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류화가. 여러 차례 동양을 방문하여
정감어린 시선으로 이 땅의 풍물들을 그렸다.
그녀는 한국을 무척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화풍은 섬세하고 잔잔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냄.
그녀의 화집 [Old korea](1919)에 실려 있는 그림들을 소개한다.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
스카트랜드의 자그마한 도시 Aberdeenshire 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쓰 키이쓰(Elizabeth Keith, 1887-1956) 는 다른 여류 화가들, 예를 들자면 불란서의 Mary Cassatt 이나 Berthe Morisot 처럼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의 후원으로 여유있는 화가생활을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또 Frida Kahlo, Lee Krasner, Helen Frankenthaler 등등처럼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남자 화가와의 긴밀한 관계에 편승되어 미술사에 자죽을 남긴 여자도 아닙니다.
더구나 한국과 한국인을 소재로 그림, 주로 목판화로, 한국인을 서양인들에게 소개한 미술가, 즉 미국여류 화가 Lilian M. Miller 나 프랑스 인 Paul Jacoulet 처럼 어려서부터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쓰 키이쓰는 순전히 독학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미 1933 년에 영국의 한 미술서적이 키이쓰를 일본의 목판화의 대가인 호쿠사이나 히로시게와 같은 위치에 놓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으며, 영국의 여왕도 그 전시회에 참관하였고, 전례에 없이 일본 천황의 동생도 전시회를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그 여자 살아 생전에 일본,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프랑스 영국등 여러곳에서 전시회를 가져었습니다. 그 여자 사망이후 45 년이 된 지난 2002 년 2 월에는 파사데나에 있는 Pacific Asia Museum 에서 엘리자베쓰 키이쓰의 단독 전시회가 있었고 그 여자의 일생의 그림들에 대한 책도 출판되었습니다.(Elizabeth Keith: The Printed Works by Richard Miles).
키이쓰의 가정은 그리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던듯, 엘리자베쓰가 어렸을 때 런던으로 이사를 해야 했었고 , 엘리자베쓰 키이쓰는 다른 여자들처럼 아마 뜨개질, 바느질, 음식하는등의 가정 살림을 할 부인으로서의 준비를 하면서 지냈었겠지요. 집에서 그림 공부를 지원할 형편도 아니었고, 부모님들도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결혼을 하지 않했는지 못 했는지 혼기를 지났다고 할 수 있는 28 세의 과년한 노처녀로서 그는 마침 남편을 따라 동경에 와 있는 Jessie(동생인지 언니인지는 모르겠지만) 을 방문하러 1915 년에 일본으로 왔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천재성을 감출 수 없었는지, 때마침 적십자사는 환자들을 도울 기금을 마련하느라고 고심하던중, 사회 유명인사들의 모습을 우습께 만화처럼 그려서 책자로 만들어 팔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엘리자베쓰 키이쓰가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단숨에 다 팔리고,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키이쓰는 일약 화가로 변신하게 되었지요.(Grin and Bear It: Caricatures by Elizabeth Keith, 1917)
삼일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풍습과 인물등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을 동경에서 전시하였고, 그때 마침 목판화 출판계의 대부라 할수 있는 와다나베 씨가 그것을 보고 목판화로 출판할것을 권유했고, 그때 그 최초의 작품이 예측한 대로 큰 성공을 거두어서 그때부터 엘리자베쓰 키이쓰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술가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것입니다.
독학의 미혼 여성 키이쓰를 평생 한국을 포함한 동양을 그리는 최초의 서양화가로 등단 시킨 그림이 바로 아래의 서울 동대문의 수려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벌써 오래전이기도 하려니와 아마 만들어진 숫자도 많지 않았던지 아직까지 제가 아무리 찾아도 구입할수가 없이 대단히 귀해진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옮겨왔습니다.
“New Year’s Shopping, Seoul”
Elizabeth Keith, 1921
Woodblock print
Elizabeth Keith(엘리자베쓰 키이쓰) 라는 스카트랜드 출신의 여류 화가는 사실 한국에서 더 알려 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28세의 미혼 여성으로 동경에 살고 있는 언니 Elspet(Jessie 라고 보통 부르지만요)를 휴가차 방문하려 왔다가, 너무 동양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돌아가는 배표를 팔아 버리고 일본, 중국, 한국, 그리고 비율빈등의 나라를 두루두루 돌아 다니며, 그곳의 풍물과 사람들을 누구 보다도 따듯한 정감을 가지고 평생을 그리다가 미국에서 죽어간 여류화가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엘리자베쓰 키이쓰와 한국과의 관계는 특별한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여자가 한국과 한국인을 그린 거의 최초의 서양인 화가라는 것입니다. 그 녀가 일본에 도착한것이 1915 년, 그리고 한국에 발을 드딘것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압박받다가 드디어 독립만세를 부른 1919 년이었지요.
그 여자는 일본의 문화에 감탄하면서도 짓밟힌 한국인에 대하여 무한한 동정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그 여자가 누구 보다도 먼저 일본에서 한국을 소재로 한 그림을 보여준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것은 아마 한국땅 밖에서 한국인을 소재로 전시회를 연것은 역사상 최초일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전시회는 그의 개인의 또는 미술행로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지요.
그 전시회에서 동대문을 그린 그의 수채화를 전시하였는데, 목판화 출판의 거인인 와다나베가 그것을 보고 목판화로 만들것을 권유, 그 이후에 그 그림이 대단히 인기가 있어서 그는 일약 화가로 등단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키이쓰는 수채화, 엣칭들을 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목판화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셋째로 말 할 수 있는것은 키이쓰가 한국에서 1921 년에 최초로 한국인을 그린 그의 그림의 전시회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공개적인 그림 전시회라는 역사자체가 없다싶이 한 한국에서, 그것도 외국인이 한국인을 그린 그림들을 외국인은 물론이고 한국사람들도 많이 관람을 하였던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 이외에도 엘리자베쓰 키이쓰와 한국의 관계에 대하여 말할것이 있습니다만, 나중에 차차 그 사람의 그림을 소개하면서 언급하고 싶은 심정이고
오늘은 설날도 가까워 오니, 키이쓰의 설날 나들이를 그린 그림을 올립니다. 양반집 부인이 아마 설날 애들 옷 잘 입혀서 물건도 살겸 길거리로 나온 듯, 아니면 가까운데 세배인사 하러 외출이라도 한듯 합니다.
키이쓰의 그림은 조그마한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린 사실화라 할수 있는데, 그 여자의 관찰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것이 1921년 서양인이 본
서울의 설날의 모습입니다.
달빛아래의 서울의 동대문
East Gate, Seoul, by Moonlight
Elizabeth Keith, 1920
Woodblock Print(목판화)
이 아래 그림은 역시 동대문이지만, 해가 솟아 오를 때의 모습인데,
요즘 처럼 차량이 정신없이 지나 다니는 동대문을 생각하면 이 평화스럽고 조용한 1919 년 당시의 동대문은 너무나 대조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그 당시의 동대문과 지금의 동대문과는 구조적으로도 다른듯 싶구요. 다음에 서울가면, 차로 지나갈것이 아니라 내려서 동대문을 자세히 봐야 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해뜰 무렵의 서울의 동대문
East Gate, Seoul, Sunrise
By
Elizabeth Keith, 1920
Woodblock Print(목판화)
많은 서양 사람들이 그렇듯이 동양의 성문들이 상당히 관광거리었던듯, 키이쓰는 1925 년에 평양의 東門도 그렸습니다.
저는 가본 적이 없지만 사진과 비교해보면 키이쓰의 그림이 얼마나 사실에 충실한 그림이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평양의 동문이 서울의 동대문에 못지 않게 의젓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지금 평양에 저 문이 남아 있는지 없는지 몹씨 궁금하군요.
평양성의 동대문
East Gate, Pyeng Yang, Korea
By
Elizabeth Keith, 1925
아래 그림은
멀리 뒤로 보이는 것이 동대문인듯 하니
아마 청계천 어디쯤 지나가고 있는
꽃가마 타고 가는 결혼 행열인데
길에서 노는 아이들
냇가에 앉아서 빨래를 하며 처다보는 여인들
하다못해 길바닥에 물을 쏟아 붓는 아낙네의
모습이 너무도 그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군요.
Marriage Procession, Seoul, 1921
By Elizabeth Keith
시골 결혼식장에 참석하게 된 키이쓰는
일찌감치 가서 방 문앞에 앉아서 보면서
왁작찌걸하며 진행되는 결혼식 장면을 실감있게
글로도 썼으려니와 그림도 마치 사진처럼
자세하게 그렸습니다.
키이쓰에게 인상적이었던것은
신부도 신부이려이와
큰 솥에 펄펄 국수를 끓여서 오는 손님마다
한그릇씩 퍼주고 ,
손님이 먹다 남은 것을 다시 솥에 붙기도 하는 장면,
옷 치장도 없이 하루종일 일만하는
신부의 어머니,
애 들처 업고 드나드는 애 어머니들,
마당에서 제일 신나게 노는 애들 들인 듯…
Country Wedding Feast, 1921
By Elizabeth Keith
아래 그림은 보시다 싶이 1938 년에 그림인데,
키이쓰는 정교하게 세련된 화필로
한국 신부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이것은 칼라 엣칭입니다.
어쩌면 한번 보지도 못한 신랑을 처음 만나는
결혼식날,
하루 종일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눈을 내려 감고 웃지도 못하며 하루를 지내는 한국 신부를
그 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라고
말하는군요.
부모님이 정혼 해 준 평생배필을
신혼 초야에나 겨우 촛 불밑에서 흘깃 볼수 있었던
아름답게 애처로운 이런 한국 신부를
사랑아니면 결혼 안한다는 현대 한국여성들을
어떻게 이해 할런지요.
Korean Bride
By Elizabeth Keith, 1938
새색시 다리 저려요
갓쓰고 도포입은 어른신이 몹시 추우신가봐요
자료제공 : 설원당 장독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