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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학번 김병호의 IBS 입사 사연
73학번 새내기 나 김병호는 인문사회 계열로 입학을 했다. 신설된 사범대학의 1기생인데 아직 학과가 정해지지 않아 100명이 본관 지계층에서 함께 교양과목과 교직과목을 수강할 때다, 서울 출신들은 경인선 서울역 - 제물포역 정기승차권을 끊어 통학을 하거나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에서 다녔다. 1년 반 뒤인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양현제>라는 이름의 학교 기숙사가 캠퍼스 서쪽 지금의 종합 운동장 뒤편에 있었다. 나는 기숙사생활을 하며 대학생활에 적응하느라 3월을 어찌 지났는지도 모른 채 훌쩍 지내고 4월을 맞았다. 어느 날 기숙사 옆방의 좀 차갑고 도도한 느낌의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동아리 활동으로 방송반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등교시간이면 음질이 별로인 혼 스피커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것을 들은 적은 있지만 방송반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몰랐다. 박찬구 선배는 1년 선배였지만 왠지 위엄이 있어 보였다. 곧장 2호관 현관 옆의 허름한 방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시험지 한 장을 내주며 아는 대로 쓰라는 것이다.
1번 IBS가 무엇의 약자인가?
2번 SYMPHONY와 CONCERT의 차이에 대해 써라
3번 ....... 등등
평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연주회도 가곤 했던 상식으로 써냈는데, 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방송반이 아무나 쉽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통과 의례의 장치인 듯 싶었다. 대뜸 PD로 뽑혔으니 내일부터 수업이 끝나면 이리로 오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3월 말에 이미 신입들을 모집했는데 인원 확충이 안 되어 추가로 인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음악도 맘대로 들을 수 있으며, 방송 제작의 고급 인력이 필요하다는 감언에 넘어가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어언 50년이다.
당시 동기로는 기술부 김종원, 아나부 이은성, 강선숙, 이희자, 최정숙, 제작부 김종엽이 있었고 2차로 장경호(기술부) 허원범(아나)이 나보다 조금 먼저 들어온 걸로 기억한다. 그리하여 우리 막강 4기는 2년 뒤, 학도호국단의 출발과 함께 학생회 소속 방송부를 인하대학교 교육방송국으로 승격 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강복춘 선배는 ROTC와 학생회 활동? 등으로 방송실엔 거의 오지 않았고 우리 바로 위 기수인 3기 박찬구(PD) 허정(기술) 박분도(아나) 오혜정(아나) 선배들이 모든 방송을 책임지고 있었다. 3기 박찬구 선배는 고교 방송반 출신이며 영어와 고전음악을 좋아했다. IBS 최초의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물론 모든 선후배가 하나 되어 벽면에 종이 계란판과 천정용 스티로폼을 직접 본드로 붙이는 작업을 해서 만든 스튜디오였지만 방송국 분위기는 났다. 박찬구 선배는 우리 인하대학교 교가를 합창부와 협력하여 녹음테이프를 제작하여 행사와 방송에 사용한 공로자이다. 방송에 사용되는 음악의 선곡부터 아나운스먼트까지 촘촘하게 챙겨 후배들을 혼내기도 했다. 야단맞은 여국원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여 원성도 들었다. 기술부 허정 선배도 고교 방송반 출신으로 늘 웃는 얼굴로 후배들을 이끌어 주었고 특히 기술부 직속 후배 김종원과 같이 후문 근처에 방을 얻어 같이 지냈다. 학업과 방송반 그리고 자전거 사업과 청춘사업을 하느라 늘 바빴다. 그리하여 IBS 최초의 CC가 탄생한다. 동기 아나운서인 오혜정 선배와 결혼하여 지금은 캐나다에서 거주하고 있다. 발음과 목소리가 기성 아나운서와 다름없던 실력파 박분도 선배는 맘 좋은 교회오빠였다. 곱슬머리를 거의 단발로 기르고 다녔다. 홍홍홍 웃기를 잘했다.
방송국원들은 허름한 방송실이 아지트였다. 과제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냄새나는 교련복이며 체육복 그리고 T자 같은 큰 교재들과 무거운 원서 등도 두고 다녔다. 그래도 스튜디오, 조정실, 편집실의 구분이 있었다. 방송실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청바지 통기타로 대표되는 대학문화 속에 축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축제 때는 방송부는 더 바빴다. 남들은 파트너와 희희낙락 즐길 때 각종 행사에 앰프며 스피커 마이크 등을 나르며 방송장비를 지원해야 했다. 특히 기술부가 주축이 되어 일을 했다.
2학기가 되자 입대하는 사람, 복학하는 선배가 엇갈렸다. 박찬구 선배가 군에 가고 허정 선배가 방송부장이 되었다. 자원공학과? 정한영 선배가 복학해서 방송실에 가끔 놀러오셨다. 학교 뒤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셨는데 당시론 드문 토스터기와 전기커피포트, 전축 등이 있어 가끔 동기들과 방으로 놀러가서 토스트와 우유를 먹곤 했다. 서승직 선배도 복학하여 가끔 아나운서들의 발음과 멘트를 지도해 주셨다.
유신 치하의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있었고 야당과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정보기관원들이 대학에도 상주하던 시절이었다. 유신독재의 암울한 그림자는 사회의 모든 부문에 어둠을 몰고 왔다. 이후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 발령으로부터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 유언비어 배포 및 정치적 집회 금지라는 혹독한 독재 유지의 악행들이 자행된다. 많은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초법적 조치로 옥고를 치루고 재학 중에 갑자기 군에 끌려가고 했다. 당시에 교내 방송이라는 것이 음악을 제공하는 게 주였지만 그래도 방송이라는 미디어의 비판적 기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3년 인하대학교 최초의 가두시위가 있었다. 학우들을 집결시키는 데에는 방송의 역할이 컸다. 나중에 뒤따를 체포 구금 등의 문제를 대비해 1인 방송을 했다. 그런데 방송부원은 대부분 처벌을 비켜갔다.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1학년을 보냈다.
응답하라 1974
1974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캠퍼스에는 신선한 신입생들로 활기가 가득했다. 우리는 발 빠르게 신입 방송부원을 모집하는 글을 만들어 교내 곳곳에 게시했다. 많은 지원자들로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보았다. 제 5기 신입부원으로 제작부 강용구, 윤태화, 한송준, 박현우 기술부 이성휘, 정진만, 최재권 아나 김기홍, 김규남, 김은숙, 문용철, 오성숙, 전영수 13명을 뽑았다. 수습 때부터 모두 활발하게 활동했다. 방송실이 활기에 넘쳤다. 개성이 빛을 발한 5기였다. 신입부원 환영회 때 술을 처음 먹는다는 정진만 군은 소주 한잔에 정신을 잃어 내가 이성휘 군과 같이 집에 데려다 줘야했다. 그래도 5기에는 술을 하는 친구들 5~6명이 있었다. 오성숙 아나는 착실하고 순진했다. 동기인 강용구는 누이동생에게 하듯이 오성숙이를 놀려먹었다. 어떤 때는 울리기까지 했다. 3기 2명, 4기 9명과 5기 13명으로 식구가 늘어나 방송실이 북적거렸다. 어쩌다 편집회의를 할 때면 편집실이 비좁았다. 방송부가 독립기관으로 승격되어야 한다는 내부의 요구를 학교 측에 전달하는 일들을 시작했다. 나와 몇몇이 박현우 군의 후암동 집에 모여 타 대학의 자료를 모아 정관 시안을 만들었다. 일부는 총장과 학생처에 청원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학생처장 원영무교수 댁을 방문하기도 했다.
봄 축제 때의 일이다. 파트너를 데리고 오면 어려운 일이 생길 줄은 알았다. 그래도 진짜 예쁘고 맘에 쏙 드는 여자 친구가 있어 그녀의 마음을 사려고 축제에 초대했다. 서울에서 인천이 멀지 않은데 그녀는 먼 지방으로 여행이라도 가는 듯 즐거워했다. 여대에 다니던 터라 우리 학교 축제에 은근 기대도 하였다. 캠퍼스는 애드벌룬에 대형 현수막이 달려 펄럭이고 각 써클의 호객 행위로 벌써 한껏 분위기를 띠우고 있었다. 그래도 방송실에는 한번 들려봐야 했다. 스튜디오와 조정실을 안내하고 편집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동기들이 바쁘다고 해서 모처럼 빼입은 양복 차림으로 앰프를 들고 뛰었다. 한참 도와주다 보니 파트너를 방송실에 혼자 두고 온 일이 생각났다. 벌써 1시간 이상이 지난 뒤였다. 방송실로 달려가니 그녀는 혼자 방송실을 지키고 있었다. 겉으론 참고 있지만 화가 나 있었다. 오늘 이 친구와 헤어지겠구나하는 예감이 들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적중하는 건지! 방송반의 뒷일은 다 제쳐두고 그녀에게만 집중했는데도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안녕’이란 말 한마디로 난 그녀와 이별하게 되었다. 우리는 IBS와 사랑이 너무 찐해서 연애도 못할 운명이었나 보다.
생애 첫 명함 : 인하대학교 총학생회 방송부장 김병호
2학년 2학기에 방송부장이 되었다. 전체 부원 회의에서 투표로 선출하였는데, 나는 이은성이 뽑힐 줄로 알고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내가 차기 방송부장으로 선출되었다. 한 학기가 지나서 알게 되었는데 인창고 학생회장 출신 김규남이 막후에서 서울 출신인 나를 밀었다는 것이다. 나만 모르게 인천파 서울파로 표가 갈린 모양이었다. 당시에 이은성이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은성에게는 전화위복이었다. 다음해 2학기 방송국으로 승격되어 국장을 하였으니...... 2학기가 되자 3기 김기덕 선배가 복학했으나 방송은 하지 않았다. 헤럴드 강독, 토플 등의 영어 강좌를 개설해서 바쁜 중에도 방송실로 자주 놀러와 후배들에게 좋은 말과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후에 영어 방송을 하여 교육방송국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학생회의 출범으로 2학년으로 부장이 된 나는 학생회 막내였다. 대학의 학생회와 대의원회는 권모술수와 이권을 탐하는 기성 정치판의 축소판이었다. 책만 보던 백면서생이 정치판의 생리를 알 리 없었다. 예산은 주는 대로 받아 주로 디스크를 사는 데 사용했다. 메인앰프의 TR이 자주 나가서 부속을 사는데도 돈이 들었다. 인하대학교 총학생회 방송부장이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2통 받았는데 별로 쓸데가 없었다. 당시 21살인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명함을 갖게 되었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었다. 총학 방송부이니 총학 행사는 물론이고 학교 행사와 축제 때, 음향설비 지원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모두의 도움으로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
계속 발표되는 긴급조치로 모든 활동은 위축되어 우리는 가끔 소주를 마시며 울분을 달래었다.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비방 등과 유언비어 날조 유포 등의 행위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국민의 입과 귀와 손발을 묶는 독재의 수단이었다. 택시운전사가 승객을 유언비어로 고발하기도 하고 이 발령을 근거로 친구나 경쟁자를 해치는 일도 있었다. 고발만으로 감옥살이도 하고 강제 징집이 되어 군에도 끌려가는 등 암울한 시대를 건너는 힘없고 가여운 청춘들이었다. 동기인 김종엽이 입대를 했다. 그렇게 모질고도 추운 겨울이 지나갔다.
1975년 봄
그래도 캠퍼스에는 봄과 함께 참신한 인재들이 신입 방송부원이 들어왔다. 6기 제작부 김중구, 유병숙, 정찬형. 기술부 이길훈, 최영환, 홍일점 김리연과 아나부 문제영, 오선환, 이홍열, 정혜숙
이은성의 발의로 보도부가 신설 되었다. 이은성을 부장으로 활발한 아나운서들인 5기 김은숙과 문용철, 제작부 한송준이 보도부원으로 편성 되었다. 신입 부원으로 6기 김경호, 신상실, 이정숙을 보강했다. 비로소 언론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활동을 시작했다. 13명의 막강 6기가 신입 신고를 톡톡히 하여서 그런지 방송부 전체가 활기를 띠었다. 4월부터 풍부해진 인력을 바탕으로 아침, 점심, 저녁방송까지 주당 780분의 방송을 하였다. 신청곡들도 들어왔다.
특히나 신설 보도부는 신입들을 다잡았다. 동인천 역전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고, 길에서 앵벌이를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자는 대범하고 용기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래도 당시에는 사회가 대학생에게 관용적이었다. 젊은이들의 사소한 일탈을 좋게 봐주었다.
제 1 회 IBS 수련회
여름방학을 맞아 IBS 최초로 전국원을 대상으로 2박 3일간의 MT를 오대산 월정사와 강릉해수욕장으로 다녀왔다. 이런 규모의 MT는 경험도 없고 경비도 부족한 상태로 조중훈 이사장님의 사모님 시주로 월정사가 크게 일어났다고 그래서 인하대학생에게 잘해준다는 소문만을 믿고 공문은커녕 사전 연락도 없이 시외버스를 2번이나 갈아타고 점심시간을 훨씬 지나 월정사에 도착했다. 주지스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황당해 하셨다. 취사는 알아서 할터이니 숙소만 제공해 주십사고 청했다. 다행히 요사체에 큰 방이 하나 비어 있어서 사용해도 좋지만 ‘남녀가 유별한데’ 하며 걱정을 하시는 것이었다. 다행히 방이 얼마나 큰지 20여명이 가방을 쌓아 남녀를 구분해서 누워 잘 수 있었다. 사진을 보니 여국원은 3학년 최정숙, 1학년 문제영, 신상실, 유병숙 이렇게 4명이었다. 부장으로 여국원들이 신경이 많이 쓰였지만 자기들이 알아서 잘해 주었다.
그래도 MT랍시고 신입부원들을 중심으로 수련회 기간 동안 팀을 만들어 프로그램을 하나씩 제작해서 제출하면 심사해서 그것으로 수습 딱지를 떼고 정식부원으로 임명한다고 하였다. 휴대용 앰프며 카세트녹음기, 혼 스피커까지 들고 갔다. 기술부원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음향을 셋팅하고 간단한 수련 프로그램과 장기자랑을 하고 삼삼오오 술도 마시고 대화도 했다.
4기 최정숙이 왕언니로 식사를 책임져 주었다. 도착해서 계곡에 씻고 놀며 라면을 먹기로 했다. 한참 놀다보니 소나기가 쏟아진다. 다리 밑으로 모두 대피해서 한참 끓던 라면을 다시 끓였더니 어떤 냄비에 끓인 것은 라면발이 우동가락만 하였다. 그래도 배고픈 청춘들은 그것도 맛있게 먹어 치웠다. 저녁밥은 절 뒷마당에 걸어놓은 가마솥으로 지어먹었다. 가지고 간 김치와 밑반찬이 전부였다. 12시 취침 모두 피곤해선지 금새 떨어졌다. 한잠 자고 일어나 보니 깜짝 놀랐다.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다가 그대로 쓰러져 잤는지 남녀의 구별이 없이 뒤섞여 전사한 것이다. 인원을 파악하니 두 명이 없었다. 가만 살펴보니 툇마루에서 남녀가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예 한 이불을 덮고 누웠다. 모른 체하고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을 서둘렀다. 적멸보궁까지의 산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상원사까지는 비포장 차도로 천천한 오르막길 10km이다. 그리 힘든 코스는 아니였다. 고교 산악부 경험으로 몰고 올라갔다. 상원사가 보이자 1학년 문재영이가 쓰러졌다. 밤새 잠을 안자고 산행에 나선 것이다. 가뜩이나 허약 체질인데 잠도 못자고 기를 쓰며 따라왔는데 1차 목적지가 보이니 긴장을 놓고 잠시 의식을 잃었다. 여국원들에게 팔다리를 주무르라 하고 응급약을 찾으니 있을 리가 없다. 등산객에게서 소주 한 컵을 얻었다. 가지고간 분말 포도쥬스를 진하게 타서 숟가락으로 조금씩 먹였더니 호흡이 돌아오고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이다. 누군가가 업고 절방 툇마루에 뉘였다. 춥다고 몸을 떨었다. 여름이라 변변한 옷가지도 없었다. 남방이며 점퍼를 있는 대로 덮어주었다. 상태가 조급씩 좋아지고 있어서 계속 손발을 주무르며 돌보는 몇 명이 남아 있기로 했다.
한 팀은 상원사 범종소리를 딴다고 종루에 남았다. 나머지 7~8명은 적멸보궁까지 올라갔디. 여름이라도 그곳은 추웠다. 누가 주머니에서 라면땅인지 생라면인지 꺼내서 조금씩 나누어 먹고 금새 내려왔다. 재영이는 일어날 수 있는 정도가 되어 차를 탔는지 몇 명과 먼저 내려갔다고 한다. 위기를 잘 면할 수 있어서 지금도 감사하다. 시련과 어려움은 우리를 결속시킨다. 그것만으로도 수련회의 성과가 있었다.
저녁에 작품 발표회를 하기로 했는데 놀러가서 어떤 놈이 그걸하고 있겠는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한 팀은 성능이 별로인 녹음기지만 상원사 종소리를 녹음해 왔다. 국보36호인 동종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당시에는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은 모조품을 걸어놓고 진품은 보관 중이다. 그 소리를 녹음기에 담아 왔으니 대단한 일이었다. 수련회 세부 자료나 녹음테이프도 지금은 없을 터이다.
다음 날 아침 경포대로 향했다. 두어 시간을 해수욕을 하며 놀고 강릉 - 청량리 완행 열차를 타고 귀경하는 것으로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추억은 주관식이라고 한다. 내 기억에 오류가 있거나 다른 내용이 있다면 함께했던 국원들의 첨언을 기대한다.
내 전공은 방송학 부전공은 군사학
중간에 군대에 갔다 오면 학교를 못 마칠 것 같았다. 집사정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돈을 벌어야했다. 나는 장남이었다. 가끔은 집안일도 돕고 T셔츠를 학교에 가지고 와서 팔기도 했다. 두 학기 받은 공로장학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장학금을 타고도 동기들에게 내색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미안한 일이다. 아무튼 2학년 말에 ROTC에 지원을 했다. 간단한 체력 측정과 신원조회 그리고 3급 이상의 공무원에 준하는 인사 2명에게서 추천을 받아야했다. 남광우 학장님께 추천서를 받고, 마침 친구 아버지가 서울시 부시장으로 승진을 하셔서 늦은 밤까지 기다려 나머지 한 장의 추천서를 받았다. 겨울방학 중에 중정인지 보안사에서인지 조사관이 나와서 신원 확인을 했다. 2월 중순 합격과 함께 예비 입단 교육을 받았는데, 주로 선배에 대한 복종심을 요구하는 가혹한 얼차려였다. 주먹 쥐고 푸시업을 해서 주먹이 왕모래로 다 까졌다. 3학년이 되자 이은성, 허원범 동기와 함께 ROTC 1년차가 되었다. 과 선배는 없지만 학생회장 문희탁을 비롯해서 학생회에 선배가 서넛 있었다.
국어과나 사범대에서는 남학생이 드물어 과에서 나에게도 역할을 해주었으면 했는데 방송부장에 ROTC를 하고 있으니 일을 하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반 학생보다 부지런히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2학기가 되니 과 친구들이 하는 말이 ‘김병호는 전공이 방송학이고 부전공은 군사학’이라고 했다. 그만큼 방송실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방학에 가는 과 답사여행에도 병영훈련으로 참석하지 못하곤 했다. 아무튼 방송국으로서는 우리 ROTC 3명이 제작부 아나부 보도부를 지키고 있어 전환기 어려움을 어느 정도 카바할 수 있었다고 자임한다. 물론 복학한 선배님들도 도움을 주셨지만 필드에는 잘 서지 않았다. 방송국 승격에 따르는 많은 일들을 74~76학년도에 했다.
여담이지만 ROTC에서 두 번 잘릴 뻔했다. 3학년 1학기와 4학년 1학기 학생시위에 협조하고가담한 일로 경고를 받았다. 실제로 학생회장 문희탁 선배는 ROTC였는데 아깝게도 4학년 1학기 때 제적을 당하고 입대했다.
지나고 보니 전공인 방송학이고 부전공이라던 군사학도 변변하게 하지 못한 것 같다. 임관시험 성적 순으로 주는 군번은 3천5백명 중에 2015번이었고 언론계의 문이 너무 좁아 2~3군데 시험에 다 떨어지고 사범대 국어교육과 이름으로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먹고 살았으니 말이다.
인하대학교교육방송국으로 승격
1975학년도 1학기를 마칠 무렵 갑자기 학도호국단을 만들라고 정부의 지침이 내려와서 모든 조직이 군대식으로 바뀌고 모든 임원은 학교에서 임명했다, 학생운동 자체를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학도호국단이 출범하며 방송부의 위상이 애매했다. 1년여의 우리의 노력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전 단계에 이르렀다. 가칭 인하대학교 교육방송국으로 독립 기관이 된 것이다. 1975년 2학기 이은성 방송부장이 아니라 실무국장이란 명함을 받았다. 학생회관 준공과 함께 1975년 10월 7-106호로 이전한다. 드디어 소망하던 방송국이 되었다. 2개의 스튜디오와 첨단 장비들이 들어왔다. 주조정실에 새로 들어온 콘솔에 버튼이 너무 많아 엔지니어가 아니면 잘 만지지도 못했다. 약간의 사무집기와 실무국장의 책상도 들어왔다. 이전에 따른 후속 공사도 많았다. 배선을 새로 하고 컬럼 스피커를 달았다. 모 엔지니어는 나무를 타다 인경호로 추락하기도 했다. 물로 떨어져 다행이었다. 그래도 신이 났다. 금새 자리가 잡혀가고 긴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나는 4학년이 되어서도 방송에 욕심을 부렸다. 5분짜리 <IBS컬럼>이란 프로를 새로 만들고 직접 생방으로 한 학기를 진행했다. 현실 비판적인 글들을 썼다. 언론계로 나가고 싶었다.
IBS로고와 최초의 방송국 기(旗), 국원증과 명함
내 기억으로는 IBS 로고는 허정 선배가 만들었지 싶다. 그 로고를 남대문에 시장 상패가게에 가서 주물을 뜨고 본을 만들어 뱃지를 제작한 것은 나다. 그 본으로 졸업생에게 해주는 14K기념품도 만들었다.
다크블루 벨벳 바탕에 황금색으로 IBS를 수놓은 인하대학교 교육방송국기(旗)도 우리 4기가 최초로 제작했다. 4기 졸업 기념품으로 제작해서 기증한 것이다. 그 깃발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면 한 구석에 병호 은성 원범이라고 조그맣게 새긴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하얀 나일론천에 페인트로 IBS라고 쓴 약식깃발을 사용했다. 조금 지나 광목천에 인쇄한 깃발을 사용해 왔다. 학생회의 한부서로 적은 예산으로 기를 만든다는 일도 어려웠다.
언론사 직원을 흉내 내서 빨간 사선이 두줄 쳐진 방송국원증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 나는 2학년 때의 국원증부터 가지고 있다. 빨간색 사각 방송부 직인도 찍혀있다.
각부의 부장 명함과 보도부 기자 명함은 75년 방송국으로 승격하고 나서 이은성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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