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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열기가 대단한 서울 장안은 이산 가족의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분단의 아픔은 곳 곳에서 분출되었고 온 국민의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제아는 군복을 입은 채로 독서실에 입실하였다. 83년 6월초 제대 1개월여를 앞두고 전방으로 훈련을 떠나면서 당번병을 서울로 내보내어 장교특채를 하는 회사 중에서 지원 마감이 안된 회사에 입사원서를 넣어달라고 하였더니 A생명보험에 지원해 주었다.
제아가 전역하던 날 독서실로 직행한 것은 입사 직전 보름여 사이에 대학원 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독서실은 이미 낯익은 곳이었다.외대대학원에 지원하였지만 정치외교학과장 노면준교수는 박부 3학년에라면 몰라도 수학과 출신을 바로 받아 들일 수는 없다고 거절하였다. 시험을 치르고 대천으로 여행을 다녀온 제아는 사회인이 되었다.
제아는 그해 겨울 곧바로 대학원 진학이 어렵게 되자. 고려대 정외과에 학사편입학을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제아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 졌지만 입학금을 내고 나니 학비가 없었다. 제대시에 받은 130만원 중 100만원은 아버님 병구완 값으로 드리고, 새의복과 월세방을 얻고 나니 남은 것은 몇 푼 되지 않았다. 무리를 해서 지난 대학시절처럼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다닐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과외가 묶였고 결혼이나 아버님 병환 치료 문제등 여러 정황이 공부를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휴학을 하였다. 앞으로 두 번의 휴학과 제적기간 2년을 감안하면, 4년여를 돈을 버는 일에 충실키로 작정하고, 3천만원의 4개년 PLAN을 세웠다. 2년간의 학부를 마치는데 필요한 학비 1천만원, 결혼 및 생활에 필요한 비용으로 1천만원, 집을 얻는데 1천만원 등 3천만원이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당시의 월급여 30만원으로 4년만에 3천만원의 자금 마련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제아는 명저 나폴레온 힐의 거부가 되는 13가지 비결을 읽고 또 읽었다. 뚜렷한 묘책은 없었지만. 그 책이 주는 메시지는 벌 수 있다는 신념 하나였다. 스스로 믿는 것이며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기간별로 언제까지는 얼마. 얼마라는 식의 단계적 상승 방법이었다.
경제 신문을 뒤져 보았다. 돈을 벌 수 있는 게 무얼까? 주식투자가 눈에 들어 왔다. 제아는 정치학 공부를 하겠다고 다시 대학에 다시 입학했지만 내심 문외한인 경제를 공부할 기회를 전역후에 갖고 싶어하던 터였다. 또 한편. 돈의 포트폴리오인 주식을 알아야 된다는걸 알게 되었다. 증권회사에 가서 시장지와 상장회사 결산분석을 얻을 수 있었다.
밤 새는줄 모르고 독파하였다. 각종 생소한 용어와 기술적 지표가 무엇인지 몰랐다. 단지 방송을 통해 칠판에 백묵으로 여직원이 받아적는 팔자, 사자의 호가정도만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해 가을, 한신공영을 80만원 어치 처음 매입하였다. 운좋게도 곧바로 달포이내에 140만원이 되어 주었다. 돈벌이가 너무 쉽게 생각되었다. 당시는 거의 저가주가 대종이었고,지수 역시 100선대였다.
5원짜리 주식이 있었는가 하면 40원짜리 주식이 관리종목 상한가폭인 하루 50원씩이나 상승해 90원이 되는 수도 있었다. 1985년 봄, 대학에 복학을 하지 못하고 역시 지난해에 이어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하던 해부터 시작한 주식 투자는, 이제 눈을 뜨고 감을 잡을 만한 때였다. 재미있었다. 한탕 해보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이 해에 제아는 매우 큰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사이에 모았던 주식 모두로 남광토건 주식을 샀다. 당시 남광토건 주식은 주식2부 소속으로, 액면 500원짜리가 80원에서 160원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당시 하루의 상한. 하한가 제한폭은 30원이었는데 150원을 고수하던 주가가 연일 140,130,120원 등으로 밀려 내려왔다 110,원대에 들자 제아는 매수에 들어갔다. 다음날은 100원대로 내렸지만 다시 매수를 하였다.
100원대을 바닥으로 보던 주가는 주춤하더니, 이번에는 90원대로 내려앉았다. 제아는 집중매주를 하였다. 정신없는 물타기였다. 지금까지의 재형저축등을 모주 해약하여 12만주를 샀다. 그리고 여름휴가에서 돌아와 보니, 주가는 지하실로 곤두박질해 있었다. 아연질색하였다. 63원이었고, 관리대상종목으로 쫓겨가 있었다. 정보부재였고 자만이었다.
큰 손실이었다. 가을이 다 가고 찬바람이 불어 올 때까지도 지지부진, 관리대상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다.「주식 투기」2년만에 된서리을 맞고 말았다.
이때 지병이 악화되어 시골집에 가계시던 아버님의 병환이 위급하여, 제아는 급히 혼수 상태의 부친을 모셔와야 했다.
한강 성심벼원에 입원을 시켜드렸지만 낮시간에는제아가 회사엘 다니느라 보호자 없는 환자 인 셈이었다. 점심 식사때는 간호사가 대신 도와주었다. 부인도 많고 자식도 많은 아버지였지만, 아무도병실을 찾아보지 아니 하였다.
치료비용으로 주식을 할 수없이 처분하였다. 후에 이 남관토건 주식은 액면가가 5천원짜리로 바뀌고 건설주 호황을 틈타,2만원까지무려 30배 이상 오르기도 하였다.
분산투자를 하라 물타기를 하지말라 쉬는 것도 버는 것이다 어깨쯤에서 팔고 무릎에서 사라 는 투자자 겨언을 터득하고 실감하는데는 근 3년여가 걸렸다. 욕심이 과한 즉 죄를 낳은 꼴 이 되고 말았다.
한편,그 해 가을 제아는 이듬해의 결혼을 앞두고이사철을 맞추어, 부천시 역곡동에 800만원의 전세을 얻었다. 보통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계약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등기를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복덕방 아줌마가 마을 금고에 50만원 대풍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물론 값싸고 좋은 집이라고 일러주기까지 하면서 ...
그러나 이사 후 다음날 회사에서 돌아와 보니 문틈에 쪽지 편지가 끼어 있었다. 「이 집은 문제가 있는 집이므로 저희 회사로 연락 바랍니다. 새마을 금고」마을금고에서 최고장이 날아들고 경매가 들어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등본상에는 아직 경매신청내용이 미기재된 상태였으므로 속는 것은 당연했다. 본인의 헛똑똑함이었다.
그 경매 신청자인 새마을 금고의 경리 아가씨가 새로 누군가가 아사를 온다는 애길 듣고 일부러 다녀간 것이었다. 주인은 대출금 ,전세금, 사채등으로 집을 담보하여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빼내어 서울에서 옷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후 제아는 여려군데로 문의를 하고 애써 보았지만,근저당 이후 세입자는 물론 젠세권 설정이 없는 입주자는 보호 받을 수 없으며, 더구나 당시 200만원이던 임대차 보호법의소액 보증금에도 훨씬 초과되는 금액이므로 한분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마을금고 이사장 최호순씨를 만났을 때, 최씨는 제아가 끼고있는 반지를 보고 자신도 ROTC 5기 (한양대)생임을 밝히며, 강제 경매를 즉각 중지해주고 주인과 조속히 해결을 보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서울의 상호싱용금고에서 경매신청이 또 들어왔다. 900만원의 일수대출과맞보증900만원,합이 1천800마원이나 됐다. 이번에는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은 지독한 철면피였다.
집을 담보로 융자 500만원과 일수900만원, 전세800마원 등 2천만원을 빼내어 고속터미널 의류상가을 벌리고는 집은 흑석동에 월세로 살고 있었다. 제아가 주인집을 찾아 전세금 반환을 요구하자.그들은 부엌칼을 들고와 죽이겠다고 까지 하였다. 한마디로 짐승같은 사람들이었다. 파출소에서 경찰이 달려오고, 경찰은 제아에게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제소하도록 권유하였다.
6개월이나 시간을 끌던 이 사건은 제아가 은행감독원에 신용금고를 상대로 소액상업자금의 환도초과대출(1인당 300만원)을 탄원함으로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게 됐고, 상호신용금고가 경매 취하를 하였다.
제아는 크리스찬으로 교회에 나갈 때마다 이 전세사건의 해결을 응답 받을 경우, 십분의 일인 100만원을 불우한 이들에게 내도록 작정하였는데 3자 매매를 통한 방법으로 해결을 하고 나니,700만원만 받고100만원이 꼭 남아 어음공증으로 대신하게 되었는데 후일 제아가 주소지를 옮기며 도망다니던 주인을 찿았을 때 그 집의 주인 아저씨가 「젊은 양반 교회에 나가시유,어지간 하면 그냥놔두시유」라는 말에 주인의 자녀들을 생각하여 증서를 행사치 아니 하였다.모두는 기도의 응답이었다.
1986년 3월15일 비가 함촉히 내려 주던 봄날. 제아는 평소 존경하던 목사님을 모시고 혼례를 올렸다.
아버님은 병원에서 퇴원을 하여 시골집에 갔었지만 받아들이지를 아니하여 제아가 고교시절 자취하던 읍내의 주인집에 부탁해 하숙을 하며 병환중 이었으므로, 제아는 양부모가 다 참석치 못한 가운데 결혼식을 하였다. 서글픈 일이었다. 그러나 큰 축복이었다. 제아는 신부에게 아름다운 축복의 노래를 선물하였다.
축복
오늘은 기쁜 날
축복받는 날
우리의 만남을 감사하는 날
이화빛깔 사랑을
열매 맺는 날
우리둘이는
우주을 감싸는 달무리를 영근채로
주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며
활짝필 꿈을
장정들이여 심는 날
낙원으로 드는 촛불 행렬사이로
웨딩마치에 순애를 싣고서
우리는
그 꿈을 가슴으로
약속하는 날
아라리요
당신은 언제나
태양을 향하여
아침스런 환희를 잉태하는
당신은 천사
당신은 여왕
오늘은 기쁜 날
축복받은 날
우리의 만남을 감사하는 날
잊지 못할 날
1986.3.15 국빈예식장에서
제아가 대학 4년때, 버스안에서 자리를 내드렸던 한 할아버지가 굳이 자청하여「운명」을 얘기해 주었는데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라고 시작한 말이 너무 신통해 무슨 성씨와 결혼하겠냐고 묻자, 거침없이 그는 「장씨야」라고 답변해 주었다.
제아의마담 뚜 는 전우신문이 해주었다. 제아가 부대로 전입을 가던 그 해 겨울, 제아가 군단포병사령부에서 1등상을 받고 전우신문과 KBS 국군의 방송에 난 뒤, 제아에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날아든 아름다운 꽃엽서가 제아의 신부로 변신하였다. 사랑의 열매가 5년여만에 이뤄진 셈이었다 제아의 신부는 한라산의 설산 위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휴학을 계속했던 대학은 복학 만료 시기가 되었지만 전세사건, 부친의 입원, 자금의 부족 등으로 제적이 되고 말았다. 시간이 어김없이 흘렀지만 도리가 없었다.2년 뒤의 재입학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었다.
1986년에, 개화되기 시작한 주식 시장은 제아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제아는 주식시장에 다시재도전하여 「씨감자가 여물때까지 기다리기」를 하였다. 씨눈이 달린 감자를 심어서 싹이 났을 때, 사람들은 그 싹을 보고 웅성대기 시작하고, 조바심이 나는 사람들은 새끼감자가 달렸을 때, 먹지도 못하는 물감자를 캐버리고 만다.
제아는 잎이 지고 여문감자를 캐니는 시기를 「증시과열」이라는 기사가 신문지면에 대서특필될때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그랬다. 그러나 투자가들은 과열일 때 팔고 바닥일 때 사지만, 투기자들은 그 반대로 달려들기 마련이다. 이듬해의「4월조치」시에도 그랬다.
제아는 지난 남광토건서의 대패를 거울삼아 다시 공부를 하였다. 각 상장사의 유보율, 부채비율, 당기순이익등를 토대로 저평가주를 물색하였다. 연중 최고, 최저치는 좋은 비교자료가 되었다.
종목 선택의 결정적 자료는 역시계곡선, 이동평균선, 투자심리선 등으로 결정하였다. 위 3가지 지표는 거의 적중하였다. 투자심리선 25%이하시 역시계곡선에 의해 매수시기에 선택된 종목은 성공이었다.
자동차,전자에 이은 주가는 연일 내릴 줄 몰랐다. 주식인구가 불고, 지점이 늘어나고, 시장은 북적대기 시작하였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중에는 작전설이 난무하였다.
초여름에 산 증권주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주어 18,000원에 매입한 주식이 38,000원까지 가 주었다.
이어갈아탄 대한종합식품주는 대통령선거 직후 수직 상승에다 배당락시세를 무시하고 이듬해 개장되었을 때 하루 아침에 황금주가 되어있었다. 4,000원짜리 주식은 이후 12,000원대까지 상승하였다. 당시 그 회사는 적자상태였으나 부산에 시가 수십억원의 공터을 갖고 매도 예정이라는 걸 알았던 터였다.
「실적주와 재료주에 오래 기다리는 것」「팔기전에는 절대 손해가 아니다」라는 격언을 거울삼았던 제아는 복을 많이 받았다.
세번에 걸친 투기(제아는 서슴없이 부른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투자는 투기다)는 가난을 걷어가 주었다.
9천원으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여 도전하였던 제1라운드에 이어 재입학후 새로 시작한 일어서기, 허물벗기의 제2라운드가 끝나는 공이 요란스레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