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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테인스와 컨츄리 연주가 얼 스쿠럭스 의 연주
치프턴스의 월드 와일드한 겔틱 음악
앨범의 주인공은 치프턴스 The Chieftains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밴드다. 앨범의 부제를 보면 이들이 40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앨범의 타이틀을 다시 한 번 보면 이들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월드와이드하게 음악을 연주해왔음도 알 수 있다. 이들이 40년 동안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연주한 음악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단 음반에 실린 음악들을 훑어보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자신들이 참여한 영화 사운드트랙에서 커트한 것들이다. 그래서 이 앨범에 게스트로 초빙된 음악인들, 이른바 피처링 아티스트(featuring artist)의 면면은 월드와이드하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트 가펑클Art Gafunkel,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 조니 미첼Joni Mitchell,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 린다 론슈태드Linda Ronstadt, 스팅Sting 등 한 시대를 풍미한 국제적 스타들의 이름이다. 밴 모리슨Van Morison,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0' conner, 코어스The corrs 등도 앞서 언급한 인물들 못지않은 국제적 스타들 이지만 치프턴스와 같은 국적을 가진 '아이리시'들이기에 더 각별해 보인다.
로스 로보스LosLobos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멕시코계 미국인들로 구성되어 이른바 텍스-멕스(tex-mex)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는 록 밴드다. 텍스-멕스가 무엇인지, 린다 론슈태드와 로스 로보스가 왜 함께 어울리고 있는지는 뒤에 언급할 것이다. 지금은치프턴스와 함께 작업한 음악인들이 아일랜드 음악과는 거리가 먼 경우도 포함된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 하다.
다른 한 트랙에서는 중국 민속악기 앙상블의 협연이 전개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트랙은 밥 말리Bob Marley의 고전인 <Redemption Song)을 밥 말리의 아들인 지기 말리Ziggy Muley의 노래에 맞추어 연주한다. 밥 말리는 자메이카 출신의 전설적인 레게 뮤지션이자 블랙 파워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이렇게 자메이카의 '흑인' 음악을 아일랜드의 '백인' 밴드가 연주하고있는 것이다. 음악들이 모두 월드 와이드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치프턴스의 음악은 그렇다. 이들의 40년 동안의 활동을 통해 아일랜드의 지방 음악, 즉 로컬 음악은 어느새 지구적 음악, 즉 글로벌 음악이 되어 있는것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이 세계 순회공연, 이른바 월드 투어를 하면서 글로벌하게 활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세계 각지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치프턴스가 대표하는 아일랜드 음악을,월드 뮤직을 다루는 이 책의 시작으로 삼는것은 적절해 보인다.
월드 스타가 된 존재가 정식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음악이 되기 전부터 아일랜드 음악이 오랜 문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아일랜드 선술집(Irish pub)에 가면 아일랜드 민요를 연주하는 그룹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이런 선술집은 에이레 섬뿐만 아니라 브리튼 섬 각지, 나아가 미국을 비롯해 아일랜드계가 많이 사는 곳에서 발견된다. 이런 장소들은 아일랜드의 전통음악을 통해 자신들의 민족적(ethnic) 배경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곳에 가보면 아일랜드인이 가무에 능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지 않다.
하나의 음악에서 동시에 풍겨나을 때도 많다. 즉, 명랑하고 쾌활한 음악인데도 묘한 슬픔과 애수가 서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일랜드 민요의 가사에 트러블(trouble)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시사적이다. 아일랜드인에게 트러블이란 무엇일까. 지금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고지에 살고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한때는 라틴족 게르만족과 더불어 유럽을 주름잡던 3대 민족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기원전 2세기경부터 켈트족은 유럽 각지로 흩어지고 로마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오다가 기원전 50년경 시저의 갈리아 정복과 브리튼 정복으로 인하여 로마화된다"는 역사책의 기록을 보면 기원후(A.D.) 시대 이후에는 역사의 주역에서 물러난 셈이다 성공한 민족은 아니다. 게다가 이 섬에서도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현재 대영제국에 속하고 있고, 아일랜드는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와 독립국인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 민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켈트족의 문화적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끈질기게 남아 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대해 사람들이 연상하는 체크무늬 치마, 파이프를 부는 음악대, 호박으로 만든 할로윈 데이의 괴물 가면 등은 수 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켈트족의 문화적 전통이다.
섬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한 예로 1999년 8월에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소도시인 로리앙 (Laurient)에서는 '켈트 페스티벌' 이라는 대규모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세계 각지에서 켈트족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백 파이프를 불면서 요란스러운 축제를 벌였다. 실제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외에도 이 축제를 개최한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이나 스페인의 갈리씨아 지방, 또한 캐나다 동부의 케이프브레턴(Cape Breton) 섬 등에는 켈트족이 밀집하여 거주하는 지역이 존재한다.
무엇일까. 다름 아니라 이들은 가무에 능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화와 전설 등 풍부한 구비문학적 전통도 가지고 있다. 오래된 민족이다보니 이들의 문화에는 근대화 된 이후의 유럽에서 발견하기 힘든 특징들이 나타난다. 민족음악학 (ethnornusicology)의 연구중에는 켈틱 음악과 동양음악, 특히 인도음악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경우도 이따금 있다. 악곡 구조, 음고의 배치, 리듬 패턴 등등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접어두더라도 아일랜드 음악이 유럽에서 나오는 음악 가운데 (상대적으로) 동양적인 느낌이라는 데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물론 엄밀한 분석이 아니라 느낌일뿐이지만 어쨌든 켈틱 음악(나아가 아일랜드 음악)을 월드 뮤직에 포함 시킬 수 있는 것은 이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보면 이 민족이 얼마나 질긴지 알 수 있다. 켈트족 가운데서도 가장 끈질긴 민족이 아이리시(Irish)라는 점은 틀림없다. 이들은 끈질긴 투쟁 끝에 결국 1937년 영국에서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으니까. 한때 세계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구가했던 대영제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바로 코앞에 있는 아일랜드였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 산재한 켈트족의 자취를 따라가기 전에 우선 아일랜드에 집중하기로 하자. 않는다. 아일랜드가 오늘날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 1700년대, 즉 18세기 무렵이다. 그 전까지의 아일랜드 음악은 대체로 종교음악이거나 전래민요였다. 종교 음악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전래민요의 경우 <아! 목동아>, <한 떨기 장미꽃>, <종달새>를 한 두번쯤 불러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아일랜드 구전민요의 정서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목가적이고 전원적이라는 설명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후 크롬웰은 구교도인 아일랜드인의 토지를 몰수해서 영국인에게 분배했고, 그 결과 아일랜드인 대다수는 영국인 지주 밑에서 일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아일랜드인의 '트러블 이란 다름 아니라 영국인과 앵글로색슨족을 말하는 것 이다. 전역을 여행하면서 후원자(patron)들을 위해 작곡을 하고 하프를 연주했다. 바로크 음악의 영향을 흡수하여 그가 만든 작품 가운데 200여 작품은 지금까지도 악보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 중에서 <0'Carolan's Concerto>는 현존하는 아일드 최고의 트래디셔널 밴드인 치프턴스도 이따금 연주하는 곡이다.
등장한다. 그리고 하프가 등장할수록 예스럽고 중세적인 느낌을전달한다. 그 이유는 18세기를 보내면서 하프를 연주하는 전통이 점차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의 지배자들이 게일어(Gaelic)를 비롯한 전통을 억압하는 법령과 정책을 실시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하프가 쇠퇴하는 것을 대체하여 새로운 악기가 아일랜드 음악을 상징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일리언 파이프(uillean pipe)다. 일리언 파이프 외에도 틴 휘슬(tin whistle) 또는 페니휘슬 (pennywhistle), 피들(fiddle), 보란(bodhran), 콘서티나(concertina)처럼 현재까지도 아일랜드 전통음악에서 즐겨 사용되는 악기들도 살아남았다.
외부에서 들어온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아이리시 트래디셔널의 원형이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원형이 형성됨과 더불어 근대화하는 양상도 발생했다 즉, 이전까지 음악이 익명으로 구비전승되던 것과 달리 이때부터는 개별 연주자들의 해석이 하나의 버전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후대 뮤지션에게 전승 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털로 오캐롤란은 그런 점에서 근대 아일랜드 음악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일 것이다 어떤 연주인이 이 시기의 스타일에 가깝게 연주하면 '아이리시 트래디셔널'을 연주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이리시 컨템퍼러리'를 연주하는 것이 될 것이다. 특히 18세기에는 악기에 대한 고유한 주법, 이른바 '컷(cut)'과 '롤 (roll)'이라고 불리는 주법이 확립되었다. 이는 각각 '자르기'와 '굴리기'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피들과 파이프라고 하더라도 자르고 굴리는 솜씨에서 아일랜드 고유의 특징이 나타난다는 얘기다. 유형의 음악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넓은 개념이다. 여기에는 성악과 기악이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음악을 연주하면서 무엇을 했을까. 다름 아니라 춤이다. 즉, 18세기에 확립된 아일랜드 전통음악은 춤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이른바 포크 댄스라고 부를 수 있는 춤인데 대표적인 것은 지그(jig)와 릴(reel)이다.
연합단체(The Society of the United Irishmen)가 주도하여 아일랜드의 자치공화국을 세우려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결국 아일랜드는 1800년부터 영국에 정치적으로 완전 통합되었다.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한일합방'과 비슷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봉기를 하던 민중들이 부르던 노래는 <Irish Revolutionary Songs> 라는 음반을 듣고 추측할 수 있다. 말 감자 수확의 실패였다. 주식인 감자이 부족으로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고, 그 결과 100만 명이 사망하고 또 다른 100만 명은 바다 건너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현재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형성되어 있는 아일랜드인 들의 커뮤니티는 이때 급격히 팽창한 것이다. 어쨌든 인구가 800만명에서 600만 명으로 감소했다니 19세기는 '슬픈 아일랜드'라는 표현에 가장 어울리는 시기였다. 오래된 아일랜드의 음악을 수집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그가 수집하고 편집한 자료는 <The Complete Collection of Irish Music>으로 집대성되어 있고, 지금도 인터넷 쇼핑 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조지 페트리의 수집이 없었다면 오늘날 아일랜드 전통음악이 이처럼 풍성하게 기록되어 남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수집하는 동안 아일랜드 섬 각지의 촌동네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피들을 깽깽거리고 파이프를 불어대고 보란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음악은 '폭동을 저지하는 수단' 이라고 했던가 (1996)일 것이다. 그러니 잠시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에 나오듯 제1차 대전의 와중인 1916년 4월 신페인당을 주축으로 더블린에서 무장봉기(이른바 '부활절 봉기' )가 있었고, 그 뒤 1919년부터 3년간 영국과 치열한 게릴라전을 펼친 끝에 마침내 1921년 영국-아일랜드 협약(Anglo-Irish Treaty), 이른바 런던 협약이 체결되어 아일랜드는 독립국이 된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북아일랜드의 6개 주는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투옥되었다가 뒤에는 런던 협약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 결과 그는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발레라 등에게 변절자라는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 독립을위해 싸우던 세력들 사이에서도 콜린스 지지파와 발레라 지지파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고, 결국 콜린스는 발레라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사살당한다. 그의 고향에 있는 푯말은 세워지는 족족 파손될 정도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콜린스의 정적 발레라가 1926년 런던 협약을 수용하고, 그 뒤 아일랜드 자유공화국의 총리를 거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발레라는 1966년경에 "역사는 마이클 콜린스가 위대했으며 나의 식견이 짧았다고 기록할 것이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그 말의 진심이 무엇이든 간에 아일랜드는 1937년에 국호를 에이레로 바꾸고, 1948년에는 영연방에서 탈퇴하고, 1949년에는부활절 봉기 33주년을기념하여 국명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개명하고, 1973년에는 EC에 가입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아일랜드 공화군 (IRA)의 테러가심심치 않게 발생했지만... 발걸음이 진행되던 1920~30년대 이후 폭넓은 부활의 양상을 보였다. 선술집과 더불어 댄스홀이 등장했고, 여기서 이른바 '케일리 밴드(ceili band)'가 음악을 일상적으로 연주했다. 아일랜드 국내뿐만 아니라 아일랜드계 이주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에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앞서 아일랜드음악의 정서가 왁자지껄함과 센티멘털함으로 구분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 각각의 예는 1950~60년대에 활동하던 뮤지션들에서 전형을 찾을 수 있다. 전자의 예는 클랜시 브라더스 The Clancy Brother, 후자의 예는 메리 오하라Mary O'Hara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제는 오래된 이름이 되어버렸지만 미국과 영국등지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한 존재들이다. 윤복희가 미국에서 활동 할 때 (아리랑)을 부른 것이 진짜 한국 민요로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이들의 음악은 아일랜드의 음악적 전통이 미국의 쇼 비즈니스계에서 상업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비유를 하나 더 추가하면 이런 과정은 미국에서 포크 음악이 상업적 컨트리 음악이 되어가는 것과 유사 할것이다. 케올토이리 쿠알란 Ceoltoiri Cualann이라는 그룹을 결성하면서 부터다. 숀 오리아다는 아일랜드 포크 음악에 침투한 상업적 팝 음악의 영향을 제거하고 기악 위주로 레퍼토리를 편성하여 연주 활동을시작했다. 지그, 릴, 슬로 에어 등 켈트족의 고유한 민속 댄스 리듬을 부활시킨 것도 그의 공이다. 숀 오리아다는 단지 복고에 머물지 않고 한 곡 내에서도 템포와 리듬을 바꾸는 등 아일랜드 민속음악을 현대화하고 세련되게 만들었다. 다름 아니라 서두에 언급 한 치프턴스다. 치프턴스의 리더인 패디 몰로니 Paddy Moloney가 바로 케올토이리 쿠알란 출신이었고 숀오리아다도 1970년대 초반까지는 패디 몰로니와 함께 치프턴스에서 연주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전업 음악인으로 활동할 생각이 없이 부업으로 음악을 연주했지만 1975년 스탠리 큐브릭 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 <Barry Lyndon>의 사운드트랙에 <Women of Ireland)와 <Morning Dew> 등의 곡이 수록되면서 영국뿐 아니라 미국 시장에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 곡들은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는데도 영화에 삽입된 음악은 히트를 기록한 예외적 경우에 속한다. 이런 예외적 현상은 이 곡들이 FM 라디오를 통해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소개되었다는 사정으로 설명할 수 있을것이다.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은 뿌리 (roots)' 를 찾는 경향이 강했우니까. 하는 다작 활동을 통해 대중적 인기와 평단의 찬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되었다. 특히 아일랜드의 록 음악인인 밴 모리슨과 함께 작업한 1988년 작품 <Irrish Heartbeat>. 그리고 믹 재거Mick Jagger,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 라이 쿠더 Ry Cooder 등 대형 스타들이 참여한 1995년 작품 <The Long Black Veil> 등은 월드 뮤직의 명반이자 팝 음악과 월드 뮤직의 크로스오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이들은 권위와 명성에 빛나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전통 민속 레코딩 (Best Traditional Folk Recording)' 부문이나 '최우수 월드 뮤직 앨범(Best World Music Album)' 부문에서 거의 단골손님처럼 상을받았다. 그뒤의 스토리는 잠시 접어두자. 일랜드 음악인에 대한 실례일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1996년에 발표된 <Common Ground: Voices of Modern Irish Music> 이라는 음반을 살펴보자. '공통의 지반: 현대 아일랜드 음악의 목소리들' 정도로 번역될 이 음반에는 포크에 속하는 음악인들 과 팝에 속하는 음악인들이 모두 참여하여 아일랜드의 전통음악을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다. A 40 Year Celebration>만큼이나 화려하고 월드와이드하다. 단,치프턴스의 음반에는 아일랜드계의 혈통과는 무관한 사람들도 참여했지만 이 음반에는 혈통이 확실한 사람들만 참여했다. 아이리시 포크에 속하는 음악인들을 제외하고 팝(또는 록)에 속하는 면면만 훑어보면, 일단 아일랜드 국적을 가진 인물로는 U2의 멤버인 보노Bono와 애덤 클레이턴 Adam ciayton, 시네이드 오코너의 이름이 눈에 띈다. 한편 엘비스 코스텔로, 케이트 부시 같은 '영국인'도 아일랜드인의 먼 후손이라는 이유로 여기 참여했고,지구 반대편에 있는뉴질랜드 출신의 크라우디드 하우스Crowded House 멤버인 팀 핀Tim Finn과 닐 핀NeiI Finn도 참여했다. Christy Moore라는 사실이 중요한 정보다. 치프턴스의 멤버들 못지않게 아이리시 포크 리바이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기타 연주자이자 부주키(bouzouki) 연주자인 도널 루니와 싱어송라이터인 크리스티 무어는 뉴브리지 태쟁으로 1960년대 말부터 듀오를 만들어 활동했고, 이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에메트 스파이스랜드 Emmet Spiceland, 플랭스티 Planxty,보씨 밴드Bothy Band, 무빙 하츠Moving Hearts 등을 만들어 활동했다. 현대적 에너지를 섞은 것이었고, 그 결과 아일랜드의 팝 음악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두 인물은 1980년대 이후에는 직접 연주하고 레코딩하는 활동보다는 음반 프로듀서로 더 많은 활동을하고 있지만, 아일랜드의 많은음악인들은 이들이 영향을 받아 음악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주한 뒤에는 미국에서 '아일랜드음악의 대부'라는 지위를 누리고 있다. 플랭스티에서, 그리고 치프턴스에서 이따금 객원 보컬로 노래 부른 돌로레스 키언Dolores Keane의 목소리도 아일랜드 음악을 어느 정도 찾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귀에 익을 것이다. 또한 크리스티 무어의 동생인 배리 무어는 루카 블룸Luka Bloom이라는 예명을사용하면서 아이리시 포크의 영향이 강한 팝 음악을 구사하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같은 용어인가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이리시 포크라는 범주에 아이리시 트래디셔널과 아이리시 컨템퍼러리(또는 켈틱 컨템퍼러리)를 포함해서 사용해왔다고 답변하겠다. 즉 전자가 악기 편성이나 연주법 등에서 전통적 노선을 고수하는 경우라면, 후자는 시치적 변화에 맞추어 전통을 현대화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포크라는 단어의 의미가 날로 모호해진다는 점은 논외로 해야 할 것이다. 많다. 직업 음악인으로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경우는 전통을 고수하기보다 현대적 사운드, 나아가 외래의 조류와 퓨전될 가능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디바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이들의 경력을 거슬러 추적하면 두자매가 세 명의 형제들인 셰이, 마이클, 마틴과 더불어 1965년부터 블랙 패밀리The Black Family라는 밴드, 밴드라기 보다는 클랜(clan)을 이루어 활동했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들 블랙 패밀리의 구성원들이 아카디Arcady나 드다난De Dannan같이 아일랜드의 포크음악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밴드들과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 있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것은 정보와 능력 부족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의 어딘가에 걸쳐 있다. 이들은 1973년 데뷔 앨범을 발표하고 1975년 독일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주목을 받았고, 1979년부터 1982년까지는 엔야도 밴드에 가담하여 연주했다. 이때 이 후 TV 드라마나 자연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이들의 '뉴 에이지' 풍 켈틱 음악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전파되었다. 1984년 TV 프로그램 <Robin of Sherwood)의 사운드트랙을 맡아 이듬해 브리티시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수상한 사실이 유명하다. 사람은 불만을 나타낼 것이고, 팝음악에 익숙한사람은 '전통음악과 팝음악사이의 간극을 메웠다' 고 평할 것이다. 이런 논란에서 어느 한쪽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점이 있다. 그것은 아일랜드의 음악 문화에서는 민속음악(포크)과 대중음악(팝)사이의 간극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점이다. 아일랜드의 대중음악인들이 치프턴스나 클래내드 등의 음반에 심심치 않게 참여하고 평소에도 강한 유대를 맺고 지내는 현상이 아일랜드 음악 문화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래서 월드 뮤직과는 거리가 있지만 아일랜드의 대중음악을 잠시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록 음악이 '흑인처럼 노래 부르는 백인'의 것이라면 아일랜드에서 유명한 록 음악인들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영화는 소울음악을 하려는 아일랜드의 무명 밴드의 이야기다). 즉, 아일랜드인들이 전통음악이나 민속음악만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1960년대 이후 아일랜드의 젊은 세대들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록 음악을 비롯한 영미의 팝 음악을 즐겨 들었다. 단지 즐겨 들은 것뿐만 아니라 팝 음악계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배출했다. 출처 :시와음악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 시와음악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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