 베르사유궁전이었다.
베르사유궁전은 왕권의 영화를 상징하는 대궁전으로 루이14세 절정기에 그의 부와 권력을 집결하여 50년에 걸쳐 완성시켰다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호화로운 궁전 중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곳은 “겨울의 방”이었다.
이 방은 1차 세계대전 종결의 조인식이 행해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궁전을 둘러싼 정원은 100ha에 달하여 프랑스 정원의 걸작품이었다.
11월 12일, 파리에서 두 번째 관광은 루브르박물관이었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며 모나리자 등의 세계 걸작품을 소유한 루브르박물관에서 우리나라 여행객들을 위한 우리말로 설명해주는 무전기가 있었는데 이 무전기는 대한항공에서 제공했다고 한다. 이 무전기 덕택에 가이드의 도움 없이 세계적인 걸작품들을 잘 감상할 수 있었는데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 후 패션 중심지인 상체리거리와 나폴레옹의 개선문 중 세느강 쪽에 있는 개선문을 보았다. 또한 루이16세와 마리앙트와네트를 포함한 18명이 처형당한 슬픈 역사를 간직한 콩코드광장을 갔다. 콩코드광장은 상체리제거리와 개선문 사이에 있는 팔각형 광장으로 파리에서 최고의 광장으로 손꼽힌다.
프랑스혁명 백주년 기념 및 만국박람회의 상징으로 세워진 에펠탑에서 엘리베이터로 탑의 중간까지 올라가 망원경으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노틀담성당 옆 몽마르뜨언덕 위에는 화가의 거리가 조성되어 관광객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는데 이들은 주로 파리로 그림 유학을 와서 오도가도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국인도 2명이나 있었다.
낮에 세느강 유람선을 탔으나 저녁식사 후 야경이 더 아름답다하여 다시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파리의 야경을 구경했다.
11월 13일, 유로스타 호텔에서 조식 후 역으로 이동하여 런던으로 출발했다.
데임스강에 1894년에 건립한 화려한 다리와 런던 하구에 설치된 타워브릿지 및의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7m에 달한다고 한다.
다리에서 22km 밑 하구에 신도시가 조성되어 있고 감옥에서 조금 벗어나면 양파모양의 건물인 런던시청이 있었다.
영국의 국회의사당은 상원 출입문과 하원 출입문의 복도 융단색이 다르다고 한다. 국회의사당을 지나 세계 3대 성당 중 하나인 성바오르성당를 보고 레선사원을 갔다. 그 곳은 성공회 왕실 교회로서 전몰자의 묘지가 있었다. 나무로 된 십자가가 있고 중앙에 양귀비꽃으로 장식하였으며 영국의 재향군인회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참여한 전사자는 별도로 한 곳에 모셔 놓았다. 여기서 도보로 버킹궁전에 도착했다.
버킹 궁전을 본 후 대영박물관에 갔다. 대영박물관은 의사 한스 슬론경이 개인 소장품 7만여 점을 기증하면서 관람객들에게 관람료를 받지 않았다.
2011년 11월 14잉ㄹ 오후 7시 35분에 영국의 런던공항에서 출발하여 다음날 오후 2시 25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유럽여행 첫날부터 돌아올 때까지 당시 73세인 나를 도와준 서울 목동에서 온 삼총사 아주머니들 덕분에 여행을 어려움 없이 잘 마칠 수 있었다. 그 분들은 60세 회갑 기념으로 친구 3명이 같이 온 것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부산에 있는 왕오빠라 부르며 매월 카톡으로 안부 메시지를 보내주고 유럽여행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은 불교문화의 유적지로 도시에는 없고 주로 시골에 있는데 유럽은 주로 기독교문화로서 성당이 주를 이루며 도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 나이에 10박 12일을 여행하다 보니 서울에 도착해서 시차문제도 있지만 힘들어서 48시간 동안 계속 잠만 잤고 몸살이 나서 고생한 후 당분간 해외 여행은 포기했었다.
그런데, 2015년 10월에 우연한 기회에 일본 오키나와를 2박 3일 여행하게 되었다.
첫날, 아침 6시30분에 김해공항에서 여행 수속을 마치고 8시 30분에 출발하여 10시 25분에 오키나와 나라공항에 도착하였다.
일본 최고의 동굴과 에이사 민속촌을 둘려본 후 중식을 하고 류쿠왕국의 화려함을 간직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리성을 갔다.
수리성 성문 밖에 빨간 우체통을 보고 어린 시절이 생각나 반가웠다.
태평양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오키나와 평화공원 입구에 한국인 위령탑이 있는데 그 둘레에는 우리나라 각 도에서 가져온 돌이 하나씩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 탑이 서 있는 땅은 한국정부에서 매입하여 한국소유이며, 관리는 일본에서 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코스타 비스타 호텔에서 온천 사우나를 하며 여독을 풀었다.
다음날, 1960m의 긴 다리를 건너면서 멋진 산호초 바다를 보고 코우리지마에 만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큰 잔디밭 만라모에 갔다. 코끼리 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만라모를 둘러보고 열대과일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후르츠랜드를 관람한 후 중식을 먹었다.
중식 후 23만평의 대자연을 자랑하는 오키나와 EXPO 해양공원에서 4층 건물의 세계최대 수족관을 관람했다.
수족관 앞 별도 야외 풀장에서 돌고래쇼 관람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오키나와는 공기가 맑고 미군용 비행장만 4개가 조성되어 있으며 미군들이 거주하는 시가지가 가장 번화했다.
첫댓글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