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12. 사육신 현창사업에 평생을 바친 김산 군수 박숭고
필자는 일주일에 1-2일 정도 묘골 육신사에서 해설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런 만큼 틈틈이 시간을 내어 ‘묘골·육신사·사육신·박팽년’ 등과 관련한 자료들을 살펴보고, 필요한 것들은 별도로 정리를 해두는 편이다. 그런데 관련 자료들을 보다보면 의외로 자주 만나게 되는 인물이 한 명 있다. 그는 사육신도 생육신도 아닐뿐더러, 사육신 사건 당시에 생존했던 인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육신, 특히 박팽년 선생과 관련하여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이 여간 예사롭지가 않다.
‘김산 군수 박숭고’
묘골 박씨 문중 자료에서는 박숭고라는 인물을 ‘김산 군수공(金山郡守公)’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육신 박팽년과는 떼려야 땔 수 없어 보이는 이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이번 이야기는 김산 군수 박숭고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옛 것을 숭상하다, 숭고(崇古)
‘박숭고(朴崇古)[1615-1671]’
그는 사육신 박팽년 선생의 7세손이자 종손이다. 참고로 ‘7대손(代孫)’과 ‘7세손(世孫)’은 같은 표현이다. 한때 ‘상대하세(上代下世)’라고 하여 대수를 위로 적용할 때는 ‘대’를 쓰고, 아래로 적용할 때는 ‘세’를 쓴 적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대를 이야기 할 때는 세에서 1을 빼야한다는 ‘대=세-1’을 주장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주장들은 최근 관련 전문가의 논의를 거쳐 깔끔하게 일단락이 됐다. 다시 말해 대나 세는 같은 개념이며, 옛날에도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하세’니 ‘대=세-1’과 같은 개념도 근래에 생겨난 것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매우 부정확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실 관계를 살펴보면 본래 세로 사용하던 글자가 과거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대로 바꿨다. 이는 ‘피휘(避諱)[윗사람의 이름을 피하는 예법]’ 때문이었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가운데 글자인 ‘세’자를 피하기 위해 ‘대’로 바꾼 것이었다. ‘관세음보살’을 다르게 ‘관음보살’이라 부르는 것도 역시 같은 이유에서이다.
사육신(死六臣)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 덕분이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명이기도 한 그는 당시 세상에서 쉬쉬하며 비밀리에 전해지던 사육신 이야기를 한데 묶어, 육신전(六臣傳)이라는 전기를 펴냈다. 육신전의 파급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왜냐하면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육신과 관련된 거의 모든 텍스트가 바로 이 육신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조선왕조실록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조금 더 추가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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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 육신전은 박팽년 선생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여하튼 육신전이 지어졌던 성종 조 당시만 해도 사육신을 바라보는 왕의 시각은 여전히 ‘사육신=역모자’였다. 그러한 시기에 금기였던 사육신의 이야기를 말이 아닌 글로 써서 남겼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남효온만큼이나 사육신을 현창하는 데 있어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 또 있다. 남효온보다 161년 뒤에 태어난 ‘박숭고’라는 인물이다. 그는 박팽년 선생의 7대 종손으로 인조 때 세자를 보좌하는 관직인 세마(洗馬)와 익찬(翊贊)을 거쳐 이후 4개 군의 수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숭고(崇古)’라는 자신의 이름처럼 한 평생을 옛 것을 숭상하는 일에 바쳤다는 사실이다.
2. 박숭고의 업적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에는 ‘사육신역사공원’이 있다. 지금 이곳에는 사육신을 비롯하여 ‘사칠신(死七臣)’으로 불리는 백촌 김문기 선생의 묘까지 모두 일곱 기의 묘가 있다. 하지만 1636년[인조 14] 이곳에서 사육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묘는 모두 네 기였다. 작은 비석에 ‘박씨지묘·성씨지묘·이씨지묘·유씨지묘’라 새겨져 있었는데, 후에 각각 ‘박팽년·성삼문·이개·유응부’의 묘로 세상 사람들의 공인을 받았다. 당시 이 네 기의 묘가 사육신의 묘임을 공인해준 인물이 여러 명 있었다. ‘신독재 김집·미수 허목·택당 이식·청음 김상헌·백헌 이경석’ 등인데,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다. 바로 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자문을 구해 지금의 사육신묘의 기틀을 처음 마련했던 인물이 바로 박숭고였던 것이다.
대전시 동구 가양동에는 대전시 기념물 제1호인 박팽년 선생의 유허지와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8호인 박팽년 선생 유허비가 있다. 여기에도 박숭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때는 1668년[현종 9], 대전의 유림들이 박팽년 선생의 유허지에 유허비를 세우려했다. 하지만 그 당시 유허지 일대는 이모(李某)라는 사람의 개인 땅이었다. 당연히 유허비를 세우는데 문제가 되었다. 이때 대구 묘골 출신의 박숭고가 사재를 털어 그 땅을 매입해준 덕에 유허비를 세울 수가 있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 육신사 경내에는 대한민국 보물 제554호인 태고정이 있다. 이 정자가 처음 세워진 것은 1479년[성종 10]이며, 임란 때 소실된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전자를 구정(舊亭), 후자를 신정(新亭)이라 하는데, 신정의 이름을 ‘태고정(太古亭)’으로 명명한 이가 박숭고이다. 순박하고 고졸한 옛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의 ‘태고’, 과연 ‘숭고’라는 이름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또한 묘골 초입의 사육신기념관에는 박팽년 선생의 필적을 돌에다 새겨 넣은 유물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힘들게 수집한 선생의 필적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옥돌에다 새겨 넣은 것이다. 이 역시 박숭고의 아이디어였다. 현재 이 기념관에는 박숭고가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옥돌에다 새겨 넣은 유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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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필적이 세상에서는 꺼리는 바가 되었고, 또 여러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거의 흩어지고 없어져 남은 것은 열에 한 둘도 되지 않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이 시첩은 다행히 문헌의 집안에서 찾아 상자 속에 넣어둔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불초가 선조의 음덕을 입고 이 고을에 부임하여 공무를 보는 여가에 삼가 돌에 본떠 넣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게 도모할 뿐이다.
칠대손 통훈대부행금산군수 숭고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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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조상을 높이고 종족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족보간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670년[현종 11]에 족보를 편집하고, 우암 송시열로부터 서문까지 받아 두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결국 이 족보는 간행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구초보(舊草譜)’라고 불리는 이 미완의 족보는 순천 박씨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과연 세상에 떠도는 말처럼 사람의 이름에는 그 어떤 신비한 기운이 담겨 있는 것일까?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숭고는 ‘옛 것을 숭상 한다’는 자신의 이름처럼 사육신 및 박팽년 선생의 현창사업에 한 평생을 바쳤기에 하는 말이다.
끝으로 사육신과 묘골의 유적[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1988]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박숭고 관련한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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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돈독하신 뜻과 행실 그리고 조상의 얼을 이어받아 선대에 밝히지 못한 조상의 자취를 이제야 나타내어 후세에 전하게 하여 자손들의 교훈을 삼게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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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선생의 필적. ‘스스로 천지조화의 마음을 터득하였네. 낭묘에 재목이 모자라면 쓰이게 될 것이나 세상에 훌륭한 장인 없으니 서로 침범하지 않으리. 인수[박팽년의 자]가 비해당[안평대군의 당호]을 위하여 왕개보의 고송 시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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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선생의 필적. ‘호서하는 왕자가 기꺼이 써주었으니 송설의 풍류는 그 또한 한때였다. 꽃 꽂은 듯 좋은 자질 자태를 다할 수 없었으며 해를 쏠 듯 신비 광채 기이함이 다시 또 많았도다. 세상의 드문 묘수 오래도록 흠앙했고 천하에 알려졌던 높은 명성 실지로 보았다네. 아계의 한 필 나에게 있으니 젖은 붓으로 일필휘지 아끼지 말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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