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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1장-4>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 예수, 솔로몬과 술림미 여인의 청순한 사랑(4)
7절,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지난주 요약>
술람미 여인은 오빠들로 인하여 세상 일만 하다가 검게 되었는데, 이제 그녀가 깨닫고 고백하는 말이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지키지 못한 ”포도원“은 아가서 전반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교회이며, 가꾸어야 할 마음의 포도원인 것입니다.
그녀는 마르다처럼 일만 하여 자신의 교회를 가꾸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포도원을 가꾸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성전을 가꾸는 것이 자기 사명인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것들로 검게 물든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등을 통하여 자기의 영성을 기르지 못하고 남들에 의해서 세상 일만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잡아 죽도록 일만 시키고자 하는 바로의 영에 잡힌 것입니다. 야곱을 붙잡아 일만 시키고자 하는 라반의 영에 잡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일만 하면 안됩니다.애굽 고센 땅에서 죽도록 일을 한 이스라엘이 되면 안됩니다.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혼도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영혼이 죽어나가는 것입니다.
일의 영성, 여기서 출애굽해야 합니다.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그래서 내가 이렇게 검게 되었구나!
이렇게 자신을 발견하는 것부터 출애굽은 시작됩니다.
술람미 여자도 이것을 알고 오늘 함께 묵상해 볼 7절, 8절에서 개인적인 출애굽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자를 찾아 나서기로 결단을 합니다. 일의 영성에서 사랑의 영성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뗀 것입니다. 마치 마르다에서 마리아가 되고자 하는 결단과 같습니다.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먼저 솔로몬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고자 찾아 나선 것입니다. ”주님 어디계세요“와 같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솔로몬을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라고 표현합니다. 보통 일반적인 으로 사용하는 마음(히, 레브)가 아니고 생명, 영혼이라는 의미의 ”나프쉬“ (네페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에게 솔로몬은 생명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을 다하여 사랑하는 자야!“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생명을 다하여 사랑하겠습니다!
입술로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이기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조건에서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주님 그 자체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 6:5)
이런 생명을 드리는 사랑은 자신의 의지도 필요하지만, 의지 만으로는 안되는 것이 이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롬 5:5). 성령의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있었을 때, 그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마 26:35)고 했지만 죽음이 두려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날 성령을 체험한 후에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까지 하는 생명을 드리는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만나기 위하여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말하라고 명령형으로 말합니다. 명령형은 강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반드시 찾아만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입니다.
솔로몬은 실제 많은 목장과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전 2:4-7). 그리고 그곳에는 팔레스타인의 강렬한 햇빛을 피하여 쉬는 장소가 있었을 것입니다. 양치는 곳, 쉬게 하는 곳은 솔로몬이 양들인 백성들을 보살피는 곳입니다. 백성들을 쉬게 하는 곳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들의 목자이십니다 (요 10:2,11,14,16). 예수님에게는 당신의 예비 신부들을 보살피는 곳과 쉴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오면 주님을 만나고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1:28)
술람미 여인이 목자인 솔로몬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면 여기 저기 찾아 다니게 될텐데 그는 그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얼굴을 가린 자와 같은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당시 창녀들이 그렇게 하고 다녔습니다.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와 동침하고자 다말이 창녀처럼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감싼 후에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아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창 38:15),
그리고 남편을 잃은 과부도 그렇게 하고 다닙니다. 그러므로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얼굴을 가린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찾지 못하고 여기 저기 다니는 것은 창녀와 과부로 오해할 수 있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원자, 영적 참 신랑을 찾기 위하여 여기 저기 찾아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친구들 사이에서 솔로몬을 찾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칫 참 신랑인 솔로몬을 만나지 못하면 다른 신랑을 만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흉내내는 가짜 신랑들이 많습니다. 많은 인간들이 자신을 예수라고, 보혜사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것도 신기한데, 그런 사람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우리들은 머지 않아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그들의 죽음을 볼 것입니다.
①예수님처럼 그들이 부활하지 않는 한 그들은 가짜이며, ②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처럼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권세가 있지 못하면 가짜이고, ③구약성경에 예언된 자가 아니라면 가짜이고, ④우리들을 죄로부터 해방시킬 대속적 죽음을 죽지 못하고 늙거나 병들어 죽는다면 가짜인 것입니다. ⑤더구나 죄가 없어야 하는데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죄없는 인간은 이 땅에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여기 저기서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롬 3:10)
그럼데도 많은 사람들이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가짜인 그들과 영적 혼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수와 혼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마세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 주님이 정확히 어디에서 역사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여기 저기 다 있습니다. 편재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역사하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이나 이단 집단에서 신랑을 만나고자 한다면 어렵습니다. 술집에 가서 참 신랑을 만나고자 한다면 오히려 사탄의 신랑을 만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어디서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님이 목자로 계시는 참된 교회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예비 신부들을 주님께 중매하는 지도자가 있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중매장이가 중매는 안하고 그가 신부를 취하는 곳이면 안됩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형상이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처럼 모시고 따라 다니는 것은 강력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8절,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이 부분은 예루살렘 딸들의 합창으로 보기도 하고, 솔로몬의 노래라고 보기도 합니다. 누구의 노래라고 해도 내용의 흐름은 이어집니다. 두 해석 다 의미가 있습니다. ① 솔로몬의 노래라면 우리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예수님의 음성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② 아 5:9, 6:1절에서 동일한 표현 ”여자들 가운데 어여쁜 자야“ 가 나오는데 모두 예루살렘 딸들의 합창인 것으로 보아 여기서도 예루살렘 딸들의 노래로 보는 것도 무난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딸들로 보고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먼저, 예루살렘 딸들도 술람미 여인이 ”어여쁘다“(히, 야페)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신부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주변 사람들 보기에 이렇게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심히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창 12: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창 24:16]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주님의 신부감이 되면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심히“말입니다. 반드시 육신적으로 미모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어여쁘다“의 원어가 ”맑고 깨끗하다“의 뜻도 있으므로 거룩함, 정결함, 순수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배교하지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마음이 쏠리는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가짜 예수에게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 자입니다.
그래서 사탄도 오직 한 신랑 만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이런 아름다운 여자를 자기 신부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바로, 블레셋의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창 12:15, 창 20:2)
[창세기 12:15]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창세기 20: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부감이 되어가면 더 많은 유혹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뻐지면 많은 남자들이 따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이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신부가 되고자 애를 쓰는 단계에서 다른 신랑을 만날 수 있으므로 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단 신천지에 넘어간 자들은 대체로 예수님에 대하여 열심을 가진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하는 연인을 찾기 원하면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이라“고 조언해 줍니다.
장막은 오늘날 교회입니다. 목자들이 양을 먹이는 그들에게는 장막이 쳐져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장막 안이라 하지 않고 곁이라고 했을까요? 그들 장막 안이라는 것은 그들의 신부가 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4: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목자들과 다른 장막을 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님이 신부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 위에 장막을 쳐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
그러므로 장막 곁은 임재가 있는 교회, 성령의 역사가 있는 교회에 딱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자에게 장막을 치실 것입니다. 여기가 그의 지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침방이 되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솔로몬의 목장에서 양들을 치는 목자들입니다. 오늘날 주의 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솔로몬이 아닌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들을 신랑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또한 주의 종들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의 목장에서 양들을 돌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염소 새끼“(히, 게디이야)는 꼭 염소 새끼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하면 양과 염소 다 포함되는 것과 같습니다.
새끼 염소를 여성형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신부가 되고자 하는 소자, 작은 자들일 것입니다. 아직 신부감이 되지 않은 단장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작은 누이들입니다 (아 8:8)
어쩌면 그들은 성숙한 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소외되고 있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작은 누이들을 챙기십니다 (마 18:6, 10)
이런 자들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부감으로 자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술람미 여인도 이런 자들을 돌보고 먹이고 있습니다.
[아가 6: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아가 8: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예수님도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돌보라,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라고 하셨습니다.
염소 새끼와 같은 작은 자들을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먹이고 있으면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남들이 인정해 주는 일, 돈과 권세가 있는 큰 자들과 항상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염소 새끼를 먹이고 있을 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만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렇게 작은 자에게, 작은 것에 충성할 때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도 주님은 보고 계심을 믿습니까?
교회공동체 속에서 구석 구석 작은 것들을 챙겨주는 그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앞에서 눈에 띄는 설교를 하지 않아도, 지휘를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는 것이 기쁜 일이지만 가장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어쩔거나, 아무리 설교를 해도 그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어쩔거나, 심하면 설교를 듣고 넘어지는 자가 있지 않을까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바울도 가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앞으로 설교를 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동성애자가 있을 때 말씀대로 설교를 하면 그들은 설교를 통해서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완견을 많이 키우는데, 개를 개라고 하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말씀이 나온 김에 드리는 말씀인데, 개는 개입니다. 개가 사람이 아닙니다. 요즘 개가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인줄 압니다. 반대현상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개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 생일도 챙겨주고, 장례식도 해주고, 심하면 유산까지 물려준다네요~~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 돈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세요.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많이 맡은 자에게 더 많은 열매를 요구하실 것입니다(눅 12:48). 그러므로 잘 드러나지 않는 염소 새끼를 먹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자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은 주연을 맡은 자에게 모든 포코스가 맞추어져 있지만, 교회에는 모두가 주연인 것입니다. 조명도, 음향도, 청소도, 설거지도, 전도지 하나 돌리는 자도 모두 주인공입니다. 천국의 행위록에 그가 기록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인기 연예 스타가 되면 안됩니다. 자기가 영광 다 받아 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눅 17:10) 이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