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분류 : 사적 제408호, 국보 제289호
시대 및 시기 : 백제, 7세기
성격 및 유형 : 왕궁 유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634
방문일 : 2021년10월20일
누구와 : 아들네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에 「옛날 궁궐터」,「무왕이 별도를 세운 곳」,「마한의 궁성터」라는 단어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때 만든 지리서로 동국여지승람을 추가적으로 보완한 각 도별 지리서로「옛 궁터에 오층석탑이 있는데 왕금탑(王金塔)이라 부른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며, 대동지지는 고산자 김정호가 펴낸 책으로 대동지지에 「본래 백제의 금마지인데, 무강왕(무왕) 때 성을 쌓아 별도를 설치하고, 금마저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며, 익산읍지에는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으로 돌을 쌓은 것이다. 속전에는 마한시대에 만들었다고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하니 오래전 이곳이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 도쿄 쇼오렌인 사찰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무왕)은 지모밀지(금마)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관세음응험기는 1976년에 마한·백제문화 학술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일본 교토대학 교수였던 마키타 타이료는 일본 교토의 靑蓮院에서 발견되었다는 『관세음응험기』를 근거로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정사를 지어 경영했다."고 주장하면서 또 다른 양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특히 왕궁리 오층 석탑 안에서 나온 유물과 관세음응험기의 기록과 비교하면 금강반야경을 동판이 아닌 금판에 새겼다는 점, 사리가 6개가 아니라 16개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나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내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989년부터 30년 넘게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백제후기 무왕(재위 600∼641) 때 조성된 왕궁터로 추정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왕궁은 일정기간 궁으로 사용되다 백제 말에서 신라 초에 사찰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왜? 왕궁이 사찰로 바뀌게되었는지 확실한 원인은 규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조사에서는 전각 건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백제 정원 시설 등의 궁성 관련 유구가 확인되고 총 1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런 점으로 볼 때 백제 왕궁이었음이 확실시 되었다는 것입니다.
왕궁리유적은 1998년9월11일 전라북도 기념물1호, 모질메 산성에서 국가지정문화제 사적 제408호로 승격되었으며 2015년7월 익산에서는 미륵사지와 함께 백제역사유적지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란?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에 분포하는 8곳의 백제유적과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는 475년부터 660년까지 백제 후기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유적들로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공주지구의 유적은 웅진기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지구의 유적은 사비기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나성,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 익산지구의 유적은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이 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왕궁리유적은 왕궁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옛날 백제 왕궁이 있던 마을인데 왕궁하면 조선시대 왕궁인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같이 고대 건축물이 들어차있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왕궁리유적은 궁궐에 대한 건축물은 전혀 없으며 넓고 광활한 대지에 오층석탑만이 중앙에 덩그러니 있습니다.
넓고 광활한 대지 곳곳에는 옛날 왕궁이 있었던 흔적인 주춧돌이 보이며 오측석탑에서 동남쪽으로 보이는 후원터가 최근 발굴작업을 마치고 일부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후원터는 가지 못하고 오층석탑과 주위만 돌아보는 정도였습니다.
왕궁리 오층석탑
왕궁리 오층석탑은 국보 제289호로 지정되었으며 1965년에 보수를 위해 해체, 복원되었는데 해체과정에서 탑 안에서 사리장엄구와 사리병, 순금 금강경판 등이 나왔다고 합니다.
특히 사리장엄구는 백제의 예술미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국보 제289호 왕궁리 오층석탑은 넓은 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데 석탑을 가운데 두고 사방이 모두 백제 왕궁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최근 왕궁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왕이 국사를 보던 정전과 정원 그리고 화장실 등이 있었던 흔적이 확인되었고, 금이나 동, 유리 제품을 만들어냈던 공방 등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알려진 백제 왕궁 관련 유적은 서울 풍납토성, 공주 공산성, 부여 관북리 유적 등인데, 익산 왕궁리 유적만 왕궁 터였음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상태로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무려 1만여점으로 흙으로 만든 다양한 그릇 등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왕궁리유적을 돌아 보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층석탑으로 가면 먼저 만나는 건 왕궁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을 쌓아 놓은 기와더미입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기와만 30만이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출토된 기와조각에는 밋밋한 것 부터 글씨가 새겨져 있는 기와도 나왔다고 하는데 기와에 새겨진 글씨는 00000 등 이라고 하며 기와더미 앞 안내문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는 총30만점 정도 기와편이 발견되어 다른 유물에 비해 많이 수습되었는데 그 일부를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전시하고 있다.
기와는 왕궁리유적의 왕궁이나, 사찰, 담장의 지붕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막새기와와 함께 시대별로 만드는 흙과 제작방법 기와의 무늬에서 차이가 있어 유적의 연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기와더미를 지나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궁리유적을 설명하는 입간판과 유적지에 세웠었던 건물의 위치도가 있습니다.
야자매트가 깔린 도로를 따라 조금더 들어서면 고목이 된 벚나무가 양쪽으로 즐비하게 우거졌는데 여름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던 나무들도 다가오는 겨울 문턱에는 어쩔 수가 없는지 붉게 물들인 잎새를 거의 다 땅바닥에 내려놓아 앙상함이 드러난 상태입니다.
나무와 마누 사이로 국보인 왕궁리 오층석탑이 찬란하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벚나무와 단풍나무가 우거진 곳곳에는 긴의자까지 설치되어 있는데 여름 날 긴의자에 기대 푸른 잔디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석탑, 그리고 넓은 왕궁터를 보는 풍경을 상상해보면 가슴까지 시원스러움을 느낄수있는 것 같습니다.
나은이와 나린이는 아까부터 신이났습니다.
어린 아리들이 문화재를 아는 것도 아니고 유산의 중요성을 아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신나고 즐거워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백제의 혼이 담긴 오층석탑을 돌아봅니다.
탑에 대한 상식이 없어 글을 쓸 실력도 안되지만 탑의 설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탑 내부에 있었던 불상과 사리장엄구가 우리 손에 발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문화재라면 사죽을 못쓰고 정신을 못차리는 일본넘들 손에 들어가지 않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1500여년전 우리 백제인들의 혼이 담긴 귀중한 문화재 우리가 아끼고 지켜야할 것입니다.
오층석탑 뒤로는 넓고 황량하기까지한 왕굴터가 펼쳐집니다.
동남쪽 끝자락 야트마한 산이 보이는데 발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그곳은 왕궁후원터라고 하는데 우리는 일정상 가보지 못했습니다.
나은이, 나린이와 왕궁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음은 익산 쌍릉으로 가야합니다.
익산 쌍릉은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된 곳은 아니지만 이곳 왕궁과는 연관이 있는 곳으로 왕궁리를 답사했다면 쌍릉도 꼭 답사해야할 곳입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
대형 사진틀이 있습니다.
포토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타이틀이 익산 문화재 야행(夜行)인데 밤을 뜻하는 밤 '야(夜)'자를 썼는데 그 이유는 알 수없습니다.
포토죤이 있으면 우리도 사진 찍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