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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정보 스크랩 중국의 역사 왜곡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우리의 대응전략
진여원 추천 0 조회 33 07.01.07 18: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제(副題): 중국의 역사 왜곡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우리의 대응전략

중국이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자기들의 역사라 주장하면서, 길림성(吉林省) 집안(輯安)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유네스코(UNESCO)에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 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은 북한이 유네스코에 신청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방해하기도 했다. 최근 이 같은 사실이 언론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면서 학계 뿐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일반시민들까지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설명하는 경우는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과거에도 종종 그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한국 학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지금에 와서 갑자기 이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쟁점화 되었기 때문이고, 고구려사 왜곡이 개인학자의 차원이 아니라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하에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어 과거와는 그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귀속시키는 움직임이 단순한 학문적 차원을 넘어서 남북통일 이후의 상황변동을 고려한 중국 정부의 한반도 전략 내지는 동북아시아 전략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5년 7월에 북경(北京)과 심양(瀋陽)을 거쳐 집안(輯安)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고 백두산, 연변 등지를 여행한 적이 있다. 당시 필자는 한국 정부나 기업이 만주(滿州)지역에 많은 투자를 하여 그 지역을 발전시키면 그것이 북한에 영향을 주어 변화를 앞당길 수 있고, 남북통일이 달성되면 만주지역을 정치, 군사적으로는 중국에 속하게 내버려 두더라도 경제, 문화적으로는 한반도와 만주가 상호 협력하는 하나의 동북아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구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을 현지 교포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필자의 말?대부분 교포들이 반기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었으나, 그 중에 한 교포는 연변지역에 한국 기업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그에 대한 견제로 중국 정부가 연변(延邊)지역에 한족(漢族)을 많이 이주시키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 중국 정부가 매우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 정부의 만주 진출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매우 치밀하고 고차원적으로 정책을 수립하여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게 되고 연변지역에 대한 투자도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 행정부는 남북관계를 급속도로 개선하였고, 경의선 계통과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연결도 머지않아 이루어질 전망이다. 노무현 행정부도 동북아시대를 선언했다. 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머지않아 남북통일이 달성될 것도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의 진전은 만주지역과 한반도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지게 됨을 의미하고, 어떤 형태로든 만주지역에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 변화의 바람은 처음에는 분명 한류(韓流)가 될 것이다. 이 한류에 대한 인위적 역풍으로 중국 정부가 생각해낸 것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최근 국내 학계, 언론, 정가, 시민들에게까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중국의 고구려사(高句麗史) 편입 시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무엇이며, 그것에 정당성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 하여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실체는 무엇이고, 고구려사가 한국 역사에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고, 결론으로 중국의 동북아 전략 내지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의 대응전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해보기로 한다.

◆ 중국 측이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느 논리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이다.

현재의 중국 강역을 기준으로 역사상 '중국(中國)'의 범주를 확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1951년 5월 5일자 광명일보(光明日報)에 백수이(白壽彛)가 논설 형식으로 처음 제기하였다. 논문으로는 1959년에 조화부(趙華富)가 이 문제를 처음 다루었다. 조화부는 중국에서 '통일적다민족국가(統一的多民族國家)'가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면서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와 그 이외의 민족 간의 관계는 '중국 국내의 문제'이고, '국외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손조민(孫祚民)은 중국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로 되기 이전에는 흉노(匈奴), 돌궐(突厥), 거란(契丹) 등 소수민족들이 독립적 민족국가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의 한(漢), 당(唐) 등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적 외족(外族)이자, 외국(外國)이었다고 반론을 전개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으로 이들의 논쟁은 중단되었다.

논쟁은 마수천(馬壽千)에 의해 1979년에 다시 전개되었다. 재개된 논쟁에서 새로 추가된 명제는 "중국은 일찍부터 통일적다민족국가를 형성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후 중국 역사학계는 1981년 5월, 1984년 12월, 1985년 10월 세차례에 걸친 전국규모의 학습토론회를 통해 반드시 진(秦), 한(漢) 이래로 중국이 통일적다민족국가였다는 역사를 전제로 출발해야 한다는 비교적 일치된 인식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인식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앞서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손조민이 특히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화하고 나섰다. 그는 역사연구는 반드시 사실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서역(西域)이 외국이라 칭해졌다는 사실, 후한(後漢) 이후에 흉노가 중국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 토번(吐蕃)과 당(唐)이 적국의 예(禮)를 취하고 '세계를 획적했다'는 사실, 정사(正史) '외국전(外國傳)'에 기재된 조선과 일본 등이 지금은 중국 강역 밖에 있다는 사실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2003년 현재 중국의 각급 학교 교과서에 통일적다민족국가(統一的多民族國家)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은 중국의 통일적다민족국가 형성과 발전적 규율을 기초연구로 채택하고 있다. 또, 현재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간칭으로서 하나의 통일적다민족국가라 선언하고 있다. 단, 중국의 개념은 하나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에 와서 한족(漢族)과 기타 민족을 포괄하는 중화민족 공유(公有)의 국가를 중국이라 지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중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통일적다민족국가의 논리를 채택하여 역사 연구와 서술에 적용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은 한족(漢族)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에 국가는 어느 하나의 민족만을 대변할 수 없고 여러 민족을 통일적으로 대변해야 한다. 한족의 역사만을 중국 역사로 취급하게 되면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중국 역사에 단절이 생긴다. 이는 중국 역사의 특수성이다. 청사(淸史)를 중국 역사로 인정하면 청나라의 선대(先代) 왕조였던 금나라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금사(金史)를 넣으면 요사(遼史)도 넣어야 한다. 자연히 그러다 보면 중국을 이루고 있는 소수민족의 역사를 모두 중국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 또, 현재 엄연히 중국에 살고 있는 어느 민족을 중국 역사에서 제외시키고 한족 중심으로 역사를 설명하게 되면, 중국 역사가 한족과 주변민족의 전쟁사로 점철되었던 만큼, 현재 중국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 사이에 과거의 적대관계만이 부각된다. 어느 소수민족에게 "너희는 현재는 중국인이지만 너희의 조상은 중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었고, 너희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방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면 그들이 과연 그러한 주장을 용납할 것인가 하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따라서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현재 중국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까지 중국 역사의 일부로 서술하고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열세번째로 인구가 많은 조선족(朝鮮族)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중국이 2002년 8월부터 조선족 자치구에서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역사라는 역사관(歷史觀), 조선족은 중국의 다양한 민족 가운데 살고 있는 민족이라는 민족관(民族觀),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라는 조국관(祖國觀) 등의 삼관(三觀) 교육을 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고조선사(古朝鮮史), 부여사(夫餘史), 고구려사(高句麗史), 발해사(渤海史)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논리도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에서 출발한다.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일반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였다. 1970년대 후반까지 고구려는 고조선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국가로서 백제, 신라와 더불어 한반도 삼국의 하나로 파악되었고, 1980년대에 길림성(吉林省) 집안(輯安)과 요령성(遼寧省) 환인(桓仁) 일대에서 고구려 유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면서 중원문화의 영향이 부각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가지도 고구려는 예맥(濊貊) 계통으로 동이(東夷) 가운데 가장 강대한 민족이었다고 이해되었다.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 역사로 귀속시키려는 견해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90년대였다. 중국 학자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고구려가 중국을 구성했던 소수민족 중의 하나가 세운 지방정권이었고, 중국의 영역 안에 있었으며 중원 왕조와 고구려의 관계도 국내관계였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다른 민족이 세운 국가이며 고구려가 망한 후에는 그 유민 대부분이 한족(漢族)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그 역사가 한국 역사에 포함되는 것은 옳지 않고 중국 역사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은 중국이 처한 현재적 입장에서 중국 역사를 설명하는 불가피한 논리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이 그토록 북방민족을 자국민으로 생각했다면 그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그 이북에 중국 황제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독립적 국가세력이 있었고, 중국은 그들의 침략을 두려워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선비족(鮮卑族)이 건국한 북위(北魏), 여진족(女眞族)이 건국한 금(金)과 청(淸), 몽골족[蒙古族]이 건국한 원(元)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황제를 살해하고 중원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은 현재의 입장에서 중국 역사를 설명하는데 유용한 이론일지는 몰지만 역사상의 중국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마법의 거울과 같다. 중국 학자들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객관적 실체적 역사관으로 돌아오는 것이 올바른 학자의 자세와 태도가 될 것이다.

◆ 동북공정(東北工程)은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이다.

중국은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입장에서 현재 중국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귀속시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주변 소수민족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곳이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은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를 기초로 1977년 5월에 세워졌다. 중국사회과학원은 31개 연구소, 45개 연구중심, 약 300개의 2,3급 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은 1983년에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센터로 설립되었다. 총인원이 20명인데 전업인원(專業人員)이 17명이고, 행정관리인원이 3명이다.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로 나누어, 중국의 변계(邊界)와 강역 및 그에 대한 역사를 연구하며, 현재의 중국 변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대책을 세우고 예측하는 연구를 진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은 바로 변강사지연구중심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명칭이다. 변강사지연구중심을 축으로 길림성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동북사범대학 동북아연구중심, 길림사범학원 고적연구소, 중국인민대학 청사연구소 등이 참여하고 있다. 변강사지연구중심은 중국사회과학원 직속의 개방성연구기구로 연구중심의 주임, 부주임 아래에 연구1부, 연구2부, 편집부, 종합처, 도서실, 망락신식부(網絡信息部) 등 6개부가 있다. 연구1부에서 동북(東北), 북방(北方), 서북(西北) 변강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고, 2부에서 서남(西南), 남방(南方), 해강(海彊)의 역사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은 중국의 모든 변강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관계된 동북공정은 연구 1부가 중심이 되어 2002년 2월부터 5년을 기한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동북공정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동북 3성 최고위 관료 등 행정조직, 대학과 사회과학원 등 연구기관대학 등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연구부분, 변역 부문, 자료수집, 정리부분으로 나뉜다. 주요 연구내용은 고대중국강역이론연구, 동북지방사연구, 동북민족사연구, 고조선.고구려.발해사연구, 중조관계사연구, 중국동북변강과 러시아 원동지구의 정책경제관계사연구, 동북변강사회온장잔략연구, 조선반도형세변화와 그것이 동북변강의 안정에 미칠 영향 연구, 응용연구 등으로 되어 있다.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는 고구려 문제라 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중국이 고구려사를 귀속시키는 논리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경내의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 주장한다. 고구려 정권은 남하한 일부 부여족(夫餘族) 일파와 전한(前漢)시기 고구려현(高句麗縣) 경내의 기타 변강 민족이 공동으로 건립하였고 후에 옥저(沃沮), 동예(東濊), 소수맥(小水貊) 등의 기타 예맥족(濊貊族), 한인(漢人), 선비족(鮮卑族), 숙신인(肅愼人) 등의 민족 성원이 더하여져 점차 융합하여 고구려 민족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구려 정권을 구성한 민족은 여럿이었던 것으로, 이들 민족의 원류 역시 모두 전한시기에 동북변강지구에서 활동한 민족이었고, 일찍이 주(周)나라 때에 중앙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전한시기에는 전한 현토군(玄菟郡)에서 활동하였고 전한왕조의 관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정권은 건립 초기부터 서한(西漢)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 민족 기원에 대해서 예맥설, 부여설, 고이(高夷)설, 상인(商人)설, 염제(炎帝)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이들 민족이 모두 고대 중국경내에 있던 민족이기 때문에 고구려 민족의 귀속을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둘째, 고구려의 활동중심이 몇번 옮겨졌지만 한사군(漢四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고구려의 수도가 홀승골성, 위나암성, 환도성, 평양성, 장안성 등으로 옮겨졌지만 그 활동중심이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한정되어 현도(玄菟), 낙랑(樂浪), 진번(眞蕃), 임둔(臨屯)의 한사군의 관할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 고구려는 줄곧 중국 역대 중앙왕조와 신속(臣屬)관계를 유지해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관계를 끊고 '중국(中國)' 밖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역대왕조는 고구려를 직간접적으로 관리하였는데, 양한대(兩漢代)에는 고구려에 대한 관리가 직접적이었고,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는 중원의 내란으로 고구려 세력이 발전하였고, 다수의 중국 분열정권은 겨우 고구려와 신속관계를 유지하였다. 수당(隨唐)시기에는 중국의 결속이 분열되어 수, 당 왕조가 고구려를 간접 통치하였고 668년에 수(隨)와 당(唐) 두 나라의 노력으로 고구려는 마침내 당나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직접관할 하에 놓였다. 관리방식이 모두 같지 않지만 역대의 통치자들 모두 고구려의 활동구역을 중국의 고유영토로 인식했다. 반면에 고구려는 스스로 관계를 끊고 중국 밖에 존재하려한 적이 없으며, 중국 역대왕조에 신속관계를 유지하면서 봉작(封爵)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특히나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을 두고, 당이 고구려를 통합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넷째,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주체부분의 고구려인이 한족(漢族)으로 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의 원래 인구가 70여만명이었는데 그중에 30만명이 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신라에 대략 10만, 발해에 10만 이상, 북방 돌궐(突厥) 등으로 도망친 사람이 1만여명,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을 고려해 넣으면 대략 고구려 원래 인구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발해로 간 고구려인은 여진(女眞), 즉 금(金)에 흡수되었다가 한족(漢族)으로 융합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구려인이 중화민족으로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이상 여러가지를 종합해볼 때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지방민족정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며, 적은 부분의 고구려인이 경외(境外)로 융합되었다고 하며, 고구려 정권의 귀속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고 저들은 주장한다.

또 고구려와 고려는 관련이 없으며, 오늘날의 조선족은 장시간 융합과 교류를 거치면서 신라인을 주체로 하여 형성된 것으로 융합과정에서 한반도에 있던 고구려인(高句麗人), 말갈인(靺鞨人), 한인(漢人) 등을 포괄하였고, 19세기 중엽 이후에 일부분의 조선인이 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오늘날 중국 경내의 조선족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와 고려, 고구려와 조선족과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중국 측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이 동북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배경은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제시하고 있는 연구과제 중에 '동북변강사회온정전략연구', '조선반도형세변화와 그것이 동북변강의 안정에 미칠 영향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은 한반도에서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예상하고, 그것이 중국동북지역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 연구를 통해 동북지역을 평온하게 안정시킬 전략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한반도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은 누구나 예상하는 바이다. 최근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변화만 보아도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남북화해협력이 증대되고, 경의선이 머지않아 연결되게 되어 있다. 경의선 연결은 중국 동북지역을 거쳐 시베리아횡단철도와의 연결을 의미하며, 한반도에서 많은 물자와 인원이 만주로 진출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집안(集安)의 고구려 유적 답사나 백두산 관광도 아주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면서 고구려는 한국인의 조상이 세운 나라이고, 그 일대의 유적이나 땅은 모두 고구려의 것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심각한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총독부 건물(과거 중앙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을 보고 한국 사람들이 기분 나빠했던 것처럼 중국인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양국 간의 외교적 마찰로 인하여 조선족 사회가 동요하고, 그에 영행을 받은 만주족이 동요하여 독립을 요구한다면 중국으로서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한다.

북한의 탈북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은 북한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를 예상하게 하고, 이는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만주로 유입되는 경우를 상정하게 한다.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가 아닌 남북평화통일이 달성되더라도 만주지역은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조선족이 동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남북통일에 충격을 받은 만주족이 단결하여 분리 독립을 요구한다면 이는 실로 심각한 문제이다. 중국은 만주족에게 두번씩이나 정복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한번은 송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당하였고, 다른 한번은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결국, 중국 정부는 미래에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 역사로 귀속시켜 설명하는 등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 명칭을 내걸고 동북문제에 대해 집중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 고구려사(高句麗史)는 한국 역사의 일부이다.

한국인들은 누구나 고구려사가 당연히 한국 역사에 속하는 고대 왕국으로 생각해 왔다. 특별한 설명도 없이 초등학교 때부터 고구려는 우리의 조상들이 세운 나라였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제 고구려사(高句麗史)가 왜 한국 역사에 속하는가를 설명해야만 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중국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는 고구려 정권은 남하한 일부 부여족(夫餘族) 일파와 전한(前漢) 고구려현(高句麗縣) 경내의 기타 변강 민족이 공동 건립하였고, 후에 옥저(沃沮), 동예(東濊), 소수맥(少數貊) 등의 기타 예맥족(濊貊族), 한인(漢人), 선비인(鮮卑人), 숙신인(肅愼人)의 숫자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매우 적었다고 기술했다.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소수맥 등이 각기 하나의 민족이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들은 예맥족이 지역별로 세운 정치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민족(民族)이란 흔히 인종, 언어, 문화를 같이하고 동일체의식을 가진 인간집단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인종이란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회색인종 등을 말하는 것이므로 고구려인이 오늘날 한국인과 같은 황인종에 속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최근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한국인의 유전자는 중국인과는 거리가 멀고 만주족(滿州族)과 가깝다고 한다. 이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 살았던 고구려인이 중국 한족(漢族)과는 거리가 먼 인종이었다는 과학적인 의미가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두 계통의 백제 건국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둘 다 백제의 시조(始祖)인 온조(溫祚)가 고구려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의 아버지는 추몽(皺蒙) 또는 주몽(朱蒙)이라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夫餘)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卒本夫餘)에 왔는데, 졸본부여의 국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의 둘째 딸로 아내를 삼았다. 얼마 아니하여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그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이 비류(沸流)였고 둘째 아들이 온조였다. (중략)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로 보익(輔翼)을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는데, 이 때가 전한(前漢) 효성제(效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었다. (중략) 귀부해올 때 백성들이 모두 즐겨 쫓았으므로 후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로 성씨를 삼았다.'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인(卒本人)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이 비류이고 작은아들이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내고 있었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前漢) 건소(建昭) 3년 2월에 남쪽으로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취하여 비(妃)로 삼았다.'

이들 설화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구려에서 태어나 백제로 왔고, 그들의 조상은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왔다.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를 세운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었던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위서(魏書), 주서(周書), 수서(隨書), 북사(北史)에서도 고구려가 부여에서 파생되었다고 하고,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하였다. 백제 역시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부여 혹은 고구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서에서는 백제국(百濟國)은 그 선조가 부여에서 왔고 그 의복과 음식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였다. 특히 472년에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國書)가 실려 있는데, 거기서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주서의 백제전(百濟傳)에서는 부여의 별종으로, 북사의 백제전에서 부여 동명왕(東明王)의 후손 구태(仇台)가 백제를 세웠다고 하고, 그 음식과 의복이 고려(高麗)와 대략 같다고 하였다. 수서의 백제전에서는 백제의 선대(先代)가 고려국(高麗國)에서 나왔다고 하고,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가 백제를 세웠으며, 의복이 고려와 같다고 하였다. 구당서신당서의 백제전에서도 부여의 별종이라 하였고 신당서에서는 백제의 풍속이 고려와 같다고 하였다. 이들 기록에서 고려(高麗)는 다들 잘 아는 바와 같이 고구려(高句麗)를 의미한다. 이처럼 중국인들 자신이 기록한 중국 정사(正史)에 백제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거나 고구려에서 왔다고 하고, 그 의복, 음식, 풍속이 고구려와 같았다고 하였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국민은 같은 민족이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신라에 대해서는 수서(隨書)의 신라전(新羅傳)에서 풍속, 형정(刑政), 의복이 고려(高麗), 백제(百濟)와 같다고 하였으며, 구당서(舊唐書)의 신라전에서는 그 풍속과 형법, 의복이 고려, 백제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부여 혹은 고구려에서 왔다고 기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라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삼한(三韓) 소국(小國)에서 성장한 국가이므로, 백제와 같은 민족이 형성한 국가이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인 것처럼 신라 또한 고구려와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의미가 된다. 한마디로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는 같은 민족이 형성한 국가였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광개토호태왕릉비(廣開土好太王陵碑)에서는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왕(鄒牟王)으로 북부여(北夫餘)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소위 신묘년(辛卯年)의 기사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 조공을 바쳐왔다고 하였다. 동부여(東夫餘)에 대해서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속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이다. 속민이 고구려가 복속한 백성이라는 뜻이라면 396년 이전에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를 복속한 적이 없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구려가 정복한 비려(稗麗; 契丹), 숙신(肅愼)에 대해 속민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은 것을 보아도 속민이 단순히 복속민(屬服民)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 고구려의 천하관에 따른 표현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고구려의 복속민이 된 비려, 숙신이 고구려의 국제 질서에 포함되었음에도 속민이라 표현하지 않은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이를 동일 민족의식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본 견해가 옳을 듯하다. 속(屬)이란 글자에 '살붙이', '혈족'이라는 뜻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신라와 백제, 동부여에 대해서만 속민이라는 표현을 쓰고, 비려, 숙신, 왜(倭), 후연(後燕)에 대해서는 속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속민(屬民)'이 같은 민족이라는 의미로 쓰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는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에 대해 같은 혈족(血族)으로서 동일체의식 내지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광개토호태왕릉비(廣開土好太王陵碑)에서는 영락(永樂) 6년(서기 396년)에 백제로부터 획득한 58성 가운데 36성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신래한예(新來韓濊)라 표현하였다. 한(韓)은 한강유역의 선주민으로, 예(濊)는 고구려계통의 이주민으로 한강유역과 충청도일대에까지 적석총(積石塚)을 남긴 사람들이었다.

한예(韓濊)라는 표현은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에도 보인다. 후한(後漢) 환제(桓帝), 영제(永帝) 말년에 한예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이 제어하지 못해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많이 흘러들어갔는데,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 이남의 황지(荒地)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만들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 유민을 거두어 모으고 군대를 일으켜 한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이 점차 나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대방군 남쪽에 있던 백제의 주민이 한예라 불린 사실이 확인된다. 아울러 당시에는 주민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음도 알 수 있다.

부여에 '예왕지인(濊王之印)'과 예성(濊城)이 있어 모두 본래 예맥의 땅이라 한 기록은 부여가 예(濊) 혹은 예맥(濊貊)이었음을 나타낸다. 고구려와 동옥저의 남쪽에 예맥이 있다고 하는데, 동예의 북족에는 고구려와 옥저가 있다고 하므로 동예 또한 예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예는 그 노인들이 스스로 일컫기를 구려(句麗)와 같은 종족이라 하였다고 하고, 언어와 예절,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고, 의복이 달랐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동예가 예맥이고, 동예와 고구려가 같은 종족이라고 하므로 고구려도 예맥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으로서 언어와 여러 가지 일이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고 하므로, 고구려 역시 부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한 예맥이었다. 옥저도 고구려와 말이 같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동예(東濊), 옥저(沃沮) 등은 모두 예맥으로서 대체로 언어가 같았다고 하겠다.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三韓)이라고 불린 한(韓)이 있었다. 그런데 백제에서 한(韓)과 예(濊)가 함께 섞여 살았고, 적석총을 통해서 볼 때, 예의 분포가 경기도는 물론 강원도와 충청도까지 이르고 있음은 한예(韓濊)가 융합되어 이미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 한과 예가 섞여 살 수 있었음은 이들의 언어가 대체로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고대 기록에 백제를 부여의 별종이라고 한 것도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라는 뜻일 것이다.

신라를 한예(韓濊)라고 표현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와 마찬가지로 삼한(三韓)에 속하였으므로 백제와 같은 민족이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민족이고, 백제와 신라가 같은 민족이라면, 고구려와 신라도 같은 민족이다. 신라 초기의 고분을 보면 대개가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와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인데, 토광목관묘는 부여와 고조선 지역에서, 토광목곽묘위만조선 말기에 유행하던 무덤양식이다. 이는 부여에서 고구려, 위만조선, 삼한 지역 전역에 걸쳐 기원 전후기에 대거 민족이동이 일어나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한(漢)의 침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나라가 침략하자,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예(濊)가 전란을 피하여 대거 이동함으로써 지역적으로 차이를 보이던 한반도와 압록강 이북의 주민들이 서로 섞여 살게 되면서 한예(韓濊)라는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른 통치집단을 형성한 탓에 다른 명칭으로 불렸을 뿐이라 하겠다.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는 모두 한예족(韓濊族)이 세운 국가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오늘날의 한민족(韓民族)과 같은 역사적 민족공동체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온돌, 지석묘(支石墓)와 적석묘(積石墓)가 있다.

먼저 비파형동검은 요령식동검, 혹은 만주식동검이라고 부르는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만주에서부터 한반도 전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같은 모양의 비파형동검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같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라 분류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구려인들이 온돌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온돌은 한국인 고유의 난방방식인데, 집안(集安)의 동대자 거주지, 발해 상경성(上京城) 침전지,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그리고 남쪽에서는 경기도 수원 서둔동철기시대 주거지, 강원도 춘천 중도를 비롯한 여러 유적들에서 구들이 발견되었다. 온돌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해오고 있는 고유한 난방방식이므로, 고구려와 발해를 세운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들이었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지석묘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 일본 큐슈 북서부지역, 중국 절강성과 요령성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 중에 한반도에 7~8만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요동지방에는 지석묘가 있으나, 요서지역에는 지석묘가 발견된 바가 없고, 중국에는 절강성과 산동성에 지석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의 동북지방에서는 이른바 석붕(石棚) 혹은 탁자식 지석묘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먼저 요동반도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120여기의 석붕이 발견되었는데, 주로 요동반도 남부의 대련(大連), 영구(營口), 안산(鞍山) 지구에 총 107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대련 지구의 보란점시(普蘭店市)와 와방점시(瓦房店市) 북부 및 영구 지구의 개주시 남부를 중심으로 한 벽류하 유역과 대양하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또, 요령성 단동시(丹東市), 무순시(撫順市), 철려시(鐵驪市)애서도 지석묘가 발견되었다. 중국 동북지방 지석묘 분포의 북쪽 한계선은 대체로 길림성 남부인 통화 지구의 혼하 상류 유역 및 휘발하 상류유역이라 한다.

이처럼 요령성, 길림성 일대에 지석묘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집안(集安) 일대에도 지석묘가 상당히 많이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는 지석묘가 집안 뿐 아니라 그 주위의 길림성과 요령성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가 세워지기 전부터 그 지역에 한반도와 같은 무덤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지석묘를 남긴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에서는 신라인과 백제인으로 되고 한반도 북부와 압록강 이북지역에서는 고조선인과 고구려인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옥저(沃沮),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사람들은 비파형동검과 온돌, 지석묘라고 하는 동질의 문화를 가진 동일민족인 것이다.

다음으로 적석총(積石塚)이라는 무덤양식이 고구려와 백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야 하겠다. 적석총은 압록강 이북의 집안(集安), 환인(桓仁), 통화(通化) 등지에도 분포하지만, 압록강 이남의 자성, 만포, 위원, 초산, 시중 지역에도 분포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청천강유역과 대동강 유역, 그리고 임진강과 한강유역에까지 분포한다. 적석총은 임진강, 한강유역 뿐만 아니라 충청도 일대에까지 분포하고 있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 송파구 석촌동일대에 토총(土塚) 23기, 석총(石塚) 66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석총 대부분은 적석총으로 보아도 무난하다. 충청남도 청양군 벽천리의 적석총과 조치원 적석총도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1917년 곡정제일(谷井濟一)이 사진과 함께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청양면 벽천리에 석총 여러기가 있다고 하는데, 사진을 통해서 볼 때 무기단적석총(無基壇積石塚)으로 파악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조치원 적석총도 여러 사람의 기록으로 볼 때, 존재하였던 것이 분명하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이처럼 사라진 적석총까지 포함하면 임진강유역이나 한강유역 그리고 그보다 남쪽인 충청도일대에까지 지금 남아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적석총들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남긴 이들 적석총은 양식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고구려와 백제지역의 적석총은 같은 무덤양식이다.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적석총이라는 같은 무덤양식을 남긴 고구려인들과 백제인들은 동일민족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적석봉토분(積石封土墳)도 흙을 벗겨내면 적석총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적석총이 백제를 거쳐 신라로 전파되는 동안 변형된 것이라 이해하면,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같은 무덤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민족을 인종, 언어, 문화를 같이하고 동일체의식을 가진 인간집단이라고 정의할 때,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인종, 언어, 문화가 같았음은 물론, 같은 동일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이들 삼국의 주민이 같은 민족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같은 민족의 역사를 일부는 떼어내어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한국 역사라고 함은 적절치 못하다. 고구려 유민의 일부가 중국에 유입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그 존재도 확인할 수 없는 반면에, 한반도에는 고구려인과 동일민족인 한예족(韓濊族)이 7천만명이나 살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사(高句麗史)는 당연히 한국 역사의 일부라고 봄이 마땅한 것이다.

◆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자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한 중국 측의 주장에는 억지가 많다.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의 홈페이지에는 '고구려 문제'라 하여 고구려사가 중국 역사에 편입 내지 귀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나열하고 있다. 이제 여기서는 그에 대한 반론을 차례로 펼쳐보겠다.

첫째, 고구려는 중국 경내의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에 대해서이다. 현재의 중국강역으로 보면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卒本)이나 국내성(國內城)은 분명 중국의 경내에 있었다. 그러나 건국 당시에는 이들 지역이 중국의 경내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건국한 세력은 압록강 남쪽에도 있었다. 과거의 평안북도, 지금의 자강도 자성군, 만포시, 위원군, 초산군, 시중군에 분포하고 있는 수많은 적석묘(積石墓)들은 압록강 남쪽세력과 북쪽세력이 함께 고구려를 건설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과거나 현재 어디를 기준으로 해도 중국 경내의 세력만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漢)의 현도군(玄菟郡) 고구려현(高句麗縣) 경내의 변강민족이 공동으로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현도군이 설치된 기원전 107년 이전에 고구려가 이미 있었고, 그 고구려에 한나라가 현도군 고구려현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 고구려를 세운 세력이 힘을 합쳐 한의 현도군을 서북쪽으로 몰아냈기 때문에 결코 한나라에 우호적이지도 않았고 순응하지도 않았다. 고조선을 포함한 고대 국가들이 주(周) 시기에 중앙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하면서, 기자(箕子)가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을 믿는 입장에서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기자는 조선에 오지도 않았고 기자조선(箕子朝鮮)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국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설사 기자가 책봉되어 왔다고 하더라도, 고조선 사람들이 말도 통하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중국인을 군왕으로 받들었을 까닭이 없다. 기자조선은 후대 역사가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일 뿐이다.

둘째, 고구려의 활동중심이 몇번 옮겨졌지만 한사군(漢四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 답변한다. 한사군이 모두 설치된 것은 기원전 107년이고, 임둔군(臨屯郡)과 진번군(眞蕃郡)은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고, 현도군(玄菟郡)은 기원전 75년에 고구려인들의 저항을 받아 흥경(興京), 노성(老城) 방면으로 쫓겨 갔다. 고구려 남쪽에 낙랑(樂浪)이 있었다고 하지만,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6만 2천 812호, 40만 6천 748명이었던 인구가 진서(晉書) 지리지에는 낙랑군(樂浪郡) 3700호, 대방군(帶方郡) 4900호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한사군의 영역이 아주 축소되어 극히 좁은 지역만을 지배하다가 축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30년 정도 한사군의 범위 안이 있었던 것을 가지고 줄곧 그러하였다고 설명함은 잘못이다. 몽고족(蒙古族)이 세운 원(元)이 중국 대륙을 지배한 것을 두고, 은(殷)에서부터 송(宋)대까지의 역사는 모두 몽골의 역사에 속한다고 한다면 중국인들은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셋째, 고구려는 줄곧 중국의 역대 중앙왕조와 신속(臣屬)관계를 유지해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관계를 끊고 '중국(中國)' 밖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반론한다. 신속관계는 고대 동아시아의 외교관계의 표현이었을 뿐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 외교관계를 가지고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의 역사라고 한다면, 고대에 줄곧 중국의 여러 왕조와 신속관계를 맺은 일본의 역사도 중국 역사라고 해야 한다. 일본의 고대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고구려사도 중국 역사로 설명할 수 없다.

넷째,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주체부분의 고구려인이 한족(漢族)으로 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의 원래 인구가 70여만명이었는데 그 중에 30만명이 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신라에 대략 10만, 발해에 10만 이상, 북방 돌궐(突厥) 등으로 도망한 사람이 1만여명,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을 고려해 넣으면 대략 고구려 원래 인구와 일치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통계는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허구의 계산이다. 고구려의 인구는 669년에 69만 7천호였는데 669년 5월에 당(唐)이 고려(高麗; 高句麗)의 호(戶) 2만 8천 2백을 옮겨갔다고 한다. 이에 대해 20여만명을 당으로 옮겼다고 하는 견해가 있지만, 어떻게 해서 그런 계산이 나왔는지 희한할 따름이다. 645년 요동성, 개모성, 백암성 등 고구려의 10여성에서 7만여명을 당나라로 옮겼다고 하나, 이는 인구 통계가 기록된 668년보다 23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당으로 옮겨진 인구가 69만 7천호에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다. 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 남생(男生)의 묘지명(墓誌銘)에는 연남생이 국내성 등 6성의 10만호를 이끌고 망명했다고 한다. 10만호의 숫자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당으로 옮겨진 호구는 약 13만호이다. 69만호 가운데 56만호는 그들의 거주지에 살거나 신라로 옮겨갔다. 그들의 거주지에 살던 사람들은 발해(渤海)의 주민이 되었다가 발해가 망한 후에, 압록강 이남의 주민들은 고려(高麗)로 편입되었고, 압록강 이북의 발해 유민들도 상당수 고려로 투항해왔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고구려인 중에 한족(漢族)으로 들어간 숫자가 한민족(韓民族)에 들어간 숫자보다 많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적은 부분의 고구려인이 한족(漢族)으로 융합되었다고 하여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다.

설사, 중국으로 간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중국으로 유입된 사람들은 한족(漢族)이나 만주족(滿州族)에 동화되어 그 존재를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대신에 한반도에는 과거에 고구려를 구성했던 민족이 7천만명이나 살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사(高句麗史)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의 역사이어야 하는가, 그 존재가 분명한 7천만명의 역사이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너무도 명백하다.

지금까지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귀속시키려는 중국 측의 견해가 부당함을 지적해 보았지만 중국 학자들이 저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데에는 남한과 북한 학자들의 잘못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손진기(孫進己)가 쓴 글을 보면 그와 같은 사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은 비록 중국과 조선 두 나라가 압록강과 도문강을 경계선으로 하고 있지만, 조선에 귀속되어야 할 지금의 동북지구를 중국이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해야 하는 숙원이 오랫동안 조선 인민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다.'

이렇게 북한에서 나온 1979년 조선전사(朝鮮全史)에서 조선에 귀속되어야 할 동북지구를 중국이 부당하게 점령하고 있다고 말하고, 조선 인민은 그에 대한 수복이 마음 속에 있다고 하였으니, 중국 측으로서는 언제인가 조선 민족이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을까 우려할 법하다. 또, 1993년에 집안(集安)에서 열린 '고구려 문화 국제토론회의'에서 북한의 박시형(朴時亨) 등이 중국 동북지역의 고대 민족이 고구려인들이라고 중국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주장에 대한 관점을 공개적으로 공격하며 '중국 학자들이 국경을 가지고 역사 속의 귀속으로 확정하였다. 이것은 역사성을 위반한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 한국의 어느 학자가 신문잡지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하기를 "역사상 중국은 옛날부터 고구려가 중국에 속한다고 한 적이 없으며, 중국 학자들도 고구려가 중국에 귀속되었다는 관점을 주장한 것이 없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고구려가 중국 민족이라고 하니, 이는 황당하고 가소로운 일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손진기(孫進己) 자신이 조선전사와 남북한 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글을 작성하였는데, 글의 내용은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 홈페이지에 실린 글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의 주장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사의 귀속(歸屬)은 역사상 어떤 한 시기(時期)의 귀속이나 오늘날의 귀속만 가지고 판정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몇천년 동안 내려온 모든 역사시기에 주로 어떻게 귀속하였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판정해야 한다. 고구려가 모든 역사시기에 주로 중국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고구려가 중국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둘째,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동북 전역과 조선반도 북부가 모두 연(燕)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진(秦)이 6국을 통일한 뒤, 이 지역은 다시 진나라에 속하였고 고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 기원전 2세기에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거느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영토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고구려는 기원전 108년에 벌써 정식으로 한나라 현도군(玄菟郡)의 1개 현(縣)으로 되었고, 졸본부여(卒本夫餘)도 한의 현도군이 관할하는 범위 안에 있었다. 기원전 37년 주몽(朱蒙)이 졸본부여에 이르러 고구려 5부를 통일하였다. 이는 모두 당시 한(漢)의 현도군 영토, 즉 오늘의 중국 영토에서 진행된 것으로 오늘의 조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셋째, 5세기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을 가지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생겼다고 봐서는 안된다. 5세기 전 고구려는 중국이고 5세기 후 고구려는 조선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이것은 오늘날의 국경을 가지고 나누는 것으로 당시 국경을 가지고 보면 5세기 전후 고구려는 모두 중국 영토에 있는 중원 제국의 지방정권이다.

넷째, 전체 역사과정을 통해 보면 고구려 왕국은 시종 중원 제국의 한 지방민족 정권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할거를 가지고 전 역사 기간 동안 중국에 귀속되었던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다섯째, 고구려가 망한 후에 그 유민들이 대부분 중화민족에 융합되었다. 고구려 민족이 남긴 문화유적을 조선 민족이 만든 역사유적으로 보고, 심지어는 그곳에 가서 최고의 경배를 드리기도 하는데, 이런 관점이 중국의 학자와 인민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여섯째, 한족(漢族)의 선조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것이 천년이 넘었다. 4세기 초에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 것은 다른 민족의 토지를 점령한 것이다. 한족 정권이 반도의 북부를 쳐서 점령하는 것은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는 것이며, 수(隨) 당(唐)이 고구려를 친 것은 대외침략전쟁이 아니라 중국의 국내 민족 간의 내전이었다.

일곱째, 왕씨(王氏)의 고려는 신라인과 백제인, 일부 고구려인, 한인(漢人)의 후예들이 세운 것이다.

여덟째, 오늘날의 조선족은 고대 조선반도 남부의 삼한(三韓)에서 비롯되어 신라인을 핵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당(唐)이 신라에게 패강(浿江) 이남지역을 주고 요(遼)가 압록강 이동 여진 영토를 고려에게 주었다. 명(明)은 도문강 이남의 땅을 조선에게 주었다. 이렇게 중조(中朝)국경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조선 및 한국의 학자들은 다른 속셈을 가지고 오랜 역사 속의 민족과 정권이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논쟁을 일으켜 중국의 땅을 조선의 것이라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것은 두나라 사이의 우의를 파괴하는 무리한 요구이다. 만일 세계 각국이 모두 1천년 전의 역사분쟁을 가지고 오늘의 국경을 다시 논증하려 한다면 세계적인 대란이 발생할 것이다.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모두 지금의 중,조 두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전통적 국경을 승인한다. 다만  일부 조선과 한국의 학자들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중국 영토를 침략하려고 하는 관점을 우리는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반박하여야 하며, 그들의 감추어진 나쁜 계략을 폭로하여야 한다.'

손진기의 이 글은 북한에서 나온 조선전사(朝鮮全史)이 세련되지 못한 표현과 한국 및 조선족 관광객들의 신중치 못한 행동이 중국을 자극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국인들이 마땅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역사상의 고구려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하여, 그 땅을 수복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한중(韓中)간 현재의 국경은 존중되어야 한다. 앞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동북아시아에도 유럽공동체(EC)와 같은 경제협력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따라서 만주가 옛 고구려 영토였다고 하여, 수복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더욱이 불필요한 발언을 함으로써 양국 간에 정치외교적인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외의 손진기(孫進己)의 주장에 대해서는 변강사지연구중심의 입장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언급하였다. 손진기 역시 고구려가 단순한 외교적 의례관계에서 중원 제국의 관작을 받은 것을 가지고 고구려사(高句麗史)가 중국 역사에 귀속된다고 하고 있는데, 이 또한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적 외교관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역대 중앙왕조에 귀속되지 않았으니 고구려를 지방민족정권이라 하거나, 수(隨) 당(唐)과의 전쟁을 중국의 국내 민족 간의 내전이라 함도 억지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남쪽의 신라, 백제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한예(韓濊)였기에 조선족(朝鮮族)은 고대 조선반도 남부의 삼한에서 비롯되어 신라인을 핵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함도 역사를 잘못 인식한 결과이다.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동북 전역과 조선반도가 모두 연(燕)에 속하였다고 하지만, 연나라의 영역은 압록강을 넘어온 적이 없고, 대개 요하 서쪽에 있었다.

고구려가 한(漢)의 현도군(玄菟郡) 영토 안에서 건국되었고 그 역사가 한사군(漢四郡) 영역 내에서 전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 즉 낙랑(樂浪)·진번(眞蕃)·임둔(臨屯)·현도(玄菟)의 영역이었다고 말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6만 2천 812호, 40만 6천 748명이었던 낙랑군의 인구는 진서(晉書)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낙랑군(樂浪郡) 3700호, 대방군(帶方郡) 4900호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313년, 314년까지 남아 있기는 하였지만 단순 계산으로 해도 낙랑군의 인구는 설치 당시의 100의 5로 줄어들어 그 영역 또한 매우 축소된 가운데, 극히 일부지역에서 소수의 한족(漢族)과 친(親)중국계 조선인을 지배하는 형태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고구려의 무력(武力) 행동에 의해 축출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하기야 기년명전(紀年銘錢)이나 고분벽화의 묵서명을 근거로 낙랑, 대방군이 축출된 후에도 중국인들이 평양 황해도 일대에 많이 남아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전축분에서 나온 기년명전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대인 407년까지 만들어졌다고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고구려에 의해 낙랑, 대방군이 축출된 313년, 314년까지뿐 아니라 407년까지 평안, 황해도 일대에 중국인들이 남아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안악3호분의 묘주(墓主)를 전연(前燕)에서 망명온 동수(冬壽)라고 하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견해이다. 이 견해를 따를 경우,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중국인들이 동수가 죽은 357년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동수는 그들 중국인의 대표이거나, 혹은 그들 중국인을 지배하기 위해 파견한 존재였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주장은 314년까지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의 영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중국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사가 중국의 역사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중국 학계의 주장을 본의 아니게 지지하는 결과를 낳게 될 우려가 있다.

이들 견해와는 달리, 북한 학자들과 필자는 안악3호분을 고국원왕릉(故國原王陵)이라 보고 있다. 안악3호분의 묵서명에는 동수가 357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의 출신지는 유주 요동 평곽 도향 경상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수가 죽은 357년에는 요동이 유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묵서가 기재될 수 없다. 357년에 묵서명이 작성되었다면, 동수의 출신지는 유주 요동이 아니라 평주 요동으로 기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동수의 출신지가 유주 요동으로 기재되어 있음은 요동군이 유주에 속하였던 370년에서 380년 사이에 안악3호분이 축조되었고, 그 때 묵서명이 기재되었음을 뜻한다. 무덤의 노부행렬도에 '성상번(聖上繁)'이라고 한 표기는 국왕의 깃발을 의미하고, 370년에서 380년 사이에 죽은 군주가 이 무덤의 주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 시기에 죽은 고구려의 국왕은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무덤의 벽화에는 연화문 또한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벽화가 그려졌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372년이다. 고국원왕은 371년에 죽었지만 고구려에서는 3년만에 장례를 치렀으므로 373년에 무덤이 만들어졌다. 동수의 출신지가 유주 요동으로 기재되고, 연화문이 무덤에 그려질 수 있었던 것도 안악3호분이 371년에 죽은 고국원왕의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묵서명은 고국원왕에 앞서 357년에 죽은 장하독 동수의 업적을 기려 373년에 기재한 것이다. 이처럼 안악3호분이 고구려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고구려가 313년과 314년에 낙랑, 대방군을 축출하고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또, 314년 이후에 중국인들이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314년 이후에도 평안도 황해도 지역에 중국인들이 남아있지도 않았고, 그 이전에도 낙랑, 대방군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고구려에게 축출되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한반도 북부가 중국의 역사적 활동무대에 포함된다고 하는 주장은 역사적 진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 억지스런 주장이다.  

요컨대,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강역 내에서 건국되지도 않았고, 조공관계는 형식적 의례적 외교관계였을 뿐이고 실질적인 신속관계는 아니었기에 고구려를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한사군은 설치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쫓겨 가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축출되었기 때문에 한반도 북부를 중국의 고유 강역으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주장이라는 것이다.

◆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현재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간칭으로서 하나의 통일다민족국가(統一多民族國家)를 표방하고 있다. 영토가 넓고 여러 소수민족을 국민으로 다스리고 있는 중국에서는 어떤 민족을 중국 국민이 아니라고 하거나 어떤 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고 그 고민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으로 나타났다. 현재의 중국강역을 기준으로 그 경내의 모든 민족의 역사를 중국사(中國史)로 다루는 과정에서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옥저(沃沮),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의 역사가 중국 역사에 편입되어 설명되고 있다.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은 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따라 변강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상의 중국은 오늘의 중국보다 훨씬 적은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만리장성이 바로 그 증거로서, 중국은 오랫동안 북방민족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이 성을 경계로 지켜왔다. 이는 만리장성 이북의 땅이 역사상 중국인들에게 중국의 땅으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주변의 민족을 동이(東夷), 서융(西絨), 남만(南蠻), 북적(北狄) 즉 사이(四夷)라 하여 멸시하며 자신들과 구분해왔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과거의 중국(中國) 밖에 있던 주변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켜 설명함은 도리가 아니다. 중국이 현재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변강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고 역사의 귀속을 주장하는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도하게 역사의 귀속을 주장하는 것은 자칫 현재 한국에서 보는 것처럼 주변국을 자극하여 변강지역 주민들의 분리 독립 요구를 오히려 가속화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현재의 중국 국가체제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변강을 자극하여 중국의 붕괴를 촉진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3년 12월 9일 한국의 17개학회가 공동으로 중국의 고구려사(高句麗史) 왜곡 중단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시민단체들까지 나서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비판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로, 북한과 중국 지역의 고구려고분과 유적이 금년에는 함께 유네스코(UNESCO)에 등재될 전망이다. 또, 고구려연구재단이 설립되어 고구려사를 포함한 동아시아역사연구가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필자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동북아정세에 국가적 차원에서 어떻게 능동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제 필자가 제시하는 대응방안을 설명해보기로 한다.

첫째, 한국은 외교적 채널을 통하여 중국이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현재의 한중국경을 넘어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행위는 그것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남북한을 자극하고 이는 다시 중국 동북지역 주민들에게 영향을 주어 중국 국가체제의 붕괴를 오히려 촉진할 우려가 있으므로 중국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고 본다.

둘째, 한중 양국의 학자들은 역사상의 영토와 현재의 영토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한중 양국이 서로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과거의 영토를 수복하려 한다면 한중 양국간에 영토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는 한중 양국 어느 쪽에도 이롭지 않다. 앞으로 동북아시아에도 유럽공동체와 같은 경제협력공동체가 형성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양국 간의 국경이 어디인가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된다. 한중 양국은 상대편을 경제발전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선린우호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북방전략도 만주지역을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경제적으로는 적극 활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중국 각지에 진출하여 공장을 짓고 기업 활동을 하고 있고, 한국인 어느 누구나 자유롭게 중국을 여행할 수 있는 오늘의 현실로 보더라도 만주가 어느 나라의 영토인가 하는 것보다 해당 지역을 누가 더 발전시키고 이윤을 더 많이 창출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하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 뿐 아니라 동북재조(東北再造)라 하여 동북 3성의 경제발전과 개혁개방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북재조의 실체를 필자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동북 3성의 경제발전은 한국경제에 경쟁적 협력관계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동북경제발전은 탈북자나 북한 사회주의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로 인한 난민수용, 남북통일시에 조선족의 대량 한반도로의 유입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 될 것이다.

한국 역시 남북통일과 통일 이후 북한지역과 동북지역에 대한 장기적인 국가발전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남북통일이 되었을 경우에 북한지역에 어떤 경제체제를 적용할 것인가도 심각하게 고민해볼 문제이다.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전면적으로 시행해야 하겠지만 그럴 경우에, 남쪽의 부동산 투기꾼들은 북쪽으로 달려가고, 북쪽 주민들은 남쪽으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대거 내려올 것이 예상된다. 한반도 전체가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에 필자는 개인적으로 북한지역에는 토지와 부동산을 국유(國有)로 묶어놓고 나머지 분야에만 시장경제를 도입해야만 통일직후에 혼란을 줄이고 저비용으로 북한지역을 경제개발할 수 있고, 이는 남측 기업에게도 저비용생산구조를 제공하여 이윤창출에 기여할 것이라 생각한다. 좀더 바람직한 방향은 성급하게 남북통일을 하는 것보다 분단 상태에서 북한은 중국식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남측의 기업을 적극 유치하고 남측의 기업들도 동남아시아나 중국으로 진출하지 말고 북한지역에 공장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남북경협을 발전시켜 북한의 경제수준이 남한과 비슷하게 되는 시점에 가서 남북통일을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채택할 경우에도 통일 후에 북한지역의 부동산에 대해서 국유제를 유지함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심층적 연구가 필요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통일부를 포함한 관련기관에서 이러한 문제를 이미 연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고구려연구재단과는 별도로 남복통일이후의 북한지역과 중국 동북지역을 포함한 종합적인 국가발전전략을 연구하고 수립해야 한다고 본다. 중국 사회과학원처럼 모든 연구기관을 하나로 묶어 연구역량의 유기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하여 필요한 연구를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넷째, 멀지 않은 장래에 남북통일과 동북아시아경제공동체 형성으로 경제협력과 무역이 증가하면서 많은 인구가 한중간에 왕래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또, 중국경제가 수년 안에 한국경제를 추월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동북아시대 초기에는 중국에 한류(韓流) 바람이 불겠지만, 나중에는 한국에 한류(漢流) 바람이 불 것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너도 나도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 유학하고, 중국을 오간다면 한예민족(韓濊民族)이 한족(漢族)에 동화될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소리없는 전쟁으로,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우리 한예민족은 앞으로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 것이다. 우리 말을 지키고 우리 역사를 교육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민족이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 각 개인에게 거듭 우리 역사를 교육하여 그들이 우리 민족임을 각인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사(韓國史)의 교육과 연구가 지속적으로 가일층 강화되어야 한다.

끝으로 필자는 한중 양국이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삼아, 양국간의 선린우호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동북아시아를 세계의 중심지대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  

출처; 백산학회 編 '고구려는 과연 중국의 역사인가?' (2004년 版)

해설;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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