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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별것도 아닌데. 공주마마께 약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루하가 여미아의 얼굴을 빤히 쏘아보다가 다그쳤다.
“여미아! 그 탄지신공彈指神功은 내게 배운 솜씨가 아니던데?”
여미아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워낙 위급한 상황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옛날 스승께 배운 것이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런 건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건마는······.”
“아니, 그런 절학을 쓰지 않고 녹슬게 내버려 두다뇨? 이 험난한 세월에 여인이 자기 몸을 지키기에는 아주 좋은 기술입니다.”
“죄송합니다. 하늘의 어진님께서 지켜주실 터인데. 제 손가락을 잘라 버려야······.”
“아니, 아가씨! 그토록 아름다운 섬섬옥수를······.”
조영이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여미아가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 샌가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었다.
“그네들이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 바로 여미아 아가씨의 무예일 것입니다.”
“제가 쓰러뜨린 그 사람은 많이 다치지 않았나요?”
여미아는 자신과 상대하던 거한의 신상이 몹시 염려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잠시 졸도했을 따름입니다.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고승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여미아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루하가 여미아를 쏘아보고 있다가 말했다.
“저도 여미아가 그토록 놀라운 무예의 소유자인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인인 나까지도 감쪽같이 속였네요.”
“마마, 죄송합니다. 옛날에 배운 무예를 다시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마를 속인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알았으니 됐다. 오히려 내게 든든한 호위무사가 생겼으니, 다행이구나.”
이루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여미아가 여전히 쩔쩔매며 아뢰었다.
“마마, 저는 제가 터득한 무예를 영원히 버릴 작정입니다. 그래서 손가락들을······.”
“아니다. 괜찮다. 그냥 옛날처럼 지내면 된다.”
이루하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대답한 후 다시 경고했다.
“너의 손가락을 다치게 하면, 그건 나를 섬기는 일에 불편을 주는 것이니, 큰 벌이 네게 임할 줄 알아라.”
“네, 마마. 명심하겠사옵니다.”
이루하가 다시 고승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인, 죄송합니다. 저의 가정사를 늘어놓아서.”
“아닙니다. 두 분 아가씨가 나이는 젊지만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고승은 이어서 이루하에게 물었다.
“공주님의 여종 여미아 아가씨는 한 사람의 거한을 사로잡은 장본인으로서, 그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시는지 물어봐 주시겠소?”
“여미아, 대답을 드려라.”
이루하가 명했다.
“참으로 송구스럽니다만, 십자사 대덕님께 배운 바에 의하면, 구세주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하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에게 오히려 선물을 주어 그를 내보내는 것은 어떨지요?”
“오! 원수를 사랑하라?”
고승이 크게 놀라는 것 같았다.
“그건 성현들의 글에서조차 읽어보지 못한 놀라운 가르침이군요.”
“그 분은 세상에 계실 때, 원수가 주리거든 먹여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가르치셨답니다. 또 경전에 이르기를, 원수가 오히려 잘되도록 그에게 복을 빌어주라고 하셨답니다.”
“천하 세상에 그런 가르침을 베푼 성현도 계셨군요.”
고승은 큰 충격을 받았는지 한 동안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수를 너그럽게 놓아준다면, 나중에 그 원수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을까요?”
조영이 물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구세주께서는 자신의 원수들이 자기 목숨을 앗아가도록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원수라도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이랍니다.”
“그 분의 말씀을 천하 만민이 따른다면 세상에는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가 넘쳐나겠군요.”
고승의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원한과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백성을 모조리 죽이려 할 때 우리는 모두 당하고 있어야 합니까?”
조영이 볼멘소리로 되물었다. 여미아가 그 화사한 얼굴에 고요한 미소를 피웠다. 초롱불에 비친 여미아의 미소는, 마치 봄날에 활짝 핀 진분홍 모란화, 아니면 흑색 줄기에 고혹적으로 수놓인 백첩분홍매화 같았다. 조영은 그 미소를 보자 스스로가 속으로 머쓱해졌다.
‘아, 실언했구나.’
“외람된 말씀이오나, 자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은 군주의 당연한 본분이 아닐까요?”
여미아가 그 고혹적인 눈빛으로 조영을 응시하며 반문했다.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까지라도 바쳐서.”
여미아의 이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은 모두 침묵에 잠겼다. 조영이 자신의 조부 고승으로부터 그와 유사한 가르침을 받은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왕은 백성의 종이 되어 백성을 섬겨야 한다고 했다. 여미아의 말은 조부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았다.
깊은 침묵을 깨뜨린 것은 여미아의 다음 말이다.
“하늘의 임금 구세주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것도,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서였답니다.”
그 찰나지간, 어떤 섬광이 번쩍 일어났다. 조영의 뇌 속에서.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 같았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 군주가 죽는다?’
다시 사위는 정적에 싸였다. 가끔씩 이른 봄의 바람 소리만이 실내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초롱불은 말없이 네 사람의 혼을 태우고 있다.
“영아야, 그 네 거한의 신변처리를 네게 일임하고 싶다.”
긴 침묵 끝에 고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렇다면, 여미아 아가씨의 말처럼 그들에게 선물을 주어 내보냈으면 합니다.”
“어떤 선물?”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일정한 액수의 돈을 주어서 보내죠? 물론, 그들의 얼굴은 끝까지 확인하지 않는 게 좋을 성 싶습니다.”
고승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옳은 것 같구나. 저들이 우리를 원수로 대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선대하면, 하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그 때 이루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네, 저도 십자사十字寺 대덕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원수의 이마에 숯불을 쌓는 것이라고.”
그 즉시로 조영은 명을 내려 야행인들의 상처를 치료해 준 후 그들 각자에게 상당한 금액의 돈을 주어 그들을 내보냈다.
날이 새자 만일을 염려해 조영은 친히 이루하 공주와 그녀의 시녀 여미아를 성 안의 사저私邸까지 배웅하고자 그녀들을 따라나섰다.
아직은 차가운 봄바람이 땅을 누비고 있다.
이국적 풍모를 지닌 아름다운 이루하가 여걸 같은 씩씩한 모습으로 말을 몰고 고가장의 출구를 나선다. 그 뒤에는 여미아가 역시 마상에 앉아 주인을 바짝 좇았다. 맨 뒤에서 허리에 검을 찬 조영은 위풍당당하게 건마 위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주시했다.
그들이 고가장을 멀찍이 나와서 성문으로 통하는 관도에 들어섰을 때다. 앞서 가던 여미아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왼손을 뒤로 돌려 휘저었다. 그 순간 불시에 어떤 푸르스름한 물체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와 미처 방비하기도 전에 조영의 품에 꽂혔다. 그 섬광 같은 물건은 정확하게 그의 왼편 겨드랑이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조영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조영은 슬며시 그 물건을 우수로 집어 꺼내보니, 그것은 옥비녀였다. 하지만, 진짜로 대경실색한 것은 그 다음 순간이다. 그가 옥비녀를 막 우수로 드는 찰나, 무언가 하얀 물체가 다시 날아와 옥비녀가 박혔던 동일한 그 자리에 정확하게 끼워지는 것이다.
엉겁결에 그 물건을 겨드랑이에서 꺼내 보니, 그것은 하얀 바탕에 약간의 채색이 깃든 부드러운 금견지錦繭紙(누에고치로 만든 종이)였다.
금견지는 중국에 없는 고려(고구려)의 특산물이었다<고반여사>.
조영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여미아의 표창비술鏢槍飛術을 내가 방어하지 못하다니 아, 내 실력이 이토록 형편없단 말인가?’
하지만 그를 진정 혼비백산하게 한 것은, 부드러운 금견지를 마치 유엽도柳葉刀처럼 날리는 여미아의 무예였다. 전설로만 듣던 암기비술暗器飛術이다.
조영이 눈을 들어 여미아를 흘낏 바라보니, 그녀도 그 순간 고개를 돌려 보일 듯 말 듯 한 신비로운 미소를 남기고 이내 뒷모습만을 보였다.
조영은 옥비녀와 종이조각을 품속에 넣고 몹시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말없이 말을 몰았다. 이루하의 사저까지 두 여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조영은 마상에서 여미아가 던진 종이조각을 펴보았다.
거기엔 한 수의 시가 적혀 있었다.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燃 戀 洗 世 연 연 세 세
조영은 제목만 흘낏 살펴보고 가슴이 두근거려 옥비녀와 금견지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조영이 본가에 도착하자 조부 고승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영아야, 시일이 몹시 촉박한 것 같구나. 내가 이미 뛰어난 명장明匠을 물색해 놓았다.”
“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에요?”
“천명신검을 새로 두 자루 더 만들 작정이다.”
“네?”
조영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에게 은밀하게 부탁해서 네가 받은 천명신검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동일하게, 하지만 그보다 더욱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해.”
“할아버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조영은 놀란 눈을 치켜떴다.
“원래의 천명신검은 너의 것이 아니니라. 너의 마음이 그것에 얽매여서는 아니 된다. 백성을 얻는 것은 명검名劍이 아니라, 신망과 덕이니라. 알겠느냐?”
“그럼 그 검은······?”
“본래의 진품은 영주도독 조대인에게 갈 것이다.”
조영이 침묵을 지킨다.
“영아야, 잘 들어라. 내가 가진 이 세상의 보배를 탐내는 자가 있다면, 나의 보배를 그에게 내어주어야 내 목숨이 안전해진단다. 그리고 색불루 임금의 ‘별유진보’라는 시를 잊지 말거라.”
하지만,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천고의 가보를 얼토당토않게 조문홰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참으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너의 마음이 몹시 섭섭할 줄 안다. 하지만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도 모르느냐? 그건 잃는 게 아니라 더 크고 장구한 것을 얻기 위한 출자出資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조영은 간신히 대답했다.
조영이 침울해하고 있을 때, 밖에서 종이 오더니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어떤 손님이냐?”
“송막도독 이진영 대인의 가신인 이해고입니다.”
“어서 그를 영빈관으로 모셔라.”
고승과 조영은 영빈관을 향해 부리나케 갔다. 잠시 후 이해고가 그 당당한 풍채와 더불어 검은 수염 사이로 하얀 이를 드러냈다.
“대인, 불과 얼마 전에 뵈었는데, 또 다시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가져오시는지요?”
“실은, 저희 공주마마께서 귀장원貴莊園에 묵다가 여기에 큰 불편을 끼쳐드렸다는 소식을 듣고, 전하殿下(이진영)의 명을 받들어 사죄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오는 길입니다.”
“원 이거. 사죄 드려야 할 쪽은 오히려 우리입니다. 정말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고승이 겸손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대인.”
고승은 이해고 일행에게 조반과 약주를 대접했다. 조반을 마친 후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이해고가 얼마 전에 구경했던 조영의 검법을 입에 올리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제가 알기로 고려인의 활솜씨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거란이나 해족, 말갈, 실위, 돌궐 등을 능가합니다. 하지만, 검법에 있어서도 그토록 뛰어난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고려에서도 검을 숭상하는 고귀한 유풍이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검은 활과 더불어 천하 병기의 조종祖宗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선조들은 검을 대단히 중시하고 검법에 대해 많이 연구했습니다.”
사실, 우리민족은 단군조선 때부터 이미 검을 차고 다니는 관습이 있었다고 <산해경>은 기록하고 있다.
“천명신검 같은 명검을 제작해 거기에 통치이념을 간직해 둔 것이 우연은 아니군요.”
이해고의 말은 이제 천명신검을 들먹이는 지경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고승은 그가 다시 찾아온 이유가 실은 천명신검 때문임을 직감했다.
“천명신검은 별 거 아니지만, 그 속에 든 교훈, 그리고 색불루 임금의 시 ‘별유진보’와 어우러질 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죠.”
이해고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고승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검을 다시 한 번 구경시켜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일전에 실컷 구경했는데요.”
고승이 조영에게 말했다.
“영아야, 그 검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네, 할아버지.”
조영은 대답하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며 조영은 궁금해 했다.
‘우리가 그걸 영주도독 조문홰에게 주기로 했는데, 이 자가 혹시 그걸 눈치 챈 게 아닐까?’
총명하고 명민한 조영은 이해고가 천명신검을 언급할 때부터 조마조마했었다. 조영이 나타나자 고승은 그에게서 검을 받아 매우 정중하고 조심스런 태도로 양손에 검을 받들어 이해고에게 내밀었다.
“실은, 천명신검을 최고의 장인에게 맡겨, 동일하고 동등한 가치의 진품을 두 자루 더 만들 작정입니다.”
이해고가 검을 받아든 후 말없이 고승을 쳐다보았다.
“저희가 어제 밤에 이루하 공주께 큰 실례를 범한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 그리고 악한들을 물리쳐주신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새로 제작한 두 개의 복제품 중 한 자루를 이진영 도독께 선사하기로 했습니다.”
고승의 말이다.
“아, 뭘요? 그만한 일을 가지고······.”
이해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그건 이 늙은이의 아주 작은 성의 표시이니, 절대로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해고는 소기의 목적이 달성된 듯, 아주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가장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그가 간 후 고승은 조영에게 부탁했다.
“영아야, 우리가 이 이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인들뿐만 아니라 거란인, 말갈인 등등 이 곳에 거주하는 외인들과 아주 돈독한 사귐을 유지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조영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여미아가 전해준 비녀와 금견지 뿐이었다.
(다음장으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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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7. 29. 한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