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빌 1:6-1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다 찬송: 6, 23, 490장 교독문: 살후 2:13-3:5
출애굽기가 끝난 후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내용은 구원의 서정 또는 순서라 부르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개혁파 교회가 말하는 구원의 서정은, 지금까지 살펴 보았던 대로, 선택과 부르심, 거듭남, 회심과 신앙, 그리스도와의 연합, 칭의, 입양, 성화와 견인의 단계로 되어 있다. 이 과정을 말할 때, 이러한 단계들은 어떤 시간적 순서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일 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구원의 감격에 대한 경험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의 차이를 두고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앞에서 말한 여러 단계를 한꺼번에 경험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의 감격은 서로 다르며, 따라서 구원의 과정에 대해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이 성령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음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과정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의 구원의 삶을 주장하심으로 시작하게 하셨으며, 그 구원의 과정을 지속하여 완성의 단계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 본문 6절은 이 마지막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날이 되면 모든 성도는 10-11절에서 말하는 대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의 결국은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요,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 즉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까지 계속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삶과 견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성도의 마지막 날에 대한 힌트가 있다.
성도의 신앙하는 삶이란 단순히 현재의 삶에 그치지 아니하고 미래에 주어질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이 완성이 되는 그 날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그 마지막에 주시는 은총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단계를 신학적인 용어로 “영화(榮化)”라고 말한다. 즉 영광스럽게 변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성도는 이 과정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선택과 구속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구속을 시작하셨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우리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이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의 이 구원의 과정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짐작한 바이지만, 우리의 구원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라야 완성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이 구원의 마지막 단계인 “영화”의 단계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작년에 계속 들었던 대로 이것은 바로 “영원한 안식”의 소망과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것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 사역을 완성하시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속의 완성과는 훨씬 차원이 다른 완벽한 완성을 이루실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즉 삼위 하나님께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첫째,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영화가 시작되면, 신자와 불신자가 심판을 받아 각기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새로운 삶에서 불신자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는 했지만, 아직 미완성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과는 달리 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 된 모습을 보임으로 인해 갈등이 있었지만, 이제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이 차이는 영원히 해소된다. 즉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지키지 못했던 불순종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해결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성도가 이 영화의 자리에 참여하게 되면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단계에서, 즉 본문 10-11절에서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이루어지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는 삶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완벽한 삶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삶이 가지는 목표로서의 완성을 의미한다. 즉 피조된 인간으로서의 완벽함일 뿐이지, 세상이 말하는 어떤 신비적인 모습으로의 변화,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벗어나서 어떤 신적인 합일에 이르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성도의 영화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죽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났고, 그의 육체는 심판이 유보되어 이 땅에서 생명을 가진 존재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이 땅에 들어온 심판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영혼과 육신이 갈라져 불완전한 삶을 살던 육신으로서의 인간이 그의 영혼과 결합하게 되어 창조 때의 완벽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갈라짐이 있는데, 불신자는 부활하여 영벌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대로,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되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그의 육신이 부활하여 영혼과 결합하여 완전한 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이요, 어린 양의 신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 삶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가 목표로 하던 삶이고, 이 삶은 원래 아담의 순종으로 완성되어야 할 삶이었다.
따라서 신자가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불완전한 삶을 살아오던 것, 의로우면서도 죄를 짓는 의인의 삶을 살던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목표로 하던 완전한 인간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더욱 인간답게 되는 것일 뿐, 인간 이상의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특별하게 주어진 어떤 측면, 즉 영적인 부분이 창조될 때 주어진 본성보다 더 높아지는 일은 없다. 이러한 논리는 오직 신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요, 영지주의와 고대 그리스 철학 체계였던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에 의하면, 이 세상의 육신은 낡고 사라져 가지만, 영적인 것은 육신의 낡은 것을 벗어버리고 이데아 세계, 즉 영적인 세계에 도달하여 완전한 자아를 입는 것이 최종 단계라고 말하는데, 교회 역사 가운데 기독교가 이러한 철학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을 완전한 자아인 이데아에 도달하는 것을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을 당신의 피조물로 지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 결코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을 목표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삶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다시 오시는 것이다. 이 과정을 따라 신자는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지금 베드로는 현실의 삶을 “썩어질 정욕”이라고 말하며, 이제 완성될 나를 “신성한 성품”이라고 말함으로 대조하고 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보라.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은 결코 완성에 이를 수 없는 정욕으로 가득하여 썩은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 사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 신성함의 상태를 이미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신성함이 앞에서 말한 철학적인 이데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를 의미한다.
바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롬 8:18-25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신자가 겪는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을 비교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최종 구원의 목표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구속과 함께 피조물의 회복으로 인하여 이 둘이 함께 완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앞으로 영광스럽게 될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인데, 이 삶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이루는 삶이 된다.
여기에서 두 번째, 피조물의 관점에서의 영화가 나온다. 아담의 타락은 온 피조물이 타락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지 못하고 썩어짐의 종 노릇하면서 구속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구속주께서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의 구속을 시작하셨다면 이제 마지막은 모든 피조물이 기다리는 재림이다. 이 재림이 있을 때 모든 인류가 부활하여 각기 심판대 앞에 이를 뿐만 아니라 인류가 보존하고 다스려야만 했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때는 이 피조세계가 완벽하게 회복되어 하나님의 처음 창조가 사모하던 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여기에는 오직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찬양하며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 그대로 살아가는 곳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마지막 단계인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그렇다. 영화는 그저 인간이 완성된 단계에서 영원토록 즐겁게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목표는 인생이 살아가는 현실의 삶에서 만나는 현재의 고난 때문에 갖게 된 생각들인데,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 그리고 구속의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신자들의 구속과 함께 그들이 살아갈 피조세계의 완전한 회복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로 부름을 받아 현재를 사는 성도들은 바로 이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영화의 단계를 통해 이루시는 것은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심으로 피조물을 영화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과 온 피조세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이루실 일이다.
우리가 성도로 부름을 받을 때 바로 이 소망을 받는다. 하나님은 많은 인생 가운데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 선택을 계속 이어가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통해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적용하셔서, 우리의 거듭남을 주장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시고, 이 믿음을 통해 우리로 회개함에 이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양자 됨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게 하신다. 그리고 이 은혜로 말미암아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을 비교하면서 성도로서 견인의 삶을 살게 하신 후에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마지막이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받고 사는 자가 우리 외에 누가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이 권면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빌 3:17-21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며,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