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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3장
1. 사사기 3장 구조
사사기 3장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1-6절.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하나님
7-11절. 메소포다미아의 압제와 사사 옷니엘
12-30절. 모압 왕 에글론의 압제와 사사 에훗
31절. 블레셋의 압제와 사사 삼갈
2. 사사기 3장 주해
사사기 3장의 구조에 의해 각 단락의 본문을 주해하면 다음과 같다.
3:1-6 /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하나님
1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4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5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여기서는 앞서 언급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놓게 된 이유를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계속해서 전쟁을 치러 왔지만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가 있다. 가나안 전쟁은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호수아가 수행한 전쟁인데, 이 전쟁에 나타난 하나님이 도우시는 능력을 전혀 보거나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있다. 곧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태어난 세대, 여호수아와 동일한 시대에 살던 이스라엘이 죽은 후에 태어난 세대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새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겪게 하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그 열조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 참여하여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임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을 시험하실 생각으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놓으신 것이다.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그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 – 하나님의 율법(언약의 계명) - 을 잘 듣고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고자 해서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지 듣지 않는지를 알지 못해서 알고자 한다는 것에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마음의 실상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잘 알고 계시기에 그러한 그들의 마음을 끌어내서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자 하신다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현이다. 따라서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의도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지 않고 남겨 두었는데 가나안 족속과 헷 사람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어땠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거하여 있으면서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다. 그뿐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이 섬기는 신까지 숭배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의 끌어내 구원하기 위해 사사들을 준비해 놓으셨다. 왕이 없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앞에 사사를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으며,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있는 실증을 여실히 나타내셨다.
3:7-11 / 메소포다미아의 압제와 사사 옷니엘
7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9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여호수아가 죽고 그와 동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죽은 후에 태어난 세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월이 흐름 속에서 열조들에게 있은 일을 점차 잊었으며 나중에는 알지 못하였으니, 가나안 정복 전쟁이 있는 까닭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의 후손들과 대대로 맺은 언약을 이루시는 것임을, 그리고 그들의 열조가 그 전쟁에서 가나안 거주민들을 모두 진멸하며 몰아낼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남겨 두는 불순종에 있은 패역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셨다. 그에 따라서 가나안 거주민들이 남겨진 것은 하나님을 대하는 열조들의 상태를 드러내시는 의도적인 것과 함께 그들의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한 의도도 포함이 되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들 또한 열조들이 보인 부패한 본성에 있어 열조들이 걸어간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는 것에서 가나안 거주민을 그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않으셨으니, 이들이 이스라엘의 가시와 올무가 되는 것을 보며 그 처리를 열조들이 보인 모습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진멸하고 몰아내야 했다. 하지만 열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지 않음에서 하나님이 시험하신 의도는 명확해졌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딸들은 가나안 거주민들의 아들들과 딸들과 결혼하였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악에 빠져들었다. 하나님께서 금한 것(출 34:15; 23:24; 신 3:4)을 행한 것이다. 이는 노아 시대 때에 보인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에 있는 것이요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할 뿐인 것으로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함께 하지 않는 저주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창 6:2-5).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였다.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가나안의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들을 숭배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을 보시고 진노하셨다. 그래서 그들을 징계하셨다. 그것으로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을 다스리고 있는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고 그의 손에 이스라엘을 붙임으로 압제 속에 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8년을 구산 리사다임을 섬겼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은 징계하여 고통 중에 있게 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을 대함은 거듭 하는 언급이지만 시험의 목적에서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는 것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며 하나님을 그 이스라엘의 왕으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과 대대로 맺은 언약을 이루심에 있다. 비록 열조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거주민을 남겨 두었으나 그럼에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함에 있는 승리에 있게 된 것은 인간적인 힘이나 그 시대에서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의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에 진입하고 진행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일하신 도우심으로 되어진 것임을 알고 그 이스라엘의 후손인 백성들은 열조가 보인 모습에서‘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행동하였던 모습은 취하지 않고‘왕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는 보여 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메소보다미아의 압제 속에 놓여 8년간 구산 리사다임을 섬긴 기간은 징계를 당하는 환난의 날이었다. 그 환난을 겪는 징계가 주어짐으로 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에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그로부터 구원할 은혜를 구하였다.
이스라엘을 징계 속에 두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돌아보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한 구원자를 세워주셨다. 그는 갈렙의 (막내)아우인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다.1) 여호수아 15:13-19, 사사기 1:11-15에 보면 그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일찍이 갈렙은 자기의 기업으로 받은 땅 기럇 아르바 – 헤브론 – 을 점령한 후 그 서남쪽에 있는 드빌 –기럇세벨 – 을 치려할 때 그것을 먼저 취하는 자에게 자기의 딸 악사를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나스의 아들이자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이 기럇세벨로 올라가 그 성읍을 점령함으로 갈렙은 약속대로 옷니엘에게 딸 악사를 아내로 주었다. 따라서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이면서 또한 그의 사위가 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 옷니엘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일할 사람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을 다스리는 구산 리사다임과 싸우러 나갔다. 하나님은 구산 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붙이셨다. 그러므로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쳐 이겼다. 그러므로 그 땅에 평화가 깃들었는데, 옷니엘이 숨을 거두기까지 사사로 일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린 40년 동안은 그 누구도 이스라엘의 평화를 깨뜨리지 못했다. 사사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계신 하나님을 그의 구원 사역과 통치 속에서 보이며 산 사람이다. “여호와의 손이 임하셨으므로”, 옷니엘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겼으며,“여호와의 손이 임하셨으므로” 사사 옷니엘이 숨을 거두기까지 그 땅에 40년 동안 평화가 깃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이 사사 옷니엘을 세우심을 통해서 전개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자아 통찰이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이 주어진 것이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라고 말하였다.
3:12-30 / 모압 왕 에글론의 압제와 사사 에훗
12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13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17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18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19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20에훗이 그에게로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이르되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나니 21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22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23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뒤에서 닫아 잠그니라 24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들어와서 다락문들이 잠겼음을 보고 이르되 왕이 분명히 서늘한 방에서 그의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25그들이 오래 기다려도 왕이 다락문들을 열지 아니하는지라 열쇠를 가지고 열어 본즉 그들의 군주가 이미 땅에 엎드러져 죽었더라 26그들이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하니라 27그가 이르러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28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여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29그 때에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였으니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라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였더라 30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1) 3:12a : 옷니엘이 사사로 활동한 40년은 그 땅이 태평하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옷니엘이 죽은 후의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는 바인‘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라고 거듭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지켜보시고 계신대도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는 악을 행하였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 그래서 가나안에 거주하는 원주민들과 함께 섞여 살면서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과 결혼하고 그들이 숭배하는 신을 섬기는 악을 행함에 있었다(참조. 삿 3:5-6).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갖는 당연한 결과였다. 창세기 6:1-6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기들을 위하는 탐심에 있는 인간의 죄 성향이 끊임없이 분출되는 무서움을 보게 된다. 이 기록에 의하여 사사 시대의 경우를 보게 되면, 경건한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 안에 가나안에 남아 있는 사람의 딸들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인을 아내를 삼았다. 이는 그들이 육체이므로 범과함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떠나고 가나안 땅의 신들인 우상을 섬긴 것도 자기들을 위하여 좋아하는 것을 다하면서 살고자 하는 탐심에 의해서 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됨과 번성, 풍요를 위해서 가나안의 딸들을 취하였으며 가나안 땅의 신들을 자기들 위에 두고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
(2) 3:12b-14 :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보시고 진노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대적자의 손에 붙이는 징계를 행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지은 죄악을 깨닫고 회개케 하여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 앞에 그분의 통치와 베푸신 복을 인하여 화목한 관계를 이루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이에 모압 왕인 에글론을 강성케 하시고 그들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다. 따라서 모압이 강성해져 이스라엘을 압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 것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모암 왕 에글론을 이스라엘을 칠 마음을 갖는 충동에 있게 하시는 것은 모압을 일으키심으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그 압제를 받음으로 슬픔을 겪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충동시키시는 것이다. 회개케 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마음을 심어 주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의 후손들과 대대로 언약을 맺으심으로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대로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속성과 관련되어 있다. 모압 왕 에글론은 암몬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함께 동맹의 조약을 맺고 연합군을 구성하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여 살고 있는 곳으로 쳐 들어왔다. 모암 연합군은 종려나무가 무성한 성읍 여리고를 점령하였다. 그리고는 18년 동안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소유하게 한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에서 모압 왕 에글론을 섬기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했다.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한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왕이 없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한 그 결과는 가나안의 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복의 원인이 되지 않았으며, 가나안 땅의 신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이 되지를 않았다. 가나안의 딸들과 가나안 땅의 신들은 이스라엘에게 재앙의 화를 당하는 수치와 부끄러움이었다.
(3) 3:15-30 :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연합군의 압제를 당하면서 슬픔을 겪었다. 우리가 일제로부터 36년간의 압제를 당했었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우리가 겪은 경우와는 압제의 성질이 다르다. 우리의 경우는 주권을 빼앗김으로 식민백성이 겪는 슬픔이었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주권 상실 운운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슬픔을 겪는 수치와 부끄러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말미암은 저주받은 불행한 백성이라는데 있다. 그것으로서 이스라엘은 압제를 당하는 것이며, 평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참 안식이 없는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심판 그것이었다. 18년 동안 계속되어진 모압 연합군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은 소망 없는 삶의 두려움을 깨닫게 되었고, 이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의 출발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린 것이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그들을 돌아보셨다. 메소보다미아의 압제에 있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사사 옷니엘을 준비하셨듯이, 이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압 연합군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내시려고 그들에게 내린 진노를 거두시고 이스라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실 것에서 한 구원자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었다. 여기서‘왼손잡이’란 말은 양손이 다 있는데 그 중 특히 왼손의 기능이 발달해서 왼손을 주로 사용하는 자를 말하는 것에서가 아니다. 여기서의 왼손잡이는 히브리 원어로‘바른 손이 불구가 된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른 손을 바르게 쓸 수 없게 불구가 되어 있어 왼손만을 쓰는 자를 사사로 세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용사는“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살도 발하는 자”(대상 12:2)이어야 했다. 그런데 왼 손만을 사용하는 왼손잡이를 하나님께서 쓰신 것에는 이번의 에훗 외에도, 왼손잡이만 700명을 선출해서 물매를 던져 원수를 이기게 한 역사가 있다(삿 20:16).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른 손에 비해 약한 왼 손의 사람을 뽑아서 용사로 쓰신 것은 약한 자를 통하여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사람의 힘과 방법, 기술, 무기 등 등에 의해서가 아닌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능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에서였다. 하나님은 왼손잡이 에훗을 사사로 일으켜 세우심으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게 해 주시는 것이 되게 하셨다. 에훗이 왼손잡이란 사실에 대해서 카일․델리취는 그 해석을 좀 달리하였다. 그는 왼손잡이는 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자를 말하는데, 그러나 반드시 불구자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에훗이 어렸을 때부터 계속하여 사용하지 못한 것 같다고 보았다. 그는 왼손잡이란 표현이 불구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20:16에서 베냐민의 군대에 700명의 용감한 돌팔매 자들과 연관하여 다시 사용된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는 그들이 다 불구자들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700명 중 일부는 오른 손이 불구가 되어서 왼손잡이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오른 손이 불구자가 되어서 왼손을 쓰게 된 것이 아니라 본래가 왼 손만을 사용하는 왼손잡이가 태반일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에훗의 경우 전자의 의미가 더 분명하다고 본다. 에훗은 베냐민 지파 출신인데 작은 지파이다. 그런데 그를 왼손잡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는 출생에서부터 다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정상적으로 오른손을 쓸 수 없는 불구의 장애를 가지고서 태어남으로 해서 왼 손만을 쓸 수 있는 왼손잡이에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히브리 원어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뜻하고도 맞다. 따라서 오른 손과 왼 손 모두 정상적으로 갖고 있는데, 두 손 중에서 주로 사용하는 기능이 오른 손이 아닌 왼 손을 사용하는 것에서 왼손잡이의 기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왼 쪽 한 손밖에는 쓸 수 없는 왼손잡이인 에훗을 사사로 일으켜 세우신 것은 어떤 인물이, 그리고 어떤 신체적 조건을 갖춘 사람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합당하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 그의 중심을 보신다. 곧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려 사는 사람을 쓰신다. 하나님은 그런 에훗을 이스라엘 앞에 내세우심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데 있음을 보여 주시고 있다.
3:15 하반절에서부터 30절은 하나님께서 사사로 세운 에훗은 모압 왕 에글론을 상대로 싸워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을 다룬다. 따라서 사사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어떻게 죽였으며, 모압과 연합한 많은 군대와 어떻게 싸워 이겼는지를 알려 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동안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임무를 에훗에게 부탁하였다. 그러자 에훗은 칼을 준비하여 오른 쪽 허벅지 옷 속에 감추고 모압 왕 에글론에게 나아갔다. 에훗은 공물을 바쳐 에글론을 안심시킨 뒤에 공물을 메고 온 사람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자신도 길갈 부근에 돌을 조각하여 세워 놓은 우상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서는 에글론에게 은밀히 드릴 말이 있다고 하여 에글론이 신하를 물러가 있게 한 후 에글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왔다고 말하면서 그 순간 의자에서 일어나는 에글론을 칼로 찔러 죽였다. 에훗은 에글론을 죽인 후 스이라 – 스이라는 팔레스타인의 중앙산맥이었던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곳이다 – 로 도망하였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나팔을 불어 모압인들과 싸우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자를 소집하여 산지에서 내려왔다. 에훗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고 하였다. 에훗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군대는 요단강을 점령하여 여리고를 지키던 모압 군사들이 한 사람도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그날 있은 전투에서 모압 군사를 1만 명가량을 죽였는데 다 역사(力士)요 용사(勇士)였다.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고 다 죽임을 당했다. 그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 수하에 항복하였다. 그날 이후 그 땅에는 80년 동안 평화가 깃들었다. 이스라엘은 에훗이 모압 사람들과 치른 전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았다. 어떻게 모압 사람을 자기들에게 붙이셔서 이기게 하셨는지를 여실히 본 것이다.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몸소 겪었다. 에훗에 의해서 모압 연합군의 압제로부터 구원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여 살았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산 동안에는 진정한 평화가 실현되었다. 하나님과 가까이 다가있는 때는 평화의 날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때는 평화가 깨진다. 이 사실을 솔로몬의 통치 때에서도 본다. 솔로몬이 왕으로 있으면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할 때 이스라엘은 안연히 살았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하여야 할 통치에 있지 않고 타락했을 때 이스라엘은 그 타락과 함께 함으로 범죄하였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에훗은 살아 있는 동안인 80년간의 세월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통치하였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려 거기에 부합하여 살게 하였다. 이스라엘이 에훗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어 가도록 힘썼을 때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 그러기에 80년간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참으로 행복한 세월이었다.
3:31 / 블레셋의 압제와 사사 삼갈
31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에훗이 사사로 활동한 80년간은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었다는 기사에 이어 사사 에훗이 죽은 후의 세 번째 사사인 삼갈에 관한 기록으로 이어진다. 이 사사 삼갈에 관한 기사는 앞서의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기사와는 달리 단 1절이 전부이다.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징계하시기 위해 이번에는 블레셋을 일으켜 도구로 쓰셨다는 사실은 본문 앞서의 이스라엘의 행동 정황에서 볼 때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본문의 기록을 볼 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땅을 침범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부르짖음에 있었으며, 그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이미 한 구원자를 준비해 놓으셨다. 그가 삼갈이다.
삼갈에 대해서는 단지 그가 아낫의 아들이라는 것과 소 모는 일을 하는 자였다는 암시를 받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삼갈이 처한 그 상황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도구가 되게 하신다. 그에 따라서 삼갈은 소를 길들이고 몰고 다니는 연장인 소 모는 막대기로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괴롭히는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그들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였다. 에훗이 왼손잡이였던 것을 밝힌 것과 같이 삼갈이 소 모는 일을 하는 연장으로서 블레셋과 싸워 이겼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블레셋 사람들이 지닌 무기와 삼갈의 무기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당시 블레셋 군대는 철제 무기의 독점권을 지니고 있던 자들(삼상 13:19-21)인 반면에 사사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상대를 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마치 블레셋의 장군이요 용사인 골리앗을 이스라엘의 목동으로 소년 다윗이 상대하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실감이 되는 격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삼갈이 단지 소 모는 막대기를 지니고 있는 것뿐인 약한 데서 나타났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장 약할 때에 실은 가장 강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와 함께 하시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일하지만 사실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일하시는 것이었다. 그와 같이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를 지니고 블레셋과 싸웠지만, 그 싸움을 하신 분은 삼갈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한 영화에서 로봇이 있는데, 그 로봇 안에 로봇을 조정하는 사람이 들어 앉아 있으면서 로봇이 적과 싸우게 한다. 로봇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로봇은 다만 자기 안에서 조정하는 군인 – 주인 - 의 통제를 받아서 움직여 싸울 뿐이다. 정작 싸우는 것은 로봇 안에서 로봇을 조정하는 군인이다. 이는 사사 삼갈에게서도 보게 되는 것이다.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600명을 죽인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구원 얻은 그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아야 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움을 하면서 자기 열조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면서 배웠던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면서 구원해 나가시는 이유를 배워 나갔다.
사사 삼갈의 활동으로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구원이 완전한 이스라엘의 해방은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은 드보라의 노래에서 알 수 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5:6). 이 노래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살던 시대에도, 그리고 야엘이 살던 시대에도 큰 길로 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작고 좁은 길로만 다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들 외에도 또 다른 이방 사람들의 위협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큰 길 – 통상을 목적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 곧 상업로, 무역로 이다 – 을 피해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작고 좁은 길 – 옆 길, 샛 길 – 을 택하여 다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는 사사 삼갈이 활동하던 시대가 얼마나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사 삼갈의 사역에 의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무서워하며 두려움을 갖고 움츠려 있어 될 수 있는 한에는 사람들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길을 택한 것에서 이스라엘이 처한 당시 그 시대적 상황과 함께 이스라엘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사사 삼갈의 활동과 관련하여 특이한 것은 (1) 다른 사사들의 경우는 이스라엘 백성 중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지가 밝혀지고 있으나 삼갈의 경우는 그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요 (2) 또한 다른 사사들의 경우는 사사로 활동한 기간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반면에 삼갈의 경우는 그가 얼마 동안 사사로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삼갈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지와 그가 얼마 동안 사사의 활동에 있었는지를 알 수 없다. 이렇게 근원(족보, 가문)을 알 수 없는 인물이나 하나님은 그런 무명한 자를 들어 쓰셔서 당대의 힘 있는 유명한 자인 블레셋을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였으며(참조. 고후 6:9; 딤전 1:15), 사사의 활동 기간이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이스라엘사에 남긴 역사적 업적은 결코 작게 평가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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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옷니엘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 (1) “그(옷니엘)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은 옷니엘은 곧 갈렙의 아우이며 그나스의 아들이라고 보기 쉬우므로 번역을 다시 해야 한다.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갈렙의 아우’는 옷니엘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나스’를 수식하고 있어 ‘그나스의 아들’을 뜻하는데다가, 원문에서는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되고 있지 않은 ‘가장 나이가 어린(적은)’을 뜻하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따라서 옷니엘의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보다 가장 나이 어리다는 것을 뜻하여 ‘갈렙의 막내 동생’을 뜻한다. 해서, 다시 번역하면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그나스는 갈렙의 막내 동생이다”를 말한다. 따라서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갈렙의 조카’이다. 즉, 옷니엘에게서 그나스는 아버지이고, 갈렙은 큰아버지이다. (2) 반면에 이견도 있다. “그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을 글자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그는 갈렙의 아우’에 의한 대로 옷니엘과 갈렙은 갈렙이 형이고 옷니엘이 동생인 형제간이 된다. 그리고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에서 그나스는 개인의 이름이 아닌, 즉 옷니엘의 아버지가 그나스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나스’의 후손 옷니엘‘이란 뜻으로 본다. 갈렙도 그나스 사람인 때문이다(민 32:12). 해서 갈렙의 아우인 옷니엘은 그나스의 후손에 의한 아들인 것을 말하게 된다. 따라서 갈렙의 아우이며 그나스의 후손인 옷니엘이 된다. 그럴 경우는 한글성경에서 보는 대로 “옷니엘은 갈렙의 아우이며 그나스의 아들”로 번역할 수 있게 된다. (3) 이 두 견해에서 문법적 분석에 의할 때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