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 이창건 老원자력 과학자가 국립묘지에서 올린 4 잔 의 술
이승만 박사에게 올린 첫 번째 술 잔
이승만 대통령은 젊은 시절, 미워하기도 했으나 세월을 먹어갈수록 훌륭한 점이 많이 보입니다.
자신의 정치 체제를 국민들이 반대하자 피를 흘리지 않고 하야한 점도 그렇고,
미국으로부터 과학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점은 큰 업적으로 봅니다.
이것은 한국 사회를 자유화하는 역할을 했고,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불러왔고,
불합리하고 인습적인 사고방식을 깨뜨리는 해방자 역할을 하였다고 봅니다.
이창건박사가 올린 첫잔에 어리는 이 승만 대통령 얼굴
이창건 박사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박건이 불렀던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라는 노래가 있다.
기력은 점차 쇠해지는 것을 느끼지만 추억은 더욱 새록새록 해진다.
지나온 날은 기차를 타고 건너온 것 같다. 고비가 있었고 분기점도 있었다.
이박사에게는 첫 번째 분기 역에서 만난 분이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창건 박사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1955년 이었다.
“1950년대 초반 이공계 엘리뜨 중에는 공군 소속 기술 장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산업기반이 전무하던 시절 그나마 전공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한 사람이 제대하면서 미군 장교로부터 『원자력 공학입문』이란 책을 선물 받았는데,
이 교재를 갖고 물리학 ·공학 전공의 공군장교 출신 12명이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매주 한 차례 문교부 창고 건물에서 세미나를 했다.”
6·25 때 특수 공작부대인 KLO 부대 출신인 이 박사도 학과 선배의 권유로 이 모임에 가담했다.
그는 “전기공학과에서 배운 적이 없는 교재인데 1권밖에 없으니 가장 막내인 내가 일일이 타자를 쳐 나눠줬다.
변변한 옷이 없어 미군이 버린 군복을 검정 염색을 해 입고 다닌 학생들도 많았다.
그 옷은 교복에, 운동복에, 잠옷에, 애인을 만나러 갈 때, 단벌이었지만 만사형통이었다.”
원자폭탄은 알지만, 아무도 원자력 발전소는 생각도 못한 시절,
스승도 없는 상태에서 언제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지식에 청춘들은 빨려 들어갔다.
우리 원자력 산업 평론가들은 1956년을 한국 원자력의 원년으로 삼는다.
이승만은 무엇인가를 간파해서 진수를 찾아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과는 정 반대다.
이승만이 586이라면 문재인은 286 급이니, 시대와 지능은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개념에 눈을 뜬 이승만 정부가 이 해 문교부 산하에 원자력과를 만들었다.
일은 늘 사람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그 해 7월, 이 대통령은 워커 시슬러라는 미국 전력협회 회장을 만난다.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의 과학고문으로 국내 화력발전소 건설에도 도움을 준 인물이다.
이대통령이 방한한 시슬러에게 전력난 해결방안을 묻자 그는 갖고 있던 나무상자 하나를 열었다.
그 속에 자그마한 막대기 하나와 석탄덩어리가 들어있었다.
“리 프레시던트! 이게 핵 연료봉이란 겁니다.
같은 무게 석탄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300만 배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시슬러 회장! 그걸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너지는 땅에서 캐는 게 아니라 머리로 개발하는 겁니다. 헌신적인 과학기술자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이승만이 원자력 엔지니어 양성을 결심한 순간이었다.
문교부 창고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부하던 청춘들에게 희망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당신들을 미국에 유학 보낼 지도 모르니 공부를 더욱 가열 차게 하라!”는 전갈이었다.
국무회의에서 “우리도 원자력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물리학 박사인 최규남 문교부 장관이 즉석에서 답변했다.
(지금 문 정권 사람들도 한번 생각을 해보아라! 얼굴 좀 예쁘고 카메라 발 받는다고, 교육문제를 생전 생각도 고민도 안 해본 삥 바리 정치인 유 은혜를 교육부 장관시켜서야 되겠는가.
어디 캠프에 들락거렸다고 앵긴대로 산자부 장관 시켜야 되겠는가, 그러니까 국립호텔에 가지 않는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고 보고한 것이다.
“당장 데리고 오시오.” 세상은 늘 순수하게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지시로 국비 유학생이 선발됐다.
10년간 236명의 엘리뜨(엘리뜨 교복이 아닌 군복 단벌을 Always 일상화 한 이들)가
미국·영국·캐나다에서 원자력을 공부했다.
그 속에 스터디 멤버들도 포함됐다.
스터디 그룹의 좌장을 당시 서울대 물리학과 조교수였던 윤세원 이었다.
“윤 선배는 문교부 원자력과 과장으로 옮겨갔는데 원자력 관련 법률 제정 등으로 국회를 포함 여기저기 신발 문수가 안보이게 뛰어다녔다.
예산이 부족하자 훗날 광주광역시청 물봉처럼 서대문 집과 용인 고향 땅까지 팔았다.”
이창건 박사는 윤세원 선배가 그립다고 했다.
https://youtu.be/Bgmiq9Kq11Q
“이 대통령은 1인당 연간소득 40달러이던 시절, 1인당 6,000달러가 드는 해외연수에 10년간 236명을 보냈다.
시슬러는 20년이 지나야 그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 때 이대통령은 나이 80을 넘었다.
자기 당대에 덕을 보려한 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생들이 외국으로 출발에 앞 서 이대통령에게 인사를 갔다.
이대통령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외국으로 싸우러가는 용사를 격려하듯 느릿느릿 말했다.
“여러분들의 몸은 여러분 가족이나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공부를 하여 원자력으로 국민의 밥을 만들어 주십시오. 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한국을 살릴 여러분을 키우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책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956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41달러 정도로서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를 받아 끼니를 때우는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만들었고,
1959년에는 당시 한국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돈인 35만 달러를 들여서 교육용 원자로를 만들었다.
외환기근으로 당시 한국으로서는 단 돈 10달러를 쓸 때도 대통령의 결재를 받던 시절이었다.
1956년 4월 이창건 학생을 비롯한 한국의 젊은 물리학자들이 국비 원자력 연구원으로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에 파견되었다. 아르곤 연구소의 학비는 10개월 연수기간 동안 6천 달러로 비쌌다.
1956년에 보낸 1기 유학생 이후 4년 동안 8차에 걸쳐 200여명이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들이 한국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세우고, 그 해 7월에는 원자력연구소 내에 연구용원자로 트리가마크 2 건설을 이끌며 한국의 원자력 시대를 열었다.
이 대통령은 직접 원자력 연구소 건설 부지를 제안하고 공사현장을 수시로 둘러보며 연구자들을 격려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출생이므로 이 때 이미 80세를 넘긴 나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생애를 초월한 이십년 뒤 한국을 부흥시키는 수단매체로 원자력을 선택하고
끈질기고도 적극적인 기다림을 펼 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90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육성한 원자력 인력들은 그의 사후 한국형원자로 모델까지 개발하여 한국을 세계 원자력 경쟁의 선두에 서게 했다.
미국과 케나다로부터 눈물의 햄버거를 먹고 배워 ‘APR 1400'이라는 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원자로를 개발해냈다.
어떤 사고가 나더라도 사람은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세계 최고 최강의 안전기술이 탑재되어 있다.
■이창건 박사는 이대통령에게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술 한 잔을 올렸다.
UAE 바라카 원전 입찰에서 우리에게 기술을 가르쳐 준 나라들을 꺾고 승리하던 날!
볼 위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인고의 세월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