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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심리학, 행동 유전학, 종교에 대한 스티븐 제이 굴드의
헛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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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한편으로는 다윈 이후의 최고의 진화 생물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꽤 있다. 굴드와의 앙숙 관계로 유명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굴드를 상당히 높이 평가한다. 도킨스는 굴드가 많은 중요한 부분에서 틀렸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틀렸기 때문에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굴드도 도킨스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이에 반해 메이너드 스미스(John Maynard Smith)는 굴드가 너무나 한심하기 때문에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본다. 여기서 더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코스미데스(Leda Cosmides)와 투비(John Tooby)는 굴드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굴드에 대한 찬사는 엄청나게 많다. 그의 책에 대한 찬사일색의 서평은 셀 수도 없다. 따라서 굳이 인용하지는 않겠다.
먼저 도킨스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도킨스는 빈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굴드와 도킨스가 앙숙이라고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래의 인용문을 보고 놀랄 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킨스의 글에서 굴드에 대한 경멸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스티브 굴드(Steve Gould)는 미국 과학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좋은 영향이 많았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진화에 대한 대작(magnum opus)과 Natural History(자연사)에 연재했던 에세이들을 모은 열 권짜리 모음집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점은 기쁜 일이다. 우리가 많은 경우 의견을 달리하긴 했지만, 자연 세계의 경이에 대해 마법에 걸린 듯이 기뻐했으며 그런 경이는 다름 아닌 순수한 자연주의적(naturalistic) 설명을 요구할만하다고 열정적으로 확신했다는 점 등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공유하기도 했다. (『A Devil’s Chaplain』, 189쪽; 『악마의 사도』, 351쪽)
메더워의 문구를 빌리자면 스티븐 굴드는 피더 메더워(Peter Medawar)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습의 귀족(aristocrat of learning)이다. 이 두 명은, 귀족들 그리고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항상 최고였던 사람들에게 있기 마련인 어느 정도의 거만함이 있지만 그래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대인이었으며 거만함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너그러웠던, 비범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다. 만약 여러분이 과학자라면 그들의 책을 읽어라. 만약 과학자가 아니라면 특히 읽어라. (『A Devil’s Chaplain』, 202쪽; 『악마의 사도』, 376쪽)
The Structure of Evolutionary Theory(진화론의 구조)는 너무나 대단히 강력한 최종 발언이어서 우리 모두는 그것에 답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바쁘게 보내게 될 것이다. (『A Devil’s Chaplain』, 222쪽; 『악마의 사도』, 414쪽)
메이너드 스미스는 굴드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굴드는 창조론/진화론 논쟁처럼 수준이 별로 높지 않은 일만 그럭저럭 해낼 정도로 전문 진화 생물학자로서는 한심하다는 것이다.
뛰어난 에세이들 때문에 그는 생물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탁월한 진화 이론가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가 그의 연구에 대해 이야기해
본 진화 생물학자들은 그의 생각들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신경 쓸 가치가 거의 없지만 적어도 창조론자들에 맞선 싸움에서 우리 편에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Because of the excellence of his essays, he has come to be seen by
non-biologists as the preeminent evolutionary theorist. In contrast, the
evolutionary biologists with whom I have discussed his work tend to see him as
a man whose ideas are so confused as to be hardly
worth bothering with, but as one who should not be publicly criticized because
he is at least on our side against the creationists.) (「Genes, Memes, & Minds, John Maynard Smith」,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Volume 42, Number 19, November
30, 1995, http://www.nybooks.com/articles/1703)
코스미데스와 투비는 더 나아간다.
엄청나게 인기 있는 작가로서 굴드는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 중 극히 소수만이 원래 출처를 실제로 들추어 볼 것이며 나머지 모두는 따뜻한 인정으로 넘치고 믿을 만해 보이는 그의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신뢰할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가 무슨
주장을 하든 폭로될 가능성이 없이 안전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는 이런 절연(insulation)을 파괴적인 효과가 나타나도록 이용한다.(As a immensely popular writer,
Gould is conscious that he is paradoxically safe from exposure in whatever he
asserts because only minuscule number of his readers will actually consult the
original sources, with all the rest trusting his warmly benevolent and credible
persona. He uses this insulation to devastating effect.) (「Letter to the Editor of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on Stephen Jay
Gould's "Darwinian Fundamentalism"(June 12, 1997) and
"Evolution: The Pleasures of Pluralism"(June 26, 1997)」, John Tooby and Leda Cosmides,
July 7, 1997, http://cogweb.ucla.edu/Debate/CEP_Gould.html,
http://cafe.daum.net/Psychoanalyse의 <번역> 게시판에서 이 글 전체의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실로, 굴드의 글은 전체적으로 현대 이론들, 구분들, 도구들tools에
대한 어떤 명백한 인지도 너무나 자주 결여하고 있어서 생물학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지난 30년 동안
“땡땡이(cutting class)” 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Letter to the Editor of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on
Stephen Jay Gould's "Darwinian Fundamentalism"(June 12, 1997) and
"Evolution: The Pleasures of Pluralism"(June 26, 1997)」, John Tooby and Leda Cosmides,
July 7, 1997, http://cogweb.ucla.edu/Debate/CEP_Gould.html)
도킨스는 “학습의 귀족(aristocrat of learning)”이라는 표현을 쓴 반면 코스미데스와 투비는 “땡땡이(cutting class)”라는 표현을 썼다. 코스미데스와 투비가 “의식하고 있다(is conscious)”와 “이용한다(uses)”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굴드가 상습적으로 사기를 친다는 말이다.
나는 굴드가 자신의 전문 영역인 고생물학에서 이룬 업적을 평가할 생각이 없다. 또한 그가 창조론자에 맞서 진화론을 방어한 것을 깎아 내릴 생각도 없다. 또한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완성한 『The Structure of Evolutionary Theory(진화론의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내릴 생각도 없다.
이 글의 목표는 굴드가 진화 심리학(또는 사회생물학), 행동 유전학, 종교에 대해 쓴 글을 평가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면에서는 메이너드 스미스, 코스미데스, 투비의 매우 냉소적인 평가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굴드가 사기꾼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자기 기만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을 입증/반증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나 미드(Margaret Mead)가 사기꾼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들의 말이 헛소리임을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려고 한다. 굴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 1981, 1996)』에서 행동 유전학을 비판했으며, 『Rocks of Ages: Science and Religion in the Fullness of Life(1999)』에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썼다. 그리고 진화 심리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굴드는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인터넷에서 뒤진 것이기 때문에 목록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973, 「Biological Potentiality vs. Biological Determinism」, reprinted in 『Ever Since Darwin: Reflections on Natural History』
1974. 「On Biological and Social Determinism」, 『History of Science 12 (1974)』, 212-20
1974, 「The Nonscience of Human Nature」, 『Natural History 83』, 21–25, reprinted in 『Ever Since
Darwin: Reflections on Natural History』
1978. 「Sociobiology: the art of storytelling」, 『New Scientist 80(1129) (1978)』, 530-533
1978. 「The Criminal as Nature's Mistake, or the Ape in Some of Us」, 『Ever Since Darwin: Reflections on Natural History』
1978. 「So Cleverly Kind an
Animal」, 『Ever Since Darwin: Reflections on Natural History』
1979. 「The spandrels of San Marco and the Panglossian
paradigm: a critique of the adaptationist programme」,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Series
B, Vol. 205, No. 1161 (1979) 』, 581-598, with R. C. Lewontin, http://ethomas.web.wesleyan.edu/wescourses/2004s/ees227/01/spandrels.html,
http://www.blackwellpublishing.com/ridley/classictexts/gould.pdf
1980. 「Sociobiology and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 『Sociobiology: beyond nature/nurture? (1980)』, G. W. Barlow & J. Silverberg (Eds.), 257-269
1982. 「Exaptation—a missing term in the science of form」, 『Paleobiology 8 (1)』, with S. Vrba, 4-15
1983. 「Irrelevance, submission, and
partnership: the changing role of paleontology in Darwin's three centennials,
and a modest proposal for macroevolution」, 『Evolution from Molecules to Men』, D.
1984. 「Challenges to
Neo-Darwinism and their meaning for a revised view of human consciousness」, Tanner Lectures on Human Values. Clare Hall,
1991. 「Exaptation: a crucial tool for an evolutionary psychology」, 『Journal of Social Issues 47(3) (1991)』, 43-65
1997. 「Darwinian Fundamentalism」, 『New York Review of Books, VOLUME 44, NUMBER 10 • JUNE 12, 1997』, http://www.nybooks.com/articles/1151
1997. 「Evolution: The Pleasures of Pluralism」, 『New York Review of Books, June 26, 1997』, http://cogweb.ucla.edu/Debate/Gould.html
2000. 「The evolutionary definition of selective agency, validation of the theory of hiearchichical selection, and fallacy of the selfish gene」, 『Thinking about Evolution』, Rama Shankar Singh(Eds.)』, 208-234
2000. 「More Things in Heaven and Earth」, 『Alas Poor Darwin: Arguments against Evolutionary Psychology』, Hilary Rose and Steven Rose (Eds.)
이 글들이 내가 공격하고자 하는 굴드의 헛소리들이다. 이 글의 목적을 이 글들이 왜 헛소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굴드는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 가부장제 이론가들, 주류 사회학자들, 문화 인류학자들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면서
책을 팔아먹고 교수질을 해 먹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그들은
“보라.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인 굴드가 진화 심리학이 엉터리라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의 말이
틀렸다는 진화 심리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굴드는 종교를 옹호함으로써 성직자들이 십일조를
계속 챙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는 굴드는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으며 진화 심리학자들과 행동 유전학자들은 어쩌다 보니 악마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굴드는 자신의 적을 자본주의 옹호론자, 여성 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 등으로 몬다. 웃기지 마라. 나는 굴드보다 더 지독한 빨갱이다(궁금한 사람은 내가 쓰고 있는 글 『나는 왜 다윈주의적 공산주의자인가』를 보시라). 내가 굴드를 그렇게도 경멸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굴드가 나불대는 온갖 헛소리들을 전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거의 그대로 믿고 있으며 이것은 공산주의 운동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있다. 이것은 구소련 등을 공산주의 국가라고 믿었던 20세기 중반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전세계 진보 운동이 엄청난 해악을 끼쳤던 것과 비슷하다(그 규모나 심각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메이너드 스미스의
말대로 그의 헛소리들은 비판을 하기에는 너무나 한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판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온갖 종교와 미신들은 비판을 하기에는 너무나 한심하지만 비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전히 수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미신을 믿고 있으며 그 폐해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화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내놓는 창조론자의 헛소리들은 여전히 다룰 필요가 있는 이유다. 이것은 또한 다우징(dowsing)이나
혈액형 성격론을 비롯한 온갖 미신에 대한 과학적 실험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이미 수 많은 행동 유전학자들과 진화 심리학자들이 굴드의 헛소리를 낱낱이 파헤쳤다. 하지만 한국에는 거의 소개가 되지 않았다(나중에 이 글에서 내가 아는 한 소개할 생각이다). 또한 굴드의 헛소리들을 하나의 글에 모아 놓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진화 심리학, 행동 유전학, 종교에 대한 굴드의 짜증나는 글들을 다 읽고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시도는 해 볼 생각이다. 이미 『Rocks of Ages』는 다 읽었으며 이 책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완성했다.
굴드는 진화 심리학자들이 생물의 (거의) 모든 특성을 적응(adaptation)이라고 우긴다고 말한다. 이 말 자체도 헛소리지만 여기서는 다른 문제를 다룰 것이다.
굴드에 따르면 상대성장의 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 부적응적인 부산물(by-product)이 생길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생물의 발달 과정이 무정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발달은 특정한 길을 따라 이루어지며 이 발달 과정 자체에는 어느 정도 관성이 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말이다.
이번에는 굴드가 드는 예들을 살펴보자. 티라노사우루스의 앞발은 너무나 작아서 많은 공룡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도대체 앞발이 왜 그렇게 작은 것일까? 여러 가지 적응 가설들이 제시되었지만 아직 확실히 규명된 것 같지는 않다. 굴드는 적응 가설들을 제시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앞발이 매우 작은 이유를 상대성장의 부산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달 과정의 관성 때문에 몸집과 뒷발이 매우 커지면서 앞발이 작아졌다는 것이다.
포유류 중에는 뿔이 매우 크고 화려한 종들이 있다. 도대체 그렇게 큰 뿔이 어디에 쓰이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여러 적응 가설들이 제시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핸디캡 원리를 이용한 설명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핸디캡 원리를 바탕으로 한 적응 가설에 따르면 커다란 뿔이 생존이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런 뿔을 달고 다님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수컷이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암컷들은 뿔이 더 큰 수컷을 선호하며 그래서 수컷들은 더 큰 뿔을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아직은 이 큰 뿔에 대한 핸디캡 가설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입증된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굴드에 따르면 큰 뿔도 상대성장의 부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상대성장 때문에 몸집이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뿔은 더 커졌다는 것이다.
물론 매우 작은 앞발과 큰 뿔이 적응인지 여부는 실증적으로 검증할 문제지 미리 가정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가설을 세울 권리가 있다. 문제는 그 가설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입증하느냐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 두 경우에 굴드의 부산물 가설은 가망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발달 과정의 관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 선택이 그 관성을 얼마나 극복하고 좀 더 적응적인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라는 문제에서 나는 굴드와 의견이 매우 다르다. 내가 보기에는 시간만 충분하면 자연 선택은 그런 관성을 상당히 쉽게 극복하는 것 같다.
여러 포유류 종들의 앞발을 살펴보자. 긴팔유인원(gibbon, 긴팔원숭이)의 팔, 인간의 팔, 코끼리의 앞발, 고래의 앞지느러미(flipper), 박쥐의 날개를 비교해 보라. 자연 선택 과정에서 크기뿐 아니라 모양도 적응적으로 매우 다르게 바뀌었다. 왜 포유류의 경우에는 상대성장의 관성이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티라노사우루스에게만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물론 티라노사우루스에게는 매우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 그 관성을 극복하지 못했을 수 있다. 이론적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의 설득력이 없다. 진화 생물학자에게는 굴드가 생각하는 이런 거의 가망성 없어 보이는 부산물 가설이 아니라 좀 더 유망해 보이는 적응 가설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굴드는 아주 비열한 전략을 쓴다.
100여 년 전에 인간의 머리 크기와 지능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다는 연구가 있었다. 머리가 클수록 머리가 좋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두개골의 모양에서
뇌의 크기를 추론해냈다. 머리가 커서 놀림 받는 한국인에게 희망을 주는(농담이다) 이 메시지가 굴드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굴드에 따르면 100여 년 전의 연구는 조작되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100여 년 전의 연구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100여 년 전의 연구에 대한 논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과연 당시의 연구에 대한 고증을 통해 조작 여부를 밝힐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회의적이다.
문제는
20세기 후반에도 비슷한 연구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연구들에 따르면 뇌의 크기와
IQ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다. 두개골의 모양으로부터 뇌의
크기를 추론해내서 IQ와 비교하니까 정말로 상당이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또한 그 이후에는 MRI 같은 장비를 이용해서 뇌의 크기를 직접
잰 후에 IQ와 비교해 보았다. 그러자 상관 관계는 더 크게
나타났다. MRI를 이용한 연구에서는 표본의 수가 작긴 했지만 어쨌든
100여 년 전의 연구와 같은 방향의 결과가 나타났다.
굴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해결했다. 그는 초판에서도 2판에서도 뇌 크기와 IQ 사이의 상관 관계에 대한 20세기 후반의 연구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전략은 다음과 같다: “19세기에 어떤 작자가 뇌 크기와 IQ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다고 우겼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사기였다. 따라서 뇌 크기와 IQ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없다. 20세기 후반의 연구가 상관 관계가 있음을 보였다고? 괜찮다. 내가 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으면 되니까.”
“머리 큰 사람은 머리가 좋다”라는 명제에 많은
사람들이 머리 작은 천재도 있다고 응답한다. 굴드도 역시
그런 식으로 응답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통계학 기법을 상당히 깊이 다룬다는
점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이다.
누가 뇌의 크기와 IQ(또는 지능) 사이의 상관 계수(correlation
coefficient)가 1 이라고 했나? 키와
몸무게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다. 키가 큰 사람이 대체로 더 무겁다.
하지만 물론 상관 계수는 1 보다 작다. 즉
키가 160cm인 사람이 170cm인 사람보다 무거운 경우가
있다. 아무도 몸무게와 키 사이의 상관 관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키 작고 뚱뚱한 사람이 키 크고 빼빼
마른 사람에 비해 몸무게가 더 나가는 사례가 있다는 것을 반론이라고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IQ가 문제일 때는 그런 반론이 과학적 반론일 수 있다고 믿는(또는
믿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굴드도 그런 사람들에 포함되는
것 같다.
나는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종교는
궤멸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종교는 과학적
사고를 가로 막는다. 그리고 종교는 온갖 사악한 도덕 규범의 근원지다.
반면 굴드는 종교를 옹호한다. 이것은 굴드가 진화 심리학(또는 사회생물학)이나 행동 유전학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굴드의 행동에 일관성이 있다.
굴드는 인문학이나 사회 과학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빈 서판(blank slate)주의를 위해 진화 심리학과 전쟁을 벌였다. 또한 『Rocks of Ages』에서는 미국 대중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신앙주의(fideism) 기독교를 사실상 옹호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권력(학계의 권력과 종교계의 권력)에 아부했던
것이 굴드의 엄청난 인기에 한 몫 했던 것 같다. 그가
온갖 헛소리를 나불댔음에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이 헛소리였기 때문에 권력에 아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무어(George
Edward Moore)이며 그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연주의적 오류를 정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 그가 정의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이 용어를 쓰고 있다. 이 용어는 보통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하는 오류를 의미하며 나도 그런 의미로 쓸 것이다. 즉 사실로부터 부당하게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사실에 대한 설명을 다루는 영역인 과학과 당위에 대한 정당화를 다루는 도덕
철학은 별개인 것이다. 나는 이런 구분과 절연이 옳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측면이 있긴 한데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나의 글 「『과학적 윤리학을 위하여』 --- 설명과 정당화」를 참조하라).
NOMA는 “Non-Overlapping Magisteria”의 약자다. ‘magisterium’은
‘교권(敎權)’을
뜻한다. 굴드는 사실을 설명하는 과학의 교권과 가치와
도덕성을 다루는 교권이 별개라고 주장한다. 사실로부터 도덕성을 추론할 수 없으며 가치와 도덕성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사실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자연주의적 오류 개념에 새로운
이름만 붙인 것이다. 만약 굴드가 이런 이야기만 했다면
내가 굳이 그의 책을 비판하는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굴드가 가치와 도덕성을 다루는 교권을 종교라고 부른다는 데 있다.
과학은 자연 세계의 사실적 특성을 기록하려고 하며 이런 사실들을 통합하고 설명하는 이론들을
개발하려고 한다. 반면 종교는 인간의 목적, 의미, 가치 등의 영역 – 이 영역은 똑 같이 중요하지만 지극히 다른 영역이다
– 에서 작동한다. 그런 주제들은 과학의 사실 영역이 해명을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해결할(resolve)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 어느 정도 특정적인, 윤리적 원칙들에 따라 행동해야
하지만 이런 원칙들의 유효성은 과학의 사실적 발견들로부터 결코 추론될 수 없다. (『Rocks of Ages』, 4쪽)
약간 반복됨을 무릅쓰고 정리를 하자면, 과학의
망(net) 또는 교권은 경험적 세계 – 우주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사실), 왜 우주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가(이론) – 를 다룬다. 종교의 교권은 궁극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의 문제들로 뻗친다. 이 두 교권은 겹치지 않으며 모든 탐구를 포괄하지도 않는다(예컨대 예술의 교권과 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라). (『Rocks of Ages』, 6쪽)
이 책의 제목 “rocks of ages”는 사람들이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신을 뜻하는 말인
“rock of ages(영원한 반석)”의 복수형이다.
너희는 영원토록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 하나님만이
너희를 보호하는 영원한 반석이시다. (이사야서 26:4, 표준새번역)
So always trust the LORD because he
is forever our mighty rock. (Isaiah 26:4, CEV)
굴드는 과학이라는 교권과 종교라는 교권이 두 개의 영원한 반석으로서 인류와 함께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출발한다.
종교를 창세기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Genesis
literalism), 성 야누아리우스(Saint Januarius)의 액화하는 피(liquefying
blood)의 기적(이것은 적어도 뉴욕의 거리에서 매년 굉장한 성 제나로 축제San Gennaro
Festival가 열리는 것에 대한 구실을 제공하기는 한다), 밀교(kabbalah)의 성경 암호(Bible
codes), 현대의 대중 매체의 속임수(hype, 과장)
등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미신, 비합리주의, 속물주의, 무지, 독단, 그리고 인간 지성에 대한 다른 일련의 모욕들(이것들은 때때로 살인과
억압의 위험한 도구로 정치적으로 변환되기도 한다)과 싸우고 싶다면 신의 축복을 빌겠다. 하지만 이런 적을 “종교”라고
부르지는 말라. (『Rocks of Ages』, 209쪽)
모든 버전의 NOMA의 첫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과학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특별한 개입을 통해서 신이 자연의 역사에서의 중요한 사건들을 직접 정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권들을 뒤섞지 말라.” 통상적인 어법에서 우리는 그런 특별한 개입을 “기적” – 이것은 신성한 명령으로 자연의 사실들을 재정리하기 위해 특유하고 일시적으로 자연 법칙을 중단하는 것으로
조작적으로(operationally) 정의된다 – 이라고
부른다. (『Rocks of Ages』, 84쪽)
근본주의적 극단주의와 같은 오류들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으며 도도한, 시계태엽을 감는 존재(clockwinder, 우주라는 시계의 태엽을 감은 후에는 개입하지
않는 신)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창조물들의 삶에 몸소 신경을 쓰는 사랑하는 신이라는 신 개념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보통 범하는 NOMA에 대한 좀 더 미묘한 위반은 어떤가? (『Rocks of Ages』,
93쪽)
굴드에 따르면 NOMA를 위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전을 무시해야 하며, 기적을 믿어서도 안 된다. 신을 믿더라도
우주의 법칙을 창조하고 우주를 처음 작동시킨 다음에는 절대로 자연의 역사에 개입하지 않는 신만 믿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들은 이신론자라고 불린다.
이신론(deism)은 경전, 기적, 계시 등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직 이성으로만 신의 속성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범신론(pantheism)은 이신론보다 무신론에 더 가깝다. NOMA를 위반하지 않는 종교인은 이신론자와 범신론자밖에 없다.
실제로 이신론이나 범신론을 일관성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신론자로
불렸던 사람들 중 다수는 실제로는 일관된 이신론자가 아니었다. 어떤 ‘이신론자들’은 인간의
영혼이 영생한다고 믿었으며 어떤 ‘이신론자들’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보았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이성으로 그것을 입증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주의 즉 경전, 계시, 기적의 종교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신론자나 범신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전체 종교인 중에 소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처럼 일관되게 이신론이나 범신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즉 굴드의 표현대로 하자면 NOMA의 원칙을 일관성 있게 제대로 지키는
종교인은 극소수다. 그럼에도 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다고 가정되는 갈등에 대해,
즉 완전히 다르지만 똑 같이 필수불가결한 이 두 주제들의 논리나 고유의 유용성(proper
utility)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사회적 관습에만 존재하는 논쟁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기본적 테제를 표명함에 있어 내가 독창적인 것을 제공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아마 실례들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는 창의성이 있을 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의 논증은 수십 년 동안 지도적인 과학 사상가들과 또는 종교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받아들이는 강한 동의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Rocks of Ages』,
3쪽)
(나의 서문Preamble의 첫 부분에서 표명했듯이, NOMA는
논쟁의 여지가 있거나 특이한 해결책이 아니라 과학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 중 압도 다수가 오랜 기간 동의해오던 것이라는 점을 또한 되풀이해서
이야기해야겠다.) (『Rocks of Ages』, 64쪽)
일관된 이신론과 범신론은 종교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다. 아인슈타인은 스스로를 종교인이라고 우겼지만 나는 아인슈타인에게서 종교적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 대다수의 종교인들은 신앙주의자들이다. 종교의
논리 자체가 과학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전통 하에서 자라지 않은 사람들은 무지와 고정 관념이라는 잘못된 이유
때문에 교황을 정의상 과학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독단적인 전통주의의 원형적 상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Rocks of Ages』, 70쪽)
나도 그렇게 보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다. 과연 굴드는 무슨 근거로 그것이 “무지와 고정 관념” 때문이라고 보는 것일까?
결국 매우 보수적인 교황 피우스 12세(Pius XII)는 1950년에
발표한 <인류(Humani Generis)>라는 회칙(回勅, encyclical)에서 적합한 탐구로서의 진화를 방어했으며
그것도 NOMA를 중심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즉 육체적 진화에 대한 연구를 자신의 교권 밖에 있다고 인정하는 한편 더 나아가 그런 다윈주의적 생각들을, 과학적 주장과 혼동되지만 종교의 교권 안에 있는 어떤 것 즉 인간 영혼의 기원과 구성과 구분했다. (『Rocks of Ages』,
75쪽)
이 인용문만 보면 인간의 육체는 진화론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정신은 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이 교황 피우스 12세의 생각으로 보인다. 교황이 정신과 영혼을 구분해서 정신은 진화의
산물이고 영혼은 신의 창조물이라고 보았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96년
연설로 이어진다.
인간의 몸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생명체에서 생겨났다 하더라도(If the human body take its origin from pre-existent living matter),
영혼은 하느님이 직접 창조하셨다. ...... 결과적으로, 영혼이 생명체의 힘에서 출현한다고 또는 생명체의 부수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는 – 이것은 진화론을 부추기는 철학과 부합한다
- 진화론은 인간에 대한 진리와 양립하지 못한다.
또한 개인의 존엄을 뒷받침할 수도 없다. (『빈 서판』, 332쪽, page 186, 교황이 1996년에 했던 연설)
굴드는 교황의 1996년 연설도 NOMA의 원칙을 지킨 예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웃기는 얘기다. 육체는 진화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정신은 신이 창조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진화론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동물은 진화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신이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결코 진화론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진화론으로 인간의 정신, 문화, 사회를 설명하는 것을 사실상 거부하는 굴드 같은 작자에게는 별
문제가 안 될 것이다.
굴드는 제스처에 불과한 것과 진실된 믿음을 구분할 줄 모르는 듯하다. 물론 교황은 갈릴레오를 협박한 교황청의 잘못을 사과했다. 하지만
이것은 교황이 진정으로 과학을 존중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20세기 말에 물리학을 통째로 무시하다가는
대중들의 눈에도 너무 한심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가 진화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는 피우스 12세가 뭐라고 했는지를 보라.
흥미롭게도 이 문단들의 주된 취지는 진화 일반을 다룬 것이 아니라 피우스가 “다원 발생설(polygenism)” – 다수의 부모들로부터 인간 조상이 기원했다는
생각 – 이라고 부른 교리에 대한 논박에 있었다. 그는 그런
생각이 “개인 아담이 실제로 저지른 죄로부터 시작하여 세대를 거쳐서 모든 사람들에게로 전해져서 모든
사람들의 것으로 된” 원죄의 교리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한 예에서 피우스는 NOMA의 원칙을 어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톨릭 신학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해서 이런 문장이 어떻게 상징적으로 독해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 (『Rocks of
Ages』, 77쪽의 주3)
피우스는 사실 인간 육체의 경우도 진화의 산물이라고 인정할 용의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원죄의 교리가 성립하려면 인간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황이 진화론이 어느 정도 맞을지도 모른다고 한 마디 한 걸 가지고 굴드는 NOMA의 원칙을 표방했다는 식으로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듯이 이야기한다. 이렇게
명백하게 NOMA의 원칙을 거부한 것도 상징이라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줄 수 있다면 도대체 상징을 들이대며
얼버무릴 수 없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교황이 어떤 헛소리를 해도 굴드는 “상징일지도 모른다”라고 발뺌할 것이다.
교황은 다른 측면들에서도 NOMA를 기꺼이 어긴다. 예컨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예수의 기적을 생각해 보라. 기독교에서 예수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굴드는
NOMA의 원칙을 지키려면 기적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기적을 행한다고 주장하지 않았거나, 사기꾼이다. 물론 어떤 교황도 이런 발칙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현재에도 교황청은 기적의 사례들을 조사해서 그 중 일부를 기적으로 인정해준다.
교황과 교황청의 행적 전체를 보지 않고
이런 식으로 몇 가지 부실한 증거를 들이대며 교황이 NOMA를 존중했다고 우긴다면 스탈린,
명백히, 소위 기독교 우익(Christian right)이라고 불리는 극단주의자들 특히 미국 공립 학교의 과학 과정에 창조론을 강요하려고
노력하는 작은 분파는 이런 당파주의자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집단이다. 하지만 우리 과학자들 중에 종교
개념이 편협해서 그 미묘함과 다양성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뉴저지의 자동차 전시장 유리 창의 아침
이슬이 말라가는 모양에서 신이 만든 성모상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고 미신적인 믿음들과 전체 교권을 동일시하는 과격 무신론자들도 이런
당파주의자들에 포함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Rocks of Ages』, 68쪽)
신이 유리창에 성모상을 새겼다고 보는 것이나
성모가 처녀임에도 예수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나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믿기는 마찬가지다. 즉 두 경우
모두 NOMA를 어긴 것이다. 그럼에도 굴드는 불쌍한 뉴저지 사람은 바보 같다고 놀리는 반면, 교황은 NOMA를 제대로 실천한다고 우기고 있다.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는 굴드에게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교황처럼 막강한 권력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20세기 초반과 후반에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시비를 건 것은 큰 문제였다. 그리고 굴드는 그런 시도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굴드가 한 다음의 말은 기가 막힌다.
따라서 미국에서 모든 창조론 집단들 중에서 가장 크며 잠재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립 학교의 과학 과정에 자신의 신학적 믿음을 강요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개인적이며 당파적인 교리들은 교회와 집에서 가르치는 것이 적절하다는 나의 견해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Rocks of Ages』,
127쪽)
공립 학교에서만 가르치지 않으면 만사 형통이다. 따라서 온갖 인종주의적 편견을 나치의 정당 모임이나 나치 개인의 집에서만 가르친다면 굴드가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진화 심리학이나 행동
유전학에 대해서는 공립 학교에서 가르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온갖 헛소리를 근거로 온갖 욕을 해대던 인간이 종교에는 그렇게 관대할 수가 없다. 종교의 이름이면 모든 것이 통한다. 단지 공립 학교에서만 가르치지
않으면.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현대 개인교도들 절대 다수는 자신의 성스러운 텍스트들을 그런 식으로 교조주의적이고 비타협적인 방식으로 독해하지
않을 것이다. 주로 자유주의적(liberal) 형태 내에서
한정된 다양성이 있는 유럽의 국가들에서는 특히 그럴 것이다. (『Rocks
of Ages』, 131쪽)
굴드는 뉴스도 안 보고 살았던 것일까? 굴드가 이 책을 쓸 당시에 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자.
유대-기독교의 개념은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간 본성 이론이다. 최근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6퍼센트가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믿고, 79퍼센트가 성서에 기록된 기적들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으며, 76퍼센트가 천사와 악마를 비롯한 비물질적인 영혼을 믿고,
67퍼센트가 어떤 형태로든 사후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반면, 단 15퍼센트만이 다윈의 진화론이 지구상에 출현한 인간의 기원을 가장 적절히 설명하는 이론이라 믿는다. (『빈 서판』, 27쪽)
미국인 다수는 여전히 NOMA를 개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글자 그대로(literally, 문자주의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해야겠다. 왜냐하면 여러 원천들에서 이어 붙인
그런 텍스트에는 불가피하게 많은 모순들을 포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이 도덕적 진리로 가득 차
있는, 영감을 받고 쓴 문서(inspired document)라고
보며 인간 역사에 대한 정확한 연대기도 자연적 사실에 대한 완벽한 서술도 아니라고 보는 절대 다수의 종교인들에게는 이런 다양한 독해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Rocks of Ages』, 130쪽 주2)
물론 성경에는 온갖 모순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에 대한 모순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성과 관련해서도
온갖 모순들이 있다. 특히 구약의 도덕과 신약의 도덕은 극단적으로 충돌한다. 그리고 성경이 도덕적 진리로 가득 차 있다고? 굴드는 과연 성경을 읽어보기나 한 것일까? 성경은 온갖 도덕적 헛소리로
가득 차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수 많은 목록을 만들었으며 나도 「미신 없는 세상을 위하여
– 사악한 성경 구절들」라는 목록을 만들었다. 물론 성경에는 착하게 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도덕적 진리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굴드의 방식을 적용하면 된다.
히틀러의 온갖 사악한 헛소리는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그 책에 있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문장들만 인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과학은 도덕의 도덕성(morality of
morals)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즉, 인류학자가
살인, 유아살해, 대량학살,
그리고 외부인 혐오가 많은 인간 사회의 특징이었음을,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더 많이 일어났음을, 그리고 심지어 어떤 맥락에서는 적응적으로 이득이 되었음을 새롭게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그런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제에는 어떤 뒷받침도 제공하지 않는다. (『Rocks
of Ages』, 66쪽)
생물학적 진화의 사실들이나 이론들이 도덕에 관련된 어떤 행동을 금지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다윈의 위대한 통찰을 심각하게 오용하는 것이며 NOMA를 중대하게 위반하는 것이다. (『Rocks of Ages』,
162쪽)
자연은 따뜻하고 포근한 쪽으로도 추하고 역겨운 쪽으로도 어떤 통계적 선호를 보이지 않는다. 그 모든 복잡성과 다양성과 함께, 우리의 욕망에 대한 그 모든 숭고한
무관심과 함께 자연은 그냥 존재할 뿐이다. (『Rocks of
Ages』, 195쪽)
하지만 진화 심리학(또는 사회생물학)과 행동 유전학이 문제일 때에 굴드의 태도는 돌변한다. 굴드는 진화 심리학이 온갖 사회악(계급, 여성 차별, 인종주의, 강간 등)을 정당화한다고 1970년대 이후로 20여 년 동안 줄기차게 나불대고 다녔다. 진화 심리학자들이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하지 말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 없었다.
또한 굴드는 흑인이 백인보다 선천적으로 IQ가 낮을 리가 없다고, 강간 등이 적응일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나는 흑인이 백인보다 선천적으로 IQ가 낮다고, 강간이 적응이라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들이 순전히 과학의 기준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굴드는 자신의 도덕적 기준이나 소망에 따라 이런 문제에 접근하는 듯하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굴드의 글을 상세히 인용할 생각이다.
요컨대 굴드는 『Rocks of Ages』라는 책에서만 NOMA의 원칙을 실천에 옮긴다. 그것도 이상한 방식으로.
--- 이 글에 인용된 글 중 번역본이 출판된 것들도 있다. 많은 경우 번역을 고쳤지만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첫댓글 설명과 정당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 많지요.. 굴드의 글을 읽는 것은 무기한 보류 하야겠네요.
그리고 흑인과 백인의 아이큐...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 물론 흑인이 백인에 비해서 나쁘다는게 아니라. 그 역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뭐 아닐 수도 있구요.
흑/백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외모에 관련된 유전자가 어떠한 형태로든 지능에도 관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만,
이덕하님 말씀처럼 검증되어야 할 문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