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 과정
무당은 신과 교통하여 신의 의사를 인간에게 전하고 또 인간의 의사나 소망을 신에게 고하는 영통한 존재이다. 이처럼 보통 인간과는 이질적이고 신비한 무당은 처음에 어떻게 하여 무당이 되는가? 무당이 되는 과정은 혈통을 따라 인위적인 세습에 의해 무당이 되는 세습무와 자연적인 강신에 의해 정신 이상(종교 체험)의 과정을 거쳐서 신의 의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무당이 되는 강신무의 2종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강신무의 종교 체험
강신무는 무당이 되는 초기에 반드시 신명이라는 신비한 명을 체험함으로써 영통력을 얻을 수 있다. 무당이 될 사람에게 신이 내리면 정신 이상 증후가 오고 신체에도 이상 질환 증세가 나타나 장기간 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증세가 약이나 의료 행위로서는 고칠 수가 없고 오직 강신한 신을 받아서 무당이 되어야만 낫는다는 데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따른다.
신병이 병인 것은 틀림없지만 신에 의한 이상 증세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강신무가 되자면 반드시 신명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또 이 신병은 무당이 되어 강신한 신을 섬겨야만 치료가 된다는 데에 종교 심리상의 문제가 따른다. 또한 신병이 병 증세로 나타나면서도 종교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병이 과연 신에 의한 종교적 현상인지 아니면 신과는 관계없이 단순한 정신 이상 증세인지를 분별하는 것도 어렵다. 그밖에도 무당에게 강신되어 무당이 신앙하고 있는 신의 존재는 또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 등도 문제이다.
신병 체험의 한계와 분포
신병은 강신무에 한해서 무당이 되는 초기에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과정이다. 곧 이 신병은 강신무가 영력을 소지할 수 있는 영력의 계기가 됨과 동시에 무당이 망아(忘我) 상태에 빠져 영계로 몰입되어 가는 '엑스터시'의 근원이 된다.
신병은 세습무 계통을 제의한 강신무 계통 곧 무당, 박수, 선무당류, 명두, 태주 등의 점쟁이류가 공통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밖에 지역에 따라서는 독경자(讀經者) 곧 경꾼, 경쟁이류의 무경(巫經)계통에서도 강신 초기에 신병을 체험하게 된다. 독경자도 당초에 독경 의식을 인위적으로 학습해서 하는 것과 강신으로 인해 신병을 체험하고 나서 신의 의사에 따라 나중에 독경 의식을 학습하게 되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강신으로 인한 신병의 분포는 현재 강신무와 독경자가 존재하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이같이 강신에 의한 신병의 체험자가 지금도 전국에서 속출하고 있지만 이 가운데 세습무가 분포된 영남, 제주지방에서는 강신무와 세습무가 명존하여 신병이 존재하면서도 세습무에게는 신병 체험과 관계없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한편 남녀의 차로 나타나는 신병의 범위를 보면 무녀가 지배적이고 남무는 극히 적다. 이것은 무당이 대부분 여성이고 특히 강신무의 대개가 무녀이며 남무의 경우는 박수류의 것으로 그 수가 아주 드물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신병 체험의 증상
신병의유형 신명의 증상은 성무자(成巫者) 개인이 처한 문화적 지역성에 따라 차이가 있고 또 성무자 개인의 생활 환경에 따라 증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신병의 증상을 유형별로 확연히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개인에 따라 신병의 증상에 차이가 있으면서도 내적인 본질면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나타나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생적 유형이라는 입장에서 신명을 이야기해야하며 발생적 기준은 신병을 체험한 무당 자신이 진술하는 신병증상의 현상에 한한 것이다.
무(無)원인의 발생 형태의 경우는 원인없이 시름시름 앓아서 밥을 못 먹고 몸도 마르며 정신까지 허약해지는 증상이다. 이런 유형이 신병에서 제일 많이 나타난다.
돌발적 정신 이상에 의한 발생 형태의 경우는 갑자기 미쳐서 일어나는 증상인데, 일반적인 정신 이상 증상과는 달리 종교성을 배경으로 한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신체 질환 돌발에 의한 발생 형태의 경우는 신체에 질병이 돌발하여 신병으로 발전해 가는 형태의 것이다.
현몽에 의한 발생 형태의 경우는 꿈속에서 신이나 사령 또는 해괴한 일을 본 것이 원인이 되어 발명하는 것인데, 특히 정신 이상 증세가 급진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신이 현몽했을 경우엔 계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현몽에 의한 발생형의 빈도는 적다.
충격에 의한 발생 형태는 외적 충격이 원인이 되어 정신이 허탈해진 상태에서 신병으로 발전해 가는데 역시 빈도수가 많지 않다.
이상의 발생 형태 분류는 필자가 l960년부터 현재까지 무속의 전국적인 현지 조사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강신무의 신병 자료를 기초로 한 것이다. 신병 증상의 실례는 다음과 같다.
1968년 3윌 11일에 조사된 서울 영등포구 사당동 l7통 3반에 거주하는 무녀 박명순 씨(당시 53세)의 예를 보면, 박씨는 15세에 결혼하여 18세 때 첫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가 백일도 되기 전에 자다가 밤중에 갑자기 죽어서 박씨는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죽은 3일 뒤부터 눈만 감으면 박씨의 눈에 무신도가 여러 개씩 연속적으로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엔 잠을 자지 않을 때에도 눈을 감으면 베옷을 입은 상제들이 눈에 어려 보였다.
이런 증세를 고친다고 집에서 장님 경쟁이를 불러다 경을 읽기로 했다. 이때 박씨는 벽장에다 촛불을 켜고 빌고 있는 자신의 환상을 보았다. 그날 밤 신령님들이 칼과 깃발을 날리며 말을 타고 자기집으로 몰려드는 꿈을 꾸었다.
20세가 되면서부터는 꿈속에서 산에 기도를 하러 가면 밤에 점잖은 할아버지 한사람이 나타나 박씨에게 밥을 주어서 그것을 받아든 박씨가 하늘로 올라가며 그 밥을 새와 짐승들에게 나누어 주는 꿈을 꾸었다. 또 동해의 용궁에 가는 꿈을 꾸고 자기가 금빛 찬란한 바다위를 걸어다니는 꿈을 꾸면서 제주도라고 하는 데를 가 보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점잖은 할아버지 한 분이 커다란 책 한 권을 주어서 받는 꿈을 꾸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남편은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하면서 여색에 빠지게 되어 자연히 부부 사이가 멀어졌다. 점을 쳐 보니 자신에게 신이 내릴 팔자라 하였다.
52세가 되는 어느 날 밤, 자다가 별안간 뱃속이 답답하여 전깃불을 켜니 몸이 떨리며 흔들리고 죽은 고모(고모는 무녀였다)가 몸에 실렸다고 생각되었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새 치마를 꺼내 입고 방문을 열며 "관성제군(關聖帝君)"과 "열두대신"을 입으로 의쳤다. 그러다가는 자리에 누워 자다가 또 벌떡 일어나 고모집 뒤에 있는 원효로의 부군당으로 뛰어 들어가서 당문을 열고 "관성제군"을 외치며 각 신령을 찾아 그 신명을 불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뒤 날을 잡아 무당을 데려다가 강신굿을 하여 신을 받았다. 굿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 아직 독립해서 굿을 할 수는 없으나 조무(助巫)로 굿을 조력하였다. 이렇게 강신굿을 하여 신을 받고 나서는 심신이 좋아졌다.
1968년 3월 7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산 7번지에 사는 장명훈(남 42세) 씨의 강신 체험을 보면, 장씨는 7세 때부터 마음이 들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놀 때에는 여자 동무들과 같이 놀았으며 장구를 치고 춤추는 것이 즐거웠다. 그가 9세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인 11세 때에는 공부가 하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앞이 어두워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되고 마음은 더욱 들떠서 마침내 학교를 중퇴하였다. l7세 때는 방에 누워 있다가 천장 한 귀퉁이에 작은 구슬 하나가 보이기에 일어나 잡아당겨 보니 염주가 나왔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매일 옥수(王水)를 떠 남산신께 바치고 재배하였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 일본에 건너가 철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다가 l9세 때 귀국하였다.
그가 2l세 되던 해 아버지 생신에 소를 잡아서 그 고기를 먹었는데 들뜬 마음이 더욱 심해지면서 앓아눕게 되었다. 어느 날 꿈에 과천 관악산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내려와 글씨 30자가 씌여진 종이를 내놓으며 그 가운데 한 자를 짚으라 하여 글씨 3자를 짚으니“너는 때가 되어서 오는 2윌에 알 일이 있으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또 그 뒤 꿈에 백마가 집으로 들어와 장씨를 물어 삼켜서 그는 백마의 뱃속에 들어갔다. 말의 뱃속에 들어가 보니 말의 내장이 환히 들여다보였고 뱃속에서 나와서는 안올림벙거지를 쓰고 백기, 홍기를 들고 그 백마를 타고서 “나는 백마장군이다"라고 외쳤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날부터 그의 귓가에서는 늘 흰옷을 입으라고하는 음성이 들렸다. 그래서 흰옷을 입고 있으면 개, 닭, 벌레가 물려고 덤볐다. 그래서 피하여 대문 밖으로 나가면 누가 똥을 끼얹어 옷을 갈아입는데 하루에 옷 3벌을 갈아입은 날도 있었다.
이런 증세가 계속되던 어느 날 용산역에서 사람 셋이 와서 신장기(坤將旗)와 꽃을 가져가라 하여 용산역에 가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허탕을 친 뒤부터 장씨는 아무나 붙잡고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대문으로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호랑이를 데리고 백두산이라 쓴 기를 손에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조금 지나 그 뒤로 덕물산 최영 장군(崔瑩將軍)이 짚신 신고 칼을 들고 들어왔다. "저분이 누구냐"고 물으니 귓속에서 "최영 장군이다"라고 신명을 일러주었다. 그래 장씨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데 하늘에서 명주 두 필이 늘어져 내려왔다. 사다리가 되었으니 올라오라는 분부가 하늘에서 내렸다. 장씨가 명주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보니 점잖고 위풍있는 대왕 두 분이 앉아 있다가 "너는 꽃밭에 물을 줄 사람이니 어서 내려가라" 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누군가가 발길로 차서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그가 떨어진 곳은 백사장이었다. 그 백사장에는 글씨 30자가 있었는데 지금 장씨의 집 신단에 모신30위의 무신이 그때 백사장에 적혀 있던 30자의 글씨였다고 한다.
장씨는 이런 증세가 계속되어 그가 2l세 때 노량진에 사는 박수김씨가 신이 내렸다고 내림굿을 해주었는데, 그때부터 미친 증세가 없어졌고 김씨를 따라다니며 굿하는 일을 배워 박수무당이 되었다. 27세 때 결혼하였으나 첫날밤부터 아내가 싫어 한방에 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결혼을 하면서부터 영험을 잃게 되었다. 그러면서 장씨는 여자가 되어 태조대왕을 모시고 동침하는 꿈을 꾸고 자유당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자는 꿈을 꾸곤 하였다.
장씨의 성장 과정을 보면 그의 부친은 무학(無學)으로 장사를 했는데 성격이 거칠었고 그의 어머니는 장씨를 낳고 백일도 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얼굴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다. 장씨는 11명의아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로서 서모 밑에서 늘 침울한 나날을 보냈다.
신병 증상의 특징
신병은 발생 초기에 증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다음과 같온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발단 꿈이나 외적 충격에 의하여 일어나는 경우보다는 까닭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식성 대개가 밥을 먹지 못하고 편식증이 생겨 냉수만 마시거나 또는 어, 육류를 전혀 먹지 못하고 소화불량 증세가 나타난다.
신체 상태 몸이 말라 허약해지고 사지가 쑤시거나 뒤틀리는 형, 한쪽 골이나 한쪽 가슴, 한쪽 어깨, 한쪽 팔이 아픈 편통증이 일어나는 형, 혈변(血便)이 장기간 계속되는 형, 늘 답답하고 어깨가 무거워지는 형 등의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다.
정신 상태 마음이 들떠 안정되지 않으며 꿈이 많아지고 꿈속에서 신과 접촉하는 성스러운 장면을 본다. 꿈의 횟수가 많아지면서 의식이 희미해져 꿈과 생시의 구분이 흐려지며 이 상태에서 생시에도 신의 허상, 환각, 환청을 체험한다. 이런 상태가 심해지면 미쳐서 집을 뛰쳐나가 산이나 들판을 헤맨다.
증상의 경과 처음부터 정신 질환으로 되는 예도 있으나 대부분 신체 질환으로부터 정신 질환으로 이행한다.
병의 기간 장기적인 병이며 평균8년, 아주 긴 기간은 약 30년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치료 의약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으며 의약 치료는 신병에 역효과를 가져와 증세가 악화된다고 믿는다. 이 증상은 강신한 신을 받아서 내림굿인 강신제를 통해 무당이 되어야만 치료된다. 나았다고 하여 무당의 일을 그만두면 다시 전과 똑같은 증세가 일어난다. 여기서 신병의 심리적, 종교적 양면성을 발견하게 된다.
종교적인 각도에서 보면 신병은 신의 계시에 의한 선택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병 환자들이 체험하는 신의 현몽, 신의 환상, 신의 말이나 굿하는 소리에 관계되는 환청과 환각이나 빙신(憑坤)상태에서 발성되는 신명을 부르거나 신과 관계되는 내용을 말로 하는 환성에서 무속의 종교성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외국과의 비교
앞에서 보아 온 한국 무당의 신병이 시베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의 샤먼이나 주술사가 초기에 체험하는 병적 증상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시베리아 야쿠트족 샤먼들은 샤먼이 되는 초기 단계의 체험에서 그들의 몸뚱이를 쇠갈고리로 사지의 각을 떠서 팔과 다리를 분리시키고 살을 갉아 내어 뼈만 남기고 눈알을 잡아빼거나 팔과 다리를 칼로 토막토막 내고 몸통만 내동댕이쳐 며칠이고 버려 두었다가 다시 잘라 낸 뼈마디와 사지를 맞추어 놓는 체험을 겪는다. 물론 이것은 정신 이상 상태에서 겪는 환상이다.
야쿠트족 샤먼들의 설명에 의하면 마령(魔靈)이 샤먼이 될 사람의 혼을 데리고 지하계에 있는 마령의 집 속으로 들어가 3년 동안 머무는데 여기서 샤먼이 되는 계기를 얻는다. 그 마령은 샤먼이 될 사람의 머리를 잘라 옆에 치워 놓고 다시 몸뚱이를 잘게 쪼갠 다음 그 부분마다 여러 가지 병의 귀신을 고루 분배시킨다. 샤먼이 될 사람은 오직 이와 같은 시련울 겪어야만 구제될 힘을 얻어 그의 뼈에는 새로운 살이 오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새 피를 받게 된다.
퉁구스족 샤먼들도 초기에 샤먼의 조상신들이 와서 샤먼이 되는 계기를 부여해 준다. 이때의 조상신들이 부여하는 것은, 샤먼이 될 사람이 의식을 잃고 땅에 쓰러질 때까지 화살로 꿰뚫어 쑤시고 그 다음에는 몸뚱이에서 살점을 찢어서 때어 내고 뼈를 추려 낸다. 그리고 몸에서 흐르는 피를 조상신들이 마시고 목을 쳐서 머리를 끓는 기름솥에 던져, 뒤에 샤먼의 복장에 부착할 금속 제품의 조각으로 만들어 내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부리야트족의 샤먼들도 초기에 조령(祖靈)들로부터 고문을 받으며 사지와 몸뚱이를 토막토막 잘라 내는 체험을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술사나 주의(呪醫)들은 초기의 체험에서 먼저 동굴로 들어간다. 그러면 토템 영웅신 둘이 나타나 그를 죽여서 몸을 갈라 두 쪽으로 배를 가르고 내장의 모든 기관들을 꺼낸 뒤 주술적인 물체를 넣어 다시 제자리에 맞춰 꿰매 놓는다. 다음은 그 토템의 영웅신이 그의 모든 뼈를 추려다 주술적인 물체와 함께 다시 제자리에 박아 놓는다. 이 기간 동안은 주술의 지배자가 주술사가 될 후보자를 감시하며 불을 밝히고 그 후보자의 망아적(忘我的) 체험을 관찰한다.
아메리카 샤먼들의 경우도 초기에는 조령들로부터 죽음을 당하는 체험을 하고 맨발로 불 위를 걸어가면서 치아나 눈동자가 찢겨 나가는 것을 체험한다. 또 북아메리카의 샤먼들은 초기에 독한 약을 먹고 엑스터시에 빠져 조령들로부터 고문을 당하는 동안 땅 위에 시체처럼 누워 거적으로 덮어 놓는다. 이 경우는 인위적인 '엑스터시'로 볼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메디신 맨(Medicine man)'이 영력을 얻는 초기에 신비로운 꿈, 불가해한 병,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환각을 보며 신들이 찾아와 자신의 머리, 팔, 다리 등 신체를 칼로 잘라내는 환각을 체험한다.
인도네시아의 '마낭(Manang-shaman)'도 위의 예와 유사한 체험을 하며 자신의 머리를 잘라 내고 뇌를 꺼내 마령의 신비력을 넣어 다시 머리 안에 넣는 체험을 한 다음 엑스터시에 빠져 하늘을 여행하게 된다.
지금까지 보아온 샤먼,주술사, 주의들이 초기에 반드시 신비적인 병을 앓고 이 신비적인 명에 의해서 영력이나 주력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주술자가 되어 신을 섬김으로써 이 병이 완치된다는 것이 일치되고 있다. 또 증상의 내용을 보면 이상스러운 꿈이나 망아적 환각 속에서 자신의 신체가 신에 의해 할단(割斷)되었다가 다시 부활하고 이런 죽음이 영력을 얻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 일치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증상의 신비적 체험은 영력을 행사하는 직능자들이 공통적으로 거치는 과정이 됨과 동시에 이것은 또 미개 문화권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계적 공통성을 갖게 된다. 특히 사지 할단의 모티브와 죽었다 살아나는 재생의 모티브는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종교적 체험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심령의 차원을 바꾸는 인간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상의 미개 지역 샤먼의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은 한국의 무당이 체험하는 신병과 비교할 때 심도의 차이는 있으나 성격적인 면에서는 같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종교 체험 현상이라 생각된다.
한국이나 일본 등 문화 민족 지역에서 사지 할단이나 주력(呪力)주입을 위한 신체의 해체 모티브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미개 민족의 샤먼이 체험하는 격렬하고 야성적인 원시 그대로의 체험에 문화적 사고가 더해져 그 원초적인 것이 여과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양자의 차는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신병의 의미(종교적 재생)
신병의 특징은 꿈, 환상, 환청, 환성의 내용이 주로 신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 증상의 치료 방법 역시 신을 맞아 무당이 되어 굿에 종사해야만 낫는다고 믿는 데서 신병이 종교 체험이라는 확증을 얻게 된다.
한편 종교가 인간의 심리 현상과 격리될 수 없는 것이고 또 신병이 일반 질병 증상과 다른 불가해한 정신병 계통이라는 데서 신병은 종교적, 심리적 양면성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가 원인이 되어 정신 이상이 생겼더라도 그 자신이 처한 문화적 배경에 따라 증상이 다르다.
이렇게 볼 때 신병의 현상적 증상은 기존의 무속적 종교 질서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종교 현상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곧 신병의 현상적 구조를 보면 신과 인간이 수직으로 직결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 활동에 의해 창조된 문화 현상으로서의 기존종교 현상이 존재하고, 전승되고 있는 기존의 종교 현상 속에 신은 이미 존재한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의식 속에 어떤 형태로든지 존재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마음이 기존의 종교에 몰입하여 그 속에서 기존의 신과 수직 관계를 맺어 신을 체험할 때 인간의 사고 단계가 현실과는 이질적인 것이어서 신과의 수직 관계가 성립되는 신화적 사고의 차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관계로 신병은 전통화한 기존의 종교적 현상을 전제로 하여 그 속에 몰입될 때 신을 의식하고 체험하는 종교적 체험 현상으로 보인다. 종교적 체험은 신의 인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인간 이상의 초월적인 절대자 신을 만나 그 능력을 체험해서 전수받아 그 절대자와 같이 행동화하려는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무의 신병은 신이 선택된 인간에게 내려 주는 계시적 체험이라 볼 수 있고, 그 선택된 인간은 이와 같은 계시적 체험을 통해 완전히 의식 구조가 바뀌어 비범한 초월자로 되어 신의 추종자나 신격적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신병의 종교적 재생 의미는 앞에서 예시한 시베리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 샤먼의 이니시에이션에 나타난 공통적인 사지 할단의 '디스멤버먼트(dismemberment)' 모티브와 이 사지 할단의 체험 기간중에 가사(假死) 상태로부터 부활되는 재생의 모티브에서 그 맥을 짚을 수 있다.
특히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샤먼이 독한 약물을 먹고 인위적으로 엑스터시에 빠져 샤먼의 후보자가 가사 상태에 이르면 그를 거적으로 덮어 죽은 시체로 가정하는 의식은 샤먼의 이니시에이션에 대한 종교적 재생의 원래 의미를 의식으로써 설명해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성무 의식(강신제)
앞에서 본 신병 증상이 나타나면 먼저 병으로 보고 백방으로 손을 써서 치료해 보려고 노력했다가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찾아가 최후로 점을 보게 된다. 여기서 강신으로 인한 신병이라는 진단이 내리면 어쩔 수 없이 신의(神意)를 거역할 수 없다고 하여 강신한 신을 받아 무당이 되는 성무 의식의 굿을 하게 된다. 이 굿을 내림굿 또는 신굿이라고 부른다.
내림굿은 신이 무당이 될 사람에게 내린다는 강신의 뜻으로 사용된다. 신굿은 인간의 소망을 기원하는 일반적인 굿과는 다른 전문적인 '강신굿의 신사(神事)'라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의 소명에 의한 신병으로 진단되면 날을 잡아서 내림굿을 한다. 내림굿을 주관하는 무당은 무의 사회에서 덕망있는 유능한 무당이라야 한다. 굿을 하는 날에는 관심있는 부녀들이 굿판에 모여든다. 굿하는 장소는 강신자의 집이나 굿을 주관하는 무당의 집 또는 굿당 가운데 형편에 따라 장소를 택하게 된다.
내림굿 절차는 그 지역 무속의 일반 절차에 따르는데, 특별히 내림굿이라는 신맞이 절차가 따로 첨가되어 대개 조상굿을 끝낸 다음 곧바로 하게 된다. 서울 지역을 보면 부정굿, 가망굿, 상산굿, 제석굿, 신장굿, 조상굿을 하고 내림굿에 들어간 다음 나머지의 굿절차가 계속된다. 굿상에 바치는 제물도 일반굿과 같다. 내림굿에 사용되는 신명상(神名床)이 따로 준비되고, 일반적인 굿 절차는 굿을 주관하는 무당이 맡아 하는데 내림굿만은 강신자가 혼자서 주관한다.
내림굿에 들어가게 되면 굿에 사용되는 무복 전부(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서울 지역의 무복은 약 10종)를 강신자에게 포개어 입혀서 굿상 앞에 절을 시키고(절의 횟수는 일정치 않고 정성에 따라 많이 할수록 좋다), 굿상 앞에 세워 둔 채 무당이 강신 축원을 하면서 장구와 제금 등 무악기를 격렬하게 두드린다. 강신자는 제정신이 아닌 채 발이 떨어지지 않다가 신이 내리면 어깨가 떨리면서 그 진동이 전신으로 번지며 발이 마릇바닥에서 떨어지며 그때 맹렬한 도무로 무악에 맞춰 황홀경 속에서 한동안 춤을 춘다. 그리고 나서 바깥쪽으로 향해 차려 놓은 신명상 앞으로 내림굿을 해주는 무당에게 인도되어 자신에게 내린 신이 어떤 신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신병상 위에는 9개의 종지에 쌀, 참깨, 콩 따위의 곡물을 각각 담아 놓고 백지로 덮어 잡아맨 것이 놓여 있다. 무당의 지시에 따라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이든 마음대로 종지 하나를 강신자가 집어들면 무당이 그 속에 든 곡물을 확인하여 신명을 가르쳐 준다. 쌀은 제석신, 콩은 군웅신, 참깨는 산신으로 상정한다. 이때 알아낸 신명의 신이 강신자에게 내린 신으로 일평생 그가 모시게 될 몸주신이 된다. 그리고는 말문이 열려 신의를 전하는 공수가 내린다. 이때의 첫 말문이 제일 영통한 것이라 하여 이웃에서 모여든 부녀들이 앞을 다투어 돈을 걸고 자기들의 신수점을 친다. 이 신점이 끝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림굿 절차가 끝나고 그 다음의 일반굿 절차를 계속하여 굿을 전부 마치게 된다.
이후로는 강신자가 집에서 몸주신을 봉안하고서 내림굿을 주관해준 무당을 스승으로 삼아 스승 무당이 굿하는 데를 따라다니며 조무노릇을 하면서 굿을 완전히 익혀 독립할 때까지 무사(巫事)를 배우게 된다.
이 스승 무당과 강신자 사이에는 내림굿을 해준 것을 인연으로 무업(巫業)의 조직이 성립되어 스승 무당을 신어머니, 강신자를 신딸, 박수는 신아들이 된다. 그러나 신병에 걸려 내림굿을 하였다해서 전부 무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강신자의 재능에 따라 장차 큰무당이 되느냐 아니면 평생 선무당이나 조무로 일생을 마치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 우선 암기력이 좋아야 며칠이고 계속해서 할장편의 구송 서사물 무가를 외울 수 있다. 무당들이 대체로 무식했기 때문에 굿에 따라다니며 스승 무당의 무가를 들어서 암기했다. 가끔 한글을 깨우쳐 무가를 기록한 책을 놓고 외는 경우도 있다. 무가를 외고 굿 절차를 배우는 학습 기간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략 3년의 기간이 필요하다.
이상의 성무 의식은 다음과 같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첫째로 신의 소명을 자신이 직접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곧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는 신비적 체험을 하고 무당이나 점쟁이가 막연하게 신병이라고 알려 주던 것이 자신이 직접 신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그 신의 소명에 대한 종교적 사실을 인식하게된다.
둘째는 소명한 신의 사자로 무당이 되어 추종하겠다는 선서의 의미를 암시한다. 여기서 자신에게 내린 신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확인된 신을 몸주신으로 평생 봉안하며 영력의 원천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이 소명한 신을 굿에서 자신이 최초로 추대하고 그 밑에서 사자로 무당이 된다는 것을 민중 앞에서 공증한다는 암시적인 의미가 있다.
셋째는 자신의 영력을 민중이 심판하여 민중으로부터의 공공적 신권자로서의 무라는 것을 공인받아 무의 자격을 획득한다는 의미가 된다.
성무 의식과 같은 성격의 것이 시베리아,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아 등지의 샤먼과 주술사들의 이니시에이션에도 나타나는데 민중의 공인을 획득하는 의미가 있다. 시베리아 야쿠트족 샤먼의 이니시에이션에 나타나는 한 예를 보면, 민중인 씨족원들이 모인 가운데서 성무 의식과 같은 의식을 세 번 치러야 하는데 이때 신 앞에 사자가 되었음을 선서하고 의식을 위해 옮겨다 심은 백화(白樺) 나무 위로 샤먼이 될 사람이 올라가 그의 영혼이 천상계로 여행하여 영계로 왕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때의 백화나무는 우주의 중심축에 서 있는 우주의 통로를 의미하는 우주적 성수(聖樹)이기 때문에 이 우주의 성수를 통해 지상과 천상의 왕래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세습무의 성무 과정
강신무가 영통력을 갖고 신과 교통하여 영계를 왕래하는 데 반하여, 세습무는 영력이 전혀 없이 오직 굿을 집행하는 종교 의식상의 사제권에 국한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이 세습무는 무속상의 종교적 통제권을 유지하면서 세습적인 계승 체계를 갖는 것은 이 계통무가 갖고 있는 사제의 세습적 계승권에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습무는 사제에만 그 기능이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영감이 전혀 없어서 이것에 의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은 전부 다 점쟁이에게 의존하고 있다. 곧 굿을 해야 하는 이유와 굿할 날짜의 택일을 점쟁이가 영력에 의해 결정해 주면 세습무는 이에 따라 굿을 한다. 점쟁이의 영점(靈占)말고 세습무가 점에 준하는 일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영력에 의한 점이 아니고 책력을 놓고 육갑이나 일진을 짚어 신수를 보는 정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굿할 날을 택일하는 예도 있지만 호남 지역에서는 영력에 관한 문제는 일단 점쟁이(점바치)에게 위임하는 이원적 분화 체계가 서 있다.
무속상으로 강신무가 영력에 의해 신의 뜻에 따라 무가 되는데 이것을 선천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라 한다면, 세습무의 성무는 후천적이고 인위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무가 인위적으로 세습되는 밑바탕에는 오늘날 현대인의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고대 사회의 종교적 제도의 사회성이 깔려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무의 단골 조직
호남 지역에서는 무를 단골(당골, 당골네, 당골에미, 당굴, 단굴)이라 부르고 일정한 관할 지역인 단골판을 갖고 있다. 단골판은무의 조상 대대로 그 소유권이 후대 무에게 계승되고 있다.
단골판은 자연 부락 단위 또는 문중 단위로 구획되어 단골무 한사람이 5, 6개 부락에서 많으면 l0여 개 부락까지 소유하게 되어 보통 5백 호 안팎으로부터 많으면 l,500호 정도까지 소유한다. 그래서 단골은 자기의 단골판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요청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보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굿을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주민들은 단골에게 굿이나 기타 신사를 보살펴 준 대가로 매년 보리와 벼를 철마다 제공해야 한다.
단골에게 제공하는 양은 보리와 벼가 각각 2,3되 많으면 1말이 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현재도 단골에게 숫곡식을 바치는 곳도 있으나 대부분의 지역이 받걷이 또는동냥이라 하여 단골이 자기의 단골판 안에서 거둬 가고 있다. 그러나 해방 직전까지만 해도 철이 되면 숫곡식 1섬씩을 단골 집으로 가져왔다는 말을 현지의 노무(老巫)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단골판은 철저하게 소유권제도가 실시되고 있어서, 다른 단골이 타인의 단골판 안에서 굿을 하는 일이 그들의 계율로 금지되고 있으므로 단골판이 없이는 굿을 할 수 없다.
단골이 다른 지방으로 이사가면 원래 가지고 있던 단골판을 팔고 이사가는 지방에 가서 새로 단골판을 사야 한다. 또 개인의 사정에 의해 무업을 중단할 경우에는 형편에 따라 단골판을 세 놓기도 한다. 요즘도 이와 같은 단골 조직의 규율에 따라 단골판이 현금으로 매매되고 있다.
오씨(1968년 7윌 29일 조사, 전남 완도군 노화도 거주, 남, 공인巫樂士,74세)는 전남 해남군 부평면 남창리에서 살다가 l963년 3월 4일 현 거주지로 이사와서 단골판 4백여 호를 단골 박모씨로부터 소유권에 대한 권리 7만 원을 주고 샀다. 그런 뒤 단골판을 확장하여 9개 부락 총 1,500여 호의 단골판이 되었다.
이와 같은 성격의 단골판을 기반으로 무가 혈통적 세습에 의해 계승되고 있는데, 이 단골판이 현재는 무속상의 종교적 소유권이 적용되는 특정 관할 구역에 지나지 않지만 그 역사상의 의의는 고대의 정치, 사회적 비중을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
세습무의 무 계승 체계
호남 지역말고도 영남, 제주도 지역과 호서 일부 곧 경기도 화성군을 포함한 층남, 충북 지역도 세습무가 계승되는 지역인데 이곳에서는 무를 학습하여 혈통을 따라서 무가 계승된다. 그러나 무의 계승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은 무녀가 남자 쪽인 조(祖), 부(父), 자(子),손(孫)으로 세습되면서도 무의 신사를 주관하는 것은 그 처인 여자가 맡아서 한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세습무의 분포 지역인 제주도에서는 무의 계승권과 신사의 사제권을 남자쪽이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
이렇게 무계가 남자 쪽을 따라 혈촌에 의해 세습되고 여자는 8, 9세부터 무가를 암기해서 성장하면 무의 아들과 결혼하여 시댁에 들어가서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굿판에서 굿하는 절차와 기능을 배우게 된다. 결국 가계를 잇는 사제권은 남편에게 이어지고 그의 처는 사제권자인 남편에게 사제의 기술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무속상의 사제권만 가지고는 민간인에게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또 하나의 고충이 이 세습무에게 따른다.
강신무는 영적 카리스마(charisma)로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만, 세습무는 이 영적 카리스마 대신 제도적 카리스마에 의한 사회적 제도화의 현상이기 때문에, 영적 카리스마가 강화되어 사회적 기능으로 확대된 뒤의 얼마 동안은 이 제도적 카리스마현상으로서의 그 사제권의 계승자가 보다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제도적 카리스마로 군림한 세습무는 종교 의식을 제도적 카리스마 이전보다 강화시켜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는 데에 주력하게 된다. 그 결과 종교 의식으로서의 굿 전과정이 지극히 상징적이면서 이것이 예능화하기에 이른 것이라 생각된다.
세습무가 지니고 있는 무가(巫歌)의 문예적 발전과 음악, 무용의 다양한 예술적 경지는 바로 위에 말한 종교 의식의 조직화 현상으로 보인다. 세습무의 굿이 종교 의식의 조직화에 신경을 쓴 나머지 그 절차를 신중히 섬세하게 다루는 과정에서 차츰 예능화하여 민간인들로부터 '놀이굿'이란 이름이 붙는가 하면, 강신무는 영적 카리스마를 위주로 하여 주로 영적인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다.
앞에서 제기된 단골 제도를 다시 보기로 한다.
강신무가 아직도 신화의 차원에서 신과 수평적 대화를 교환하고 있다면, 세습무는 신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신을 향한 무의 일방적인 의사 전달 형식이다. 강신무는 무의 의사를 신에게 전달하고 신의 의사를 또 인간에게 전달해 주며 접신 상태에서 영계를 탐지한다. 또 강신무는 한 지역 안에 얼마든지 그 영력의 기능에 따라 존재할 수 있다. 곧 강신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한 지역 안에서 신과 직접 수평적 관계를 맺고 있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러나 세습무는 한 지역 안에 무 하나가 존재하는 것을 윈칙으로 한다. 여기서 무가 한 지역에 무 하나만이 존재하기까지는 이것이 사회적 제도화의조직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곧 강신무의 초단계적 혼돈 상태에서 조직적 제도화의 체제로 접어들어 마침내 무의 신권적 사제권이 확립되어 사회적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무의 사회적 제도화를 통한 발전을 2단계 진화 과정으로 본다면, 이 단계의 무가 갖는 주요한 기능은 점차 사회 전반의 공공성을 띤 집단체의 사제로 집약되면서, 직능상의 전문화 내지 초인적인 존재의 신권적 통수권(統帥權)으로 인해 사제권이 사회적으로 확대, 정착되어 세습화의 단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2단계 무의 진화 단계와 같은 것은 시베리아 북부의 에스키모족과 부리야트족의 샤먼, 남부 시베리아의 세습 샤먼을 비롯하여 남아프리카 남부, 수단, 말레이지아, 수마트라등지의 주의(呪醫), 동부 아프리카 왐부케족의 마술사가 세습적으로 계승되어 추장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부족의 추장이 공적 주술사로서 세습되고 있는 것을 그 진화상의 예로 비교할 수 있다. 한편 기독교가 l세기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교회에서, 2세기의 사제적 감독의 지도자에 의해 교회가 조직화되어 사도권의 계승이 확립된 것도 종교 진화의 한 예로 비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무가 일반 종교사적 진화 단계에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세습무의 혈통적 세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남 지방의 단골이 대대로 그 소유권을 상속하고있는 것도 단골판의 상속 제도에서 입증된다.
동부 아프리카 여러 부족들의 주술사가 추장으로서 신권적 기능에 의해 부족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것과 같이 단골이 과거에 그들의 소유권이 미치는 단골판 안의 주민들로부터 신권적 기능으로 세금 또는 신께 바치는 공물로 매년 신곡이 날 때마다 곡식을 거둬들였다. 이것이 오늘에 와서는 그 신권적 기능이 약화되어 곡식을 받으러 다니기도 하고 단골판을 매매하기도 한다. 따라서 단골의 소유권과 그에 따르는 상속 제도는 오늘날에 이르러 단순한 무속의 종교적 관할 구역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단골판을 전기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메리카 인디언족의 주술사와 비교해 볼 때이 단골판은 무가 제정자로서 일정한 지역의 영토를 관할하였던 그 영토권에 대한 잔해가 제정이 분리된 뒤에도 원래의 보수적 신앙성을 고수하며 계속 사제권으로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 자료는 <김태곤: 한국의 무속>에 실린 글입니다.
첫댓글 좋은 자료내요 하나찜 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