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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황금가지/2004년 3월/225쪽/10,000원
프롤로그 - 오늘에 다시 최 부자를 찾는 까닭
나는 대학 강단에서 30년 넘게 경영학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에도 존경할 만한 부자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곤혹스러워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존경할 만한 부자의 모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이수락 선생으로부터 경주 최 부자의 독특한 가훈에 대한 짤막한 원고를 받고 눈이 번쩍 뜨였던 적이 있었다. 최 부자의 가훈이 300여 년 동안 이 집안을 만석꾼으로 지켜 오게 한 근원이었던 것이다. 경주 최씨 가암파 파조 최진립으로부터 마지막 최 부자
예로부터 우리나라에 부자는 여러 명 있었으나 다들 그리 오래 가지 못했고, 또 존경을 받는 부자는 참으로 드물었다. 최근에도 많은 재벌의 오너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형성하지 못하고 또 그 부를 행사함에 있어서도 사회적 윤리에 부합하지 않아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 사실을 볼 때 최 부자 일가의 경영 철학을 다시 음미해 보고 그들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것은 존경받는 부자의 표상을 확립한다는 의미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1. 집안을 일으키고 300년 부의 기반을 다지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기초를 다진 최진립
경주 최씨는 신라의 전신인 진한의 6부촌 중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대인 소벌도리를 득성조로 하며, 신라 말 진성여왕 때의 고운
정무공 최진립은 선조 원년(1568)에 경주부 부북 현곡촌 구미동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부남면 이조리로 이주해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진립은 동생과 함께 무명으로 종군했다. 또한 3년 후인 정유년 다시 왜군이 침입하자 수백의 군을 이끌고 미리 토굴을 만들어 적을 유인하여 무찌르는 등 많은 전투에 종군했다.
관직을 거듭 사양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마량첨사에 임명되어서는 힘없고 병든 백성을 도우면서 일용의 물자를 절약하여 성과 못을 수리하고 기계와 장비를 고쳤다. 이때 못을 수리하고 보를 쌓는 기술을 익힌 것이 훗날 농업을 일으키는 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신유년에 별장으로 있을 때 모함을 받아 경남 울산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최진립은 억울했으나 참았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실책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당파 사이의 권력 구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최진립은 깨달았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것은 옳은 일이나 관직에 있다는 것은 항상 대립되는 파벌과 함께 있어야 하므로 언제 모함에 빠지거나 숙청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2년이 지나 계해년에 광해군이 퇴위하고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최진립은 귀양살이에서 풀려 외관직의 정7품인 가덕첨사가 되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관직을 맡아 군사와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힘썼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니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최진립은 이처럼 청렴하고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다. 그는 평소에도 관사에 첩을 두지 않았으며, 뇌물은 물론이고 선물이나 물건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첫 번째 비밀 - 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위만을 갖는다
최진립은 평소 자식들에게 당부한
300년 만석꾼 집안의 두 번째 비밀 - 한국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노사 관계를 실천한다
최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최진립 장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시중을 들다가 마지막에는 장군과 함께 죽은 충노 옥동과 기별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내 주고, 충노를 위한 불망비까지 세워 주었으니 어느 가문에서 노비에게 이러한 대접을 하였던가. 이것은 훗날 경주 최 부자 가문이 부를 유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과 노비가 서로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정신이나 믿고 자제하며 양보하는 정신은 한국적 공동체 원리의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가업의 이념을 정리한 최동량
최진립의 경우 이조리 밖에 멀리 떨어진 전답이 약간 있었다 하더라도 시골의 작은 부자임에는 틀림없으나 만석꾼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최진립이 죽고 그의 셋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어 손자인 최국선에 이르면 엄청나게 재산이 불어난다. 최동량이 아버지의 묘 옆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집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우선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까 두려워 당대의 저명한 선비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행장과 묘비문, 실록을 만들어 기록을 남기는 일을 먼저 챙겼다. 이것은 경영학적인 의미로 본다면 ‘기업 이념의 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동량은 훌륭한 아버지를 표본으로 보임으로써 후손들이 본받고 따를 모델을 구축했으며 최 부잣집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먼저 남아 있는 서른 명 정도의 노비와 함께 농사일에 전념했는데, 그동안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배운 여러 가지 농사 기술을 이용했다. 당시 나라에서는 식량 증산 정책을 펴고 있었고 땅을 개간하는 자에게 3년 동안 세금을 면해 주고 주인이 없는 밭이나 신전을 개간한 자에게는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권농책이 있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세 번째 비밀 - 함께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간다
인근의 들판을 면밀히 조사한 최동량은 이조리를 중심으로 형산강 상류의 물이 합쳐지는 곳에 땅을 개간했다. 최씨 가문은 충신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최동량은 관의 협조를 얻기 수월했다. 이렇게 개간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노비나 마을 사람들에게 종래에는 드물게 적용하던 획기적인 제도인 병작제를 과감히 도입하여 노동력을 확보했다. 병작제를 통해 생산량의 반을 나누어 가지도록 한 방법은 농민들에게 생산 의욕을 북돋워 주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경작 방법이었다. 전쟁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던 인근의 유랑민들은 이조리 최씨 집의 소문을 듣고 나날이 모여들었다.
최동량을 비롯한 최씨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들 부지런했다. 최씨 가족들은 별이 지기 전 이른 새벽부터 모두 솔선해서 일터로 나갔기 때문에 노복들이나 소작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해도 최씨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신명이 났다. 개간한 논밭을 소작하면 수확의 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다. 또한 최씨 집에서는 일을 하면 세 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최동량이 하인을 부리는 기본적인 자세와 애정은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의 습속이 조그마한 일에도 꾸짖고 음식도 잘 아니 주고 의복도 잘 아니 입히고 크거나 작거나 죄과가 있으면 형벌과 매질을 지나치게 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해놓고서도 위엄 있고 행동 관습이 엄격 하노라고 자랑을 한다만, 허나 하늘은 그 소행을 괘씸하게 여겨 그러한 사람의 자손이 온전히 남지 못하고 일꾼이 떠나가 버리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일꾼도 또한 사람의 아들딸이니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 어찌 옳지 않으리오. 부디 어여삐 여기고 때릴 일이 있어도 꾸중하여 지나치게 말라. 사람의 재주는 모두 각각 다르니 그 사람이 못할 일은 아예 시키지 말고, 이 일꾼에게 저 일꾼의 말을 하지 말고, 차별하지 말고, 꾸짖되 길게 꾸중하지 말고, 자주 나무라지 말고, 헛되이 칭찬하지 말고, 수고하는 날이거든 음식을 생각하여 주고, 어린 자식이라도 어여삐 여겨 주고, 병이 들거든 집에서 간호하여 주고 증세를 각별히 유의하여 고쳐 주고 위엄 있게 은혜를 베풀면 일꾼이 자연 진실하게 되느니라. 그렇게 하여도 마침내 속이고 사나워서 부릴 수가 없거든 시키지 말라.”
또한 최동량이 죽기 전 해 겨울에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가거십훈은 구체적인 생활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후손의 행동 방향을 제시했다.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유가의 풍습에 따른 것으로 최 부잣집만의 독특한 가훈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아홉 번째 가훈인 농업과 잠업을 경학을 익히는 것보다 앞세워 강조한 부분은 눈에 띄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곱 번째의 ‘여색을 멀리 하라.’는 것이나 여덟 번째의 ‘술에 취하지 말라.’는 교훈은 부자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오류를 구체적으로 경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치와 술과 여자는 한 나라의 왕조도 멸망시킬진대 한 개인이나 기업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최 부잣집에서는 10대에 걸쳐 여자 문제나 술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이것이 부를 지킨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2부 원칙을 지키는 경영으로 300년 재산을 일구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네 번째 비밀 - 군림하지 않고 경영하는 중간 관리자를 세운다
최동량의 뒤를 이어 최씨 가문을 명실공히 부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은 바로 아들 최국선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재산을 일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최국선은 노동력이 되는 노비와 소작인들을 모으는 능력을 가졌다. 당시 주인을 대신한 마름들의 횡포는 참으로 견디기 어렵도록 무서운 것이었다. 그런데 최 부잣집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체 마름을 두지 않았다. 이것이 최 부자의 재산이 10대에 이르도록 지켜진 또 하나의 중요한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중간 관리자들이 종업원에게 횡포를 부리는 조직에서는 능률이 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극심한 노사 간의 대립을 유발할 수 있다.
최씨 집에서는 그 마을에서 제일 먼저 농우 두 마리를 사서 써레와 쟁기로 농사를 했고 분뇨 거름을 만들어 땅에 뿌려 땅심을 돋우어 생산을 증대시켰다. 아버지가 읽던 여러 가지의 농사 서적, 특히 신숙이 지은 『농가집성』 등을 탐독하는 한편 다른 지방에서의 농사 기법도 탐색했다. 그때 그가 찾은 방법이 바로 벼의 이앙법 도입이다.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인 농사법인 이앙법을 통해 이전에 김매기 작업에 투입되던 노비들의 노동력으로 더 넓은 논밭을 경작하는 광작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최씨 집안으로 유랑인들이 계속 모여들면서 농장은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다섯 번째 비밀 - 양입위출(量入爲出),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한다
최국선은 이재(理財)의 기본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함’은 오늘날의 예산 설정의 기본 정신이라 할 수 있으며, 현대 경영의 요체가 되는 탁월한 식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최국선의 말에는 또한 철저한 절약정신을 엿볼 수 있다. 최 부자의 선조들이 자손들에게 남긴 교훈은 모두 행동에까지 이를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교훈이 범하기 쉬운 막연한 포괄성을 피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해 볼 만하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여섯 번째 비밀 -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지 않고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
최국선은 검소와 절약을 특히 강조했으나 그 절약이 인색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애썼다.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때 최국선은 과감히 곳간을 헐어 집 앞 바깥마당에 큰 솥을 걸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연일 죽을 끓이도록 했다. 지금도 죽을 쑤어 나누어주던 그 자리가 활인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가훈은 바로 그때 생긴 것이다.
3, 4년 정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흉년은 가난한 백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수확량이 평년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흉년이 들 때마다 최 부잣집에서는 소작료를 대폭 탕감하여 생산의 3할 남짓만 내게 했다. 흉년이 극심할 때는 소작료를 다시 낮춰 주었으므로 최 부잣집의 소작인들은 이러한 조처에 또다시 감복했다.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는 한 달에 100석의 쌀을 나누어주었으니 약 만 명 정도가 최 부잣집에서 쌀을 얻어 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 부잣집의 창고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것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데 당시 그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 이와 같은 최 부잣집의 이웃 사랑 정신은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특히 지역 사회에 대한 책임에 해당한다.
최 부잣집의 가주, 교동 법주
경상 감사가 최국선의 덕행을 조정에 품신하여 사옹원(궁중의 식사를 담당하는 곳) 참봉에 제수했으나 임금의 명이라 하는 수 없이 잠시 동안 관식을 수행하다가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벼슬을 사퇴하고 돌아왔다. 오늘날까지 경주 최 부잣집에서는 법주라는 독특한 가주를 만들어 오고 있는데, 이러한 법주의 제조 비법은 바로 최국선이 궁중의 양조 비법을 맏며느리에게 대대로 전수해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일곱 번째 비밀 - 때를 가려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린다
흉년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마을의 대소사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의논하며 금전이 부족하면 언제나 돈을 꿀 수 있었으므로 최 부잣집은 오늘날의 마을금고 역할까지 하면서 모든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최 부잣집의 서궤에는 언제나 약속 문서가 가득 쌓여 있었는데, 최국선이 병으로 오래 누워 지낼 때 그는 맏아들을 불러 일렀다. “그 중에서 토지나 가옥의 문서는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 서약 문서나 돈을 빌려 준 장부는 모두 마당에 모아 불을 지르도록 하여라.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돈을 못 갚을 형편인데 땅 문서까지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돈을 갚겠느냐.”
최국선은 또한 가족들을 모아 놓고 사람이 물건을 팔고 사는 도리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살 때는 적게 주고 팔 때는 많이 받고자 한다. 남에게 속지는 않아야 하겠지만 너무 잇속을 챙기려 하지 말며, 남이 절박하여 물건을 헐값으로 내놓아도 값은 값대로 주고 사라. 너무 잇속을 생각하면 오래지 않아 잃어버리거나 깨지거나 자손이 도로 팔거나 하니라. 혹시 제값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주었어도 잘못이니 남에게 물어 공론대로 하면 나의 마음과 복에 해가 없느니라.” 최국선의 이러한 말은 남과의 거래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자상히 일러 주고 있다. 남을 배려하며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너무 잇속만 차리지 말고’ 거래하라는 말은 현대적으로도 의미 깊은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경주 최 부자의 가훈에 나타나는 중요한 정신은 재산의 축적 과정이 도덕적이고 정당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 부잣집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최국선으로부터 마지막
최국선은 숙종 임술년에 쉰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세자의 시위를 맡던 이광정이 쓴 그의 묘갈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사람들은 재물이 있으면 더 가지려고 하건만 공은 이를 끊었도다. 벼슬을 내렸으되 연연하지 않았으며 오직 남의 급함을 구제함에 힘썼도다. 물욕에 마음 빼앗기지 않았으며 잡은 문서 불태우니 마음 매우 넓었도다. 이같이 어진 이는 정무공의 손자로고 이 비석에 새긴 글월은 후손의 법이로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여덟 번째 비밀 - 지나치게 재산을 불리지 않는다
최국선의 뜻을 받든 세 아들들은 제각기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열심히 일했으나 세 형제 중에서 유독 둘째 아들인 최의기의 집이 날로 더 번창했다. 최 부자의 전체 소작료 수입은 1년에 만 석을 넘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최 부자의 토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소작인 개인이 내야 하는 소작료는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최 부자가 더욱더 땅을 많이 가지기를 원하여 땅을 판다는 소문만 들으면 최 부자에게 소개해 사도록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 부잣집은 극대 또는 최대보다는 적정 또는 차선을 선택함으로써 장기적인 안목에서 부의 극대화와 안정을 도모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익의 최대화’란 일정한 회계 기간을 정해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말인데, 이때 ‘일정한 기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생각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최부잣집의 경우는 한 해의 이익을 ‘만 석’으로 한정지어 연간 만 석씩 300년 동안 300만 석의 수입을 올린 셈이다. 만약 욕심을 부렸다면 한 해에 2만 석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3대를 넘지 못하고 망했다면 50년으로 쳐도 100만 석에 불과하다는 계산이 나와 결과적으로 소탐대실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의 경제 원리에서 보면 단기적인 극대 이윤의 추구보다는 적정 이윤의 추구가 오히려 종업원과 소비자들에게 먹혀들어 장기적인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욕심을 절제하지 않고 무모하게 끝없이 추구하면 결국 단명하는 것이다.
3. 사회적 윤리를 실천하며 300년 재산을 지키다
재산은 늘었지만 벼슬은 하지 못한
최의기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점점 더 늘어났으나 과거의 운이 따르지 않았다. 맏아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아홉 번째 비밀 - 청백리 정신에 바탕을 둔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한다
진사 시험에도 번번이 낙방하고 양자로 들어와서 자식마저 귀했던
최의기로부터 4대 동안 아들이 없거나 외동아들만 두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자손이 번창하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었겠지만 오히려 부를 더욱 축적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자식이 여럿이면 분가할 때마다 분재를 해야 하고, 여러 대에 걸쳐 분재를 계속하면 아무리 큰 부자라도 그 부를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형제가 많으면 이해관계가 얽힐 수도 있고 다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구체적 상황 대처법, 육연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경주 최 부잣집에는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또 하나의
가문의 새로운 중심지, 천하 명당 경주 교리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 번째 비밀 - 이루기 힘든 일일수록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다
그 자리에 모인 유림들은 설마 용마루를 다섯 자나 낮추고도 그곳에 집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한 번째 비밀 -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게 하고 항상 후하게 대접한다
경주 최 부자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이며 풍류를 알고 학식이 풍부했던
귀천이나 빈부는 결코 가리지 말고 대접할 것을 엄명했으나 손님의 부류를 전혀 구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가친척이나 사돈, 명가집 인사는 상객으로 사랑채에 모시고, 양반집 사람은 중객으로 작은집이나 사촌들의 사랑채에 모시며, 잠자리나 식사를 해결하려고 들른 하객들은 하인들이 살고 있는 초가집으로 안내된다. 하객들이 작은 쌀통에서 쌀을 한 줌 집어 들고 하인 집으로 가면 하인들은 최 부잣집 손님으로 알고 밥을 지어 주고 잠자리를 내준다. 그런데 이 쌀통은 참으로 희한한 것으로 손님들이 욕심을 부려 두 손을 넣어 쌀을 많이 움켜쥐면 손이 빠지지 않아 할 수 없이 적당량을 집을 수밖에 없었다. 최 부잣집의 1년 소작료는 벼로 치면 만 석이 채 못되고 쌀로 치면 4,000석 남짓 되었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데 벼 1,000석을 쓰고, 손님 접대로 1,000석을 썼다고 하니 과객의 수를 짐작할 만하다. 또한 하룻밤을 묵고 떠나는 과객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이 하루를 지낼 양식과 약간의 노자까지 주어 보낸 것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두 번째 비밀 - 자신을 낮춰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한다
벼슬을 향한 허망한 꿈
최세린의 동생 최세구는 순조 때 태어나 서른두 살에 생원시에 급제했으나 마찬가지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지극히 따르던 형이 죽자 그는 애통함과 외로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가문이 쇠퇴함을 몹시 개탄했다고 한다. 이 형제와 교유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인품과 학문을 아끼며 벼슬 길에 나가도록 권유했다. 그래서 그는 현종 무신년에 유지를 이루고자 한성에 올라갔으나 입경한 지 불과 이틀 만에 우연히 병을 얻어 갑자기 죽었으니 그의 나이 겨우 마흔이었다. 이것을 조상 대대로 받은 “진사는 하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훈을 잊고 벼슬에 욕심을 낸 탓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아들 만희는 최세린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세 번째 비밀 -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한다
이듬해인 1894년에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삼남 지방은 온통 난리에 휩싸이게 되었다. 경주 지방에서는 구물천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활빈당 두목이 되어 흥분한 농민들을 모아 이리저리 떼 지어 다니며 불을 지르고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재물을 빼앗아 일부는 사취하고 일부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며 의적을 자처했다. 경주 영문을 단숨에 점령한 그들은 창고를 열고 쌀가마니를 헐어서 몰려온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군데군데 불을 질렀다. 그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교리로 가자! 최 부잣집으로 가자!” 경주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까지 손에 넣은 그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폭도들은 다짜고짜 사마소에 불을 당겼다. 사마소는 최 부자의 서고로 쓰이면서 이따금씩 인근의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여는 곳이었다. 이때 최 부잣집 소작인들과 하인들이 나서며 말했다. “도대체 이 댁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일을 벌이시오? 최 부자 덕분에 우리 모두 목숨을 부지하고 있소.” “썩 비키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소. 부자 치고 도둑놈 아닌 자가 어디 있겠소.” “여기서 사방 백 리 안에 사는 사람 치고 흉년에 최 부잣집에서 도움 받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시오.” 모여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이에 동조하자 폭도들은 다소 동요되는 듯했다. 그때 진사
최 부잣집 하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80여 명의 불청객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상을 내오기 시작했다. 굶주린 농민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 혁명이나 활빈당 등의 난리 와중에도 최 부잣집은 불타지 않고 온전히 재물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대 때부터 아랫사람이나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어 온 덕 때문이라 할 것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네 번째 비밀 - 2등을 위해 1등만큼 노력한다
어느 날
4. 가치 있는 일을 위해 300년 부를 버리다
마지막 부자,
마지막 최 부자
전 재산을 바칠 필생의 사업을 찾은 마지막 최 부자
한일합방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어느 날 안희제라는 젊은이가
1915년 이들은
독립 운동의 경제적 기반, 백산상회
1919년 5월 백산상회는 자본금 100만 원의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명칭도 백산 무역 주식회사로 개칭했다. 자본금 면에서 당시 최대의 규모였으며, 신용 면에서나 거래 면에서 일본 회사를 능가하는 위치에 있었다. 창립 후 활동 지역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이익금의 대부분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회사의 수지는 항상 결손을 면하지 못했다.
3.1 만세 운동이 있은 후 백성들은 너무나 들떠 있었다. 게다가 기미년에는 흉년이 들어 수확이 평년의 절반에도 못 미치자 전에 없던 도굴꾼들이 설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경주 지식인들의 권유로
“최 부잣집이 망했다!”
마침내 백산 무역 주식회사는 창업 14년 만인 1927년에 해산되었고 담보를 넣은
‘이대도강’의 교훈
다음 해 12월 아리가는 다시 한 번
그러나 1년 후 아리가가 다시 찾아왔다. “내년부터 시작되는 제6대 중추원에 최 선생을 참의로 모시고자 합니다.”
300년 동안 모은 재산으로 학교를 세우다
광복을 맞으면서
어느 날
1950년, 드디어 대구 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그때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다섯 번째 비밀 -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일제시대 때 중추원의 참의직을 맡았던 동생
1960년대에 들어서자 정치적 격변에 따라 대학도 양적, 질적으로 발전해야 할 때였다.
에필로그 - 300년 만에 지는 노을
원고를 마쳤을 무렵,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