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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산수화 강좌 (강의자료)
중국미술이론 발전 1단계: 춘추(기원전770-475)--한(기원전206-기원후220)
제자들이 미술에 대하여 논. -- 공구, 장주, 한비, 유안, 왕충 : 그림에 대한 논의를 빌어 도를 비유
중국미술이론 발전 2단계:위진 남북조
고개지(동진) 사혁(남제) 요최(남진) 종병,왕미(유송-산수화 이론)
한 대에 이르러 회화가 간략한 것에서 정밀한 것으로 이행하고 있었으며 위진남북조에 이르자 본격적으로 발전, 이론도 밀도있는 논술로 발전.
1. 시.서.화의 결합
·한 대 '채옹'--그림에 찬을 짓고 이를 그림에 직접 씀(찬을 짓는 것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시서화를 처음으로 결합)
·동진 '왕익'(왕희지 숙부)은 채옹이후 다시 서,화,문을 결합.(行己之道-서예와 그림은 자신의 창작이 요구되며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自畵自書-스스로 그리고 스스로 쓴다)
이로 인해 송,원 이후 문인화가 제발을 중시하여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쓸것이 요구. 민간출신화가들은 겨우 성명만을 쓸뿐이어서 문인사대부의 경시를 받음.
·동진 '왕희지'--화가이기도 하나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서예의대가
2. 고개지: 건강(지금의 남경)의 와관사에 '유마힐상'
·전신(傳神): 인물의 전형적인 정신과 마음을 파악해야한다. 얼굴모습의 전신작용을 중시, 눈동자 가장 중시--회화비평의 제일기준으로 삼음
·인물과 환경을 결합시킬 것을 주장--"화운대산기"에서 인물의 사상,감정에 따라 경물은 깍아지른 듯이 험한 세를 그린다.
·이형사신(以形寫神): 형상으로서 정신을 그린다
·천상묘득(遷想妙得): 생각을 옮겨서 묘를 얻는다. 먼저 묘사할 대상을 관찰, 연구하여 대상의 사상과 감정을 깊이 이해하고 체득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각을 옮기는 것.' 천상묘득은 사유활동을 형상화하는 과정.
이는 자연과 동물화에도 적용. 고개지는 산수화도 천상묘득의 경지에 넣었는데 이는 매우 탁견이다. 고대 산수화론이 태어나 싹틀때부터 이미 자연주의 예술관과는 대립하여 대자연의 미를 재현하고 작가의 감정도 담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고개지는 망루, 누각 등은 천상묘득의 필요가 없다고 생각
그 외 '치진포세置陳布勢'--구도는 생각을 치밀하게 하여 실제로 마주 대하여 보고 교묘하게 마름질 하라
묘사할 대상에 따라 용필을 변화시켜야 한다.
3. 사혁(謝赫): [고화품록古畵品錄]--6법으로 그림의 우열을 논함
6법: 기운생동, 골법용필, 응물상형, 수류부채, 경영위치, 전이모사 p92
전대의 미술이론을 계승, 발전시킨 것. 고개지의 이론은 그 연원이 됨
기운생동: 신(神), 신운(神韻)--사혁 시대의 회화는 주로 초상화와 고사인물도였기 때문에 기운의 본의는 정신적 기질을 말함. 그러나 이 후 산수나 화조등, 또한 전체적인 회화의 예술성을 평가하는 것이 됨.
4. 요최(557-589)[속화품록]--심사조화(心師造化)론
'속화품록'은 '고화품록'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조화(자연, 객관사물)를 스승으로 삼는다.
5. 종병, 왕미--산수화론
독립적인 산수화는 동진(317-420)--남조(420-589)에 이르는 시기에 나타났다.
산수시의 등장에 이어 산수화 등장. 동진, 남북조 시대에 이르자 일부 예술가들은 산천의 미에 대해 감정상 공명하기 시작했고 이를 표현하고자 갈망.
현존 가장 오래된 산수화--수, 전자건, '유춘도遊春圖'
기록에 의하면 동진의 '대규'가 산수화를 그렸다.
동진의 '종병''왕미'(종,왕)는 작품과 이론 저술
종병[화산수서 畵山水序] 왕미[敍畵차례서]가 산수화론의 효시
♠. '창신暢神펼,마음누그러질창' 의 효능론
사람의 정신을 유쾌하게(창신) 하는 것으로 산수화보다 좋은 것이 없다. 산수화의 예술미를 감상하는 것으로 실제 산수의 자연미를 감상하는 것으로 대체
♠ 神明降之 此畵之情也: 신명이 이에 강림하니 이것이 그림의 정이다.
산수화가 막 흥기하는 시기에 왕미는 이미 자연주의적 회화에 반대하고 "신명이 이에 강림할 것"을 요구하여 이론적으로 산수화 창작에 정확한 길을 확립. 이에 송대의 곽희는 왕미의 사상을 계승[임천고지]에서 이를 더욱 진일보 시킴
♠ 咸紀心目: 관찰체험을 모두 마음의 눈에 기록한다.
종병은 친히 많은 명산대천을 편력하여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법으로 삼아" 자연 경물의 법칙을 탐구하였다. 즉 관찰경험을 통해 산천의 경물을 마음속에 기억해 놓았다가 그것을 직접 대하지 않고도 그려낼 수 있다.
♠ 투시의 초보적 규명 --가까운 것은 크고 먼 것은 작다. 묘사할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비로소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또한 화면을 투시하는 원리를 이루어 낼 수 있다. 후대 전자건의 "지척에 천리의 아득함을 담는 " 산수화도 여기에서 나타난다. 종병의 투시이론은 지금부터 1500년 전에 제시된 것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이르다.
6. 대옹의 조소론
한 대 능묘 앞의 사자나 호랑이 말 등의 동물 석조는 그 예술적 수준이 사실상 한 대 회화를 능가. 감숙 출토의 [청동분마]나 운강, 용문, 맥적산 석굴의 작품들처럼 불교를 소재로 한 위진 남북조의 조각은 예술성이 매우 높다.
동진에 이르러서야 화가겸 조각가가 나타났는데 대규가 가장 저명. 16척이나 되는 불상을 만들면서 휘장뒤에 몰래 숨어 사람들의 칭찬과 비판을 연구 3년간 생각 끝에 불상을 완성. -- 대형조각에 있어 형태의 비례는 실제 사람의 형태 비례와 달라 시각예술적 효과를 고려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오늘날 대형환조를 창작하는데 대해서도 계시해 주는 점이 있기 때문.
당. 오대의 회화이론
당대는 시가, 회화, 조각, 음악, 무용 등이 모두 매우 발달.
漢魏, 육조 시대의 성현, 공신, 의사, 열녀 등을 그리던 좁은 범위를 벗어나 세속적인 생활의 여러 측면을 그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부녀자들의 생활을 반영한 작품의 경우 과거 절개있는 여인이나 열녀 같은 소재는 어느덧 사라지고 그 대신 부녀자들의 기마나 가무 또는 약간의 노동장면 등의 묘사로 대체되었다. 부녀자들의 모습에도 변화가 일어 풍만한 살과 통통한 뺨, 호장의 특이한 의상. 등 밝은 시대감각과 비교적 건강한 심미관이 나타났다. 불교회화의 세속화, 민족화등도 당대 미술의 특징.
산수화와 화조화는 盛唐(713-765)경부터 시작되어 인물화와 나란히 발달.
미술이론도 예술기교를 전면적으로 깊이 탐구.
미술이론가 장언원(847-874)은 [역대명화기]에서 회화의 기원, 회화의 효능, 회화평론의 기준, 회화의 사승, 회화의 시대적 특징과 지역적 특징, 회화의 예술적 표현 등의 문제에 대해 매우 광범위하게 논의. 예술의 표현문제에 있어 고개지, 육탐미, 장승요, 오도자 4대화가의 용필의 기교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글씨와 그림의 용필의 차이점과 공통점, 뜻이 붓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림은 다해도 뜻은 남아 있다. 기법의 발생문제 등을 논증.
1. 장회관의 神,骨,肉론-- 고개지, 육탐미, 장승요에 대한 비평논쟁
사혁--고개지보다 육탐미의 그림을 상품으로 취급
요최--고개지를 육탐미보다 하품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남량의 장승요 그림을 평하여 거의 전대의 거장에 버금간다고 평가
이사진(唐)--장승요, 고개지와 육탐미를 상품에 같이 놓는다. 이사진은 장승요는 회화의 "성인"이므로 후학자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 사람을 그리는 아름다움에 있어 장승요는 肉을 얻었고 육탐미는 骨을 얻었으며 고개지는 神을 얻었는데 신묘하여 짝할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고개지를 으뜸으로 친다.
♠신.골.육으로 그림을 논하는 방식은 일종의 척도로 변화되어 인물화, 동물화, 서예까지 이로서 논의(장희관: 말은 근육이 많고 살이 적은 것을 상품으로 치고 살이 많고 근육이 적은 것은 하품으로 치는데 글씨도 그러하다.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뼈와 살이 알맞아 신모神貌가 흡족하고자 한다. 만약 근육과 뼈가 그 기름과 살을 당해내지 못하면 말의 경우 굼뜬말이 되고 사람의 경우 육질이 되며 글씨의 경우 묵저墨猪가 된다.)
♠신은 신사神似. 신운神韻, 골과 육은 형체의 묘사(형사形似)--- 다만 신골육이 명확히 나뉠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보는 회화에 대해 골을 갖출 것을 요구했는데 서예에서 마르고 굳센 것을 귀하게 여겼다.
2. 4격(格), 5등(等):
신.묘.능.일품神,妙,能,逸品 자연.신.묘.정.근세自然,神,妙,精,謹細
6법으로 회화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남제에서부터 당초까지 줄곧 지켜진 것.
6법에 비해 추상적인 신, 묘, 능, 일 4격은 성당 경에 비로소 나타났다.
♠4격: 당 고종의 측천후 시대에 이사진이 '속화품'을 지어 일품(逸品)에 네사람을 열거. 장회관(8세기초)은 [화단(畵斷)]을 지으면서 신묘능神,妙,能을 제시하여 그림의 우열을 비교하였다. 서예에서도 서예를 신,묘,능의 3품으로 나눔. 그 위 주경현(9세기 초, 중경)이 "신,묘,능,일품"으로 4격을 정.
♠5등: 장언원(9세기초, 중경)이 "자연自然, 신神, 묘妙, 정精, 근세謹細"의 5등을 수립
자연: 인공의 티가 없고 기교의 흔적이 없는 것. 자연의 격을 제일 위에 놓는다. 자연을 잃고나면 신이요, 신을 잃고나면 묘요, 묘를 잃고나면 정이요, 정이 잘못되면 근세가 된다. 근세한 그림이 가장 떨어지는 이유는 하나하나 모두 갖추어 매우 삼가고 매우 자세하여 밖으로 세밀한 기교를 드러내기 때문. 무엇이든 다 그려내는 것은 하품에 속하는 그림.
4격5등은 6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벗어나 6법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이는 당나라 사람들이 새로이 수립한 회화비평기준이다. 4격과 5등은 6법처럼 그렇게 구체적으로 준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작품의 풍격을 가리키는 것이다.
4격은 송, 원, 명, 청대에도 성행했지만 5등설의 영향은 크지 않다.
3. 장언원의 회화이론
♠서화동체론: 중국고대 회화기원에 대한 논의는 복희가 8괘를 그리고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장언원은 창힐이 눈이 4개여서 보통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하였다. 가장 이른 중국의 한자는 상형적인 것으로서 글자의 모양이 사물의 형상에 근거하여 그려진 것. 장언원은 창힐시대에는 글씨와 그림이 동체여서 어느것이 문자이고 어느것이 그림인지 나뉘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채도에는 이미 인물이나 기하학적인 도형이 그려져 있어 회화의 발생은 주로 인륜의 노동생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 회화효능론: 교화를 이루어 인륜을 도우며 성정을 즐겁게 한다.
장언원은 회화는 교육작용을 가지고 있어 6경의 작용에 비길 수 있다고 생각 하였다. 고대 봉건사회에서 6경은 사람들이 배우는 최고의 경전. 그리하여 후대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인물화의 효능을 논할 때 장언원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장언원은 종병과 왕미의 생활과 사상, 감정 및 그들으이 산수화에 근거하여 "어진 것을 본받고 어리석은 것을 경계하는" 평가기준은 적용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성정을 즐겁게 해 준다"고 덧붙였다. 이는 종병과 왕미의 "창신"작용과 통하는 것
♠"6법"에 대한 새로운 논술
장언원은 기운생동을 이루어내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 기운생동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운으로 그림을 구하면 형사는 그 사이에 있게 된다." 즉 대상을 표현할 때 먼저 기운, 즉 神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기운을 파악하여 형상을 이루어내면 곧 신이 있고 형도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고개지의 이형사신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고개지는 형으로 신을 그리는 것도 또한 옳다고 했는데 장언원은 신으로 생동을 나타내는 조형이라야 올바른 조형이라고 강조. 장언원은 회화에서 조형의 근거는 화가가 대상을 반영하는 立意이며 그 표현의 수단은 용필이므로 회화에 뛰어난 사람은 서예에도 뛰어나다고 하였다. 장언원은 자신이 화가이자 서예가이기도 함.
·입의立意: 구상이요, 창작의 핵심으로 천상묘득의 결과
·경영위치經營位置: 장법章法으로 입의에 의거하는 것인데 입의는 화가나 서예가의 머릿속에 있는 복안(腹案)이고 경영위치의 장법은 이미 가시적인 형상으로 구체화된 입의의 물화(物化)이다. 전자는 무형이고 후자는 유형이다. 6법의 상호관계는 경영위치가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기 때문에 일체의 형상은 경영위치의 총괄을 받는다. 이는 회화의 법칙을 정확히 총결한 것이다.
장언원은 오도자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 주된 착안점은 기운과 용필에 있었다. 또한 그는 공장(工匠)출신의 그림은 격이 높지 않다고 보았다. "예로부터 그림을 잘 그린 사람은 관리나 귀족, 일사(逸士), 고사 아닌 사람이 없어 한때 묘를 떨치고 천년동안 꽃다움을 전하였으니 여염의 비천한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이는 장언원의 봉건 사대부 문인적인 예술편견이다.
♠ 그림을 논할때는 사자(獅資사자사 재물사--사승관계) 전수(傳受--새로운 풍격은 전통의 기초 위에서 발전되고 혁신되는 것) 남북(南北) 시대(時代--남북, 시대란 그림을 그릴 때 시대적인 특징과 지역적인 특징을 알아야 함)를 알아야 한다.
·오도자는 까까이 장효사(7세기)를 스승으로 삼았고 멀리는 장승요를 스승으로 삼았지만 장효사와 장승요는 결코 오도자의 창조를 제한하지 않았고 그는 그의 스승을 뛰어넘어 독특한 풍격과 예술유파를 이룩하였다.
·의복, 수레, 풍토, 인물은 시대마다 각각 다르고 남과 북이 다르니 그림을 보는 올바름은 자세히 살피는데 있다.--예로 짚신은 북쪽의 변방에 알맞은 것이 아니고 우마차는 영남지방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역사화의 창작이나 역사연극, 무대미술작업 등에 마땅히 주의해야 할 점.
♠회화의 용필(用筆)론
회화가 발달함에 따라 중국화의 주된 조형수단이요, 형식미 표현의 ㅣ수단인 용필도 부단히 발달하여 치졸하던 것이 정세해지고 단순하던 것이 풍부하게 되었다. 장언원은 고개지, 육탐미, 장승요, 오도자 4대화가의 용필에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총결해 냈다.
·글씨와 그림은 용필법이 같다
몇가지 예에 있어 회화가 용필에 있어 서예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이를 통해 필력을 배우고 계발시킬 수 있다
·필법이 같지 않으면 풍격이 서로 다르다
용필이 같지 않으면 그려진 선의 형식미도 다르다--육탐미의 용필은 정세하고 예리하고 윤택하고 고운데 새롭고 기이하여 오묘함이 매우 뛰어나다. 장승요의 용필은 점 찍고 끌고 찍고 떨치는데 갈고리진 창과 예리한 칼이 가득찬 듯하다. 오도자의 용필은 규룡과 같은 수염과 구름 같은 머리가 수 척이나 되어 흩날려 움직이는데 터럭의 뿌리가 살속에서 나온 듯 힘이 굳세고도 남음이 있다.---고개지의 선묘는 확실히 "견고하고 굳세어 길게 맞닿아 있어" 미불이 말하는 '춘잠토사'와 같이 힘이 안에 함축되어 있고 부두러우면서도 약하지 않다. 오도자는 확실히 힘이 굳세고도 남음이 있으며 굴리고 꺽고 갑자기 부러뜨리는데 변화가 있고 힘이 있어 후대 사람들이 말하는 난엽묘에 속하는데 `장언원은 또한 용필이 다른 풍격의 양대 유파를 "성기고 세밀한" 두가지 체(體)로 귀납시켰다. 이처럼 장언원은 선의 형식미에 있어 양대 유파로 나우었을 뿐 아니라 조형상에 있어서도 양대 유파로 나누었다.
"고개지와 육탐미의 신묘함은 그 필적의 끝을 볼 수 없으니 이른바 필적이 주도면밀하다는 것이다. 장승요와 오도자의 묘는 필이 겨우 하나나 둘에 불과하지만 모습이 이에 응해 있고 점과 획을 풀어헤쳐 때로 빠뜨린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필은 비록 주도면밀하지 않지만 뜻이 주도면밀한 것이다. 그림에 성기고 세밀한 두 가지 체가 있음을 안다면 바야흐로 그림을 논할 수 있다."
·뜻이 붓보다 먼저 있고 그림이 다해도 뜻이 남아있다.
화가의 사상과 감정은 용필을 지배하기 때문에 뜻이 붓보다 먼저 있다. 화가의 뜻과 사상은 용필을 지휘하고 붓은 주제와 사상을 표현하고 형상을 이루어 내는데 이바지 하는 것이다. 그리기에 앞서 전체적인 그림이 가슴속에 있어야만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 정신이 계속 이어지고 단숨에 그려 "신기를 완전하게 할 수 있다" 중국화는 도구가 특수하여 잘못 그리면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는 유화와는 다르다. 문동이 말하는 '가슴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도 이러한 의미이다.
♠ 뜻이 그림에 있지 않아야 그림을 얻을 수 있다.
'오도자가 그림을 그리는 기법의 숙련도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혹은 팔뚝에서 혹은 다리에서부터 시작하는 데도 능히 피부와 혈맥이 연결되었다. 보통사람들은 인물을 그릴 때 머리부터 그리기 시작하는데 오도자는 어느 부위에서부터 그리건 전체가 조화롭게 되었다. 그는 직선을 그리는 데 자의 도움을 빌지 않고 원을 그리는 데도 그림쇠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도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 장언원은 오도자가 정신을 극도로 집중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기실 숙련된 기교는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오도자의 뛰어난 기예는 그의 천재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실천의 산물이다.
고암의 "한국화 이야기" 중에서...
**한국화는 크게 3 부문으로 분류한다.**
1,회화(繪畵); 일반적인 모든 그림을 말하며 산수화 화조화등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그림 들을 말함.
2,문인화(文人畵); 채색을 하지 않는 순수 먹물로만 그린 그림을 말하나 근래에 와서는 특수하게 채색을 가미하였더라도 문인화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음.
3,민화(民畵); 전문적인 그림 수업을 받지 않고 일반 가정이나 사업장에서 개인기를 발휘하여 그린 그림들을 민화라고 하며
낙관이 없는것이 특징이고 근래에는 전문 화가들도 민화를 많이 그린다,
소제와 기법이 거의 일정하다,
이는 민요를 가수가 불러도 민요라고 하듯 민화도 낙관을 하여 화가가 그려도 민화라 한다.
한국화는
동양화에서 분류하여 우리나라의 특성 과 민족적 의식을 내포한 표현법을 구사 함으로써 중국이나 일본과의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중국화 보다는 간결하며 단아한 맛을
풍기며,일본화 보다는 천박하지 않고 짙은 채색을 피하는 경향이기는 하나 채색을 한다 해도 담채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것이 한국화의 특성으로 이어진다.
1980년 이전에는 동양화로 구분하여 세계의 미술을 동서 개념으로만 분류하였는데
동양 3국 에서 먼저 중국과 일본에서 부터 각자의 이름으로 불려 사용하였다,
즉,중국화,일본화등으로 자 기의 개성을 살려 구성해 가는 경향이 뚜렷해 감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한국화 라는 명칭을 공식
명 칭으로 하게 되었다.
한국화는 우리의 개성을 살려 차별화
해 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요 한국화 의 본질을 잘 이해 하는 것이라 본다.
그림을 공부 함에 있어 법식을 무시하는 태도는 좋지 않고
일생동안 법식에만 묶여 있는 것은 더욱 좋지 않다.
처음 법식을 엄격히 지키다가 차츰 법식을
떠나 자유 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니 법식을 지키는 궁극에 이르면 비로소 완전히 법식을 벗어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육법; (六法)
1,기운생동(氣韻生動);멋
2,골법용필(骨法用筆);필력
3,응물상형(應物象形);사생에 충실
4,수류부채(隨類賦彩);맞는 채색
5,경영위치(經營位置);구도
6,전이모사(傳移模寫);모방과 창작
이
육법은 화가 라면 꼭 알고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가끔 방송등에서 기운생동에 대하여 설명이 나오는데 기운이
생동하고...결국 이말은 멋 이라는 뜻이다.
한국화(동양화)의 분종
북종화(北宗畵);
북종은 이사훈(李思訓)부자가 개조(開祖)인데 전해져서 송의 조간(趙幹) 조백구(趙伯駒),백소(伯騷 ) 마원(馬遠) 하언지(夏彦之)에 이르렀
으며,
남종화(南宗畵);
왕유(王維)가 개조인데 장조(張操) 형호(荊浩) 관동(關仝) 곽충서(郭忠恕) 동원(董源) 거연(巨然) 미씨부자(米氏父子)로 이 어져 사대가에 이르렀다.
이것은 명말(明末)에
동기창(董其昌)등이 제창한 것으로
선종(禪宗) 이 남북 양종으로 갈라지는 시기에 이사훈의 제자였던 왕유가 청록파 산수를 그리지 않고 청담(淸淡)한 수묵산수(水墨山水)를 그리기 시작한것이 원의 사대가에 이른것으로 육조대사(六祖大師)이후 마조(馬祖)운문(雲門)같은 영걸이 나온 시기와 같은 때이다.
그림은 남방 사람이 남종화를 하고 북방사람이
북종화를 한것은 아니다.
그림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북종화는 사물에 중점을 두고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즉 북종화는 그림 그 자체가 실물과 같이 그린다는 뜻인데 사진 처럼 그린다 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것이고,
남종화는 사물에 근거를 두되 작가의 사상이 깊히 잠재해 있는 그림이니 다소
사물의 형태에는 변화가 생기더라도 의미가 새롭게 부여 되는 그림이라 할수 있다,
이때 그림은 눈으로 그리지 말고 마음으로 그려라 라는 말이 생겨났고
다소 추상적인 맛을 갖게하는 그림이다.
동양화의 추상화도 여기서 부터 출발 했다고 보면 좋을 듯 싶다
대 자연을 화폭에 담은 산수화
산수화는
산자수명 (山紫水明)의 약자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대표적인
이름이다.
산수화는 역시 산과 내를 중심으로 자연의 경치를 그리는데 서양의 풍경화와 같으나
산수화로 구분하는 이유는 자연을 인간이 몸담고 의지하고 사는 경이로운 대상 또는 자연과 인간을 대등하게 보는 이상으로 자연을 넘보지 않았다.
반면
서양인들은 자연을 인간이 정복할 대상 아니면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절대적인 상반된 관계로 보아왔다.
밀레의 만종이나 풍차 그림등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사람을 삼키는 사나운 바다는 자연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서양풍경화의 좋은 예이다.
허나 동양화에 나타나는 것은 정반대이다,
종이 붓 벼루등 문방사우로 옮겨 놓은 자연은 숭고함이 넘치는 것이다.
산수화의
기법은 4단계로 나눈다,
그릴 대상의 윤곽을 잡으면 ,
산과 바위, 시내가 들어 앉고,그 다음 먹이나 물감으로 채색한후 풀 수목등으로 미흡한 곳이 마무리된다.
옛 서당이나 서예학원에서 습자 할때 처럼 개칠이란 있을 수 없다.
서양화는
원근,명암,투시법을 중시하며 산술적이다.
하지만 우리 산수화는 질감과 원근이 뚜렷해도 산술적은 아니다,
자연을 올려다 보거나(高遠) 대등하게( 平遠) 보거나 골짜기를 내려다 보거나 굽어보는(深遠)기법을
활용한다.
이른바 삼원법이다
마음과 정신까지 표출하는 인물화
인물화는 동양화 중에서도 가장 먼저
나온 분야다.
중국의 경우 당(唐)대 이전의 회화는 거의 인물화
중심이였다.
그리고 화조, 산수화는 그 다음에 나온 분야라는게 학계의 이야기다.
기명절지(器皿絶枝), 정물화
정물화하면 대개는 어떤 것이란 것 쯤 쉽게 이해가 갈것이다,
하지만 절지화 하면 무슨 말인지
조차 모를 것이다.
옛 우리 조상들이 그려온 그림중 한 분야지만 서양화 이론위주의 미술교육에 우리의 용어마져 소외 시켰으니 당연하다.
꽃과 나무, 새가 어울리는 화조화
꽃과 새를 소재로한 화조화는 현재도
다양하게 그려지고 있는 분야의 하나이다.
서울의 골동가인 인사동이 아니더라도 일반 가정에도 화조화 한두점 없는 곳이 없다.
오원 장승업 이후 미술사적으로 꼭집어
이들이 대가라고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 관재
이도영과 이들의 문인이였든 묵로 이용우, 수운 김용수등이 수준 높은 작 품들을 남겼다.
잡초와 벌래의 생동감,초충화.
한국의 초충화훼화는 색채가 강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과 달리 수려한 아름다움은 독특하게 형성되어 간 기법에서도 나타나고 잇다.
학자들은 초충화훼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초기의 신사임당, 중기의 심사정, 후기의 조희룡과 남계우를 꼽는다.
또한 초화와 같이 풀벌래도 계절에 따라 색갈이
변한다,
초목이 무성할때는 초충도 녹색을 닮으며 단풍이 들면 풀벌래의 색갈도 변하고 형체도 달라진다.
하지만 사실적인 표현을 넘어 한국 특유의 해학이 담겨있는 것이 우리 초충화훼화의 빼놓을수 없는 자랑이다,
신 사임당의 그림에서 처럼 연약한 꽃에 나비가 따른다, 자연의
섭리임이 분명하지만 여성이 억압받던 그 시대의 애환을 생각하면 다시한번 음미해 볼만 한 것이다.
잉어는 출세의 상징,어해도 - 과거보려 가는 선비의 품에 어해도
어해도( 魚蟹圖) 하면,
물고기들의 그림이지만 최근 물고기 그림류는 전통적인 잉어,게,새우,메기,쏘가 리,등의 한정된 소재를 뛰어넘어 붕어와 조개류 가오리 오징어등 바다 고기 까지 다양해 지고 있다
아름다운 모습 미인도.
우리나라 옛 여인들은 어떤 모습이 였을까?
서양의 초상화 하면 미녀가 연상 될만큼 여인들의 그림이 많지만 전통한국화에서는 쉽게 찾아 보기가 힘든것이 여인들을 소재로한 그림이다.
고분 벽화나 범종의 조각에 여인상이
없는 것은 아니나 화폭에 담긴 여인들은 가짜 시비를 불러 일으켰던 신사임당의 초상화와 윤선도의 종가에서 발견된 미인도가 가장 오래된것이다.
고산의 옛집 녹우단에서 나온 이 미인도는 공재 윤두서의 작품인지 그 아들 낙서 윤덕희의 그림인지는 확실한 고증을 요구한다.
그러나 전문가 들은 가장 오래된 미인도중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보다 이 그림이 앞설것이라는 설을 주장한다.
조선 후기에 와서 미인도의 수는 늘어
났으나 왕가나 선비 집안 부인들의 초상화는 거의 없고 춘향, 계월향,
운낭자, 최홍련등 의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잇다.
비록 많지 않은 그림이라 해도 이 그림들로 하여금 우리는 옛 여인들의 자태를 엿 볼수잇다,
삼단같은 큰 트레머리, 자주고름에 달린 수마노, 삼작, 노리개, 희고
가냘픈 손, 초생달 처럼 긴 눈썹 , 그 선을 닮은 듯 가냘픈
허리, 하늘거리는 잔 귀및 털은 앳된 얼굴과 함께 염려(艶麗)하고 신선감을 준다.
머리 끝에 살짝 매단 자주빛 댕기도 앞섶의 자주고름과 어울린다, 특히 혜원의 미인도에서는
살짝 드러낸 겨드랑이의 속살, 풍만한 하체를 감춘 치마 아래로 언뜻 비치는 흰 속옷이 선정적이다.
이같은 조선의멋과 가락, 그 감흥은 역시 우리의 멋이요,
아직도 우리 한국인의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주술과 부적의 힘 괴석도, 의젓한
소자연,괴석도
괴석(怪石)화.
돌은 천지의 뼈요, 물은 천지의 피라는 말이 있다,
도시 아스팔트 위에서는 돌을 찾기도 힘들지만 명산 대천에는 아름다운 돌들이 널려있다.
돌의 형태는 천태만상이다, 천지와 함께 태어나 돌은 그 오래된 역사를 지녀 저
마다 개성을 가진듯 생김 생김도 가지가지다, 기암에 괴석도 있고 눈길을 끄는 수석도 있다.
천지의 신비를 체험한 돌들은 말이 없어도 비밀스런 철리를(哲理) 간직 해탈한듯이 보이는가 하면 서민들 처럼 발뿌리에 차이는 돌들도 많다,
자연을 축소한 나름데로의 모습들인 것이다.
어느 곳에서 떨어져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가슴이 텅비어 구멍이 난 돌은 보는 이에 따라 감상이 다를 것이다, 그러니 화재가 않될수 없었을 것이다.
돌은 화가의 마음을 받아 그림이된다, 기암 괴석이 화선지에 옮겨지면 그 작가의 말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 괴석도를 방안에 걸어두면 일종의 부적과 같은 효력을 기대 하기도 하고 자신의 수호라고 믿으며 주술적 기원을 이 괴석에게 보낸다.
화가들은 그 돌을 정성스럽게 옮겨 자신의
말을 담기 위해 여러가지 그리는 기법을 발전 시켰다,
그 유형적 수법은 우점준 ,부벽준, 피마준,등 25가지나 된다.
풍속화는 도덕성이 따른다.
사랑과 해학의 풍속화
우리나라 풍속화는 고려시대 태동한 것으 로 보인다,
고려에서 조선 초기의 선비들 계나 놀음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풍속화가 상당수 자리를 잡고있다.
조선후기 풍속화를 발흥시킨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이전의
작가와 사료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은 윤두서(尹斗緖)의
나물캐는 여인들, 이인상(李麟祥)의 송하수업도,김두량의 도리 원흥도와 전원 행렵도 조영석의 장기도(將棋圖),강희언의 사인 삼경도(士人三景圖)등이 꼽힌다.
그러나 우리나라 풍속화의 대표적인 작가는
역시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다,
정선이 그의 진경산수를 우리나라 산을 배경으로 했듯이 이들도 조선후기의 사회상을 소제로 본격적인 한 시대를 장식 했기 때문이다.
학계는 단원의 대표적인 풍속화로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된 풍속화첩의 "서당도"와 "씨름"을 든다,
혜원의전형적인 작품은 "연당야유도"가 꼽힌다, 특히 혜원은 남녀간의 애정,또는 춘정의 대담하게 잘 그렸다, 혜원은 이같은 춘의화 때문에 도화서에서
쫒겨나기 까지 하였다,
혜원 이후 풍속화는 혜산 유숙(1827~1873)까지 이어지나 그 후로는 필자 미상의 "궁궐도"를 비롯 낙관이 없는 일부 화원들의
작품이 약간 전해질뿐 조선의 정취가 물씬하게 드러나는 뚜렸한 풍속화가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흔히 민속화를 풍속화로, 풍속화를 민속화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남녀노소가 보아서 무난하면 민속화로,미성년들이 보기에 부담이
가는 그 림은 풍속화로 보아야한다.
풍속화는 엄격히 따져 18세 이하 관람불가의 작품이라 할수있는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그림을 말하며,이하 생활 모습이나 지역적 특성을 지닌 풍속및 놀이등을 그린 그림은 민속화라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시대의 그림들을 모두 풍속화로 분류하고 있다.
글쓰는 선비의 짧은 스켓치. 문인화
기개와 자유를 엮은 문인화
조선시대 화가들을 환쟁이라 천시를 했다,
그러면서도 명품을 남긴 화가중에는 왕족 사대부등 선비들이 많다,
산수 인물 시 서에 능했던 강희안(姜希顔)을 비롯 이정(李霆-세종의 현손)(손자의손자),김시습,김정희에 이르기 까지 사대부 문인 화가는 이름을 남긴 화원 보다도 많은 편이다.
고려때는 공양왕이 그림을 그렸고
조선조에는 안평대군이 가장 많은 서화를 가졌던 소장가로 꼽힌다,
신숙주가 쓴 화기에는 안평이 2백22점의 서화를 수집 했었다고 밝히고 있다.
화공은 멸시해도 그림만은 사랑했던 것일까? 이같은 의문을 쉽게 풀어진다,
중국화론이 사대부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졌기 때문이다,
시화를 같은 같은 것으로(詩畵一律) 보는 사상이 사대부들의 서화 수장과 제작을 합리화 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주자도 그림을 좋아했고 주자학을 신봉했던
조선 사대부들도 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예학자 김장생(金長生)이 화원 이징(李澄)의 방문을 받았을때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았다 한다,
제자들이 깜작놀라 환쟁이를 그렇게 우대 하느냐고 물으니 주자의 예를 들었다고 한다.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宋時烈)도 사대부가 그림을
그리는것은 흠이 않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
우리나라 문인화가들은 구분된 양식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새 화풍의 수용에는 화원들 보다 진취적이어서 회화 발달을 주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문인화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다르다,
문인화의 정의부터 바르게 확립 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문인화는 다양했다,
현대에 와서 문인화는 확실하게 분류해 놓고 있다,
채색을 하지않은 묵화를 우선 문인화로 지정하고 부분적 채색이 되었더라도
문기가 넘칠때는 문인화로 분류한다
작가 미상의 전통회화, 민화.
서민의 숨은 애환을 담은 민화
민화(民畵)란,
문자 그대로 민간인들이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림의 특성을 분석해 보면 낙관이 없고
기법이 일반회화와 다르며 구도가 한정되어 있는것을 볼수있다.
그림을 보면 장수를 상징하는 것, 복을 비는것, 못된
귀신을 쫓아 내는 것, 자식교육, 민족 상징 등 구분이 뚜렸하다.
성격적으로 구분하거나 그림별로 구분 할 수 있는데 특별히 그림 공부를 하지않고 재주만 믿고 주변의 재료를 얻어 그린 것이 민화로 발전한것
같다.
나무 조각에 인두화, 돌과 바위에 각화, 섬유질에 투박한 그림, 흙과 토담에 낙서같은 그림, 기와나 항아리 그릇에 그림, 가구나 생활 용품에 그린 그림들을 살펴 보면 추상화 같기도 하고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기도 하고 문자를 그림
형식으로 풀었거나 모아쓴 기법을 동원 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화는 다양한 솜씨를 였볼수는
있는데 구성은 아주 간결하고 단순하다, 원근이나 명암은 없으며 상하좌우 고저 장단에도 무관심한듯 사물의
표현에만 치중한 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인두화등의 산수화는 또 회화의 기분을 그대로 맛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개는 단순 간결하다.
특히 주술적인 상징물이 많은데 네눈의
호랑이, 머리가 여 러개 달린 뱀도 있다, 무속인들의 방에
있는 삼신도 라든가 하는 그림, 자수 십이지상 등도 당시엔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낙관이 없다고 다 민화는 아니다.
트로트 가수가 민요를 부르면 민요지 트롯트 라고 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요즘엔 낙관이
된 민화도 많이 나온다,
소재와 기법을 보면 민화로 구분 지을수잇다
이같은 우리나라 불화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최근에야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으며 각 사찰의 소장 괘불등 전국 조사가 아직도 이루어 지고 있지 않다.
요조숙녀 같은 고요한 난초.
암향부동의 전령사,매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청렴한 심성 국화.
화가의 집약된 멋,낙관( 落款)
낙성관지(落成款識)를 줄여서 낙관이라 한다.
제발(題跋),화제(畵題 ),낙관인(落款印)을 합하여 낙관이라 하는데 이외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쓴
시기,장소,이유,인용구
출처도 밝힌다.
서,화에 작가의 이름도 쓰지만 아호를 쓰며, 때로는
별호를 쓰기도 하는데 요즘엔 아호와 별호를 같이 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작가의 개성일 뿐 규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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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시 붙이는 월별 명칭
먹은 뼈요,색은 살이다 동양의 신비 수묵화,그 종류
따라서 작가의 의중이 깊히 베인 상징적인 표현이다.
즉 형상에 충실한 기법으로 객관성을
갖는다. 작업중에도 먹물이 화선지를타고 번지면서
형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다분히 주관적이다. 그러나 발묵은 형태를 주관적으로 표현하지만 몰골화는 형태를 없게하는 일종의 추상화에 가깝다고 보는것이 옳다. 화선지에 물을 뿌려놓고 그리는 기법에 잘 활용한다. 얼핏 보면 채색만 보이는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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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의 감상
두루미(학)의 기상
한국화는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등 다양한 분류를 하는데 그림의 내용을 보면 자연과
맞지 않는 구성을 하고 있는것을 종종 볼것이다.
文人畵之價置
그림 가운데 문인의 성질을 띤 것이 있고, 문인의 멋을 품은 것이 있다. 그림에 예술상의 工夫를 考究한 것이 없더라도, 그림 밖으로 많은 문인의 생각을 나타낸다면, 이것을 문인화 라고 한다.
士人畵를 사람들이 문인화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추어적이고 비공리적이며, 필묵으로 유희하고 스스로 즐기면서 그린 문인들의 그림을 말한다.
精神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形式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문인화의 창시와 발전, 성숙과 번영은 문인 및 사대부 계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식으로 문인화나 사인화로 불리우기 전에도 이러한 그림은 이미 존재 했다.
문인화의 특성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문인인지 사대부 계층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채택한 기법과 형식이 중요하지 않으며, 立意의 격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물상의 내재적 생명과 작가의 주관적 情感에 착안하고, 물상의 외부 현상을 중시하지 않으며 신운을 강조하여, 신운을 표현하는 것이야 말로 좋은 작품이라고 여긴다.
작품에 선비의 書卷氣 와 士氣를 갖추어야 한다.
서법을 화법에 도입하여 필법을 중시하였다. 그림 속에 서법이 있고, 서법속에 그림이 있도록 하여 서법과 회화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詩情畵意를 추구하였고 그림 속에 의경과 문학성이 있을 것을 중시 했다.
창작방법에 있어 뜻이 붓보다 앞설 것을 강조하였고 寫意를 중시하였으며 사실을 경시했다.
필묵으로 유희하고 스스로 즐길 것을 주장하였다. 회화는 다만 자기의 인격과 이상을 이루어가는 과정 중의 餘技的 소일 방식임을 강조했다.
산수화와 화조화를 즐겨 그림으로써 자연에 기탁함을 표시하였다.
시, 글씨, 그림, 낙관을 서로 배합해서 화면의 종합 예술적 형식을 나타냈다.
사람의 정서, 의지, 정신 등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수묵은 색채와 비교하여 직관적인 것으로 여겼고, 함축적이고 어렴풋한 것을 이상적인 경계라고 보았다.
문인화의 유래
文人畵는 魏晉 에서 南北朝의 귀족계급인 선비 문인들 사회에서 성행하면서 문학성을 내포한 산수화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 후 唐宋을 거치면서 문인화와 직업화로 장르 구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분적인 구별은 있었다.
문인화라는 말이 거론된 시기는 3 ~ 4세기 宗炳 과 王微 에서 출발하게 되지만 6세기에 그 본격적인 계기가 마련되었으나 문인들의 수묵사상은 일반적으로 王維 에서 출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대 후반의 화론 에 의하면 (8세기)의 그림에서 문인화적인 특성이 먼저 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張彦遠(818 ~ ?) 의 “歷代名畵記”에는 문인화란 말은 없었지만 회화를 구별하는 내용에 “예로부터 그림을 잘 그린 이는 귀족과 逸士, 高人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직업화가들 보다는 귀족층을 더욱 인정한 점이라 하겠다.
宋代 에서는 蘇東坡 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문인화의 이론들이 제기되면서 더욱 신분의식의 계층성이 두드러지게 굳어져갔다. 동파의 미학이 문인적인 본질에 동조되어 직업화가들이 압도하고 있던 사실주의를 배격하고 畵工을 폄하하고 문인의 위상을 높이는 경향이 짙었다.
宋代의 이론가 鄧椿은 “문인화라는 것은 그림이 문의 극치이다. 고로 고금의 문인일수록 그 뜻을 뚜렷이 드러낸다. 역대로 신분 높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서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에는 서권기를 담고 있었으며 사의가 공치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론들은 宋대의 畵院畵家들이게 일침을 가하는 힐난한 논평이 아닐 수 잆다.
또한 원대에 조맹부와 錢選의 문답이 있는데 “ 사대부의 그림이란 어떤 것인가?” 라고 한 조맹부 의 질문에 전선이 “隸家의 그림이다”라고 답 하였다. 여기에서 예가라고 하는 것은 전문적인 화가들의 기교위주인 형사를 따르지 않고, 고상한 기운을 겸비한 문인 사대부 화가들을 의미하며, 문인화가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의의를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원대에서는 전문직업화가인 화공을 行家라 하였으며 士夫畵家 즉 문인화가를 예가라고 지칭하였다.
이러한 전통이 明代의 徐渭에서 시작된 화훼(花卉)와 절지(折枝)등, 八大山人, 石濤, 揚州八怪 등에 의해서 새로이 전개되고, 淸代에 이르게 된다. 그로부터 계속적으로 擬古와 革新이라는 양극의 입장이 문인화 전통에서 생기게 되었다.
문인화가는 본래 倪雲林(倪瓚)이 말하길 “자오(自娛)한다고 하는 것은 문인화가가 士官이나 문인 在野가 다 같이 地主출신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경제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元代의 시대의 변혁, 또 明代의 농업 경쟁력이 약화되자, 향리를 떠나 도시의 상업 경제력에 寄食하는 문인화가가 차차 늘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귀족계급에서 시작한 문인의 모습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듯이 문인화도 그 발전과정에 있어서 점차적으로 그 양상이 변해왔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결국에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문인화가들도 직업적으로 점점 전화하여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전형이 淸代 중기의(8세기)의 양주팔괴 이며 그 이후부터는 거의 모든 화가가 직업적으로 문인화풍을 그리고 있었다.
문인화의 정체성 확립과 발전 방향
문인화는 역사흐름 속에서 신분고하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호한 양식을 남긴 채로 畵格을 중요시 하는 회화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문인화의 화격에는 서툰 솜씨를 졸박 함으로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소동파 의 저술에서 “이루기 어려운 것은 교(巧가 아니라 졸(拙)이다.” 라고 하는 역설적 관념으로부터 파생된 것일 것이다.
명나라 후기에 와서는 이 말이 더 진보하게 되는데 생졸(生拙: 타고난 서툼)을 일단 잃으면 되찾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技巧의 수련은 원치 않았다. 그러한 풍조는 오늘에도 이어지고, “신분의 우월도, 선비의 자오 정신도 필요 없다.”는 선언을 한때로부터 정작 중요한 문인화의 정신도 버리고 비합리적인 법칙에 얽매여 속된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요즘의 문인화는 현대화라는 미명 하래 문인화의 정체성을 잃고, 서구적 시각으로만 흘러가고 있는 것에도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러한 오류는 그 사상적 진수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문인화의 고귀한 정신은 되살려 발전시키되 문인화의 비합리적인 법칙에 얽매이는 作畵 태도는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다.
정형화된 유파나 기법을 따르기보다 자연을 통하여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는 부단한 노력으로, 바로 유가에서 말하는 ‘성의 誠意’ ‘정심 正心’ ‘수신 修身’’제가 齊家’의 도리를 이룬다면, 문인화의 본래의 정체성을 찾고 더욱 발전된 회화양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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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산수화 실기
1. 특징
1)선과 여백의 미를 중시
2)그리는 뜻을 중시, 정신적 표현
2. 기법 재료에 의한 분류
1)수묵화 : 먹의 농담으로 그린 그림
- 화선지에 수묵의 농담을 위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 중국의 당나라에서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는 고려 후기에 문인화의 형태로 나타나
조선 시대에 성행하였다.
-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주관적. 상징적 표현을 주로 한다.
2)수묵 담채화 : 먹으로 그리고 먹선에 지장이없게 엷게 표현하는 그림
- 남종화에서 많이 그려졌으며, 먹으로 그린 후 엷게 채색한다.
- 먹선을 그은 후 채색을 하거나 채색 후 먹선을 사용하여 번지게 하기도 한다.
3)진채화(농채화,채색화,후채화) : 채색위주의 그림
- 채색이 주가 되도록 짙고 두껍게 채색한다.
- 북종화에서 주로 나타난다
3. 소재(화제, 주제)에 의한 분류
1)사군자 : 매, 난, 국, 죽
2)문인화 : 시.서.화 3절이 표현된 그림(사군자)
3)풍속화 : 한 시대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그림 (김홍도, 신윤복)
4)산수화 : 자연경관을 그린그림
관념산수화 - 관념에 의해 표현하는 산수
실경산수화 -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는 실경 산수
5)인물화 : 미인도, 신선도, 초상화,풍속화 등
초상화 - 특정 인물을 그린 그림. 대상 인물을 닮게 그릴 뿐 만 아니라,
그 인물의 인격과 정신을 그려야 한다.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정신
도석화 - 도교(신선도)나 불교(선종화, 조사도, 나한도 등)를 주제로 한 인물 그림
6)기명절지화 : 나뭇가지, 그릇 등(정물)
7)화조도 : 꽃과 새를 그린그림
8)화훼화 : 꽃을 주제로 그린 그림
9)초충도 :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
10)영모도 : 털이 있느 짐승을 그린 그림
11)어해화 : 물고기 게 등
수묵산수화 묘법
1. 기본 묘법
1) 구륵법 : 윤곽선을 먼저 그린 후 그 안에 채색하는 방법
2) 몰골법 :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먹이나 물감을 묻혀 한 붓에 그리는 그림
3) 백묘법 : 채색하지 않고 먹선으로만 표현
*적묵법 :엷은 먹부터 진한 먹의 순서로 그림
2. 선의 기법
1) 운염법(선염법) : 물이 마르기 전에 칠하여 번지는 효과를 나타냄
2) 갈필법 : 물을 적게 사용하여 거칠게 그은선
3) 파필 : 붓 끝이 갈라진 붓으로 표현
4) 면필 : 넓적한 붓으로 그은 선
3. 선의 준법
*준법=돌이나 산의 굴곡을 표현
1)피마준 : 삼잎을 튐어 놓은 모양
2)우점준 : 빗방울 모양의 준
3)부벽준 : 도끼로 찍은 것 같은 모양의 준
4, 북종화와 남종화 (화풍에 따른 분류)
북종화(북화)
1.시조 : 당나라의 이사훈
2.주된 표현법 : 구륵법, 채색위주(진채화), 원채화풍, 화려하고 귀족적이다.
3.특징 : 객관적 사실적인 표현을 중시
남종화 (남화)
1.시조 : 당나라의 왕유
2.주된 표현법 : 몰골법, 수묵(담채)화 위주
3.특징 : 사의적, 주관적, 내면적, 정신적 표현이 중시 수묵화, 문인화 등. 담백하고 자유로 운 표현
* 문인화 - 문인 사대부들이 여가로 즐기던 그림. 시, 서, 화의 일치를 추구
수묵산수화의 기법
필법
가. 중봉법 - 붓대를 수직으로 붓끝이 획의 중심에 있게 사용하는 법.
나. 편봉법 - 붓대를 비스듬히 해서 붓끝이 회의 한쪽으로 치우치게 사용하는 법
다. 와봉법 - 붓대를 눕혀서 긋는 법. 가장 부피가 있는 선
묘사법
가. 구륵법 - 윤곽선을 그리고 안쪽을 채색
나. 몰골법 - 윤곽선 없이 먹의 농담이나 채색으로 표현
다. 백묘법 - 먹으로 선만 그리는 기법. 인물화에 많다.
인물화의 묘법
가. 절로묘 - 힘차게 꺽는 선
나. 철선묘 - 굵기가 같은 선
다. 유엽묘 - 허리가 굵은 선
용묵법(먹의 사용법)
먹에는 오채가 있다하여 먹의 농담과 묵법에 의해 모든 색을 함축시켜 표현 수 있다고 여겼다.
가. 발묵법 - 먹을 듬뿍 찍어 붓으로 쏟아 붓듯이 그려 튀기거나 번지게 하는 기법
나. 파묵법 - 담묵 화면 위에 농묵으로 담묵을 깨뜨리는 기법
다. 적묵법 - 담묵이 마른 후에 차츰 짙은 먹으로 덧칠하는 기법. 먹이 쌓여 층층이 겹친 중후한 느낌
라. 선염법(운염법) - 물을 바른 화면에 먹의 번짐을 이용하여 엷게 우려내는 방법. 구름, 안개
마. 갈필법 - 붓에 물기를 적게 하여 메마르고 거칠은 필치를 살리는 기법
채색법
가. 담채 - 채색을 연하게 하여 수묵이 주가 되는 표현
나. 진채(농채, 후채) - 채색을 진하게 하여 채색이 주가 되는 표현.
산수화의 준법(산이나 돌의 주름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방법)
가. 피마준 - 삼을 펼쳐 ?은 듯한 붓 자국(같은 방향으로 부드럽게 긋는 선)
나. 하엽준 - 연잎의 잎맥과 같은 붓 자국
다. 부벽준 - 도끼로 찍은 듯한 넓적한 붓 자국
라. 절대준 - 띠를 끊어 옆으로 늘어놓은 듯한 붓 자국
마. 미점준 - 쌀알 모양의 작은 점
바. 우점준 - 빗방울 모양의 점
사. 겸재준 - 가늘고 긴 선을 이용하여 세로로 길게 드리우는 준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