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한시로 읽는 역사이야기(14)
유배지 순천에서 죽은 매계梅溪 조위曺偉
조해훈(시인, 고전평론가)
시름에 겨워 돌아오니 하늘은 보이지 않고(眊矂歸來不見天·모소귀래불견천)
종남산이 지척인데 안개와 구름만 보이네.(終南咫尺望雲煙·종남지척망운연)
삼 년의 변방살이 외로운 신하가 눈물 흘리고(三年塞下孤臣淚·삼년새하고신루)
오늘 강가에 서 있으니 슬픔이 배나 더하네.(今日江頭倍黯然·금일강두배암연)
위 시는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의 ‘남천과한강(南遷過漢江)’으로, 그의 문집인 『매계집梅溪集』에 수록돼 있다. 조위가 무오사화에 화를 입어 매질 형벌을 받고 평안도 의주義州에서 유배를 살다 1500년(연산군 6)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길 때 한강을 지나면서 읊은 시이다.
의주에서 3년여의 귀양살이를 했다. 그곳에서의 삶을 회상하며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적소에서 3년여가 흐른 뒤에 온 임금의 사자使者는 ‘복직하라’는 소식을 갖고 온 게 아니었다. 의주에서 다시 남쪽 끝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을 전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유배형은 사형을 면해준 것이지 어쩌면 사형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었다. 일단 유배형은 종신형으로 인식되었다. 풀어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유배를 살아야 한다. 거기다가 경우에 따라 언제 사약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
절망 속에 한강을 지나며 임금이 계신 하늘을 보니 하늘은 보이지 않고, 임금이 계신 종남산終南山은 지척인데도 안개와 구름에 가려있었다. 적소인 변방 의주에서 3년여를 임금을 그리며 힘든 시간을 보냈건만 임금은 자신을 부르지 않고, 게다가 순천으로 적소를 옮기라는 명령을 따르려니 암담할 뿐이었다.
이번 호에서는 위 시를 지은 조위가 누구인지, 그가 왜 유배를 살게 됐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조위는 1454년(단종 2) 7월 10일에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봉계리鳳溪里의 집에서 울진현령인 아버지 조계문(曺繼門·1414~1489)과 유문(柳汶)의 딸인 문화 유씨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이다. 누나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에게 시집갔다. 그러니까 조위는 김종직의 처남이다.
조위는 어릴 적부터 예사로운 아이가 아니었다.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특출했으며, 문장이 뛰어난 이복동생 적암適菴 조신(曺伸·1454~1529)과 함께 가학을 이어받으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매형인 김종직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조위에게는 김종직이 매형이자 스승이었다. 그는 1464년(세조 10) 상경하여 종부형從父兄인 충간공 조석문(曺錫文)의 집에 유숙하면서 수학하였다. 1467년(세조 13)에는 울진 현령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공부를 하다 1470년(성종 1) 한양으로 돌아왔다. 1472년(성종 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해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김종직의 1472년 8월 14~18일 지리산 유람에 조위·유호인·임대동·한인효 등의 제자가 동행했다.
조위는 147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는 성종 때 실시한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에 첫 번으로 뽑혔다. 홍문관 등 청요직을 거친 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함양군수가 되었다. 이후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알려진 문장가였다. 성종은 사대교린과 같은 외교적 일로 문장가를 중시했으므로 조위를 아꼈다. 한명회는 신숙주·서거정·강희맹 등의 뒤를 잇는 문장가로 조위를 꼽았다.
1493년(성종 24)에 이조吏曹에서 조위에게 정조사正朝使로 중국에 가기를 바랐지만, 조위는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조위가 문장이 뛰어나므로 중국에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조로 하여금 “다음에는 조위를 반드시 중국에 사신으로 갈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1495년 연산군이 즉위했다. 조위는 연산군에게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한성부윤과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때 사관인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여 올렸다. 이에 조위는 김일손의 글을 원문대로 받아들여 편찬하게 하였다.
조위는 1498년(연산군 4) 동지중추부사겸부총관同知中樞府事兼副摠管이 되었고, 결국 성절사聖節使로 북경에 갔다. 그런데 조위가 중국에서 한양에 돌아오기 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평안도 의주에서 체포돼 투옥되었다. 그가 김종직의 처남이자 문인이며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위는 성절사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명나라 땅에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망명하지 않고 의연히 국경을 넘어 본국으로 들어왔고, 의주에서 연행됐다. 다행히도 윤필상과 이극균의 간청으로 죽음을 면하고 의주로 유배된 것이었다.
연산군 시절 사화의 희생자는 대체로 김종직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었다. 조위는 김종직의 처남이면서 문인이었으며,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한 인물로 화를 입었다.
그러면 조위는 화를 입은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연산군 대에 『성종실록』을 편수하고 있었다.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당시 실록 편수 책임자인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으로 있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쓴 사초를 본 후 유자광(柳子光·1439~1512)과 모의해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김종직의 사림 세력 등을 제거하고자 무오사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무오사화에 대해서는 앞의 글에서 소개한 바 있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간략하게 정리한다.
이극돈은 자신을 논척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는 김일손이 성종실록 사초에서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자세히 썼기 때문에 원한을 품었다. 유자광은 함양의 학사루에 건 자신의 시를 김종직이 군수가 되어 철거하고 불사르게 했으므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의 내용에서 술수를 부리고자 했다. 이를 통해 김일손에게 원한을 갚으려고 당시 실력자였던 유자광과 상의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에서 「조의제문」과 「술주시述酒詩」를 지적하여 세조를 저훼한 것으로 판단하고 대역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김일손은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사림파士林派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조위는 순천에서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었다. 「만분가」는 국한문혼용체로, 2음보 1구로 계산하여 127구이다. 3·4조와 4·4조가 주조를 이루고 2·3조, 2·4조 등도 더러 있다.
성종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만분가」의 내용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상天上 백옥경白玉京 십이루十二樓 어디 매오/ 오색운五色雲 깊은 곳에 자청전紫淸殿이 가렸으니…옥황玉皇 향안전香案前의 지척咫尺에 나아 앉아/ 흉중胸中에 쌓인 말씀 쓸커시 사뢰리라….” 「만분가」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제44책에 수록되어 전한다. 유배가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조위는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1503년(연산군 9) 적소인 순천에서 병을 얻어 안타깝게도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그는 사망 후 충북 영동면 황간 마암산에 묻혔다.
그런데 이듬해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조위는 부관참시 되었다. 조위 외에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정여창과 생육신 중 한사람이었던 남효온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 또한 세조의 일등 참모였던 한명회도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토막 나고 한양 저잣거리에 목이 효수되었다.
연산군은 조위가 지은 『두시언해』의 서문마저 삭제하였다. 조위는 당시 사림 사이에서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지도자였다. 그만큼 명망이 있던 문신이었다.
조위가 함양군수 때 토지 소유자가 국가에 납부하는 토지세인 조부租賦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 『함양지도지咸陽地圖志』를 만들었다. 이는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일선지도지一善地圖志』를 만든 것과 같은 목적이었다.
그는 유배 중에도 저술을 계속해 『매계총화』를 정리하다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버렸다. 조위는 조선 성종조의 대학자이자 명문장가로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한시를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한 『두시언해』와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를 집필하는 등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는 등의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