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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꽝에 찾아가다
신현동 미나리꽝을 물어물어 더듬어가는 길은 춥고 고독했다. 지금이 긴 겨울의 한끝이 아니었다면 상큼한 미나리 향내라도 콧날에 물씬 묻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넓은 겨울 벌판을 이룬 미나리꽝은 누렇게 시들고 굳어버린 미나리줄기가 꽝꽝 얼어붙어 있을 뿐이다.
지난 계절까지 녹색 미나리 군락과 검푸른 물결로 출렁였을 이곳 벌판 곳곳에는 택지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세워놓은 깃발과 플래카드가 바람에 펄럭였다. 송전 철탑이 하늘을 향해 찌를 듯 서 있는 사이와 펄럭이는 깃발들 머리 위로는 철새들이 '끼르륵 끼르륵' 소리를 지르며 떼를 지어 비상하고 곤두박질쳤다.
이곳 미나리꽝은 소설가 김한수의 소설집 <양철지붕 위에 사는 새>(문학동네)의 표제작인 결코 짧지 않은 동명의 중편소설 '양철지붕 위에 사는 새'가 시작되고 끝을 맺는 공간이다. 한평생 남에게 해 끼친 적 없이 살아왔던 '김씨'가 병든 아내를 수발하고 생존을 위해 매일 밤낮으로 가로질렀던 이곳은 조만간 아파트단지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아우성치듯 펄럭이는 깃발과 플래카드를 보며 삶의 목소리를 듣는다.
소설 속 김씨에게 이곳은 삶의 마지막 터전이었고 이곳에서 쓰디 쓴 삶을 곱씹었지 않았는가.
"반비알진 채마밭 너머로 펀한 미나리꽝에 점점이 박혀 모이를 쪼는 백로들도 오늘따라 눈에 차지 않는다. 외려 수확철을 넘겨 휑뎅그렁하게 비어버린 미나리꽝에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백로의 모습이 쌀말이나 팔아 끼니를 이어보겠다고 미나리꽝 밭둑에 쪼그려 앉아서 농부들이 버리고 간 미나리 찌꺼기를 줍는 독거노인들의 처지나 다름없어 보여 딱하고 짠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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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한수를 만나다
지난달 29일 늦은 밤, 소설가 김한수를 만났다. 내가 아는 김한수는 들풀처럼 질기고 억세며 겨울 철새처럼 영민하지만 가슴 웅숭깊은 곳에 눈물을 담고 사는 사내다. 그는 비극적 삶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 비극을 결코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오기를 부리곤 했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 그가 잉태시킨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렇다.
푸짐한 안주 한 접시를 시켜놓고 마주앉아서 소주잔을 연거푸 기울이며 짧지만 꽉 찬 이야기를 나눴다. 스스로 펜을 꺾은 지가 십년 즈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설이 밥벌이가 되지 않는 세상이란 말을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인천 서구 신현시장 근방 포장마차에서 조개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던 십년 전 그 즈음이 그가 펜을 꺾은 때였던 것 같다. 소설가 이인휘는 김한수를 가리켜 "우리 서민의 삶을 그만큼 제대로 그려내는 작가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고 평했었다.
맞다. 김한수의 소설은 화려한 도시의 그늘에서 떼 지어 모여 살며 이곳저곳에서 쫓겨 들어온 서민들의 신산한 삶을 담고 있다. 때문에 그의 절필이, 그가 떠난 빈자리가 못내 아쉽다. 하지만 김한수를 아는 이들은 그가 조만간 다시 귀환할 것이란 걸 의심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유목민으로 칭하기에 그는 떠돌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서민 삶의 보고 서구
<양철지붕 위에 사는 새>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결말을 연상케 하는 비극으로 숨 가쁘게 결말을 맺는다. 나는 인생의 비극과 서민의 삶이 축약돼 있는 이 소설의 결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는 두둑한 돈주머니를 흐뭇한 눈길로 쓰다듬었다. 이 시간에 준비해간 재료가 바닥나서 장사를 마감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토바이가 국일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김씨의 가슴은 불길한 상상으로 우둔우둔 뛰었다. …물다리를 건넌 김씨는 오토바이 속력을 늦추었다. 부어내리는 달빛 아래 괴괴히 누운 야산그늘에 들자 느닷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오토바이 핸들을 잡은 팔뚝에 소름이 끼쳤다. …오토바이 소리만 들리면 굴뚝 위에서 홰를 치던 복돌이도 보이지 않았다. 미루나무의 빈 가지들이 하늘을 붙잡는 허공 속에서 복돌이를 발견했다. 미루나무 상공에 커다란 원을 그리는 복돌이를 본 김씨는 아내의 죽음을 고요히 받아들였다."
중편 '양철지붕 위에…' 외에도 이 소설집에는 인천 서구 가정동, 석남동, 신현동, 목재단지 일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로 짜여있다. 서구란 어떤 곳인가? 이곳은 전국 각처에서 흘러들어온 서민들이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사는 곳이다. 소설가 김한수도 92년 '전세대란'으로 일컬어지는 전세 폭등으로 인천 서구 가정동 빌라촌으로 떠밀려 들어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어쩌면 그런 비극적 사연을 연유로 인천문학이 소설가 김한수를 품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결코 김한수가 아니었다면 서구 일대의 서민들의 삶을, IMF 시대의 서민들의 삶을 그려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소설 양철지붕 위에 사는 새 는..
IMF 이후 직장을 잃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을 그린 소설 <양철지붕 위에 사는 새>는 노점상 김씨가 주인공이다. 김씨는 만성신부전증을 앓으며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와 단 둘이 살고 있다. 피붙이라곤 중3짜리 딸이 있지만 외박과 가출을 마실 다니듯 한다. 아내의 치료비를 대느라 전 재산인 빌라를 팔고 미나리꽝 근처에 양철지붕을 얹은 무허가 주택으로 이사를 온 김씨 부부의 삶은 막장 속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이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양철지붕 집은 미나리꽝 인근엔 실존하지 않는다. 김한수는 소설 속에 양철지붕 집이라는 허구의 집을 지었고 청둥오리, 물오리, 기러기, 백로 등 철새 떼가 오가는 이곳 미나리꽝 인근에 까마귀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주인공 김씨는 까마귀를 보며 위안을 얻고 아내의 삶이 연장된다고 느낀다.
술자리에서 김한수는 "도저히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는 부조리한 삶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소설에서 김한수는 김씨와 양철지붕, 까마귀로 이어지는 부조리한 관계를 희망의 관계로 바꿔놓으며, 이를 통해 서민들의 삶을 보태지도 덜지도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어쩐지 녀석의 처지가 자신의 신세와 비슷해 보여 박정하게 굴 수도 없었다. 김씨는 매일매일 떼까마귀의 동태를 살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녀석에게 정을 붙이고 말았다. 김씨의 인기척이 날 때마다 한껏 긴장하던 녀석도 차츰차츰 긴장을 늦추고 김시와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마침내 김씨는 녀석에게 없는 복이나마 지켜달라는 뜻에서 복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아침마다 먹이를 던져주기에 이르렀다." /조혁신기자(블로그)mr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