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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 개관 삼기면(三箕面)은 본래 金馬面(益山郡)에 속했던 곳이다. 1914년 행적구역 개편에 따라 서두리(西豆里-前 栗村面), 간촌리(間村里-前 巳梯面(龍梯面)), 용연리(龍淵里-前 巳梯面(龍梯面)), 기산리(箕山里-前 九文川面), 오룡리(五龍里-前 九文川面), 연동리(蓮洞里-前 九文川面) 등 6개 리로 구성되었다. 면명(面名)은 주산(主山)인 삼기산(三箕山)에서 취해진 것이다. 지금도 삼기면은 이상의 6개 리로 구성된다. 현지 조사에서 검지마을 주민들은 오룡리가 제네, 도마, 검지, 옥실, 구정, 사오랑 등 6개 자연 마을로 구성된다고 했다. 검지(檢池, 檢知)의 부분명은 제내(堤內), 북간도, 서당터로 나뉜다. 제내는 방죽의 안쪽 마을이므로 일컫는 명칭이며, 북간도는 북향(北向)한 마을로 '북간도(北間道)와 같이 춥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서당터는 서당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검지마을은 세 동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삼동(三洞)마을' 혹은 '삼 동네'라고도 부른다. 현재 검지마을의 가구수는 64세대, 인구수는 243명이다. 남자가 114명, 여자는 129명이다. 원래 이 일대는 논바닥에서 생수가 솟는 수렁논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관개수로 개통으로 금강물을 끌어오기 전까지는 수렁논이 상답(上畓)으로 대접을 받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천수답(天水畓) 일색이었던 사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렁논은 항상 물이 차 올라 관리하기도 힘들고 일하기도 불편하다. 따라서 이제는 수렁논이 계답(階畓)보다 대접을 못 받는다고 한다. 2.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익산목발노래와 기능보유자 박갑근 검지마을은 원래 남양 홍씨(南陽 洪氏), 기계 유씨(杞溪 兪氏)가 마을의 터를 닦았으나, 이씨(李氏)와 박씨(朴氏)가 그 뒤를 이어 들어와 지금까지도 이(李)·박(朴) 두 성씨에 의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박갑근의 가계는 박갑근의 12대조 할아버지가 이 마을에 들어 온 이후 지금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박갑근의 부친은 유학자였는데 시조를 잘 불렀다. 부친의 영향으로 박갑근도 어렸을 때부터 시조를 잘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검지의 박갑근이가 시조를 잘한다"는 얘기가 인근에 퍼져 종종 어른들 앞에서 시조를 불러 칭찬을 듣곤 했다. 박갑근은 어렸을 때부터 천성적으로 음율에 밝고 소리를 좋아했다. 그러나 완고한 유학자였던 부친은 아들에게 들노래나 풍장은 막일꾼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런 중에서도 동네 정자나무 밑이나 어른들의 사랑방에서 들려 오던 단가나 토막 소리가 좋아 몰래 따라 부르곤 했다. 부친이 작고한 후 1970년 박갑근은 49세라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렸을 때부터 부르고 싶던 소리에 흠뻑 빠질 수 있게 되었다. 박갑근의 부친이 운영하던 서당에서 동문수학했던 고 이강오교수(전 전북대교수, 전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가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3. 익산목발노래와 삼기농요의 유래 1975년 사회단체로 등록한 익산농요회는 1983년 군비의 지원 등에 힘입어 검지마을에 익산농요회 전수회관(대지 370평, 건평 25평)을 짓고, 이듬해인 1984년 9월 20일 박갑근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익산목발노래 기능보유자(속칭 인간문화재)로 인정된 것이다. 1986년 8월에는 박갑근이 지도한 김제농고 민속반이 제15년차 한국 영농학생전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전수회관 마당에 「益山農謠·목발노래 會 建立紀功碑」를 세웠다. 기공비의 전면에는 郡守 金鳳先 외에 29명의 지방 유지와 독지가 명단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회장 박갑근 외에 33명의 회원 명록(名錄)이 새겨져 있다. 또한 1997년 11월 24일에는 익산시 북부에 위치한 성당면, 웅포면, 함라면, 함열읍, 낭산면의 젊은이들이 힘을 모아 익산시 성당면 회성리에 익산목발노래·농요 성당면 전수회관을 건립하였다. "일을 허는데 다 한계가 있어. 열 명이면 '너그가 하루 이 놈을 해라' 하는 한계가 있거든. 그러믄 그날 해 내야 혀, 죄다. 그러면 부지런히 서둘러서 해 놓고, 쪼그만치 냉겨 놓고 서서 흥청거리는 것이지. 그때는 노는 거여. 만날 먹고 일만 허닝게, 무슨 취미가 있고 엇따가 의지할 데가 있어? 근게 지금 말로, 그 스트레스를 그저 노래로 가서 푸는 것이여" (1997. 3. 15. 박갑근) 4. 조사 방법과 조사 과정 금번 조사에서 중점을 둔 사항은 노동과 그에 해당하는 시기를 일치시켜 조사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사에만 꼬박 1년이 소요되었다. 절기와 한해 농사의 진행에 따라 불리는 소리를 해당 시기에 채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지마을의 농요는 여타의 전라도 평야 지역과 마찬가지로 온 마을 주민들이 합심하고 단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공동 노작 형태에서 발생한 산물이다. 조사가 진행되던 일년 동안, 절기에 따라 농사짓는 것을 예전 방식 그대로 재현하면서 박갑근과 마을 사람들은 끈끈한 이웃애가 더욱 되살아나는 듯 했다. 이것은 이번 조사에서 얻은 부수적인 소득이었다. 이제 그 동안의 주요한 조사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 가창했던 창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후, 남궁홍은 1997년 4. 19일(화) 미륵 산록에서의 목발노래 조사와 촬영 이후 실시된 총회에서 사의를 표명하였다. 현재는 박갑근이 익산농요회장을 맡고 있다. 5. 검지의 전통농경과 농요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삼사월이 돌아오면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힘도 뻗쳐 오른다. 바야흐로 일년 농사가 시작되는 철이다. 한편 겨울을 지내는 동안 논두렁은 얼었다 녹았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부실해지고 곳곳이 허물어지기도 한다. 특히 검지마을의 '고라실' 천수답은 계단식이라서 논두렁이 축대처럼 높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들짐승들이 구멍을 뚫어놓기 일쑤다. 그런 상태에서 논에 물가두기를 한다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물이 유실되지 않도록 논두렁과 축대를 정비해야 하는데 이것을 '바리떼 붙이기'라고 한다. 이를테면 논두렁 복구공사인 셈이다. 논갈이는 축력을 이용해서 쟁기로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검지마을은 수렁논(현지에서는 '수랑논'이라고 부른다)이 대부분이라서 도저히 생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쇠스랑으로 직접 논파기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수렁논은 이렇듯 논의 일부가 항상 물에 잠겨 있어서 쟁기로 논갈이를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특히 당시에는 소가 귀했을 뿐만아니라 소 주인의 입장에서도 소가 지친다는 이유로 논갈이를 기피하기 일쑤였다. 특히 영리한 소는 수렁이 있는 곳을 미리 알고서 그곳을 피해다니기 때문에 쟁기질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쇠스랑을 이용하여 직접 사람이 파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다. 논파기는 두 번에 걸쳐 시행하는데 첫 번째 논파기를 '아시파기'라고 하며, 두 번째 논파기를 '두벌파기'라고 한다. 초봄에 땅이 녹아서 해동이 되면 논에 거름을 뿌린다. 그런 후에 어느 정도 물을 확보하여 논을 파기 시작한다. 논파기는 논에 물이 "짜작짜작허니" 있어야 한다. 그래야 쇠스랑에 흙이 달라붙지 않을 뿐더러 흙덩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 그 밑의 빈 공간으로 물이 채워져서 힘이 한결 덜 든다. 수렁논은 물코만 막아 놓으면 어느 정도의 물은 항상 확보할 수가 있다. 두벌파기는 아시파고 한달 쯤 후인 5월 하순이나 6월 초순, 즉 모심기 직전에 한다. 두벌파는 방법은 초벌 때 파서 밭두렁 처럼 쌓여진 곳을 다시 파서 뒤집는다. 그러면 초벌 때 파서 뒤집혀 올라간 흙 뿐만아니라 그 밑의 생흙까지 다시 파여 넘어오게 된다. 이때 넘어오는 흙덩이를 좀 과장하면 집채만하다고 한다. 검지마을의 <논파기 노래>는 두벌파기 때 불려진다. 왜냐하면 두벌파기가 아시팔 때 보다 비교적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과정에서는 두사람의 발 맞추는 것이 생명이다. "이리도 쌍쌍 저리도 쌍쌍 / 쌍쌍으로 잘도나 파세"라고 노래 부르며 바삐 옆걸음치다 보면 때로는 소보다 빨리 갈 정도라고 한다. 검지마을의 농경에서 이렇게 쇠스랑으로 팔 수밖에 없던 시절은 비교적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지하에서 솟아나는 유출수의 외부 배출장치가 설치됨과 함께 금강수계를 끌어들여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비교적 최근인 90년 이후에 경지정리사업이 시행되면서 논파는 일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논갈이는 마소(馬牛)와 같은 축력(畜力)과 쟁기를 이용하여 논가는 경우이다. 그런데 논갈이는 '물갈이'와 '태운갈이'를 번갈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물갈이는 물을 가두어 놓은 채 하는 논갈이를 말하고, 태운갈이는 논을 햇볕에 바싹 말린 후에 하는 건답갈이를 말한다. 그러나 주민들에 의하면 "지금은 논 태울 것도 읎고 썩쿨 것도 읎어, 비료만 넣으면 되닝게"라고 한다. 물갈이 한 상태에서 논이 마르면 "땅이 억셔져서 감이 나쁘고 흙덩이가 워낙 커서 안 넘어가기 때문에" 두벌갈이 때는 소가 힘들어서 못걸어 갈뿐더러 심지어 소 발톱이 다 닳을 정도라고 한다. 사태가 그쯤되면 도리없이 '메갱이'(메)로 덩어리진 흙을 "때려 바숴야 소로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물갈이도 아니고 태운갈이도 아닌 메갱이질을 '짝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거름이 매우 귀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거름이 없다는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력을 북돋아서 소출증대를 위해서는 하다못해 '논 태우기'라도 하여야 했다. 논 태우기는 흙을 태양에 바짝 말리는 일종의 일광소독이다. 물론 논태우기는 논갈이를 한 이후에 쟁기밥을 햇빛에 말리는 일이다. 따라서 논 태우기는 거의 전적으로 날씨에 달려있다. 심지어 햇볕이 좋은 날이면 수렁의 흙을 소쿠리에 담아서 마른 곳에서 말린 후 다시 그 자리에 붓기도 한다. 그렇게나마 태운 논의 농사가 확실히 잘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흙속에 있던 풀씨들을 새들이 쪼아먹기 때문에 제초의 효과도 부수적으로 따른다. 곡우무렵이면 '씻나락'(볍씨)을 담근다. 옛날의 싹틔우기는 커다란 옹기항아리에 볍씨를 채우고 물을 부어 불리는 방식이었다. 이때 부잣집에서는 소금물에 담그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맹물에 담궜다. 항아리에 담은 채 매일매일 물을 갈아 주면 일주일쯤 되어 나락에서 눈이 "뽈록뽈록" 틔인다. 그러면 항아리의 물을 모두 퍼내고 그 안을 짚으로 채워서 항아리를 뒤집는다. 그렇게 뒤집은 상태에서 3-4일 지나면 물이 모두 빠지고 볍씨 자체의 열로 인해서 "싹이 빵긋빵긋하니" 하얗게 나온다. 당시 전라북도의 벼 품종으로는 '다마금' '은방조' '공양도'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그 중에서 "너도나도 심었던" 품종은 '은방조'였다. 은방조는 "툭 터졌다 은방조"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나락 등이 터져서 쌀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획기적인 다수확 신품종이었다. 그러나 검지마을은 특이하게도 '임보수'라는 품종을 가장 많이 심었다고 한다. 임보수는 다른 이름으로 '어름벼' '서리벼'라고도 했는데 '일정때 수십년을 재배한 품종'이라고 한다. 못자리는 5월 중순경, 즉 입하무렵에 만든다. 이때 비록 논 전체에 거름을 넣지 못한다 할지라도 못자리 만큼은 필히 거름을 넣는다. 이때 못자리 골을 만든 후에 거름풀을 흩뿌리는데, 거름은 동네 주변에서 채취한 "호맹이풀을 삐들삐들하게 말려 뒀다가 못자리에 넣고 발로 밟으면" 흙에 묻혀서 거름이 된다. 논뀌미기는 써레질하는 과정을 말한다. 써레질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흙덩이를 바수어서 모심기에 적합하게 논바닥을 다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써레를 이리저리 끌고다녀 초근을 없애는 것이다. 즉 논뀌미기는 논에 물을 "짤박짤박하게" 가두어 놓고 쇠스랑을 이용하여 흙덩이를 잘게 부수고 논바닥을 평평하게 골라서 모심기에 알맞게 다듬는 과정을 말하는데 시기는 모심기 3일 전쯤에 한다. 논뀌미는 일은 대개 한 필지당 두명 정도가 하는데, 논뀌미기에서는 "흙이 말랑말랑하게 잘 썩고 곯아서 감이 좋아야" 한다. 못자리에서 모가 자라는 기간은 45일 가량이다. 모찌기와 모심기는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이른 아침부터 그날 심을 모를 못자리에서 찌기 시작하면 대개 오전 10시경에 끝난다. 그리고 이어서 모찌기에 동원된 전원이 모심기를 하는 것이다. 모를 다 찌고 나면 점심밥을 기다리는 잠깐의 틈이 있다. 이 틈새 시간에 부지런히 모심기를 해 두면 그날 모심을 분량이 일찍 끝나지만, 그렇지 않고 "허평대평"하면 늦은 밤까지 모심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 천수답 논이 다 그렇듯이 적기에 모심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모심을 철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최소한의 비가 내릴 때 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고, 그러는 동안에 못자리의 모는 계속 웃자라게 된다. 다행히 뒤늦게라도 비가 와서 늦모찌기를 할양이면 이번에는 모찌기가 무척 고되다. 모가 이미 억세진데다가 새뿌리가 자라면서 뿌리끼리 엉켜 있어서 잘 뽑히지도 않을 뿐더러 뚝뚝 끊어지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럴 때 모를 찌다보면 억센 모에 손바닥이 온통 씻기는 통에 여기저기 빨갛게 붉혀서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다. 거머리도 골칫거리이다. 온 다리에 달라 붙어서 피를 빨아대지만 일일이 떼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생석회를 뿌리면 거머리가 없어지기도 한다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모심는 적기를 흔히 "하지 전삼일 후삼일"이라고 하며, 대개는 망종에서 하지 사이의 약 보름간을 적기로 간주한다. 그러나 검지마을과 같은 천수답에서는 적기를 따질 겨를이 없다. 논물의 사정에 따라 빠른 경우에는 볍씨 뿌린지 20일 만에도 심고, 늦어지면 소서(小署)에 심을 경우도 있다. 소서(7월 초순)무렵에 모를 찌면 모가 이미 자라서 같이 일하는 상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마저 놓혀버리면 못자리에서 모가 이미 출수(出穗)해서, 비록 이앙을 한다해도 수확은 거의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때가 넘어가면 메밀밖에 심을게 없다. 이와 같이 모심을 제때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먼저, 하지를 넘기고도 비가 오지 않으면 서종(鋤種)을 한다. 서종은 말 그대로 호미로 밭작물을 심듯이 모를 심는 방법이다. 그래도 서종은 나은 편이다. 그 이후로도 비가 오지 않으면 '말뚝모'를 심는다. 말뚝모란 작대기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심는 모를 말한다. 가뭄이 지속되는 동안 모심어도 되는 시기를 마지막까지 기다려보는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다. 밤송이를 겨드랑이에 끼워서 아직 아프지 않거나, 또는 대추를 콧구멍에 넣어봐서 들랑날랑하면 모를 심어도 된다는 것이다. 즉 적어도 이때 까지는 이앙 후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주민들이 젊었을 때는 모심기를 '흐튼모'로 심었다. 줄모는 일제 말기에 보급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비록 흐튼모라고 할지라도 줄만 없다 뿐이지 실제로는 눈짐작으로 줄맞춰 나가듯이 심었다고 한다. 모심을 때는 모심는 노래인 <농부가>를 부른다. 그리고 간혹 '못방구'도 친다. 못방구는 농부가에 맞춰 장구만으로 치는 장단을 말한다. 못방구를 늘상 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못방구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주로 부잣집에서 모심을 경우이다. 부잣집은 아무래도 일꾼도 많고 술도 충분해서 새참 후에 술이 얼근해지면 못방구 치며 부르는 <농부가>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모심기 때 노동력 동원형태는 '품앗이'와 '놉'이다. 품앗이는 현물 또는 현금을 보수로 지불하는 머슴노동이나 품팔이 노동과는 달리, 자기가 이용하는 다른 사람의 노동에 대하여 직접 자기의 노동으로 보상하는 제도이다. 품앗이는 공동작업을 수행하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며 한국농촌에서는 이러한 공동작업을 위하여 자주 품앗이를 하고 있다. 품앗이는 주로 모심기에 동원되지만 이 밖에도 밭매기, 타작, 파종, 지붕이기 등 잡다한 일에 빈번하게 동원된다. 반면에 놉(삯군)은 일종의 품팔이 노동이다. 즉 교환조건이 아닌 임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품팔이 노동력은 自家의 경작지에 비하여 노동력이 과다한 영세농이나 소농층에서, 또는 경작지가 없거나, 소규모 면적의 밭을 경작하고 있는 無畓作層으로부터 공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심기는 특히 짧은 기간에 집중적인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는 집약성을 띠기 때문에 품앗이와 놉을 통한 노동력동원이 일찍부터 이루어졌던 것이다. 여자들은 본래 밭일과 가사노동에 종사했지 논농사일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가 논일하는 것을 흉으로까지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남자들이 징용으로, 또는 군대로 끌려가기 시작하면서 노동력의 절대적인 부족이 초래되었다. 그래서 이때를 기화로 일제국주의의 간교한 식민통치자들은 '몸빼'라고 하는 일본식 여성 작업복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여 논농사에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한국전쟁을 거치고, 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이농현상으로 인해서 이제는 여성들의 노동력 없이는 농촌의 존립이 힘들 정도로 이제 농촌의 여성들은 노동인력 측면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농경생활을 일컬어 흔히 '잡초와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김매기, 또는 지심매기 과정이 바로 그 순간이다. 지심은 논에 난 풀을 말한다. 일년 농사의 대장정에서 어느 한 순간 힘들지 않은 과정이 있겠느냐마는 그 중에서도 특히 힘들고 고달픈 일이 김매기과정이다. 김매기기가 힘든 까닭은 가장 무더운 혹서기에 하는 작업인데다 잡초의 생육이 대단히 왕성해서 여러번 거듭해야 하고, 논매기 방식 자체가 허리를 최대한 숙여 호미나 손으로 흙을 파 엎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시매기는 모심은 20일쯤 후에 '호무'(호미)로 파 엎는 과정을 말한다. 물론 이때 사용하는 호미는 밭호미가 아니라 논호미를 말한다. 호미로 흙을 파 엎는 까닭은 첫째가 풀을 파묻는 제초를 위함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모의 원뿌리를 찢어주고 잘라줌으로써 새뿌리의 성장과 활착력을 촉진케하기 위함이다. 지심매는 방법은 '호무를 오른손에 들고 허리를 잔뜩 숙이고 모를 3-4줄 잡고 앞으로 파 나가는' 것이다. 김매는 호미와 작업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논호미 날의 面은 왼쪽 뒤로 젖혀져 있는데(오른손잽이를 기준함), 이것은 바로 土壓을 적게 받으면서 마치 쟁기로 논을 갈 때처럼 호미밥을 왼쪽으로 넘어가도록 한 이치를 적용한 결과이다. 이때 왼쪽으로 길게 넘어오는 호미밥을 왼손으로 받아서 뒤집어 놓으면 일의 속도를 가속화할 수 있다. 두벌매기는 초벌(아시)맨 지 15일쯤 후에 역시 호무로 맨다. 두벌매기가 초벌매기 보다 조금은 수월하다. 왜냐하면 두벌매기가 초벌매기처럼 논흙을 깊게 파 엎는 일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초벌매기 때 파 엎어 놓은 흙을 호미로 다시 되파서 평평하게 고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흙을 되파서 뒤집음으로써 보름 동안에 새롭게 자란 지심을 파묻기 위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만물은 '만두레' 또는 '손질'이라고 한다. 만물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김매기 과정이며, 두벌매고 10∼15일이 경과한 후에 마지막으로 매지만 그 기간은 지심이 자란 상태에 따라 유동적이다. 도구치기가 끝나면 "손으로 논의 잡초를 훔쳐서 땅에 묻고 논바닥을 장판방처럼 판판하게" 만들어 놓는다. 이 과정이 이른바 만두레인데,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만물산야>도 이때 부른다. 만물을 끝내고 말리기 시작한 논은 벼의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출수기(出穗期)가 되면 다시 물가두기를 해야 한다. 당시에는 농약을 비롯한 오염물질이 없던 시절이라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었다. 따라서 논바닥에는 붕어, 게, 개구리, 가물치 등이 공생하면서 나방은 개구리가 잡아 먹어서 이화명충이 없고, 게와 가물치는 풀을 뜯어 먹어서 제초효과를 보는 등 그야말로 자연농법 그 자체였다. 그러나 비료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부터 '조아순'이라는 명칭의 병충해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조아순이란 후에 '도열병'이라고 붙여진 이름인데, 벼가 이 병에 걸리면 폭삭 주저 앉는다고 해서 유래된 명칭이다. 조아순은 "퇴비나 비료가 많이 들어가면 무더기로 썩어버리는 병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농경연구에 따르면 40년대에도 문고병, 도열병, 멸구, 깜부기 등이 조금씩 나타났지만 농약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한 방제작업도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천둥소리가 나고 소나기가 오면 문고병이 낫거나, 제비가 똥을 싸면 잎마름병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삼을 꺽어 논에 꽂아 놓고 제비가 앉아 똥싸기를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50년대에는 멸구가 발생하면 석유를 모래와 섞어서 벼에 뿌린 뒤 벼를 흔들어 모래를 떨어뜨리면 멸구도 같이 떨어져 물위의 석유에 싸여 죽게하는 법을 사용했다. 50년대말 멸구약이 약간 사용되었고 60년대 초에 도열병, 이화명충이나 멸구약 등이 도입되었다. 두레는 과거 한국 농촌사회에서 오랫동안 존속되어 온 대표적인 공동노동조직이었다. 두레는 노동을 위한 농민들의 조직체라는 점에서 뿐만아니라, 그 노동과정 중에 풍물의 연행을 수반하는 놀이집단으로써 농민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왔다. 검지마을의 주민들도 '두레라는 것은 부락의 공동작업이여'라고 말한다. 두레노동조직이 결성되고 작업이 이루어 지는 날이면 마을의 모든 가가호호에서 한명씩 나온다. 조경만의 조사에 의하면 두레 성원은 농경활동에 종사하는 마을 주민 전원으로 구성되는데, 성원의 연령 분포를 볼 때 하한선은 보통 15∼16세이며, 상한선은 55∼56세라고 한다. 그러나 검지마을은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참여한다. 힘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두레 성원에 포함시키고, 성원에 포함되지 않는 노인네나 아이들에게는 모추기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전주민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두레노동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두레노동이 주로 지심매기때 이루어지는 이유는 강우(降雨)와 관련이 깊다. 즉 전술했듯이 "옛날에는 물이 귀하니까 낙종(落種)한 지 20일 만에도 물이 있으면 모를 심고, 늦으면 못자리에서 모가 너무 자라서 한주먹씩 끊어내고도 심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심기는 강우와 관련이 있어서 날자를 정확히 정하기가 어려운 관계로, 미리 날을 받아서 시행하는 두레노동에는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지심매기는 벼뿌리와 잡초와의 관계 때문에 적기에 노동력이 집중되어야 하며, 강우와 관계없이 오직 논의 형편에 따라 미리 결정할 수가 있어서 두레공동노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두레의 대표는 '좌상(座上)'이다. 좌상은 두레의 결성에서부터 '술멕이'까지 전과정을 통솔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즉 두레의 총지휘자인 셈이다. 좌상은 마을의 연로한 분 중에서 농사경험이 많은 사람을 뽑았으며, 일단 좌상으로 결정되면 절대적인 권한과 위엄을 부여 하였다. 좌상으로 추대되기 위해서 특별한 선출과정을 거치지는 않지만 농사경험이 풍부하고,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분명해야 하며, 총기가 좋아야 하고, 원만한 성격과 통솔력이 인정되어야 한다. 마땅한 적임자가 추천되면 구두로 합의과정을 거쳐 좌상으로 모시는 것이 관례이다. 좌상은 한 번 선출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장되기 때문에 두레의 조직적 체계는 해마다 그대로 이어지는 방식이 된다. 두레가 동원되는 날은 동네 일촌이 마을의 넓은 공터 - 주로 모정 -로 다 모인다. 두레 성원이 마을기를 앞세우고 모정에 모이면 좌상이 오늘 지심맬 논의 위치와 작업분량, 작업순서 등을 지시한다. 좌상의 지시가 끝나면 '풍장'을 울리면서 마을기를 앞세우고 작업할 논으로 향한다. 이른바 두레풍장이다. 뙤약볕에서 일시에 많은 논을 맨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일과 놀이는 노동의 고통을 더는 농사 방식이 요구되었다. 두레풍장의 농사관행은 일의 고통을 경감하는 결정적 방식이 되었다. 풍장은 꽹과리와 장구, 그리고 징이 전부이다. 두레노동 방식으로 지심매는 논은 주로 부잣집 소유의 경작지이다. 그것은 두벌매기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즉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두벌매기는 강도 높은 노동력과 세심한 정성을 필요로하는 초벌매기 때와는 달리 작업의 신속한 해결, 즉 시급성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에 대단위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법으로는 두레방식이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레노동으로 마련된 자금은 일단 마을자금으로 확보하였다가 논매기가 완전히 끝난 칠월 백중에 '술멕이'자금으로 사용된다. '술멕이'는 더운 여름날에 동네 주민들(남자들)이 모두 모종에 모여 농사일에 고생한 서로를 위로하고, 장기간의 노동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두레를 공식적으로 해산하기 위해서 정산과 함께 잔치를 베푸는 농경의례(農耕儀禮)의 일종이다. 검지에서는 이날을 '술멕이'라고 부르지만, 전라도 일대에서는 '술멕이'라는 명칭과 함께 '호미씻이'라는 명칭도 두루 사용되고 있다. 검지마을의 술멕이는 '공동시암치기'부터 시작한다. 시암치기란 '시암제'(우물제)를 말한다. 검지에서는 춘추로 마을 공동시암을 쳤다. 봄에 못자리 설치를 끝낸 직후에 첫 번째 '시암제'를 지내고, 다시 칠월에 지심매기 끝내고 술멕이때 시암제를 지내는 의식(儀式)이 그것이다. '시암제'는 온 주민의 식수로 사용되는 우물물을 퍼내고 다시 새롭게 물을 받는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시암제는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여 청결과 위생을 유지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청소를 마치면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치고 고사상을 차린다. 고사상은 떡과 밥을 비롯해서 간단한 나물과 과일 포(脯)를 준비하여 차린다. 상차림이 끝나면 풍물패가 '시암굿'을 친다. 시암제는 기제사와 같이 술 석잔을 올리고 축문도 읽고 소지(燒紙)도 한다. 축문은 주로 우순풍조(雨順風調)와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봄철의 시암제는 동네의 '있는 집'에서 음식과 술을 기부하여 비교적 간단하게 치뤘다고 한다. 반면에 칠월에 시행하는 시암제(술멕이)는 대대적인 축제의 일환이었다. 시암제는 그 의미를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마을 공동식수원에 대한 청결유지는 앞에서 언급한 바 그대로이고, 두 번째는 용사신앙(龍巳信仰)이라는 의식(意識)이 시암제에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용사신앙은 말 그대로 용이나 뱀을 숭상하는 민간신앙의 일종인데, 특히 농경문화권에서는 용에 대한 절대적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용은 자고로 물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으로 섬겨져 왔다. 그리고 농사일에 있어서 물은 가장 중요하면서 절대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용을 섬기고 받드는 의식을 통하여 행여 있을지도 모를 물부족에 대한 걱정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용이 살고 있는 곳이 우물이라는 믿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물제'(시암굿)를 행하는 본질적이면서도 보다 간절한 이유는 우물에 사는 용을 섬기는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구에서이다. 결론적으로 시암제에는 용신께 받치는 의식을 통하여 풍년 농사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간절한 기원을 엿볼 수 있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칠월 '술멕이'는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칠석날이나 백중날 중에 좋은 날을 택해서 시행한다. 이 날은 두벌 지심매기 때 두레노동으로 이미 확보한 마을 공동자금으로 돼지부터 잡는다. 돼지는 자금의 규모에 따라 한마리나 두마리가 결정된다. 술은 부잣집에서 마을을 위해서 기꺼이 쾌척한다. 이때 제공된 술의 양에 따라서 술멕이가 2∼3일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술이 얼큰해지면 이유도 뜻도 없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움질도 많이 했다. 묵은 감정이 있어서도 아니고,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도 아닌데 괜한 시비와 싸움이 빈번하다. 그러다가도 풍장소리에 신명이 나면 언제 싸웠더냐 하고 풍물패를 앞세우고 부잣집으로 쳐들어 간다. 그러면 부잣집에서는 또다시 술동우를 내놓거나 닭을 잡아야 했다. 신명좋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렇게 몇일이고 계속되는 술멕이를 '뒷술멕이'라고 한다. 술멕이날 치뤄지는 또 하나의 행사가 '진서술내기'이다. 진서술은 나이가 17∼18살 무렵의 청소년들이 두레의 성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 동네 두레꾼들을 비롯해서 어른들에게 술대접하는 의식이다. "미성년자들은 평소에 두레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워나간다. 지역에 따라서 小童, 꽁배 따위로 불리운다. 젊은층의 지도자인 總角大方의 지휘를 받아 화롯불나르기, 소 돌보기, 각따귀 쫓기 같은 잡일을 하다 新入禮로 두레에 참여한다. 검지마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두레 성원이 되고자 하는 청소년들은 술멕이날에 갖은 심부름을 다해야 한다. 예컨대 돼지를 잡게되면 거동이 불편해서 참석하지 못한 어른들, 또는 상중(喪中)이라서 나오지 못한 어른 등 술멕이에 참여하지 못한 집에 호박잎으로 돼지고기를 싸고, 바가지에 술을 담아 일일이 돌리면서 대접해야 한다. 뿐만아니라 모정에 모인 어른들의 술 심부름, 안주 심부름, 담배 심부름 등을 도맡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심부름을 하고 나면 어느 순간에 "야들아, 너들도 심부름 인자 끝내고 술먹어라"라는 명이 떨어진다. 그때서야 비로소 술과 고기를 챙겨서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 한쪽으로 달아나서 한숨 돌린다. 모정은 위엄과 공경의 상징이다. 따라서 모정에 어른들이 올라가 계시면 젊은이나 청소년들은 언감생심 올라갈 수가 없다. 만약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가혹한 동벌(洞罰)이 따른다. 전통사회에서 마을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합목적적으로 수행하는 기초 단위이다. 즉 마을은 기초 생산공동체라는 역할과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다양한 기능이 병존하고, 수행되는 민주적이고 자치적인 최소단위라고 할 수 있다. 조루돌리기는 북(鼓)을 끈 달아서 벌 받을 사람의 등에 매달아 놓고, 한 사람이 그 북을 치면서 동네 고샅을 한바퀴 도는 벌이다. 그러면 동네 꼬마들이 뒤따르면서 '어이샤 어이샤!'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러한 방법의 동벌은 체벌 등으로 일시적인 신체적 고통을 주기 보다는, 온 동네에 잘못을 알림으로써 심리적인 수치심을 유발해서 근원적으로 반성케 하는 벌이라고 생각된다. 김매기가 끝나면 농촌은 농한기에 접어든다. 이제 여름이 다할 때까지 남은 일은 논두렁의 풀베기와 새쫓는 일 정도이다. 풀베기는 '보리풀'이라고 하는데 가을일이 끝나고 보리밭에 퇴비로 넣기 위해서 장만하는 것이다. 그리고 잡초가 우거지면 논두렁 옆의 벼가 밀리고, 논에 통풍이 잘 되지 않아서 벼가 성장하는데 지장을 주기 때문에 풀베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리풀을 하면서 추수를 기다릴 뿐이다. 벼베기는 10월 보름경부터 시작한다. 이때면 출수(出穗) 후 45∼50일쯤 된다. 그러나 옛날에는 출수 후 60일이 넘고 서리가 내린 후에야 벼베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얼음 속에서 나락비기가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벼베기는 거의 품앗이로 이루어지는데, 한사람이 하루에 낫으로 베는 분량은 약 '150뭇'(다발)이라고 한다. 150뭇이면 한마지기 반(당시에 한마지기는 150평)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벼베기를 마치면 그날 베어낸 볏단을 논두렁에 세워 놓는다. 물론 볏단을 잘 말리기 위해서지만, 논두렁에 볏단을 세우는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그날 벤 볏단의 숫자도 파악이 된다. 볏단을 세우는 사람이 음률에 맞추어 -마치 천자문을 읽거나 구구단을 외우듯이- 볏단의 숫자를 읊조리면서 세워나가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볏단을 계속해서 운반한다. 이와같이 논두렁에 일렬로 세워 놓는 것을 '줄갈이 친다'라고 한다. 줄갈이 친 몇일 후에는 '되갈이'를 해주어야 한다. 되갈이는 반대쪽의 볏단을 말리기 위해서 뒤집어 되세우는 과정을 말한다. 논두렁에서 충분히 말린 볏단은 주인집으로 운반해야 한다. 농촌의 전통적인 운반 수단은 지게이다. 농로가 전혀 닦아지지 않은 좁은 길에서 지게만큼 용이한 개인 운반 도구는 없을 것이다. 지게는 곡식을 나르는 것 외에도 짐을 운반하는 가장 대표적인 도구로서, 역사적으로는 마한 때부터 쓰였다고 한다. 지게를 이용하여 논에서 집으로 볏단을 운반하는 작업을 '등짐'이라고 한다. <등짐소리>는 등짐을 하면서 부르지만 시간상으로는 대개 해질녘에 부른다. 아침부터 시작한 등짐이라 이때 쯤이면 무척 힘도 들지만 다행히 남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으면 피곤함도 잠시 물리칠 수 있다. 얼추 등짐이 끝나가고, 술기운도 올라오는 해질녘 '파방' 무렵이면 드디어 등짐소리가 울려 퍼진다. 앞소리를 메기는 사람은 등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지게에 볏단 '서너뭇'만 올려 놓는다. 그리고 지게작대기를 뒷목에 끼워 양손을 걸치고 앞소리를 메긴다. 그러면 나머지 등짐꾼들은 앞소리꾼을 줄줄이 따르면서 뒷소리를 받는다. 해질녘에 먼데서 <등짐소리>가 울려 퍼지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논임자 안주인은 멀리서 들려오는 등짐소리를 신호로 저녁밥을 준비하기도 한다. '볏갈이'는 등짐으로 마당에 옮겨진 볏단을 쌓아나가는 벼눌을 말한다. 등짐꾼들은 지게에 실린 볏단을 볏갈이 하는 벼눌에 부린다. 그러면 벼눌을 쌓는 사람이 차근차근 모양을 갖춰가면서 볏갈이를 만든다. 볏갈이는 비가 와도 스며들지 않도록 짚 끝 쪽을 벼이삭 쪽보다 낮게 쌓아야 하는 특별한 기술이 요구된다. 볏갈이의 모양은 둥그런 원형이 대부분인데 그 모양에 따라서 '말볏갈이' '요강볏갈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볏갈이가 다 쌓아지면 맨 위에 마치 뚜껑을 덮듯이 볏단 하나를 세운다. 이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마지막으로 세우는 볏단을 '유주지'라고 부른다. "벼눌이 천개라도 유주지가 제일"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타작이란 이삭에 달린 곡식의 낟알을 터는 작업을 말한다. 과거의 한국 농경에 있어서 일반적인 타작 방법에 대하여 경기대 박물관에서 나온 연구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타작은 주로 품앗이로 이루어진다. 홀태가 보급되기 전에는 '개상'이라는 방법으로 타작이 이루어졌다. 개상질이란 절구통을 옆으로 뉘여 놓고 볏단을 그 절구통에 내려쳐서 벼 낟알을 떨구는 방식이다. 절구통이 없을 때에는 주로 통나무를 이용하는 재래식 탈곡방식이다. <타작노래>에서 '둘이 맞서 잘도 친다'라는 사설은 절구통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번갈아 가면서 내려치는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절구통에 칠때는 볏다발을 돌려 가면서 쳐야 낟알이 잘 떨어진다. 이때 볏다발을 돌리기 용이하도록 새끼를 볏단에 감는다. 그리고 새끼줄을 돌려가면서 내려침으로써 타작의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홀태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서 보급되었다고 해서 '왜홀태'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벼훑이 처럼 한 두개씩이 아니라, 한 줌씩 넣어서 훑을 수 있는 보다 능률적인 연장으로써 농촌의 전역에 보급되었다. 검지마을에서는 홀태가 보급된 이후에도 밀과 호밀을 타작할 때에는 계속해서 개상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벼를 기계식으로 탈곡하기 시작한 것은 '호롱기'(足踏式脫穀機)가 보급되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