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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 삼계문중 원문보기 글쓴이: 守相(金海三溪)
정직한 사성강목과 병진보의 잘못된 오류
(사성강목을 정직하다고 한것은 저자인 송암 이노公 자신이 외가인 남평문씨의
족보를 잘 알수 없었다고 사실대로 고백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병진보의 발문과 그 내용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병진보의 족보
편찬 방식과 오류등 잘못된 부분을 지적 하고자 합니다.
1736년 순평부원군파 후손에 의하여 발행된 병진보는 외손인 송암 이노의 사성강목을 기초로하여 족보를 편찬 하였다는 것은 발행인 우징선조의 발문 내용으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5년전인 1731년 강성군파 후손에 의하여 이미 발행된 남평문씨 최초의 족보 신해보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산재한 일가 종친들의 가승보와 가전, 실기등 모든 자료를 수십년간 수집하고 모아서 기록하고 또한 고려사에 기록된 선조들의 행적을 발췌하여 기나긴 장고 끝에 남평문씨의 세보를 편찬 만천하에 밝혀 후손들에게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해보는 첫장에 보면 외손 송암 이노의 남평문씨 시조 탄강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1731년 신해보 발행당시에도 사성강목 또한 가지고 족보 기록에 참고는 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잘못되고 틀린부분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송암 이노 자신의 사성강목 서문에 “족보는 단지 횡문 분행하여 이름을 나열할 뿐이다, 사람들의 업적이 전해지지 않고 외가의 출신에 대해서도 고찰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직계(종계)를 중히 여기고 방친(방조)들을 모두 조사하기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1736년 순평부원군파 후손인 우징 선조의 병진보 발행은 사성강목을 따르지 않은 부분이 많았으며 오히려 1731년의 신해보를 인용하여 따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위는 2002년 진주 경상대학에서 사성강목 을 분석한 학술 내용 입니다>
송암 이노公의 사성강목중 남평문씨 족보편찬 방식은 자신의 외조인 휘 은의 직계조를 맨 앞에다 붙여놓고 벼슬등 행적을 서술한후 그다음에 형제들 이름을 쓰고 형제간의 서차가 확인된 곳에는 장子 차子를 분명하게 삽입하여 서차를 기록 하였으나 송암 자신이 남평문씨 족보에 있어서 형제간의 서차를 잘모르는 2세조와 4세조(유철,유필,후식)등의 부분은 서차를 알 수 있는 長子,次子를 기록하지 않고 그 형제들 이름만 옆에 표시를 하였습니다.
즉, 다시말하면 송암 이노의 족보 편찬 방식은 자신의 외조인 휘 은의 직계조를 중심으로 족보를 편찬한 것입니다.
*아래의 족보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동그라미 표시 長子,次子)
⤓
<사성강목 송암세보>
그러나 1731년 강성군파 후손에 의하여 발행된 신해보는 송암 이노公이 형제간의 서차를 잘몰라서 서차 기록을 하지 못하고 보류 하였던 4세조(유철,유필,후식) 부분을 가승과가전등 또다른 자료와 고려사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보완을 하고 바로잡아 서차를 정하여 작성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해보의 기록이 병진보 보다 훨신 세밀하고 정확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1736년의 병진보는 발문에서 보듯이 신해보와 을묘보, 그리고 고려사에도 휘 후식 선조가 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송암 이노의 사성강목 중에 잘몰라서 형제간의 서차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송암 이노의 사성강목을 왜곡하여 3세조 충숙공의 자행에 유철,유필,후식순으로 되어져 있다고 거짓으로 말 하면서 정사인 고려사를 무시하였을 뿐만아니라 또 다른 사성강목의 내용도 왜곡하여 기록하였고 해풍군 이기씨의 30년 공들인 매우 귀중한 남평문씨 족보도 잃어버렸다고 하였습
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와 형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1.또 다른 사실의 왜곡.
사성강목의 순평부원군 휘 유필(惟弼)란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록대부판삼사사순평부원군유필
차자는 윤실로 중문지후이다
o윤실의 증손으로 순평군 달한이 있다
달한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계종은 숭록이고 효종은 숭정이다
•문계종의 손자는 정량 송수이며,송수의 아들은 첨지 수덕이고,수덕의 아들은 인의 간이다.
송수의 외손자로는 이상 정옥형이 있으며,정옥형의 손자는 용두이다.
또 이상의 아들은 윤희인데 참의이며,윤우는 사성이고,윤복은 참판이다.
간의 아들은 미년과 만년이 있는데 모두 생원이다.
간의 사위로 참판 남세웅.승지 양세걸,종실 이성군이 있다.
이성군의 아들은 해풍군 기이다.
미년의 손자로는 병사 몽헌,현감 몽원이 있으며.
첨지 김승룡은 몽원의 조카사위이다,
만년의 증손자로 수제 전이 있으며,외증손으로 박사 황서가 있다.
전의 아들은 창운이며,해풍군의 아들은 편릉군이다,
• 문효종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치는 첨지이며,민은 승지이고,서는 목사이다.
서는 26세에 나주목사를 하였다고 한다.
민의 손자는 감준 경윤이 있으며,경윤의 손자로 만호 응기가 있다.
해풍군은 30여년 공들여 작성한 남평문씨 족보를 박사 문행기에 부쳐 내가 교정을 보았는데,임진
란 중에 집에서 잃어버렸는지,어떻게 되었는지 알수가 없으니,한탄스러울 뿐이다.
위와 같이 사성강목은 휘 유필公의 아들로 증(証)과 윤실(允實)로 기록하여 증(証)은 형으로큰집이요 윤실(允實)은 동생으로 작은집인데 1736년 우징 선조의 병진보에는 형인 증(証)을 아버지로 동생인 윤실(允實)을 아들로 기록하여 형제를 父子지간으로 만들었고 또한 윤실이 차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큰집으로 만들고 인위(寅渭)는 증(証)의 아들로 원래 큰집으로 윤실(允實)이 삼촌이었던것을 동생으로 만들어 오히려 작은집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이 된 것은 무슨 연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찌되었건 병진보에서는 사성강목과는 완연히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동생을 아들로 만들고 삼촌이 형으로 둔갑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성강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저자인 송암이노 자신이 충숙공 子행의 서차를 잘몰라서 직계조인 유필을 먼저 쓰고 서차표시 없이 아들들의 이름자만 기록하여 두었을 뿐인데도 1736년 병진보 발행인 우징선조 께서는 발문에 1731년 신해보와 1735년 을묘보 그리고 고려사에는 후식 선조가 형이라고 되어져 있다고 하시면서도 유독 사성강목에 유철,유필,후식 순으로 되어있다고 왜곡하여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사성강목 어디에도 4세조에 서차 표시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순평군파에서는 277년전 부터 혹시나 유필선조가 형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끈임없이 연구를 해 오셨기 때문에 나름대로 아시는분도 분명 계실텐데 은근 슬쩍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고 봅니다.
사성강목의 원본을 잘 살펴 보시고 또다시 왜곡하여 억지 주장을 펴지 마시고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징 선조의 잘못으로 인하여 그것을 믿고 따르던 후손들이 277년이나 지난 지금
남평문씨와 순평문씨로 나눠 질수도있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여 있습니다.
<사성강목에 기재된 서차표시 표본>
아래의 표본을 보시면 순평군파의 직계조를 중심으로 系代를 이어 長子,次子등 서차를
표시 하였으나 2世와 4世祖에는 서차 표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효혜공 휘 유필선조의 단제를 떠나면서 제가 병진보 발문 내용을 말씀드린바 있는데 그때 순평군파 신갑 일가님이 나서서 최초의 족보인 1731년 신해보를 거론하면서 대종회에서는 42년전에 이미 돌아가신 우암 송시열의 혼백이 나타나서 신해보에 발문하였다고 터무니없는 엉터리를 주장하고 순평군파를 핍박하여 박해를 가한다고 하면서 대종회를 몰아붙이고 비난을 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날이 효혜공 순평부원군 휘 유필선조의 단제를 모시로 가는 자리인지라 더 이상 분위기를 흐터릴수가 없어서 말을하지는 않았으나 대신 개인적으로 신갑일가님께 분위기를 흐트린 부분에 대하여 해명할 것을 거듭 권고 하였는데 신갑 일가님도 해명할 뜻은 가지고 있었으나 서차문제가 재차 거론되어 분위기가 더욱 어색 할것같아 다음기회로 미루자고 하였습니다,
효혜공 단제를 마친 다음날 종친회 사무실에 가서 족보를 다시 한번더 살펴본 결과 신해보와 병진보 두곳에서 모두다 우암 송시열의 발문이 똑같은 내용으로 실려져 있었습니다.
어떤 순평군파에 책임있는 후손은 병진보를 발행할 때 강성군파 후손도 몆분이 참여하였는데 그분들이 병진보에도 우암 송시열의 발문을 넣어 달라고 조르고 억지를 써서 마지못해 넣었다고 마치 277년전 과거로 돌아가서 직접 본것처럼 황당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만 그분의 체면을 생각하여 이 자리에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신해보와 병진보에 똑같은 내용으로 실려있는 우암 송시열의 발문 내용인즉 삼우당 충선공 선조의 업적과 목면의 기록에 관한 발문 이었습니다.자세한 번역은 아직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아마도 우암이 돌아가시기 전인 생전에 써두었던 어떤 발문을 신해보와 병진보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용을 음해하고 왜곡하여 함부로 퍼뜨려서 종사를 연구하지 않는 99.99%의 잘모르는 선량한 종인들을 선동하여 종사를 어지럽히고 현혹시키지 마시길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지난해에 순평군파에서 작성한 서차문제에 관한 글을 몇일전 우연히 보게되었는데 그 글의 내용을 살펴보니 말끝마다, 유필종조, 후식방조, 유필종조, 방조,종조,방조,종조라는 말들을 수도없이 반복하고 나열하여 글을 썼던데 참으로 보기가 민망하고 같은 종인들끼리 정서에도 맞지않는 옹졸하고 바람직 하지않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말할 때 나의 직계조 또는 나의 방계조 이런 표현 정도는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종인들을 상대로 글을 쓰면서 나의 조상인 할아버지를 차별하는듯한 표현은 예의가 아니라 봅니다.
글은 곧 그사람의 마음이요 얼굴인데 이것은 몽니를 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강성군파에서는 후식선조를 종조라하고 유필선조를 방조라 한다면 도대체 누가 방조이고 종조인지 알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곤계 서차 문제에 있어서 엄연히 고려사가 존재하고 송암 이노 또한 서차를 잘 모른다고 하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밑도 끝도 없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화합하지도 못하고 종사를 진흙탕 속으로 내몰아 남평문씨 대종회의 발전과 위상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는 즉각 중단되고 바로 잡아져야 할것입니다.
고려사던 어디에서나 자손을 말할 때 장자인 큰아들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 입니다, 충숙공전에서 “충숙공의 아들로 후식, 유필이다” 하는것과 “충숙공의 아들로 長子 후식 次子 유철이다” 하는 것은 똑같은 뜻 아닙니까,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조선 천지에 누가 있습니까. 겨우 1%도 안되는 가능성 만으로 대사인 종사를 망칠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충렬공 후식선조와 효혜공 유필선조의 곤계서차 문제는 최초의족보 신해보와 을묘보, 정사인 고려사의 기록등 모두에도 후식선조가 형으로 기록되어져있고 송암이노의 사성강목에도 저자인 송암 자신도 누가 형인지 잘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왜!, 병진보를 발행한 우징 선조님 만이 사성강목을 왜곡하여 억지를 쓰시는 것입니까,
1%도 안되는 가능성은 뒤로 미루고 이제는 정말로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곤계서차 문제로 인하여 떳떳한 대동보 조차 발행할수도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희박한 가능성을 가지고 분파각서를 주장한다는 것은 남평문씨를 둘로 쪼개자는것과 똑같습니다.
또한 순평군파에서 추가로 의문을 제기한 최자의 보한집을 번역한 학자들은 여럿있으나 유독 박성규 교수가 嗣(사) 유필을 장남으로 잘못 번역하였다가 영훈 회장님께서 이의 제기한 질문에 답하여 회신한 편지에 “제가 84년도 젊은 나이에 의욕만 앞세워 번역하느라 깊이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어 수정하기를 벼루고 있다가 이제야 여유가생겨 재 번역을 하고있습니다. 장남의 지적 사항도 이미 수정한 상태입니다,고려사는 정사이므로 그 어떤자료도 뛰어넘을수가 없습니다, 유필公이 둘째아드님이 됩니다” 라고 한후 2달여만에 재 번역하여 출간을 한 상태로 嗣유필 문제도 이미 소멸된 상태입니다.
<문학박사 한기문교수의 답변>
이와 같을진데 이것을 돈으로 매수 하여 억지로 이렇게 만들었다고 몽니를 부리진 않으시겠죠.
그리고 지난번에 후식선조와 장인되는 최선이 동갑이라는 부분은 저도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고는 있으나 그것은 임의로 추정한 가상의 나이로 정확한 것도 아니고 족보의 기록으로 본다면 후식선조가 무려14세나 더많기 때문에 어떤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나 신해보,고려사,사성강목등 앞선 근거들을 뛰어넘을순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족보의 연대기록의 오류가 타 성씨의 족보에도 많이 있고 실제로 연대는 분명히 맞는데 처가 무려 72세가 더많고 양가문의 족보에도 부부로써 똑같이 올려져 있는 것을 저는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일뿐 형과 아우의 서차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가지고있는 후식 유필선조의 곤계 서차문제와 관련된 근거자료와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문서들은 더 있습니다.
타당한 논리를 제시하여 진정성과 진심으로 남평문씨의 종사를 걱정하고 화합의길로 가시겠다면 다시 한번더 책임있는 당사자들이 만나서 277년간 묵혀두었던 해묶은 감정의 골을 깨끗이 해소하여 정화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고려사 권 제22> 고종15년(1228)
순평군파에서는 강성군파 후손이 발행한 족보인 신해보와 을묘보도 못 믿겠다 하고, 정사인 고려사도 못 믿겠다 하고, 사학자들의 논문도 못 믿겠다 하고, 아버지인 충숙공 문극겸전도 부정하고, 순평군파의 외손인 송암 이노公의 정직성 마저 부정하고, 오로지 사성강목을 왜곡하여 유철,유필,후식순으로 되어져 있다고 잘못 말씀 하시고 휘 유필선조가 장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순평군파의 후손인 우징선조 단 한분의 말만 믿겠다는 것입니까.
밝혀진 자료와 고증은 외면하고 모른체 하면서 까지 억지로 논리를 만들어 가지 마십시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모함만 일삶고 대사인 종사는 외면한체 오직 자신의 입지만을 강화 해보자고 간신 오리배 처럼 뒤에 숨어서 저기가서 이말하고 여기가서 저말하여 불난집에 부채질만 하고 한번 흔들어 보겠다는 비열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종사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앞으로 그런 분들이 어떻게 종사를 바르게 이끌어 갈수가 있겠습니까.
어른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젊은이의 눈치만 살피는 종친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른이 어른답지 못합니까, 어른이 곧 조상입니다, 조상 모시는 곳이 종친회 입니다.
실천없이 입만 가지고 종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어른 밑에서 심부름만 하면 되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대부경 동북면병마사 충렬공 휘 후식 선조와 효혜공 휘 유필선조의 곤계서차 문제에 있어서 이것도 못믿겠고 저것도 못믿겠다면 충렬공파와 효혜공파에서 책임있는 당사자들이 각각 2명정도의 높은 사학자를 초빙하여 간담회와 토론을 거쳐서라도 300여년 가까이 지긋지긋하게 이어온 끝없는 논쟁을 이제는 정말로 끝장내 주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부분은 다음 기회에 또 이어 가겠습니다,
저의 의견과 설명에 부족한 부분이나 이의가 있으시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보여 주시면
제 자신이 부족하나마 끝까지 한번 밝혀 보고자 합니다.
@.오늘 발표를 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글을 써두고 있었는데 하루전날 한번더 검토를 해보려고 살피는 중에 뜻밖에도 중요한 단초를 하나 발견하게 되어 여기에 덧붙이고자 합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충렬공 후식선조는 1199년에 卒하셨고 효혜공 유필선조는 1228년에 卒하여 후식 선조보다 유필선조가 29년뒤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고려사에 의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만약 두분이 동갑이라 가정해보면 유필 선조가 壽78세라 29를 빼면 후식 선조는 壽49세가 되고 동생이었다면 壽45세 전후로 매우 단명하시게 되는데도 정3품인 동북면 병마사 까지 지내 셨다.
이제 충렬공 휘 후식선조와 효혜공 유필선조의 곤계 서차문제로 277년간의
끈질긴 논쟁을 끝장낼수도 있는 중대한 단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 결 론 >
충렬공 휘 후식선조의 차남되시는 제주도 입도조 남제공 휘 착 선조의 출생이1160년이며 1194년 대제학으로 왕명을 받아 제주도에 입도를 하셨습니다.
남제公의 長子 휘 양부公의 출생이 1176년으로 (고려명종 23년)1193년 무과에 급제 신종원년 1198년에 참지정사로 용호대장군에 승진하여 백마 대원수가 되었고 (희종2)1206년 남해의 왜구를 토벌 대사마 대장군으로, 이부상서 상주국공신 금자광록대부 평장사입니다.
충렬공 후식선조가 자손을 볼수있는 가장빠른 16세에 장남인 탄(誕)을 낳았고 2년후18세때 차남인 남제공을 낳았다고 보면 1142년생이되고 20세때 라면 1140년생이 됩니다.
효혜공 유필선조가 1151년생이라 후식선조가 동생이 되기 위해서는 1153년 생이 되어져야 하고 5세때 장남 탄(誕)을 낳고 7세때 차남 남제공 착을 낳아야만 되는데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고로 후식 선조님이 형이라는 것이 증명 되었습니다.
(후식선조는 대동보의 기록에는 1137년에 출생하시고 1199년에 卒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2013년 4월16일
대종회 정기총회를 떠나면서 김해 삼계문중 - 守 相 -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