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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회복을 꿈꾸는 영혼들에게 띄우는 편지(통권 73호)
예 수 사 랑 • 가 족 사 랑
11권 9호 2010. 11. 1. Daum Cafe: 가족치유상담센터
아버님의 천국여행
제주도 여행 중에 아버님이 쓰려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함께 살고 있던 동생이 아버님이 쓰려지신 후에 119를 불러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결국 깨어나지를 못하고 천국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때 저는 아내와 함께 결혼 25주년을 맞아서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화요일(19일)에 제주도로 출발해서 3일(21일)째 되는 날 최남단의 섬인 마라도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동생으로부터 비보를 듣고 나서 멍해졌습니다.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제주공항으로 와서 낮 12시 25분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공항리무진 버스로 남양주 집에 들렸다가 우리 부부는 아들 은섭이와 함께 아버님이 계시는 상주성모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오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아버님의 영정사진 앞에 무릎꿇고 앉아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올해 춘추가 여든이신 아버님이 떠나셨으니 얼마나 아쉬움이 남는지요.
한 평생 농부로 농사일을 하셨던 아버님은 소천하신 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일을 가셨다가 오셔서 아침식사를 하신 후에 잠깐 쉬셨다가 다시 일을 가시려고 준비하는 동안에 쓰려지셨습니다. 이것이 먼 길을 가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여행 이틀째 밤에 저는 한 숨도 잠을 자지 못해서 낮에 커피를 몇 잔 마셨고 앞으로 여러 가지 염려가 있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최근에 종종 불면의 시간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한 잠도 자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지내놓고 보니까 그것이 아버님의 임종의 징조였습니다.
올 추석 전에 아버님의 눈이 좋지 않아서 백내장 수술도 했고 약해진 청력을 위해 보청기도 새로 해서 잘 들려서 매우 좋아하셨는데 아버님은 갑자기 한 마디 말씀도 없이 이렇게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아버님은 올 해 3월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가족도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아버님의 신앙을 권면했고 권사님이신 어머니도 많이 신앙을 권면했지만 조상을 섬기는 일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갖고서 당신의 고집을 꺾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 해 설날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에 자녀들이 어머님의 평생소원인 예수님 영접을 아버님에게 간곡하게 권면했습니다. 아버님은 이제 결단을 하시고 올해 3월부터 교회를 나가시면서 행복해하셨는데 너무나 아쉽게 떠나셨습니다.
아버님의 영혼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해왔던 우리 가족은 아버님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고 모든 욕심과 기대를 내려놓고 감사하면서 남은 생애를 건강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은 달랐던 것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버님이 이 땅에서 하실 일을 모두 마치셨다고 생각하셨는지 갑자기 아버님의 영혼을 이 땅에서 천국으로 옮기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좋은 가을 일기에 고통이 없이 천국으로 귀천을 했으니 고종명을 하신 것이지만 자녀들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아쉬움이 남습니다.
입관을 할 때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버님의 육신의 몸은 너무나 가벼웠습니다. 아버님은 너무 많이 마르셨지요. 아버님은 몇 해 전부터는 식사의 양이 눈에 띄게 많이 줄었습니다. 말이 없으신 아버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입관예배를 집전하는 목사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너무나 열심히 사셨던 아버님을 천국에서 만날 시간을 소망하면서 주님의 긍휼과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가자는 말씀이셨습니다.
막상 아버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리면서 떠오르는 것은 아버님에게 불효했던 일들만이 생각이 났습니다. 자녀들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핸드폰을 사 드렸지만 외로운 아버님에게 충분히 문안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은 늘 자녀들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데 지난 추석 때는 진료차 용인에 사는 형님 댁에 일찍 오시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나서 매우 행복했습니다. 아버님은 사회생활에서는 인정도 많고 유머도 있으신 분인데 자식들과 개인적으로 깊은 정을 많이 나누진 못했습니다. 특히 형제들 중에 저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내면 속에는 자녀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자녀들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다섯 아들들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가 모두 채워지는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에서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는 아들들의 가정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도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실망감이 술을 한두 잔 드시고 난 후에 원망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원망은 자녀들을 향한 기대감이 많았는데 그것을 채우지 못한 자식들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저는 개인적으로 아버님이 세상적인 기대를 많이 했던 아들이었는데 목양의 길을 가면서 아버님의 기대를 많이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제주도를 여행을 떠나기 전인 19일(화) 오전에 한 번 통화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22일(토)에 발인예배를 드리고 상주시내에 있는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최근에는 많이 마르셨지만 원래 기골이 건장하셔서 유골이 많았습니다. 아버님의 유골을 분쇄해서 유골함에 넣고 아버님이 만들어놓으신 가족납골당에 안장을 했습니다. 하관예배를 집례하신 박목사님은 취토대신에 유골함에 손을 얹고 가족들과 친지들이 마지막 인사를 고인에게 하도록 하셔서 저는 그 동안 아버님 생전에 못해드린 것들의 용서를 빌고 천국에서 만날 때까지 주님 품에 안식하도록 마지막 인사를 드렸습니다.
유품을 정리했습니다. 아버님은 옷이 많이 있었지만 거의 입지 않고 몇 가지만 늘 입고 다니셨습니다. 알뜰하게 모은 돈을 저축한 통장도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정말 알뜰하게 사셔서 논밭에서 곡식 한 알도 그냥 버리지 않고 주워 모았던 분입니다. 늘 낡은 작업복을 입고 새벽 일찍 부터 저녁 늦게 까지 일하면서 보낸 한 평생이셨습니다. 농작물을 수확하면 그것을 늘 기쁨으로 자녀들에게 보내주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표현했던 아버님이셨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농사일을 하느라고 중퇴를 했는데 그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5일장 마다 만나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알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너무나 남습니다. 좀 더 여유있게 감사하면서 사시고 한 평생 매여 있던 일에서 벗어나 일을 즐기면서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입니다. 일을 하시다가 아버님은 한 줌의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아버님은 시골에 사시던 친구들에 비해서 여행도 많이 하셨습니다. 미국 여행도 하셨고 동남아 여행도 하셨고 중국 여행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한 땅의 이곳 저곳을 많이 다니셨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평생을 일을 하시다가 가셨으니 일없이 무료하게 노년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아버님의 생애는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돈을 빌리지 않고 남에게 나눠주고 빌려주면서 사셨으니까 그것도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인생말년에 예수님 영접하고 주님의 품에 안겼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아버님은 오후 다섯 시에 부름받은 포도원의 농부였습니다. 좀 더 일찍 예수님 믿으셔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시고 주님께 감사함으로 사셨더라면 아버님의 지상의 생애는 더욱 행복했을 것 같은데 이것도 결국은 우리들의 바람일 뿐이지요. 세상적인 잣대로만 자녀들을 바라보지 않고 힘든 자녀들에게 용기를 주었더라면 좀 더 자녀들과의 관계도 행복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아버님의 인생을 보면서 우리 인생은 역시 미완성 교향곡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완성된 교향곡을 만들고 싶지만 우리 인생 자체가 미완성의 교향곡이고 그래서 미련이 남는지 모릅니다. 옛시조가 떠오릅니다. "나무 고요히 머물려 해도 바람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코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
아버님은 먼 길을 떠나셨지만 아버님에 대한 추억은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어머님이 혼자 남았습니다. 몇 해 전부터 고향에 갈 때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고향에 갈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제 아버님이 먼저 가시고 어머님만 남았습니다. 몇몇 지인들이 남아계신 어머님에게 잘 해드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언젠가는 어머님도 천국에 가신 아버님에게 돌아가실 것입니다. 우리도 머지않아 아버님 계신 천국으로 가게 되겠지요.
아버님, 사랑합니다. 천국에 뵐 때까지 주님 품안에서 행복하게 안식하세요.
*** 김영근목사<예수사랑, 가족사랑 발행인> ***
2010년 11월 가족치유회복중보기도
산야가 단풍으로 붉게 물이 들어갑니다. 아버님의 장례 때문에 3박 4일 일정으로 출발한 제주도여행에서 일찍 돌아왔지만 제주도 산야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관광지마다 잘 정비되어있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행복해보였습니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확여행을 온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최근에 어떤 선교단체에서 몇몇 절에서 실시한 땅밟기로 인해서 비난의 여론이 많습니다. 신앙인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독교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은 우리들의 사랑과 섬김의 대상입니다. 우리 주변의 가정과 이웃과 북한 동포를 향한 우리의 중보기도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1. 기도시간
가족중보기도는 매일 오전 6시, 낮 12시, 저녁 9시에 개인이나 혹은 그룹별로 1회 10분 이상씩 하면 좋습니다. 시간 여건상 하루 세 번이 불편하면 편리한 시간에 한두 번을 선택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은 10분 이상씩 하기를 권면합니다.
2. 중보기도참여자
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기를 원하는 누구나(개인, 교회, 기관별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가정의 치유와 회복을 기도하기를 원하는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3. 기도의 대상
기도참여자가 살고 있는 <시,군,구>에 있는 가정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는 경기도 남양주에 살고 있어서 저의 기도대상은 <남양주시>의 가정들입니다.
4. 기도의 제목
1) 일반기도제목
첫째, 가족구성원들의 상한 마음을 건강한 마음으로 변화시켜주옵소서!
둘째, 거절의 아픔을 겪는 가족들이 자신을 수용하시는 예수님을 영접케 하소서!
셋째,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가족 안에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넷째,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살게 하소서!
다섯째, 가족의 모든 식구들의 생각이 성경적인 생각으로 바꿔지게 하소서!
여섯째, 가족들의 언어가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축복의 언어로 바뀌게 하소서!
일곱째, 가정의 신맛(미움, 정죄)이 단맛(사랑, 격려)으로 바뀌게 하소서!
여덟째, 우리들의 이웃을 향한 적대감이 환대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하소서!
아홉째, 성도들의 바리새인의 마음(교만)이 세리의 마음(겸손)으로 변하게 하소서!
열 번째, 가족식구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떠나가고 주님의 평강이 임하게 하옵소서!
열한 번째, 가족식구들이 사탄과 과거와 세상과 탐욕의 묶임에서 해방되게 하소서!
열두 번째, 가족식구들이 예수님처럼 상처를 경험한 진정한 치유자로 살게 하소서!
2) 특별기도제목
첫째, G20 모임이 지구촌 위에 경제적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희망이 되게 하소서!
둘째, 알콜중독, 성폭행, 음란, 마약 등으로 고통을 겪는 가정식구들을 치유하소서!
셋째, 지구촌의 환경재앙과 영토분쟁, 인권유린에서 모든 가정들을 보호하소서!
넷째, 북한 땅의 동포들이 독재와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신앙의 자유를 주소서!
김영근의 요즘생각1
칠레 광부들의 승리이야기
칠레는 남미의 대서양쪽에 있는 매우 길쭉한 나라다. 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이고 동시에 한국과는 FTA를 맺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칠레가 전 세계 사람들을 열광시킨 사건이 바로 69일 만에 무너진 갱도 속에 갇힌 칠레 광부들의 구조사건이다. 전 세계는 한 마음이 되어 칠레 광부 33명 모두가 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기도했었다.
이들은 모두가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69일 만에 광명의 세계로 나와서 이들은 진정 인류의 희망이 되었다. 인류 역사에 기록될만한 22시간의 휴먼 리얼리티 드라마는 감동의 눈물을 선사하며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고 지금도 짜릿한 전율이 이어지고 있다. 광부들이 나를 버리고 우리로 하나되어 죽음의 절망을 삶의 희망으로 승화시켜서 전 세계인류를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로 하나 되게 했다. 이들이 보여준 믿음과 의지, 협력과 희망은 비극을 감동적 승리와 환희로 바꿨다.
칠레의 광부들은 우리 세대의 진정한 영웅이 되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이 기독인들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건강한 양들 99마리를 들판에 남겨두고 다니셨다. 어떻게 보면 그 묻혀버린 갱도 속에 갇혀있던 광부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시대의 잃어버린 귀한 어린 양이다. 전 세계 사람은 그 생명들의 생환을 위해서 관심과 사랑을 모았고 기도했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전 세계가 하나되는 시간이었다.
이들에게 처음 17일 동안은 절망과 죽음 그 자체였다. 자신들의 생존소식이 알려지지 않았고 외부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갈등도 있었고 고통도 있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있었지만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들은 하나가 되었다. 어두운 지하 갱도속에서 그들은 일생생활을 시작했다. 휴식하고 잠자고 일하면서 생활했다. 처음에 얼마 동안은 가장 적은 양식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살아야 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삶의 희망을 불살랐고 마침내 승리했던 칠레광부들, 이 시대의 작은 영웅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사랑의 마음들이 이 지구촌 위에 가득 찼으면 좋겠다. 여전히 이 지구촌은 가난과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전쟁과 폭력정치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죽어가고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이 행복과 희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작은 소망이기도 하다. 구조된 칠레의 광부들의 가족과 남은 생애 가운데 주님의 선하신 축복과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드린다.
김영근의 요즘생각 2
닉부이치치의 삶을 보면서
최근에 절망 때문에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감동을 받게 됩니다. 남양주시 호평동에 있는 한 교회에서 찬양모임이 있었는데 강사로 왔던 강찬 전도사가 닉부이치치를 소개하면서 감동을 나누었습니다. 닉부이치치의 삶을 잠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시대를 사는 누구든 크고 작은 고통을 겪을 수 있다. 다만 그 고통을 혼자 이겨내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아무 말 없이 껴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기적을, 자신에겐 축복을 선물하는 일이다."(닉 부이치치)
닉부이치치는 허그를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힘든 사람을 껴안아주는 것은 너무나 귀합니다. 우리도 열심히 껴안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닉은 팔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안아주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먼저 슬픔당한 사람이나 낙심한 사람을 안아줄 때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들고 어려움 당할 때에 주변 사람의 팔에 안겨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부이치치는 세르비아 출신 목회자인 아버지(보리스)와 간호사였던 어머니(두쉬카)의 전폭적 지원과 사랑 아래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일반 학교를 다녔고, 지금까지 전 세계 35개국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껴안으며 희망을 전파해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지난 2008년 <더블유(W)>(MBC)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된 닉 부이치치(Nick Vujicic)는 그의 첫 저서인 「닉 부이치치의 허그(Hug)」 발간을 기념해 서울 연세대에서 열린 '닉 부이치치 초청 열린 채플' 행사에 참석해 강연을 했습니다. 이날 강연에는 닉 부이치치를 보기 위해 장애인, 학생, 교수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그 인기를 실감했습니다. 테이블 위에 자리 잡은 소소한 옷차림의 닉은 강연 시작에 앞서 "안녕하세요?!"라며 한국어로 인사말을 건네 청중들에 큰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닉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것은 그의 부모님입니다. 닉이 출생했을 때에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긍휼을 믿으면서 인내하고 아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좋은 부모님을 만난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요.
닉의 강연은 35개국 강연여행을 하던 중 만난 인도 뭄바이의 한 매춘부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 여성은 시골에서 10세 때 일명 홍등가로 팔려갔으며, 1만여 명에 가까운 남성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그곳에서 두 번의 임신을 했고 그중 한 아이를 잃었습니다. 닉이 에이즈에 걸려 쫓겨난 그녀를 만난 건 어느 한 자선단체에 의해서였습니다. 닉은 청중들에게 "여러분들이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닉은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난 아무 말 없이 껴안아 주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닉 부이치치의 허그(Hug)」의 제목처럼 그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은 바로 허그(Hug)입니다. 그렇지요. 우리의 허그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우리도 열심히 허그를 합시다. 허그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가장 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닉은 긍정적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 세 가지로 '가치ㆍ목적ㆍ용기' 등을 제시합니다. 평소 장난치는 것을 좋아한다는 닉은 몇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후 자신이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 가치(돈ㆍ명예ㆍ학벌ㆍ외모 등)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닉은 “나는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났지만 나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높게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짐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며 “여러분들은 나와 더불어 '가치'있는 존재들이니 소망을 갖고 긍정적으로 살아보라”고 조언하며 첫 번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어 두 번째 이유는 '목적'이었습니다. “내게 있어 단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이 있어 나를 만드셨다. 팔 다리가 없게 만드신 것은 다 그 계획에 의해서다”라며 “결국에는 완벽한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갈 우리들이기에 슬퍼하지 말아라”라고 전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용기'였습니다. 닉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절망감에 빠져 「성경」을 등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지내던 때, 한 교회 강연에서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팔 다리가 없는 사람은 나뿐이라 생각했고, 또 날 위로해 줄 사람도 없다고 여겼다”며 “하지만 그날 교회에는 팔 다리 없는 나와 같은 모습의 '대니얼'을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강단에 팔 다리 없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선 장면에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느 새 나도 흐느끼고 있었다”며 “우린 서로 말 없이 껴안았다”고 전했습니다.
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적(팔 다리를 주는)을 일으켜 주지는 않았지만 '대니얼'이라는 축복을 선물해 주셨다며, “여러분들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당신이 기적을 만들어줄 수는 있다”고 말하고 '용기'를 내 적극적ㆍ긍정적으로 살아가라고 조언했습니다.
세 가지 이유를 다 밝힌 닉은 테이블 위에 엎드린 후 청중들에게 "내가 미끄러졌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못 일어날거라 생각합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청중들의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아무 말없이 테이블 위의 「성경」을 향해 몸을 움직인 그는「성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는 듯하더니 심호흡을 길게 한 후 스프링처럼 몸을 튕겨 일어섰습니다.
우렁찬 박수가 이어지자 닉은 “봤습니까? 내가 「성경」을 믿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런 시도는 꿈에도 못했을 것이다”라며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난 겁도 없이 일어서기를 계속 시도했습니다. 결국 난 아무 도움 없이 서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소망과 믿음을 갖고 도전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한 닉은 강연의 끝에 "여러분들이 고통을 겪으며 절망에 빠져있습니까? 그렇다면 혼자 고민하고 외로워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에 사랑을 베풀며 사십시오"라며 "이는 하나님을 향해 가는 '소망'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으십시오"라고 말해 서로 베푸는 삶을 설파했습니다.
서로 자신의 고통이 크다고 말하는 현 시대에 팔 다리 없는 닉 부이치치의 책과 강연을 접하니 절로 '희망'이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은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켜주지 않지만, 주위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말없이 허그(Hug)할 수 있는 마음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직장동료, 가족, 친구, 연인 등 주위사람에게 손을 뻗어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고통과 고민들을 나눠 갖고,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켜 보는 것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귀한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적은 만들어 주는 것이다”라는 닉 부이치치의 의미있는 말을 되새겨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영근의 요즘생각 3
추억의 경춘선을 타고 강촌을 가다
한 마음교회의 등산팀 멤버들과 함께 경춘선을 타고 강촌을 향했습니다. 남성 10명, 여성 3명, 아이들 9명 이렇게 22명이 되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열심히 사는 분들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성실하게 한 주간을 보내다가 토요일에 등산모임에 참석했네요. 토요일에 출발하는 오랜만의 등산모임이 참으로 기대가 되었습니다. 평내호평역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경춘선이 전철로 개통되기에 평내호평역은 새로운 역으로 단장을 했습니다. 가는 길은 입석이고 오는 길은 좌석입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내가 사는 금곡동에서 출발해서 평내호평역까지 갔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힘이 좀 들기는 하지만 이제는 제법 자전거여행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건강에도 좋고 타다보면 이력이 붙어서 오르막을 올라가는 힘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기차는 서울에 있는 어떤 유치원에서 가족여행을 즐기는 분들로 좌석이 꽉 차있었습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칸입구에는 라틴계통의 사람들이 제법 유쾌하게(시끄럽게?) 큰 목소리로 담소하며 여행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함께 가는 남성분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늘 대화는 사람들을 유쾌하고 기분좋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업하는 이야기, 교회를 섬기는 이야기, 옛날이야기,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 등으로 이야기 주제도 다양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강촌역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김집사님의 아들을 좋은 파트너로 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유치원에서 공동으로 가족여행을 떠난 팀들도 강촌역에서 내렸습니다. 우리들은 열심히 걸어가는데 이 팀들은 자전거로 이동을 했습니다. 여성들은 혼자 탔고 남성들은 뒤에 아이를 태우고 탔습니다. 제법 오르막길이 많이 있어서 자전거 아버지들은 아버지 노릇하느라고 꽤나 힘이 들어했습니다. 혼자 오르기도 쉽지 않은 길인데 뒤에 아이까지 태우고 패달을 밟아야 하니까 힘이 들 수밖에 없지요. 평소에 운동을 했던 분들은 할 만 했지만 운동이 부족한 분들은 매우 힘들어보였습니다. 그래도 그들 모두는 행복해 보였습니다. 두 아들이 청년이 된 나의 경험을 비추어보면 아이들은 역시 키울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조금 올라가니 구곡폭포가 있습니다. 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높은 골짜기 아래로 내리치는 폭포의 모습이 장관입니다. 많은 등산객들이 흘린 땀을 식히기에 폭포는 충분히 시원했습니다. 사람들이 폭포를 보려고 계단에서 줄을 지어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습니다. 구곡폭포에서 내려와서 오늘의 목적지인 문배마을을 향했습니다.
문배마을로 불리는 이곳에 예전에는 화전민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의 유래는 아마 이곳에 문배라고 불리는 돌배나무가 있어서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고 또한 산등성이에서 보면 마을모양이 꼭 배처럼 생겨서 문배마을로 이름이 부쳐졌다고 합니다. 몇몇 가정들은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면서 살았는데 등산객들이 많이 오게 되니까 그 화전민들은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음식점을 열어서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배마을은 작은 관광지로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식당옆에는 채소밭이 잘 가꾸어져 있었고 등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벤치가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분수가 있는 작은 산정호수는 이 마을의 아름다운 정취를 북돋워줍니다. 토요일이어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이곳을 찾았습니다. 찾았던 사람들의 얼굴모습이 모두가 행복해보였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작은 연못에 떠있는 연꽃(혹은 수중식물)이 보기가 참으로 싱그럽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생기를 줍니다. 등산길에서 만난 작은 식물 한포기도 그렇게 정겹고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연을 벗삼아 흙을 가까이 하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지고 삶이 고단해질 때에 청산에 살려고 깊은 산중을 찾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한적한 자연에 와서 자연과 벗삼아 인생을 마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없는 자연은 을씨년스럽게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자연 속에 인간들끼리 어울림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인간들끼리 관계가 어려워 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서로가 마음을 열고 살아가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회복이 됩니다. .
함께 등반하는 몇몇 교우들이 호두의 껍질을 까고 있습니다. 이곳 호두는 둥그런 재래식 호두가 아니라 타원형의 호두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호두를 까는 어른들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호두까는 모습을 보니까 마냥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우리 고향집도 큰 호두나무가 있어서 가을철에 호두를 따다가 가마니를 덮어두면 열흘 정도가 지나면 껍질이 물러져서 쉽게 벗겨집니다. 이 벗겨진 호두를 큰 바구니에 담아 냇가에 씻은 다음에 모으면 여러 바구니에 가득찹니다. 돌이켜보면 그 때가 참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시골집도 도시형으로 바뀌었고 그 밭도 다른 사람에게 팔렸는데 언젠가 그 밭에 가보니까 호두나무는 더 이상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점심식사는 일품이었습니다. 메뉴는 한 끼에 육천 원인 산채비빔밥이었습니다. 너무 맛이 좋아서 많은 분들이 추가해서 음식을 더 먹었습니다. 맛이 있는 이유는 자연 속에서 먹는 맛이고 산을 올라와서 먹는 맛이고 맑은 공기 속에는 먹는 맛이기에 맛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 점심식사 후에 일행들은 족구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족구장을 빼앗기니까 다른 놀거리를 제공하라고 어른들에게 아우성입니다. 교인들끼리 운동을 통해서 나누는 친교가 행복해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족구를 하면서 최선을 다했는데 시합을 하면 한국사람 특유의 경쟁심이 발동하는 것같습니다. 언제 보아도 성도들끼리의 교제는 아름답습니다.
오는 열차편은 강촌역에서 오후 3시 35분 기차여서 부지런히 내려왔습니다. 오후 2시 정도 산에서 내려와야 여유가 있는데 거의 2시 15분 정도에서 산에서 출발을 했으니까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습니다. 여성분들과 어린이들은 강촌역까지 먼저 차를 태워 보냈습니다. 내려오면서 편의점에 들러 빙과로 입을 즐겁게 했습니다. 강촌에 오니까 벌써 많은 분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추억의 경춘선이 될 것같습니다.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불현듯 과거에 대학시절에 겨울철에 남이섬에 가서 고대(高大)영자신문사 동료기자들끼리 MT를 했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의 동료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국토순례여행(33) - 1월 22일
아내와 함께 보낸 하루
가정은 베이스캠프와 같은 곳입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등산객들은 산 정상에 오르기 전에 7천고지 정도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정상정복을 위해서 몸을 추스리고 모든 것을 보충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 베이스캠프가 튼튼해야 정상정복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곳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지 못하고 몸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면 결국 히말라야 등정에 실패합니다.
사람들은 가정에서 충분히 사랑과 필요한 자양분과 근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은 베이스캠프입니다. 직장인들도 배우자들의 사랑을 제대로 공급받아야 직장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관계를 회복해야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갖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베이스캠프에 돌아왔습니다. 빨래도 하고 그 동안 미루어왔던 일도 했습니다. 오랜만의 휴식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점심때에는 장신대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김영동교수 부부와 유해룡교수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아내가 활동하는 남양주시의 NGO모임의 한 회원이 주관하는 세미나에 참석을 했습니다.
저녁에는 남양주시 호평동에서 공연되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뮤지컬공연을 관람했습니다. 방학이어서 많은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과 함께 공연에 참여했습니다. 남양주시립합창단 단원들이 하는 공연인데 꽤나 수준급의 공연이었습니다. 뮤지컬로 진행되는데 참여하는 배우들의 가창 실력도 상당했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여러 번 영화로 본 것입니다. 이 뮤지컬의 내용도 가족 사랑이 주제입니다. 사랑은 율법이 아니라 친밀감이고 배려이고 관심기울이기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했습니다. 모든 가정들에게 이러한 친밀감, 배려와 관심기울이기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을 것입니다.
저녁에는 아내와 함께 못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저녁 늦게 둘째 아들 은섭이가 왔습니다. 내일 함께 전남 고흥까지 가서 그 곳에서 함께 국토순례여행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에 가정에서 포근한 잠을 잤습니다.
"주님, 좋은 가정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땅의 모든 가정들과 그 가정의 식구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남양주에 있는 모든 가정들과 그 식구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여주옵소서!"
국토순례여행(34) - 1월 23일
35년 만에 아들과 함께 찾은 소록도
아침을 먹고 아들과 함께 동서울터미널에서 전남순천행 버스를 탔습니다. 이 고속버스는 천안논산간의 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거쳐서 순천까지 갔습니다. 겨울철이지만 따스한 햇빛이 비치는 고속버스를 타고 아들과 함께 갖는 여행길이 유쾌했습니다. 순천에서 내려서 고흥을 거쳐서 녹동항까지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곳에서 숙소로 사용할 순서노회 고흥시찰회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안내하는 목사님과 함께 소록도까지 들어갔습니다. 35년 전인 대학 1학년 때에 이곳에 왔을 때는 배를 타고 건넜는데 이제는 소록대교가 건설되어서 자동차로 소록도까지 들어갔습니다. 꿈 많던 시절에 함께 비전을 나누었던 겨자씨 형제단 형제들과 함께 토요일 날 녹동항의 여인숙에서 하루를 머물고 주일 아침 배를 타고 소록도로 갔었습니다. 배를 타고 처음에 소록도에 들어갔을 때에는 오리와 닭을 가지고 배를 탔던 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한센씨병 환자인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그들이 한센씨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주일 오전 예배는 직원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그곳 주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예배를 인도하던 전도사님도 이곳에 살던 한센씨병 환자의 자녀였습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오후 예배가 흔치 않았는데 이곳 분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밤에 걷기가 불편해서 오후에 일찍 예배를 드렸습니다.
피아노를 반주하는 자매님의 손은 손가락 마디가 몇 개만 남아있는 망가진 손이었는데 천상의 곡을 연주했습니다. 마음속에 얼마나 큰 감동이 되는지요. 그냥 감사했습니다. 함께 갔던 우리 형제들이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의 찬송가로 특송 했는데 참으로 뜨거운 박수를 받았습니다. 35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이제 이곳을 50대 중반에 대학 4학년이 되는 둘째 아들과 함께 다시 찾았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소록도 중앙공원에 있는 기념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병원 설립당시에 처음으로 사용했던 의료도구들을 보았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 원장이 이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는 높은 동상을 세워 이곳에 있는 원생들로 하여금 그의 공적에 대해서 경배를 드리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소록도에서 살던 한센씨병 환자들은 그 억압적인 원장에 대하여 투쟁을 했는데 투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후에는 일본사람들이 전시물자공출로 동상의 윗부분을 징발해갔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한센씨병으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혹독한 노동과 억압을 행함으로 더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의 악한 행동을 생각해보면 더욱 몸서리쳐집니다. 이곳 소록도 공원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현재는 소록도를 거쳐서 거금도로 가는 연육교가 건설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종종 과거의 건물들, 지금은 사용하지는 않는 버려진 체로 남겨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 건물 속에 살았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한과 눈물을 머금고 이곳에 살다가 천국을 향하여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육지에 남겨둔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과 목마름 속에서 살았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도 있었지요.
이곳에 한센씨병환자이면서 시인이었던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가 있습니다. 한하운은 시인의 영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센씨병 환자로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한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나병환자의 고통스러운 삶을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켰습니다.
이곳 소록도는 많은 헌신과 희생과 사랑의 사연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이곳에서 뼈를 묻었던 몇몇 서양출신의 수녀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비록 이곳은 국립병원이지만 이곳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헌신했던 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전에 방문했던 소록도 중앙교회에 가보았습니다. 35년 전에 우리 일행이 특송했던 교회인데 외형은 똑 같았습니다. 우리는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어서 앞에서 기념사진만을 촬영했습니다.
저녁 6시가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 시간이었기에 아들과 함께 열심히 소록대교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소록도의 해변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비록 차가운 저녁바람이 불었지만 시원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록도는 너무나 아름다운 섬입니다. 주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자연은 한센씨병이라는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도 새 힘을 공급해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록대교에 도달했습니다. 소록대교를 걸어가면서 한국 사람들의 토목기술은 과히 세계적인 것으로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현수교인데 줄이 어떤 줄인가를 확인해보았습니다. 줄은 굵은 철사줄 같은 줄이 아니라 굵은 쇠막대기와 같은 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일몰을 감상하는 기쁨도 가졌습니다. 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리를 건넌 후에 아들 은섭이는 산속에 있는 지름길로 녹동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곧 녹동항구가 나왔습니다. 저녁시간에 녹동읍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바다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수산물을 판매하는 시장에서 열심히 생선을 파는 사람들의 삶의 열정을 느끼면서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이 숙소는 어떤 장로님이 순서노회의 고흥시찰내에 있는 섬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을 위한 숙소로 기증됐습니다. 그래서 이 숙소는 육지에 나왔다가 시간이 늦어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갈 수 없는 목회자들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고흥중앙교회를 섬기는 장의성목사님부부가 저희 부자에게 정성껏 식사를 대접해주셨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흥시찰회가 속한 순서노회는 시(행정단위)가 없는 농어촌지역의 노회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경제적으로 가장 여유가 없는 노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지역에서 신실하게 목양을 감당하는 장목사님의 사역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장목사님은 비록 약한 순서노회이지만 지역 교회들이 힘을 모와 북한지역에 우물 파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염된 물을 먹어서 건강이 열악한 북한 동포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북한지역우물파기 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순서노회 고흥시찰내의 교회들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여행, 참으로 재미있는 여행입니다. 아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참 행복했습니다. 아들 은섭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도록 기도했습니다. 귀한 아들을 주신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로마서 8장을 읽고 찬송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님, 아들 은섭이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주님, 순서노회의 고흥시찰내 모든 교회에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주님, 고흥중앙교회와 장의성목사님의 목양사역에
주님의 인도와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국토순례여행(35) - 1월 24일
거금도의 바닷가를 거닐면서
고흥중앙교회를 향해 가는 길에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초행길에 가는 길을 물었는데 그 분은 낯선 길손들을 위해서 터미널까지 트럭으로 태워주었습니다. 이 분은 가스배달과 가스관설치를 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고흥으로 가서 고흥중앙교회를 가는 길을 물었는데 어떤 부인은 자신도 그곳으로 간다고 하면서 교회 앞까지 안내해주었습니다. 길손을 위한 주민들의 친절함이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교회 앞에서는 교회학교 학생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회기념화보를 찍느라고 여념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어린이들은 진정한 꿈나무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 가운데 예수님의 생명으로 풍성케 되고 이 땅을 예수님의 비전과 희망으로 채울 꿈나무들입니다. 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수고를 참 많이 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통해서 이들 꿈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당회실에서 장의성목사님을 만나서 함께 담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도순서를 맡을 장로님이 들어오셔서 함께 담소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서 주일 오전예배를 정성껏 드렸습니다. 장목사님은 "말씀을 들을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참으로 감동이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주님의 종들이 복음을 현세의 욕심을 채우는 물질이나 영광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넉넉하게 물질의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는 것을 복음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로서 미국의 유명한 방송설교가이면서 부흥사였던 짐 베이커의 삶과 그의 감옥에서 회개함을 예화로 사용해서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진정한 자세가 무엇인가를 잠잠하게 말씀하셨는데 마음속에 큰 감화가 되었습니다. 또한 말씀을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사도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찔림을 받아서 회개했는데 스데반집사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돌로 쳐죽였습니다. 나도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를 겸손한 심정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또한 본인이 설교자로 교수로 어떻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하는 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점심식사는 모든 교우들이 쟁반에 음식을 담아서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식사당번들이 음식을 정갈스럽게 준비한 점심식사는 너무나 좋은 친교의 장이 되었습니다. 식사 후에 오후 1시 30분에 시작되는 오후예배시간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듣는 교우들이 진지하게 들으면서 반응해주셔서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행복했습니다. 몇몇 분들은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응답을 했습니다.
오후 예배 후에 아들과 함께 고흥에서 녹동항으로 와서 배를 타고 거금도로 향했습니다. 거금도는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서 약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선착장에서 내려서 신평이라는 다른 선착장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거금도 해변길을 아들과 함께 걷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늘 길을 갈 때마다 경험하는 것이지만 요즘 사람들은 주로 걷는 것보다는 차를 타는 것이 일상생활이기 때문에 걷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이곳 섬사람들도 보통 섬사람들의 삶과 비슷합니다. 집들이 있었고 농토가 있었습니다. 종종 가게도 눈에 띄었고요.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은 쓰레기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깨끗한 자연에 오염물질을 태우는 모습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기야 필자도 진해에서 교회를 섬기면서 환경을 정화한다고 쓰레기를 많이 태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환경을 정돈한다고 하면서 폐기물을 태웠으니까 오히려 환경유해물을 생산하고 말았지요. 오랜 만에 아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들 은섭이는 부자유친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빠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들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갈등을 겪고 있는 경우가 참 많은데 자신은 늘 아빠와 친밀한 대화를 나누어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말은 나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친해야 하는데 이것은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단절되어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은섭이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신평항까지 걸었습니다. 약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그 정도가 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길 가는 곳에 교회가 있어서 잠깐 멈추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교회는 언제 보아도 가장 좋은 곳이고 행복한 곳이고 친근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불려지는 찬송이 사람들의 심성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전파되는 말씀이 생명이 되어 영혼들을 살릴 것입니다. 아들 은섭이는 최근에 깨달았던 것을 몇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전에는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최선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전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주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공하는 경제학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섭이와 함께 하면서 아들의 귀한 깨달음을 격려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역은 다양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사용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섬에는 양파를 재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양파농장이 이곳과 저곳에 넓게 늘려있었습니다. 다마내기라고 불려지는 양파는 몸에 아주 유익한 완전식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파농장을 지나면서 오후 5시 30분에 녹동항으로 출항하는 연락선을 타려고 열심히 걸었습니다. 아들이 좀 뛰자고 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봉고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섰습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가기위해서 서두르는 줄 알고서 우리 앞에 차를 세워서 동승하도록 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신평항에 도착했습니다.
배 위에서 지는 일몰을 감상했습니다. 멀리 소록도와 거금도를 연결하는 다리 공사하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일몰을 감상하다보니 배가 녹동항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식사는 감자탕으로 했습니다. 숙소에 와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아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침구를 잘 폈습니다. 귀한 아들의 섬김에 감사했습니다. 로마서 12장 말씀을 중심으로 저녁 Q.T.를 나누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님, 이 집을 사용하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지혜와 평강을 주옵소서!
아들 은섭이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소서!“
국토순례여행(36) - 1월 25일
자랑스러운 나로호 우주발사대
은섭이가 성균관대 CCC 사랑방생활을 하면서 자취를 한 경험으로 아침식사를 빵과 시리얼로 맛있게 준비를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아침 식사를 남쪽지방 녹동에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커피믹스는 하나밖에 없어서 은섭이가 마시고 나는 한차를 마셨습니다. 짐을 꾸려서 우주발사대가 설치되어있는 나호로섬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교통편을 잘 몰라서 우선 도하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도하로 가는 길은 걷기에 아주 편한 길이었습니다. 약4km 정도를 걸어가니까 해안방조제가 나타나서 방조제위를 걸었습니다. 방조제 위를 걸으면서 오른 쪽에는 바다가 펼쳐졌고 왼쪽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도하까지는 먼 길이어서 중간에 버스를 타고 고흥까지 가서 나로호섬에 있는 축정항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이곳까지는 꽤 먼 거리였습니다. 오늘은 아들 은섭이와 삼일 째 함께 걸으면서 여행하는 중인데 은섭이는 오후 5:30분경에 서울로 가기로 스케줄을 잡아놓았습니다.
점심식사를 위해서 만두와 김밥을 사서 먹으면서 나로호섬까지 갔습니다. 가는 길에 오른쪽에는 남해의 아름다운 파도가 펼쳐졌고 섬 위의 풍경도 너무나 좋았습니다. 중간에 표두면이 나타났고 길두라는 곳을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이곳에는 고흥지역의 성자로 알려진 박석순목사님이 시무했던 길두교회가 있습니다. 박목사님은 월남에서 이곳 고흥에 정착을 해서 평생을 홀로 지내면서 많은 신앙의 후예들을 양육했습니다. 이 분이 자신의 몸을 주님의 제단에 드리면서 많은 신실한 주님의 종들을 교육시켰습니다. 너무나 귀한 분입니다. 신대원을 다닐 때에 이 분이 장신대 채플에 와서 설교를 했는데 그 당시 설교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모두가 어려웠을 때에 고등공민학교를 만들어서 후진을 양육시켰던 신실한 주님의 종입니다.
나로호섬에 도착했는데 월요일이어서 우주 박물관은 휴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주 박물관은 관람하지를 못했고 야외 전시장에 있는 발사대모형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우주발사연구가 진행되는 곳은 대부분이 통행금지구역이어서 멀찌감치 저곳에서 우주로켙 발사과정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해 여름에 처음으로 나로호 우주 로켙을 발사할 때에 온 국민은 뜨거운 관심 속에서 로켓발사를 카운트다운 했습니다. 국민들은 발사에 실패했을 때에 얼마나 실망했던지 모릅니다. 대기권에 로켓을 쏘아 올려 성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성공한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재시도가 되었지만 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곳에 와서 들어보니까 몇 개월 후에 또 로켙발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꼭 성공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우주 전시관이 설치된 광장의 앞바다는 너무나 맑은 청정해안입니다. 몽돌로 된 해수욕장이 있었습니다. 은섭이와 둘이서 해안을 거닐었는데 너무나 걷기에도 좋은 바닷가였습니다. 이번 여행길에 대부분의 해수욕장과 관광시설이 잘 보존되고 관리되어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은 그 만큼 삶의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종종 부모들이 자녀들과 함께 현장 학습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우주과학관이 휴관이어서 몹시도 아쉬워했습니다. 여기에서 축정항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8km 정도인데 아들과 함께 걷기로 했습니다. 축정항에서 오후 4시 10분 군내버스롤 타야했기에 2시간 정도 시간이 있기에 서둘러 걸으면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은섭이가 힘들 텐데 말없이 협조해주어서 감사했습니다. 아빠와 걷는 여행을 은섭이는 즐겼습니다. 중간 중간에 지름길로 가기를 원했지만 나는 그 길을 잘 모르면 오히려 힘들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길가에 경운기를 세워놓고 노부부가 함께 땔감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은섭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겨울철에 온 동네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했고 나무는 물론 땔감으로 가랑잎까지 긁어모았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행히 석탄과 석유와 가스를 사용해서 우리나라는 이렇게 산림녹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어촌마을의 특징은 마당이 좁다는 것입니다. 해안가의 경사진 곳에 집이 세워져있는 경우가 많아서 마당을 위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청정해안은 보기에도 너무나 좋았습니다. 축정항에 가까이 가니까 아이들의 한 무리가 놀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날씨인데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로 도회지로 떠난 농어촌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학생들의 한 무리가 노는 모습을 보니까 뿌듯했습니다.
축정항에 도착해서 오후 4시 10분 군내버스를 타고서 고흥까지 갔습니다. 고흥에서 은섭이는 서울 강남까지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고 나는 순천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서 순천에 있는 찜질방에 하루를 머물기로 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고흥중앙교회 여자 집사님을 한 분 만났는데 주일 오후예배 때에 필자가 전한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면서 간단한 음료수를 대접해서 맛있게 들면서 은섭이를 보냈습니다. 이 집사님의 아들이 호남신대학교의 신대원에 재학 중이면서 광주에서 교육전도사를 하면서 신학공부를 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순천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서 PC방에 가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논문심사를 작성했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진토리교회 인터넷 사역자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사역자집회는 국내의 사역자들과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선교사들이 인터넷으로 함께 참여하는 겨울수련회였습니다. 강영기목사님의 잘 준비된 주옥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는 이 집회에서 1월 26일인 내일저녁에 5분 메시지를 담당하게 되어있어서 조금은 긴장된 상태로 인테넷으로 전파되는 메시지를 경청했습니다.
순천에 나와서 역전근처에 있는 찜질방에서 하루를 머물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전 세계는 나의 교구다" 하면서 자신의 캐치 프레이즈를 삼았는데 나는 여행하면서 "전국의 찜질방은 나의 집이다" 하는 엉뚱한 캐치프레이즈를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찜질방 문화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찜질방은 여행객들이 값싸게 휴식과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서민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가족끼리 와서 휴식을 취하면서 식사도 하고 친구들끼리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종종 연인끼리 와서 사랑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서와 규율을 잘 지키는 것같아서 보기에도 좋았고 한국의 레저문화도 성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서 하루를 마감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한국의 우주개발을 축복해주세요.
많은 과학자들이 창조주인 주님을 알게 해주세요.
고흥지역과 순천지역의 모든 가정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주소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인터넷 진토리사역자집회가 은혜가운데 진행되게 하소서!"
<소록도에서 아들 은섭이와 함께>
*** 지난 겨울에 소록도에서 아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찍었다. 35년 전에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소록도를 갔는데 이제는 소록대교로 차를 타고 아들과 함께 건넜다. 오랜 세월의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흘러간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주님의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해보았다. ***
【가족치유상담센터이야기】
월간쪽지 예수사랑,가족사랑 2010년 11월호를 발행했습니다. 코스모스도 절정이고 단풍도 절정입니다. 저의 고향상주는 곶감만들기로 분주합니다. 요즘에는 걷기가 대세인데 그 중에 최고가 주님과 함께 걷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가는 여러분의 11월의 여행길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좋은 길 벗 김영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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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치유상담센터/대표: 김영근(010-3290-1007) 070-7648-3007
경기 남양주 금곡동776 신도브래뉴@102-1304호/ daum cafe: 가족치유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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