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2회
지수와 민우가 달려들어 양쪽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아이들은 몇 번 봤다고 수아를 무척 따랐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늦게 나왔어?”
“난 그래두 몇 번 왔었지만, 이이는 처음이어서 짐 다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나오려고 했는데 자기 짐 찾자마자 혼자 홀랑 나온 거 있지. 아무튼 의리 없다니까.”
“당신 먼저 나갔다고 생각했지. 기다릴 거라구 왜 말 안 했어?”
“꼭 말해야 알아요?”
상아가 쏘아붙였다.
“자, 할머니 기다리신다. 어서 가자. 짐 많을 것 같아서 차 두 대 갖고 왔어.”
“잘했다. 당신이 짐 갖고 아빠 차 타요. 우린, 언니 차로 갈 테니까.”
수아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상아는 차에 타자마자 지민 흉을 봤다.
“아무튼 융통성이라고는 10원어치도 없어. 어째 사람이 그런지 몰라. 답답해서 정말 내가 미친다니까.”
수아는 그저 씩 웃었다. 사실 지민은 약지 못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수아도 상아 말에 크게 동감하고 있었다. 수아와 지민 사이를 아는 사람들은 지민이 너무 약아 상아를 택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아 말대로 융통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수아 차가 앞장섰다. 지민이 먼저 도착하면 지민이 머쓱해할 것 같아서 서둘렀다.
수아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민과 상아, 그리고 지수와 민우가 수아 아빠, 엄마한테 귀국 인사로 큰절을 했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수고 많이 했네. 그래두 전임 자리가 빨리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수아 아빠와 엄마가 한꺼번에 인사말을 했다. 짐들이 이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서들 올라가라. 씻고 옷 갈아입어야지. 그리고 내려와서 점심 먹자.”
“엄마, 칼국수 해 놨어?”
“그럼, 해 놨지.”
“언니 방은 아랫층으로 옮겼나 봐?”
“응, 니들 불편할까 봐 침대만 옮겼어. 언니 책이 좀 많니? 서재는 그냥 이층에 뒀다.”
“이층 방 3개니까 애들, 방 하나씩 줘두 되겠다.”
“아이구, 아예 눌러 살 셈이냐?”
“그럼, 난 우리 집이 좋아.”
지민은 아무 말 없이 짐만 나르고 있었다. 상아 방과 그 맞은편의 수아 방, 그 사이에 놓인 소파 세트,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지민은 옛날 생각이 났다. 소파에 앉아 수아와 바둑을 두던 때가 떠올랐다. 바둑판을 접고 저 방으로 들어가 수아와 공부를 하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졌다. 이층에 올라오면 으레 저 방으로 들어갔었는데 하며 지민은 상아 방으로 향했다.
“여보, 우리 사는데 전혀 불편이 없겠지? 침대만 더블로 바꾸면 말야. 그리고 당신 작업은 언니 서재에서 하면 되잖아, 그치?”
“…….”
“못마땅하면 대답 안 하더라?”
상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아랫층에서 칼국수가 다 됐다고 소리쳤다. 수아가 수저를 놓고 있었다. 이층 식구들이 우르르 내려와 앉았다.
“갑자기 대가족이 됐다.”
수아 아빠가 좋아하는 눈치였다.
“오빠네는?”
“걔네는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어.”
“일요일마다 안 와요?”
“요즘 노는 날마다 부모 찾아오는 효자 있다니?”
“엄만 무슨 소리야, 여기 있는데.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조건이 뭐였는 줄 알아? 상계동 어머님 댁에 토요일마다 가서 1박하는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도 쉬잖니.”
“엄만, 벌써부터 처가살이 눈치 주는 거유?”
그때 수아 휴대폰이 울렸다.
“네, 지금은 나와 있어서 그날 스케줄이 비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오후에 사무실로 전화주세요. 죄송합니다.”
“언니 정말 바쁜가 보구나? 아까 오면서도 계속 전화 오던데.”
“얘, 네 언니, 유명인사다.”
“나두 한때는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너네, 빨리 먹고 상계동 가야지.”
“아이, 피곤해. 아무래도 어머니 퇴근해야 하니까 저녁때 가지 뭐.”
“지금 안 가구? 나, 나갈 때 데려다 주려구 했는데.”
“그래? 차 없으면 불편한데. 애들 때문에.”
“여보, 우린 택시 타고 가. 이모 바쁜데 그럴 필요 없어.”
“당신은 한국 물정을 몰라서 그래. 택시 타기가 얼마나 힘든데.”
상아는 수아 차를 얻어 타려고 서둘러 준비하고 나섰다.
지민이 수아 옆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잠이 들었고 상아도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지민은 차창 밖으로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강 교수님 찾아뵈야겠네요.”
“내일 가려구요.”
“강 교수님 학장 되신 거 알죠?”
“예.”
“강 교수님,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로 활동이 많으세요. 우리나라 장애인 편의시설은 그분이 다 맡아서 하고 있을 정도예요. 장애인편의증진법이 제정됐거든요.”
“그랬군요.”
지민은 대답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난데, 지금 어디야?”
“집안일을 보구 있어요. 한 시간 후에 들어갈 거예요.”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오늘 내내 비웠다며, 뭐 안 좋은 일이야?”
“그런 거 아녜요. 들어갈 거예요.”
“빨리 와. 보고 싶어서 눈빠지니까.”
영건의 전화였다. 깍듯한 지민과 달리 너무 예의 없는 전화라서 불쾌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핸즈프리라 전화내용이 스피커를 통해 밖으로 왕왕 울렸다.
상아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
“누구야?”
“응, 김영건이라고 시민운동가야. 나이가 무척 많아.”
수아는 전화 예의가 없는 것을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변명했다.
“아주 가까운 사이 같은데? 애인이야?”
“그래, 애인이다.”
그때 지수가 깨어나 물었다.
“엄마, 애인이 뭐야?”
“사랑하는 사람.”
“아빠하고 엄마처럼?”
“그래, 아빠하고 엄마처럼.”
지민은 김영건이란 이름을 입력시켰다. 수아한테 그토록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사실 지민은 수아는 변하지 않는 사철나무라고 믿고 있었다. 항상 그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자기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니, 그렇게 길을 잘 알어?”
“엄마 심부름 몇 번 왔었어.”
“그랬구나.”
“저기쯤 세워주세요.”
“아녜요. 애들도 있는데.”
차에서 내리는 상아에게 물었다.
“오늘은 여기서 잘 거지? 내일 전화해. 데리러 올게.”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상아가 지민이 보이지 않게 전화 걸겠다는 사인을 했다.
“여보, 민우 내가 안고 들어갈 테니까 당신 짐 챙겨 빨리. 지수도 빨리 내리구. 이모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해야지?”
“그래 지수, 할머니랑 재미있게 놀다 와라.”
지민이 서둘러 아파트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상아와 지수는 계속 손을 흔들었다.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