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부호 ‘통큰’ 기부…역사 흔적 찾긴 어려워
도평의원 김좌성씨 농지개혁·한국전쟁으로 재산 규모 줄어
‘목재왕’ 김홍조씨 개화파 젊은이와 교류로 나라 찾기 도모
1. 국도 7호선 시대
1) 울산읍과 7번 국도
2) 일제의 잔영들
3) 울산의 부자들(2)
4) 울산의 인텔리들
5) 옛샘터
2. 파란만장 그 시절
3. 정치 일번지 중구
4. 문화예술의 발상지
일제강점기 울산 읍내에서 큰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는 김좌성(金佐性)씨와 추전(秋田) 김홍조(金弘祚)씨 그리고 차용규(車溶珪)씨가 있다. 당시 울산 사람들은 울산에 3만석의 부자가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이들의 재산이 각각 1만석으로 이를 합하면 3만석이 된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김좌성씨는 일제 강점기 울산을 대표하는 부자였다. 김씨는 매관매직이 한창이었던 조선 조 말 경성에서 울산으로 오는 부사를 따라 속관으로 왔다. 당시만 해도 부사는 지방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향민들에 대한 세금 징수와 호구 조사를 속관에게 맡겼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silbo.co.kr%2Fnews%2Fphoto%2F201204%2F367358_122085_3951.jpg) |
|
|
|
▲ 반구동에 있었던 추전 김홍조씨 집은 그동안 도시개발로 옛 모습을 잃고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옛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
|
|
머리가 좋았던 그는 이 일을 하는 동안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집은 당시 울산읍사무소 부근 옥교동에 있었다.
도평의원(道評議員)을 지냈던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울산에서 각종 행사가 열릴 때 마다 많은 돈을 희사했다. 그가 도평의원이 된 것은 그에 앞서 도평의원을 했던 김홍조씨가 갑자기 운명했기 때문이다. 도평의회는 도지사의 자문기관으로 선거를 통해 의원을 선출했다.
울산청년회관 고문직에 있었던 그는 특히 회관 건립과 운영에 많은 돈을 희사했다. 1922년 회관 건립 때 500원을 내었고 1928년 청년회관을 보수할 때도 1000원을 쾌척했다.
김씨는 또 1937년 울산농고가 건립 될때도 무려 1만원이라는 많은 돈을 희사했다. 당시 1만원은 논을 100마지기 정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당시 천석꾼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1000원 정도 내었던 것을 생각하면 김씨는 통이 큰 사람이었다.
이처럼 많은 재산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사업을 열심히 했던 김씨 집안이 몰락하게 된 것은 아들 재문씨 대(代)에 들어서면서다. 재문씨는 1940년 경 일본 아오야마(靑山)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도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해방이 될 때까지 사회사업에 많은 돈을 희사했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silbo.co.kr%2Fnews%2Fphoto%2F201204%2F367358_122086_3951.jpg) |
|
▲ 옛날에 비해 규모는 크게 줄었지만 아직 일부 건축물이 옥교동에 그대로 남아 한식집으로 이용되고 있는 김좌성씨의 옛 집. |
이 땅의 해방은 재문씨 같은 재산가들에게는 어려움을 주었다. 해방이 되자 학식이 높고 돈이 많았던 재문씨는 건국준비위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런데 건준이 나중 좌익으로 몰리자 그의 입지가 좁아졌고 더욱이 농지개혁으로 그의 많은 재산이 소작인들에게 넘어가면서 그의 집안은 몰락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또 한 번 그에게 시련을 주었다.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 재산세를 많이 내었던 그는 좌익으로 몰려 당시 우익단체였던 서북청년단원들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고 이 때문에 울산의 재산을 모두 버리고 부산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다.
서북청년단은 북한의 부자들 중 김일성 정권아래 재산을 빼앗겨 6·25때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중심이 돼 만든 단체다. 그들은 남한에 온 후 일제강점기 친일을 한 사람들과 좌익을 척결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이들이 모인 사무실은 시계탑 옆 전광사 2층에 있었다.
재문씨가 살았던 옛집은 다행히 아직 그 흔적이 잘 남아 있다. 현재 옥교동에 있는 한식 전문집인 ‘외가집’이 옛날 김좌성씨가 살았던 집이다. 이 집에는 한 때 윤진일 울산농고 교장이 살다가 나중에 태화여관이 되었다. 대문에서 마당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손님들을 맞이하는 큰 식당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옛날 김좌성씨가 머물렀던 본채였다. 그리고 이 건물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각종 부속 건물이 많았다.
규모로 보면 이 집은 많이 줄었다. 옛날에는 현재 김장배 전 교육위 의장이 살고있는 집터와 또 그 뒤편에 이종건씨가 살고 있는 집터도 모두 이 집 사랑채였다. 요즘 식당의 주차장으로 이용되는 공터와 또 주차장 인근에 있는 한옥도 모두 창고 등 이 집의 부속건물이었다.
김홍조씨의 아버지는 울산 염포의 소금을 팔아 거부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번 돈으로 목재상을 비롯한 각종 사업을 벌여 더 많은 재산을 모았다. 김씨의 재산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가진 재산이 2000석은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처음으로 벌인 사업은 목재업으로 부산항이 개항될 때 항만 건설에 필요한 목재를 제공했고 일본이 경부선 철도를 개설할 때는 침목을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이 무렵 전국을 무대로 총독부가 추진한 전신주 사업에도 참여해 전신주 용 목재를 공급해 우리나라 제일의 목재왕이 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는 부산에 피혁공장을 세웠고 조선요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장 자리에 앉기도 했다. 그는 또 강원도에 흑연광산을 개발해 흑연을 일본으로 수출했고 한때는 부산~울산간을 운행하는 자동차 회사를 세워 사장에 취임도 했다.
그가 얼마나 부자였나 하는 것은 학성공원과 언양의 작천정을 구입해 자신의 소유로 두었다가 나중에 울산시와 언양 면민들에게 기증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또 자신이 죽을 때 소실인 이구소(李九簫)에게 외아들 택천(澤天)의 양육을 부탁하면서 논 100마지기를 주기도 했다.
논 30마지기만 가져도 부자 소리를 들었던 당시를 생각하면 100마지기의 논이 얼마나 큰 재산이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전은 이렇게 번 돈으로 사회사업도 많이 했다. 나라를 찾는 길이 젊은 인재의 육성에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박관수씨와 최현배씨 등 젊은이들에게 일본과 서울에 갈 수 있는 유학의 길을 열어주어 이들을 국가 동량으로 키웠다. 박영효와 김옥균 등 당시 개화파 젊은이들과 교류를 넓혔던 추전은 일신학교와 개운학교를 비롯한 교육사업과 경남일보 등 언론사 창간에도 참여했고 구포은행을 세우는 등 금융업에도 손을 대었다.
그는 또 일제강점기 독립군들이 만주에 세웠던 신흥무관학교에 후원금을 내기도 했고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추전이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낸 것은 그의 소실 이구소가 쓴 시집 <봉선화>에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추전이 어느 날 구포은행에서 돈을 찾아 배로 부산을 출발해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떠났는데 임시정부에 도착하기 전 독립군을 만나 돈만 주고 돌아 왔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러나 부호 추전 가문은 너무 빨리 몰락했다.
몰락한 것은 재산만이 아니었다. 그의 흔적 역시 요즘은 찾기가 힘들다. 그는 일제강점기 학성공원 동편 반구동에 살았는데 당시만 해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는 특히 철종 부마 박영효 대감과 친했기 때문에 박영효 대감이 울산에 오면 그와 함께 언양 작천정에 가 여흥을 즐기기도 했다. 그가 소실 이구소를 만나게 된 것도 이런 인연에서다.
추전은 죽을 때 많은 재산을 남겼다. 그러나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아들 택천씨가 해방 후 정치에 뛰어들면서 많은 재산이 모두 날아갔다. 택천씨는 2대 총선에 출마해 울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번 출마했지만 한 번도 당선되지 못하고 돈만 날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택천씨가 나중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추전이 살았던 집마저 일찍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silbo.co.kr%2Fnews%2Fphoto%2F201204%2F367358_122087_3951.jpg) |
|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
따라서 요즘은 이 마을에 가 추전의 집터를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나는 2005년 추전의 집터를 간신히 찾아내어 사진을 찍어둔 적이 있다. 당시 옛 집터에는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7년이 지난 이번에 다시 이 집을 찾았더니 주위가 너무 개발되어 옛 터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반구1동 주민센터와 경로당까지 찾아가 추전의 옛 집터를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렵사리 옛 사진을 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여러번 수소문 한 끝에 옛집을 찾을 수 있었다. 도시가 급하게 개발되다보니 이런 집을 온전히 보존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지도상으로 나마 이런 역사적 인물이 살았던 집터는 표기해 놓는 것이 향토사랑과 문화 사랑을 부르짖는 울산시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