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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좌 -14 [전국비구니회관(법룡사)]
萬善同歸集(만선동귀집) 中道訟(중도송)
- 永明延壽禪師(영명 연수선사, 904~975) -
第三 제자품 7. 아나율과 天眼(천안)
莊嚴性空世界(장엄성공세계)라. 성품이 텅 비어서 공하다고 하는 그런 것을 꿰뚫고, 그러면서 또 얼마나 멋지게 장엄 했습니까? 性空世界인 줄을 알면서도, 그 實體(실체)가 공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말 부처님 궁전은 아주 아름답고 근사하게 이렇게 잘 장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거 뭐 비만 안 새면 되지.’ 하고 이렇게 할 일이 아닙니다. 잘 장엄해야 됩니다. 얼마나 환희심 납니까? 볼수록 환희심나지요. 그러면서 이것이 性空世界인 줄 알고 장엄을 해야 됩니다. “장엄하되 性空世界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이것이 中道正見(중도정견)입니다. 바른 소견입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바른 소견입니다.
유마경에서 앞에서도 끊임없이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겁니다. 왜냐? 세속인으로서 출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融通自在(융통자재)해서 걸림이 없어요. 결국 融通自在해서 걸림이 없는 세간에서 출세간을ㆍ출세간에서 세간을, 출세간 사람들은 세간사에 너무 그렇게 걸릴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 속인들이나 하는 것이지’ 자기는 언제 출세간 사람이 됐는데? 엊그저께 세간 사람이었으면서... 그렇게 우리 중생들은 그저 집착하는 병이 너무 많아가지고 그저 집착ㆍ집착. 자기가 어디에 소속되면 그만 엊그저께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거기에 바로 집착해버리는 것이지요. 莊嚴性空世界라.
羅列幻化供具(나열환화공구)입니다. 부처님 앞에 공양물을 잔뜩 차려 올립니다. 초파일 돼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차려 올립니까? 그런데 그런 공양물을 차려 올리되 幻化ㆍ환영(幻影). 幻影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나열해야 됩니다. ‘그것 부처님이 먹나? 어쩌나?’ 이렇게 생각하고 나열하지 않는 것은, 이것은 또 큰 병입니다. 잘못된 것이지요. 대개 시자들이 그런 생각에 많이 떨어져 있는데요.
그 전에 제가 어릴 때 오대산 참선방에 살 때, 겨울 되면 참 그... 그 때만해도 먹을 것이 없어요. 거기는 본래 짜기로 유명한 동네 아닙니까?
한암스님께서 참기름 병을 딱 당신 품에 안고, 지푸라기를 가지고 꽂아놓고는 국그릇을 들고 지나가면 거기에 한 번 적셔서 국그릇에 흔들어요. 그러면 참기름 한 방울이나 두 방울 떨어질 정도지요. 그런 정도로 참기름 냄새를 맡은 곳이고, 또 상원사 김치는 짜기가 소금하고 안 바꾼다 그래요. “소금보다 더 짠 것이 상원사 김치다.” 그런 이야기가 되어 있어요. 우리는 거기에 한 몇 철나서 그런 전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설이 아니라 실화지요. 그런데 그 때 어쩌다가 아주 특별공양.
특별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찹쌀 부꾸미입니다. 그것 어쩌다가 기름 볶는 냄새를 맡으면 얼마나 구수합니까? 그런데 한 쪽에서 그것을 굽고 있는 겁니다. 저것을 얼른 주워 먹고 싶은 겁니다. 그래도 그것 참습니다. 참아야 옳은 것이지요. 그래서 한 쟁반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쟁반 되면 부처님 앞에 부전이 들고 가서 절을 하는데, 큰 절 3배 하는데 한 3초밖에 안 걸려요. 그것이 무슨 절입니까? 이것은 무슨 춤추는 것도 아니고, 굴신 운동도 아니고 큰 절 3배 하는데 그냥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속도 빠르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불경하게 절을 하지만, 절 같지 않는 절이지만 그래도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절을 하고 내려 먹는 그것이 불자로서ㆍ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소견입니다. 그것이 옳은 소견이라고요.
“그런 절 뭐 하려고 하느냐? 그럴 바엔 차라리 하지 말지.” 하지만, 아닙니다. 부처님께 올리고 그런 절이라도 하고... 供養具. 幻化와 같은 供養具. 바로 내려다 지가 먹을 것이면서, 그러면서도 그렇게 부처님께 올리고 내려 먹는 그것이 제대로 중도적인 안목을 갖춘 사람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행자로 들어 왔을 때ㆍ사미로 있을 때, 그런 것을 철저히 아주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몸에 익히기만 했습니다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입니다. 부처님도 幻化입니다. 부처님도, 불상도 허상입니다. 저것이 돌이고ㆍ나무고ㆍ철이고 그렇지 뭡니까? 그래 우리가 불상으로 만들어 놨으니까 부처님 불상이고, 그리고 부처님이고 그런 것이지, 절하는 나는 또 뭡니까?
사실은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입니다. 나도 허상이라고요.
그러나 그런 것을 알고 열심히 공양물을 나열하고, 부처님께 깍듯이 절하고 하는 그런 자세. 이것이 중도적 관점에서 우리가 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신행생활하는 것입니다. 羅列幻化供具. 이런 말 한 마디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해도요? 그냥 다른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풀어집니다. 그 다음에
供養影響如來(공양영향여래). 影響如來.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여래께 공양 올린다. 환화와 같은 공양들을 나열해서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여래에게 공양 올린다. 여래가 어디 무슨 실재 하는 어떤 자체로써 어디 눈앞에 나타나는 여래가 아니잖아요.
讚歎彼我虛玄(찬탄피아허현)이라. 나도 남도 끝내는 다 텅 비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 남을 칭찬한다. 隨喜讚歎(수희찬탄)한다 말입니다. 隨喜讚歎한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떤 대상이 전부 彼입니다. 다른 사람ㆍ아니면 다른 어떤 경계ㆍ법당도 좋고ㆍ불사도 좋고ㆍ그 사람이 한 업적도 좋고ㆍ그 모든 것이 虛玄한 줄을, 텅 빈 것인 줄을 잘 이해하면서도 잘한 일에 있어서는 끝없이 찬탄 할 줄 아는 그런 자세. 能所平等(능소평등)함을 바라는, 주관과 객관이 궁극적으로 평등하다면, 부처도 나도 다 평등합니다. 그렇지만 부처가 되려고 발원하는 이 사실. 궁극적으로 나나 부처님이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사실 그렇지요?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이니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부처가 되려고 끝없이ㆍ끝없이 발원하는 그 자세. 이것이 바로 제대로 이치를 알고, 세상 이치를 알고ㆍ진리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신행생활의 모습이다 하는 것입니다.
禮拜影現法會(예배영현법회)라. 그림자처럼 나타난 이 법회에 예배하는 겁니다. 隨喜同參(수희동참)하니까 하~ 우리가 상강례할 때 이 법당은 어떻게 음향을 잘 했는지 쉰 음성도 청아하게 들려요. 어떻게 했는지 쉰 음성도 청아하게 들리는 여기에 우리는 환희심을 느끼고, 그냥 같이 동참해서 염불하고 상강례 하는 것만으로도 참 가슴이 서늘하고 조금만 누가 건들면 그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것. 하지만 또 알고 보면 影現法會라. 그림자처럼 나타난 법회. 감동합니다. 감동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影現法會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감동을 해야 합니다. 또 너무 집착해가지고 이것이 실재 하는 냥 그렇게 알고 법회가 다 끝났는데도 법당에서 기어이 안 나가려고 한다면, 그것도 또한 하나의 집착이고 잘못 된 소견이지요.
잘못 된 소견이라고 하는 것은 “치우친 소견이다.” 하는 것입니다.
有면 유ㆍ無면 무. 허망하다ㆍ아니면 실재하다. ←이런 식으로 치우친 소견을 가지고 있는 것. ‘저 사람은 내 사람이야.’ ‘저 물건은 내 물건이야.’ 언제 내 물건이 되었고 내 사람이 되었나요? 아닙니다 그것. 그렇게 집착하는 순간 그 때부터 상처받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때부터 상처받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느 물건도ㆍ어느 재산도ㆍ어느 사람도ㆍ어떤 명성도 집착하는 순간부터, 그 때부터 상처받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냐? 본래로 그렇게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공연히 환영에 사로잡혀서 집착하니까요. 그것은 正見. 바로보지 못 하는 것이지요. 존재를 바로보지 못 하는 것이지요. 그 어떤 것도 바로보지 못 하는 것이지요. 명예나ㆍ재산이나 그 무엇도 바로보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 보면 무슨 空着(공착)인데 자기 한 4년쯤 살고는 내놓을 생각 안 하고는 거기에 조금 공들였다고 자기 절 인양 착각해 버려가지고 기어이 집착을 해가지고는 그 동안 꼬깃꼬깃 모아놓았던 돈 다 여기저기 빼 쓴다고 다 쓰고, 뭐 하고 하면서 빚까지 져가면서 버텨봤지만 결국은 쫓겨나는 것을... 그것이 현실 아닙니까? 때가 되면 척 일어날 줄 아는 것. 본래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본래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닌데 뭘 그렇게... 그런 이치를 좀 알면 정말 불교를 전하고 포교하는데 크게 플러스가 되었을 텐데, 금세의 우리 불교 역사를 보면 이런 이치를 몰라가지고 그 미련ㆍ미련ㆍ미련부리다가 자기 망신하고ㆍ세상에 망신하고ㆍ불교망신하고 그래서 일선 포교현장에서 아등바등 그 포교해놓은 것 그만 다 까먹어버리고요. ←이런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것 참... 그래서 우리가 바른 소견을 가지고 산다는 것. 그 바른 소견은 바로 중도적인 소견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 ←이런 뜻입니다.
이 용어들이요? 우리가 일상생활에 가장 가까이 접하는 육바라밀에서부터 보리심을 바라고ㆍ불도를 구하는 일이라든지ㆍ불사를 하는 일ㆍ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ㆍ절을 하는 일ㆍ예를 들어서 우리의 모습을 어떤 마음으로 갖출 것인가 하는 이런 문제들. 이런 것까지도 일일이 다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降伏鏡像魔軍(항복경상마군).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을 항복을 받는 겁니다. 魔軍이라는 것은 실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는 동안에 어쩌다가 일어나는 걸림돌입니다. 그것이 鏡像魔軍이라고요. 그 마군은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마군입니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실재 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기도 하다가ㆍ공부하다가 “魔障(마장)이 일어났다.” “魔障이 일어났다.” 그러는데 그 魔軍이 실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동안... 알면 사실 바로 降伏입니다. 그 다음에
大作夢中佛事(대작몽중불사)라. 그렇습니다. 어떤 불사든지 佛事는 꿈속의 일입니다. 꿈속 불사입니다. 꿈속의 불사인줄 알고 크게 불사를 일으켜야 됩니다. 大作이라고 했잖아요. 夢中佛事인줄 알면서도 크게 일으켜라. 크게 일으켜라. 아~ 참 근사하지요? 두 손 묶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허망하고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인데 뭐 할 것이 있느냐고, 다 허망하고 공한데 뭐 할 것이 있느냐고 이렇게 하면 이것은... 정말 그런 병에 든 사람들이 많지요. 너무 많지요. “그 뭐 포교하면 뭐해?” 하고요. 그런 병에 들어있는 이것이 출세간 사람들의 가장 큰 병입니다. 大作夢中佛事라고 했잖아요. 분명히 夢中佛事이지만 그러나 크게 일으켜야 됩니다. 열심히 불사를 지어야 됩니다. 그리고
廣度如化含識(광도여화함식)입니다. 꼭두각시와 같은 중생입니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고요. 그 이름이 중생입니다. 사실은 바로 부처입니다. 제도할 것도 없어요. 그런 사실을 알고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 됩니다.
廣度. 널리 제도해야 됩니다. 열심히 제도해야 됩니다. 가르칠 수 있는 동안 열심히 가르치다보면 자기 공부됩니다. 자기 수행된다고요. 수행 따로ㆍ포교 따로ㆍ전법 따로가 아닙니다. 열심히 전법하고ㆍ포교다보면 자기 수행 거기에 따라와요. 언제까지 공부해가지고 그 다음에 그 때, ‘공부가 어느 정도 되면 그 때 내가 전법하고ㆍ포교하겠다.’ 그렇게 작정하고 해서, 포교한 사람, 제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대로 눌러 앉아버려요. 그리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 돼버려요.
이제 행정을 하려니까 행정에 어둡지ㆍ세상에 어둡지ㆍ하기 싫지ㆍ염불도 못하지ㆍ법문도 못하지, 그만 말 않는 것이 장점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말 안하고ㆍ책 안보고ㆍ세상 것 모르는 것을 장점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야~ 이것 큰 병이지요. 그것이 장점인줄 알고 있는 겁니다. 저하고 같이 중 된 사람도 그래가지고 그냥 그대로 주저 앉아갖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이 돼버렸어요. 이제 어디 갖다 쓰려니까 종무소에서 불러서 하려니까 나이 많아버렸지ㆍ재능 없지ㆍ능력 없지ㆍ요즘 현대 사람들 제접 하는데 도저히 지식으로나 무슨 상식이 떨어져버리지, 아 이것 큰 문제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세월 가니까 이젠 몸은 병들고, 마음이 쪼그라들어 버렸어요. 정신이 쪼그라들어가지고는 이제 아무 것도... 나가서 뭘 용기 있게 할 수가 없어요. 겁이 나는 겁니다. 사람 대하기도 겁이 나버려요.
저는 참 그 점이 제일 참 안타까워요. 어디든지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옛 사람들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고 참 그것 잘 모르고 가르친 것이지요. 어쨌든지 사회도 마찬가지고ㆍ우리 불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구석이든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同證寂滅菩提(동증적멸보리)라. 寂滅. 텅 빈 깨달음을, 깨달음이라는 것이 뭐 있습니까? 없어요. 寂滅한 겁니다. “實體(실체)가 적멸한 것이지만 그것을 함께 그것을 함께 증득해야 된다.” 하는 그런 내용으로... 참~ 글 구성을 한번 보십시오. 얼른 보지만 보리에서 시작해서 보리로 딱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명문으로 수백 년 동안 人口에 회자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교훈으로 이렇게 남겨지는 것은요? 이것이 보통 글이 아닙니다. 그리고 뜻만 이렇게 전달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 어떤 구성이라든지 짜임새라든지 그 다음에 어떤 문장으로 까지도 아주 뛰어나게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 부디 많이 복사해가지고 곳곳에 가서 접하지 못한 분들에게 많이 전하시고,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 그야말로 세간에 있든ㆍ출세간에 있든 자기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 간에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다시 말해서 치우침의 병에 들지 아니하고, 원만하고ㆍ좋아하는 삶을 살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 유마경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세간인으로서 출세간법을 거침없이, 아주 화려하게 또 아주 현란할 정도로 설법을 펴는 것도 바로 그런 조화로운 인간ㆍ조화로운 삶. 그것이 바로 유마거사의 인격이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참 아주 훌륭한 경전이 우리 손에 이르게 됐다. 이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제자품 일곱 번째 아나율과 天眼
7. 아나율과 天眼(천안)
佛告阿那律(불고아나율)하사대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阿那律(아나율)이 白佛言(백불언)하대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憶念(억념)하니我昔(아석)에
於一處經行(어일처경행)이러니/時有梵王(시유범왕)이
名曰嚴淨(명왈엄정)이라 與萬梵俱(여만범구)하야
放淨光明(방정광명)하고 來詣我所(내예아소)하여
稽首作禮(계수작례)하고 問我言(문아언)하되
幾何阿那律(기하아나율)의 天眼所見(천안소견)인가한대
我卽答言(아즉답언)하되 仁者(인자)여
我見此釋迦牟尼佛土三千大千世界(아견차석가모니불토삼천대천
세계)를 如觀掌中庵摩勒果(여관장중암마륵과)라하니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來謂我言(내위아언)하되
唯阿那律(유아나율)아 天眼所見(천안소견)을
爲作相耶(위작상야)아 無作相耶(무작상야)아
假使作相(가사작상)인댄 則與外道五通(즉여외도오통)으로
等(등)이요 若無作相(약무작상)인댄 卽時無爲(즉시무위)라
不應有見(불응유견)이니라
世尊(세존)하 我時黙然(아시묵연)이러니 彼諸梵(피제범)이
聞其言(문기언)하고 得未曾有(득미증유)하야
卽爲作禮(즉위작례)하고 而問曰(이문왈)
世孰有眞天眼者(세숙유진천안자)이니까
維摩詰(유마힐)이 言(언)하되 有佛世尊(유불세존)이
得眞天眼(득진천안)하시니 常在三昧(상재삼매)하야
悉見諸佛國(실견제불국)하되 不以二相(불이이상)이니라
於是(어시)에 嚴淨梵王(엄정범왕)과
及其眷屬五百梵天(급기권속오백범천)이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고
禮維摩詰足已(예유마힐족이)에 忽然不現(홀연불현)일세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이니다
佛告阿那律(불고아나율)하사대, 부처님께서 아나율에게 고하사대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그대는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라. 참 아나율은 이야기하기로 하면 많지요. 作福(작복)의 교훈. 복 짓는 사람으로서 부처님과의 대화. 아주 재미있지요. 그리고 이 분은 용맹정진의 표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용맹정진 때문에 눈을 잃게 됐다고 하는 그런 사실들. 참, 본 받을만한 점이 많습니다.
阿那律(아나율)이 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저도 또한 그 분에게 나아가서 문병할 소임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왜냐하면 憶念(억념)하니, 기억하건데 我昔(아석)에 於一處經行(어일처경행)이러니, 제가 옛날 어느 한곳에서 경행을 하고 있었는데 時有梵王(시유범왕)이, 그 때에 범왕이 있었습니다. 名曰嚴淨(명왈엄정)이라. 그는 이름이 嚴淨이었습니다. 與萬梵俱(여만범구)하야, 만 명이나 되는 범왕들과 더불어 함께 했는데 放淨光明(방정광명)하고, 아주 청정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빛을 번쩍번쩍 발하면서 來詣我所(내예아소)하여, 저에게 왔었어요. 그러면서 稽首作禮(계수작례)하고, 머리를 조아려서 예를 올리면서 問我言(문아언)하되, 저에게 물어 말하기를 幾何阿那律(기하아나율)의 天眼所見(천안소견)인가?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아나율로서, 말하자면 처음에는 게으르다가 나중에 부처님의 꾸지람 듣고 용맹정진을 지나치게 해서 天眼을 얻었잖아요. 그래서 아나율의 천안이 소문이 자자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범왕들이 와서 따지는 겁니다. “당신이 그 훌륭한 천안을 얻었다니까 천안으로써 얼마나 봅니까?” 그 말입니다. “얼마나 멀리까지 보느냐?”
我卽答言(아즉답언). 제가 곧 답하기를 仁者(인자)여, 어지신이여
我見此釋迦牟尼佛土三千大千世界(아견차석가모니불토삼천대천세계)를, 나는 이 부처님세계, 삼천대천세계 보기를 如觀掌中에 庵摩勒果(여관장중암마륵과)라하니라. 손바닥에다 사과 올려놓고 보듯이 이 지구를 그렇게 봅니다. 그렇게 말했어요. 대단하지요? “그런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입니다.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그 때에 유마힐이 난데없이 어디서 나타나가지고는 來謂我言(내위아언)하되,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唯阿那律(유아나율)아, 여보시오 아나율이여 天眼所見(천안소견)을 爲作相耶(위작상야)아? 천안으로써 보는 것은, 作相이라고 하는 것은 “조작이 있는 것입니까?” 이런 말입니다. 아니면 無作相耶(무작상야)아? 爲作相耶아? 無作相耶아? “조작이 없는 것입니까?” 어떤 作爲. 말하자면 보는바 없이 보느냐? 보는바 있게 보느냐? 이런 뜻입니다. 假使作相(가사작상)인댄, 가령 보는바 있게, 조작이 있는 어떤 작위가 있는 것으로써 본다고 할진댄,
則與外道五通(즉여외도오통)으로 等(등)이요. 외도들 다섯 가지 신통 얻은 것 하고 뭐가 다르냐? 그것 하고 똑 같다. 若無作相(약무작상)인댄,
만약에 無爲法으로써, 조작이 없이, 하는바 없이 만약에 본다고 한다면
卽時無爲(즉시무위)라. 그것은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어. 不應有見(불응유견)이니라. 응당히 보는바가 있지 아니해. 그것은 본다고 할 수가 없어. 이 지구를 손바닥에 사과 올려놓고 보듯이 그렇게 본다고 표현한 것은 틀린 소리다. 그렇게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有爲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말이지요. 世尊(세존)하, 세존이시여 我時黙然(아시묵연)이러니, 저는 그 때에 黙然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彼諸梵(피제범)이, 그 때에 여러 범왕들이 聞其言(문기언)하고,
그 말을 듣고는 得未曾有(득미증유)하야, 미증유를 얻어서
卽爲作禮(즉위작례)하고, 곧 예배를 하고는 而問曰(이문왈), 이에 물어 가로되 世孰有眞天眼者(세숙유진천안자)이니까? 세상에 있어서 누가 제대로 된 천안을 얻은 사람입니까? 진짜 천안을 얻은 사람입니까?
維摩詰(유마힐)이 言(언)하되, 유마힐이 말하기를 有佛世尊(유불세존)이 得眞天眼(득진천안)이라. 아 부처님이 진짜 천안을 얻은 분이지. 부처님은 常在三昧(상재삼매)하야, 항상 삼매중에 있어서 悉見諸佛國(실견제불국)하되, 모든 불국토를 다 보지만 不以二相(불이이상)이라. 두 모양으로 보지 않는다. 不二라는 말이 은연중에 여러 번 나왔지요? 저 앞에서도 몇 번 나왔습니다.
이것이 不二法門을 정점으로 삼고 구성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리 놀라지 말라고 不二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ㆍ하나씩 던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不二라고 하는 것이 몸에 젖어들도록 이렇게 아주 의도적으로 편성된 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둘이 아닌 모습을 평등하게, 어떤 상대와 차별적인 것이 아니고 평등하게, 그렇게 둘이 아닌 모습으로 본다. 이것은 글쎄요. 다른 이야기지만 텅 비게 본다. 空하게 본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於是(어시)에, 그 때에 嚴淨梵王(엄정범왕)과 及其眷屬五百梵天(급기권속오백범천), 엄정 범왕과 그 권속 오백 범천이 그 말 한 마디 듣고, 둘이 아닌 모양으로써 본다 하는 그 말 한 마디 듣고 바로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고 禮維摩詰足已(예유마힐족이)에, 유마힐의 발에 예배를 올리고 忽然不現(홀연불현)일세.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이니다. 그래서 저는 도저히 그 분 앞에 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거기에도 말하자면 세상사를 보는데 어떻게 보느냐? 아무리 아나율이 天眼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보는바가 있는 그런 마음자세로 보는 이것은, 지구를 그렇게 보든ㆍ사과 한 개를 보든ㆍ눈앞에 있는 것만 보든 간에 그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두 모양이 아닌 것으로 본다 하는 것은 텅 빈 것으로 본다. 그래야 벌써 중도지요. 中道. 보되 평등한 것으로 본다. 둘이 아닌 모습으로 본다. 그러니까 여기 수백 명의 청중이 있다. 개인ㆍ개인. 어른스님은 어른스님 대로ㆍ스님은 스님대로ㆍ신도는 신도대로. 다 낱낱이 분별해서 이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있다고 하는 그러한 차원. 그 궁극적 차원이 개개인이 다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로써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도적으로 보는 것이지요. 외형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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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讚歎彼我虛玄] [大作夢中佛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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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歎彼我虛玄' '大作夢中佛事'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이니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부처가 되려고 끝없이ㆍ끝없이 발원하는 그 자세. 이것이 바로 제대로 이치를 알고, 세상 이치를 알고ㆍ진리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신행생활의 모습이다. 대원성 보살님, 고맙기가 무한대 입니다_ ()()()_
大作夢中佛事(대작몽중불사)라...어떤 불사든지 꿈속의 불사인줄 알고 크게 일으켜야 하느니라. 釋대원성보살님~ 공부 잘 하고 갑니다.다음에 또 올께요.^^_()()()_
羅列幻化供具 供養影響如來...환화와 같은 공양들을 나열해서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여래에게 공양 올린다...釋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_()()()_
중도 . 보되 평등한 것으로 본다 .둘이 아닌 모습으로 본다_ 대원성님 고맙습니다 _()()()_
中道....고맙습니다_()()()_
能所平等...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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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法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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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나도 남도 끝내는 다 텅 비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 남을 칭찬한다.(隨喜讚歎)..._()()()_
나무 아미타불
공성 안에서의 실상_()()()_
당신은부처님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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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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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힐소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