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시월
반숙자
40분 타고가는 시내 버스를 먼 여행 떠난 듯 홀가분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출발한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 나는 내 긴 겨울잠을 털어내며 버스를 탄다. 눈을 뜨리라. 육안은 물론이고 영안까지, 그리고 사지가 힘을 얻도록 준비 운동을 하리라. 인생 오십 고개 황금 결실을 위해. 꾸무럭 꾸무럭, 도약이다 봄은... .
겁많고 불쌍한 개구리, 풀만 먹고 사는 토끼가 무서워 죽자사자. 연못으로 뛰어드는 개구리, 나는 개구리가 되어 봄빛이 아른거리는 서울 거리를 달린다. 이렇게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여행길이 내 유일한 외출이다.
시부모님이 계시는 ㅈ동은 덜 시끄럽고 덜 복잡한 변두리인데, 차에서 내려 일부러 걸어가는 15분 길이 재미있다. 철따라 피고 지는 담장 안의 꽃들이며, 뻥튀기 앞에서 줄 서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좀 지저분하고 산만한 골목의 풍경들이 사람사는 맛을 더해 준다.
정해진 약속이 아니고 꼭이 어떤 용무가 아니다. 그저 느릿느릿 걸어서 이것저것 바라보며 봄길을 가는 것이 좋고, 어머님 손잡고 쌓인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아서다.
어머님은 몹시 수척해진 모습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 기계가 다 낡아서 이젠 힘을 못 써." 고갯길이 높아 질수록 엔진은 더 붕붕 힘이 든다.
어머님은 팔십 험준한 인생 고개를 다 낡은 엔진으로 기어 오르며 무진 애를 쓰신다. 감기 몸살을 한차례 치르고 날 때마다 이제는 성가하여 흩어져 살고 있는 손자들을 애타게 기다리신다. 수도꼭지가 고장났다. 새로 사온 조기가 싱싱하니 어서 오라고 주말마다 성화가 대단하시다. 사실은 고장난 수도꼭지는 기술자 불러서 고치면 되고, 싱싱한 조기야 서울 천지 어디에도 있으련만, 어머님은 그런저런 핑계로 손자들 얼굴 보시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것이다.
아버님께서 정초부터 종기가 나서 고생하셨다. 그 때에도 병원가실 생각은 접어 놓고 손자들 불러 모아 그들 손에 고약을 바르고 싶어 하셨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여벌인듯 싶었다. 아버님은 패기만만한 아이들 곁에서 점점 소멸되어 가는 당신의 세월을 위로받고 싶음일 것이다.
식욕이 왕성한 손자들을 식탁에 앉혀 놓고는 그들 모습에서 기쁨과 생기를 찾는다. 그러한 노부모님 곁에서 나는 나대로 잡히는 생각이 있다. "초록 결핍증" 겨울 삼동을 나고 사람들은 푸성귀를 그리워 한다. 나릇한 춘곤을 푸름 속에 달래고 싶어한다. 말이나 될까마는, 점점 노쇄해 가는 당신들의 세월을 느낄 때 그것을 보상해 주는 젊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 젊음은 초록빛, 초록은 힘의 상징이다. 부모님은 짙푸름 속에서 돌아다 보는 기억을 소중해 하신다. 그래서 아이들 어렸을 적 이야기를 녹음기를 틀다시피 되풀이 하신다.
아무리 좋은 기름을 넣어도 그 전같이 약발이 서지 않는다며, 그래도 열심히 인삼이나 녹용을 다리시고 보혈주사를 맞으신다. 뿐만 아니라, 자손들이나 친지 이웃에게까지 애틋한 사랑을 더 기울리신다. 그 모습은 마치 시월 풀잎이다. 언제 된서리가 내릴지 모르면서 열심히 꽃망울을 터뜨리고, 익힐지도 모르는 열매를 수없이 맺어 으시시 추위에 뜨는 연하디 연한 시월 풀잎을 ... .
그 눈빛에서 눈물같은 아쉬움이 베어온다. 하룻밤 쉬일 곳을 찾아 저문 날 주막을 찾아드는 길손의 모습이 저러할까? 기름 잦아든 심지가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에 가물가물 흔들리는 모습이라 할까? 애닯다 함은 바로 저 모습이다. 노인들이 아가들을 더 사랑스러워 하는 것은 소멸과 생성을 이어주는 생명의 다리이며, 윤회의 고리를 이어주는 끈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 눈빛은 결코 허망한 것 만은 아니다. 하루를 접는 태양의 품위다. 그리고 확실한 근원지를 찾아 낸 절대의 믿음이 서려 있다.
사람들은 젊어서 요절한 죽음을 신비롭게 보는 이가 많지만, 주어진 한 생을 열심히 살고 마지막 주인 앞에 처분을 바라는 충직한 종의 모습도 아름답다. 나는 때때로 정맥이 시퍼렇게 튀어 나온 어머님 손을 잡고 앞으로 3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 본다. 그렇게 천명을 살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여인으로 조촐하고 슬기롭게 살아오신 그 분만큼만 깨끗하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늙어질 수 있다면 큰 축복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잠드신 노인을 바라본다. 나직하지만 평온한 숨소리, 의무라는 삶의 등짐을 벗어 놓은 홀가분한 저 모습은 필경 갓 태어났을 때의 모습에 과히 엇나지 않으리라.
언젯가 11월, 서초동 거리에서 능수버들 가로수를 오랫동안 바라 본일이 있다. 그 버들은 다른 나뭇잎처럼 누렇게 뜨거나 오므라들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4월에 아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연하고 순아한 처음의 모습으로... . 노인들의 언행에서 가끔 그런 능수버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기로 변해가는 마음을 본다.
기나긴 한세상 휘젓고 사는 동안 묻은 때를 말끔히 씻고 천상의 옷으로 바꿔 입으며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 그것이 노년이 아닐련지... . 그 분들이 갖고 있는 평화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한 찾음에서 연유되고, 생색없이 베풀어 온 덕망에서 생긴 것은 아닐까?
노인들의 말은 진실이다. 정리를 하는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욕망의 끝에서 그저 담담한 처음의 자리에 선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들의 지혜 앞에 겸손해 진다. 강보에 싸여 꼬무락거리는 손자의 조그만 손을 바라보며 태어남의 신비에 감탄하다가 문득 올려다 본 서녁 하늘,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해의 소멸에 찬란한 아름다움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