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안씨 가승(家乘)의 동국안씨원파구보(東國安氏源派舊譜) : 1896년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1573~1654)의 5대손인 신죽산 16세 주촌(酒村) 안창국(安昌國, 1697~1766)이 1765년에 손자 안명유(安命鰇, 1734~1789)에게 선대의 일을 전하는 가승을 짓도록 명하여 1781~1789년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죽산안씨가승(竹山安氏 家乘)에 들어 있는 동국안씨원파구보(東國安氏源派舊譜)는 여기에 나오는 인물 안윤채(安潤采)와 안중력(安重瓅)이 1900년대 초의 인물이므로 후대에 추가해서 넣은 것으로 판단된다.
병신년이라 표기된 연대가 안창국이 손자에게 명한 1765년 이전의 병신년인 1716년이라는 주장, 가승이 완성된 1781~1789년 이전 병신년인 1776년이라 주장도 있으나, 안윤채(安潤采)와 안중력(安重瓅)이 1900년대 초의 인물임이 분명하므로 이들의 생존 시기로 추정되는 1896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승의 서문이나 본문에 원파구보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고, 그 내용이 반영되어 있지도 않으며, 동일한 가승의 다른 필사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죽산안씨 가승)에는 원파구보가 들어 있지 않다. 또 신죽산안씨 최초 족보인 신유보(1801)에도 동국안씨원파구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따라서 원파구보가 들어있는 가승보는 후대에 필사하면서 추가해 넣은 것이다. 가승은 최초 작성본이 여러 후손가에 필사되면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내용의 첨삭이 일어날 수 있다.
동국안씨원파구보(東國安氏源派舊譜)는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하는 신죽산 안씨 계보 위주로 구성됨.
[표지] 단기 4098년 서기 1765년 영조 41년(42년)에 주촌공 휘 창국이 손자 명유와 죽산안씨 가승 내외편을 살펴 보았다. 檀紀四0九八年 西紀一七六五年 乙酉 英祖四十二年 酒村公諱昌國 與其孫 命鰇 按竹山安氏家乘 內外篇
동국안씨원파구보(東國安氏源派舊譜)
우리 나라(東國)에는 처음에 안씨(安氏)가 없었다. 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2년(807) 정해(丁亥)에 중원(中原) 사람 이원(李瑗)이 동으로 우리나라 송악산 아래에 왔다. 아들 3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지춘, 다음은 엽춘, 막내는 화춘이었다.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4년 갑신왜란(甲申倭亂) 때 3형제(昆季)가 모두 대장군으로 들어가 난을 평정하고 사직을 안정시켜 공훈이 기록되고 품계도 올려 받았다. 특별이 안국공신(安國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안씨(安氏) 사성(賜姓)을 받았다. 지춘(枝春)은 이름을 방준(邦儁)으로 바꾸고 죽산(竹山)으로,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이름을 바꾸고 광주(廣州)로, 화춘(花春)을 방협(邦俠)으로 이름을 바꾸고 죽성(竹城)으로 봉군 받았다. 우리나라(東國)에 안씨 성이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이다.
송도(松都)에서 5리쯤 되는 곡령(鵠嶺)의 산 아래 북서방(北西方)을 등진 좌향(坐向)의 언덕에 개석(盖石)이 발견되었는데 신라대장군 죽산군 안방준(安邦儁)의 묘(墓)로써 헌덕왕(憲德王) 2년 기축(己丑, 809)에 태어나 헌강왕(憲康王) 5년 기해(己亥, 879)에 졸했다고 한다. 松都五里許。鵠嶺山下。乾坐之原。盖有新羅大將軍。竹山君。安邦儁之墓。生於憲德王二年。己丑(809)。卒於憲康王五年。己亥(879)。
오른쪽(위) 족보는 고려말에 간행된 것으로, 죽성군(안원형, 신죽산 시조)의 2세에서 끝난다. 병화에 살아남아 세상에 드물게 존재하는 것이다. 일찌기 그러한 것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보지 못해서 한이더니 병신년(1896년) 가을에 순흥파 안중력이 경흥의 안윤채 집에서 이 인쇄된 족보를 보고 등서(謄書)해 왔는데, 함평의 옛 가첩(古牒)과 같다. 이에 책 머리에 덧붙여 쓴다. 그러나 우리 파의 구보에는 모두 죽성군을 시조로 하기에 이로부터 1세로 칭한다.
이 문헌에 1900년대 초에 안씨동원보를 가지고 나온 안윤채(安潤采)와 안중력(安重瓅)이라는 신원이 불확실한 인물들이 처음 등장하며, 나중에 여기에 안방준(安邦俊) 후손 계보가 덧붙여져 안씨동원보로 발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안씨동원보에 들어있는 안방준(安邦俊)의 생졸년이 여기서 처음 보이며, 역시 고려말 족보라고 자칭하고 있다. 신라 말 왕들도 졸년만 전하고 생년은 대부분 미상인데도, 어느 기록에도 없던 인물 안방준과 그의 생졸년이 조선말에 처음 나타났다면 창작해낸 것이다.
더구나 위 원파구보는 신죽산안씨 시조 안원형이 순흥 안목의 장남이라고 했는데, 신죽산 안씨들은 첫 족보인 1801년 신유보부터 안목(安牧)의 차남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도 다르다. 하지만 근자에 밝혀진 바로는 안원형은 순흥 안목의 아들이 아닌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동국안씨원파구보 자체는 안윤채와 안중력이 조작해 낸 문건이 분명하다.
위 동국안씨원파구보의 연대를 1776년으로 본다면 가승(家乘)의 저자 안명유(安命鰇,1734~1789)와 거의 동시대의 그리 멀지 않은 친족인 안창훈(安昌勳, 1748~1828)의 1794년 족보 서문에 시조의 선대를 모른다고 했고, 고려말 족보를 구하지 못했다는 말과 맞지 않는다. 당시 가승에 동국안씨 원파구보가 들어 있었다면 몰랐을 리가 없지 않는가?
그리고 안수린(安壽麟, 1763~1807)의 신유보(1801) 서문이나 신유보 본문 속에도 동국안씨원파구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공주 안대겸가에서 베껴온 순흥보에 대한 말만 있으니, 동국안씨 원파구보는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며, 후대에 안명유의 가승을 필사하는 사람이 추가해 넣은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병신년은 안윤채, 안중력이 1900년대 초에 활동한 사람이므로 이들의 생존 시기인 1896년으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