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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먹고사는 문제로 씨름하는 사람에게 여유란 그림의 떡이다. 그러다가 좀 살만해지면 여행도 가고 문화 활동도 하게 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80~90년대는 대한민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대였다. 나라가 발전하고 국가재정에 여력이 생기면서 그동안 외면했던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문화예술과 스포츠 분야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문화재 분야를 전담하던 정부기관이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국가유산청으로 개칭됨)이었다. 문화재 관련 예산이 증대되면서 중요 문화재에 대한 정밀실측조사 용역을 집중적으로 발주하였다. 과거의 사례를 보더라도 당해 문화재에 대한 조사 자료가 전무할 경우 한 번 소실되어 사라진 문화재는 복원이 불가능하였다. 이처럼 천재나 인재에 의해 소실되거나 붕괴되었을 때 당해 문화재를 제대로 복원 또는 보수하기 위한 기초재료를 만들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다가 8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해마다 중요문화재에 대한 정밀실측조사가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조사가 단순히 복원이나 보수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조사과정에서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다양한 부분들을 확인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해체를 병행한 조사는 그동안 말로만 전해오던 것을 묵서나 기록문서 등을 확인함으로써 그 가치를 증명하기도 한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건축문화재는 완성된 것을 보기 때문에 실상 구조나 양식 등에 대해 감추어진 부분들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조립상태에서 눈으로 보고 보이지 않는 맞춤이나 이음공법이 이러이러할 것이다.라고 추정할 뿐이다. 해체과정은 이러한 한계를 명백하게 확인시켜 준다. 전통건축의 오리지널 구조와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해체 당시의 모습이 집을 지을 당시의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해체를 통한 조사 자료는 매우 값진 결과물이다.
1984년 초여름으로 기억한다. 전 직원이 전북 완주군 경천면에 위치한 화암사로 정밀실측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났다. 당시만 해도 자가용이 귀하던 시절이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실측조사를 위한 각종 장비와 종이뭉치와 현장에서 도면을 그리기 위한 도판까지 그야말로 사무실의 집기들을 모두 싣고 갈 정도였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고속버스 터미널에 하차하였다. 우선 짐을 대합실에 맡기고 간단한 요기를 하였다. 전주에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경천면까지 이동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전라도 지역에 많은 비가 내렸다. 물이 범람해 곳곳에서 길이 물에 잠기고 다리가 끊어지는 등 곤란한 지경이었다. 어찌어찌하여 화암사가 위치한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하였다. 진짜 고행은 여기서부터다. 지금은 화암사까지 임도가 뻥 뚫려서 차로 올라갈 수 있지만 당시엔 험난한 계곡을 따라 좁은 길을 등반하듯 올라가야 했다. 화암사는 해발 480m의 불명산 7~8부 능선 즘에 위치한다. 산 아래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700~800m이 이른다. 그 거리를 온갖 작업도구를 들고 지고 가야 했다. 도시에 살며 편안하게 출퇴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험악한 산지를 오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초여름의 푹푹 찌는 더위와 높은 습도 그리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모기떼들과 사투를 벌이며 올라갔다. 가도 가도 절은 보이지 않고 좁고 험한 협곡이 욱여싸고 있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갑자기 가파른 철재계단이 나타났다. 철재계단 뒤편은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다. 절벽 위에서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 철재계단은 지그재그 형으로 두세 번 꺾여 있다. 드디어 계단 꼭대기에 올라서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앞에 고즈넉한 산사가 수풀 사이로 그림처럼 다가왔다. 폭포의 시작이자 산사로 가는 좁은 수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니 수목이 비켜서면서 화암사의 진입로에 해당하는 돌계단이 보이고 오른쪽에 당당한 풍채로 서 있는 누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화재에 입문한 지 겨우 반년 밖에 안 되는 내가 뭘 알겠나. 보이는 건 그저 오래된 옛 건물이요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건 울창한 숲이요 그리고 생소한 까까머리 스님들이었다. 여기서 얼마동안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서울서부터 선배들을 따라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게 화암사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으로 보였다. 나고 자란 곳이 산촌이었으니 이곳에서 보이는 옛집과 주변 풍광이 내겐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고향에 내려온 것처럼 푸근하고 좋았다. 특히 산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과 숲 속에서 풍겨오는 상큼한 향기는 향수병에 시달리던 내 마음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요즘 실측설계사무소에서 진행하는 정밀실측조사 방법은 우리 때완 전혀 다르다.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만 진행하던 것과 달리 어지간한 건 기계장비에 의존한다. 심지어 건물의 기울기와 변형까지 기계가 알아서 체크한다. 우리 때처럼 수평수직 실선을 설치하고 번거롭게 추를 띄워 실측하는 따위는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실측조사도면 작도 역시 3D 촬영기술로 먼저 생성된 영상을 깔고 오토캐드프로그램을 통해 그 위에다 선형을 표현한다. 이런 방법과 과거의 방법과의 장단점은 뒤에서 논하겠다.
건물을 오차 없이 조사하기 위해선 먼저 수평과 수직방향으로 기준선을 설치해야 한다. 평면을 예로 들자면 외기둥에서 약 30cm 미만으로 이격하여 정확한 90도 각(건물의 형태에 따라 준용)이 되도록 동일한 수평 상태로 실을 설치한다. 실의 끝은 별도의 지주목이나 부착이 가능한 시설물에 의지해 단단하게 고정한다. 이론상으론 건물을 지을 때처럼 사방에 수평 및 수직 규준틀을 설치하고 거기에 의지해 수평실을 설치하라고 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주변에 설치된 각종 시설물(계단, 기단, 석축, 조형물)등으로 규준틀을 설치할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땐 편법이지만 억지로라도 규준틀을 현장에 맞게 제작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사찰 거주자들로부터 지탄을 받곤 한다. 왜 거기에 못을 박았느냐 왜 그곳에 말뚝을 박았느냐면서 그래서 사전에 사찰 측과의 협의가 중요하다. 평면실측은 기둥의 하부와 상부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따라서 수평실도 상하부 동일 선상에서 설치해야 한다. 말이야 쉽지 높은 곳에 수평실을 설치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중엔 요령이 생겨서 하부에만 설치하고 위쪽은 추를 늘어트려 기둥의 변위를 측정하기도 하였다. 뒤로 가나 앞으로 가나 정확한 실측조사가 진행되면 그만이다. 그러다 보니 숙련된 자의 안목이 작업의 난이도를 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수직을 실측하기 위한 기준선도 평면과 같은 원리를 적용하되 다만 수직이란 방향 설정만 다를 뿐이다. 규준 선은 무조건 수직과 수평을 유지해야 하고 모든 기준선은 상호 연동된 높이와 너비와 내밀기 값을 공유해야 한다.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치수연동에 오류가 발생하면 도면작업과정에서 상호 도면과의 연계성이 사라져 재 실측을 해야 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한 사람의 얼굴을 두 사람이 서서 오차 없이 그린다 치자 한 사람은 왼쪽에서 한 사람은 오른쪽에서 그림을 완성하고 두 사람의 그림을 마주 대했을 때 이음부가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한다. 만약에 이음부에 문제가 생기면 두 사람의 그림을 하나로 합칠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오차를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도록 설치하는 것이 바로 규준선(수평, 수직, 지정된 경사선 등)이다. 그러므로 정밀실측조사 중 규준선 설치에 소요되는 시간이 총 실측조사 난이도로 본다면 30~40% 정도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일단 규준선이 설치되고 나면 나머지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실측조사를 진행하려면 먼저 건물 내 외부에 비계를 매야 한다. 지금은 규격화된 강관 비계를 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소규모 현장에선 낙엽송 원목을 비계로 사용했다. 트럭 한 가득 싣고 온 비계목을 산 아래 마을에서부터 사찰 경내까지 일일이 어깨 위에 메어 날랐다. 마른 낙엽송 비계목은 단단하고 내구성이 좋아 한 번 구입하면 수년 동안 재사용한다. 비계목 표면이 여기저기 찢기고 쪼개져서 손바닥이나 팔뚝에 잔가시가 박히는 일이 다반사다. 목장갑을 껴도 가시가 파고 드는 걸 막지 못한다. 한 번 박힌 가시는 하도 작아서 핀셋으로도 뽑아내기 어렵다. 쓰리고 아파서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바늘로 후벼 파서라도 뽑아내야지 참기 어렵다.
직원들은 경내의 빈 방을 숙소로 배정받았다. 저녁을 먹기까지 정밀실측조사를 진행하였다. 저녁을 먹고 도판 앞에 앉아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도면을 그렸다. 밤 열시가 돼야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입사한 지 겨우 육 개월 밖에 안 되는 나로선 선배들처럼 실측도면을 그릴 단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물실측작업에 주축으로 끼지도 못했다. 그저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실을 잡거나 묶고 줄자로 재라는 것을 재는 정도에 불과했다. 늦은 밤까지 도면을 그려야 하는 선배들에 비해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으론 선배들이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속으로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며 일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선배들이 시키지도 않는 짓을 했다. 건물의 양식 구분도 못하는 수습생이 단면도는 뭐고 상세도는 뭔지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 그래도 눈으로 건물을 보면 가구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는 알 수 있다. 고건축 도면작도라는 것이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도제식으로 전수되는 방식이다. 즉 선배들이 그린 도면을 베끼거나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하나하나 익힌다. 빨리 배우고 싶어도 가르쳐 주지 않거나 일거릴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른다. 육 개월이 되었어도 나의 도면작도 수준은 겨우 걸음마 수준에 불과했다. 선배들과 협력해 실측조사를 하고 이런저런 잡일을 해도 도면 한 장 그리지 못하니 자꾸만 억울한 맘이 들었다. 그래서 선배들의 도움 없이도 전통건축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나 나름 고민을 하였다. 감사하게도 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어지간 한건 본 대로 그린다. 도면은 건물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고 그리느냐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그리면 평면이요 서서 바라보는 대로 그리면 입면이요 종횡 방향에서 무 자르듯 건물을 잘랐다고 가정하고 그리는 건 단면도다. 한 부분을 아주 자세하게 그리는 걸 상세도라 부른다. 그렇다면 한꺼번에 이 모든 도면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러다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조립된 상태의 투시도를 그리면 되겠다. 투시도란 말 그대로 눈으로 보이는 대로 원근감을 적용해 그리는 그림이다. 일반적인 도면은 동일한 수평과 수직선상에서 구십 도 방향으로 그리는 것으로 2D 도면이라고 한다. 반면에 투시도나 조감도는 보는 사람의 위치에서 보이는 그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즉 사진과 같은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목구조의 결구와 이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나로선 전체를 그리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어느 한 부분을 골라 그리기로 했다. 화암사의 건물 중 가장 전면에 위치한 누각 건물이 그중 그림 그리기에 딱 좋은 장소로 보였다. 이름도 너무 예술적인 雨花樓다 꽃비라니 이런 건물 이름을 지은 사람이 정말 궁금했다. 우화루는 외부에서 보면 누 하주와 누 상주가 분리된 중층건물이다. 그러나 안에서 보면 단층이다. 단차에 석축을 쌓아 분리한 전형적인 산지가람에 속한 건물이다.
화판 위에 모눈종이를 붙이고 우화루 마루에 서서 머리위로 보이는 고주와 주변 가구들을 스케치하였다. 기왕 그리는 거 부재를 권척으로 재가면서 그렸다. 그냥 그리면 과정은 편할지 모르지만 자로 재면서 그리다 보면 각각의 부재에 대한 규격도 인식되어 좋고 또 정확한 비례를 표현할 수가 있다. 선배들은 내가 무얼 그리는지 모르고 자기 할 일에 정신이 없다. 낮에 스케치한 그림을 밥상 위에 붙이고 그 위에 트레이싱페이퍼를 놓고 깨끗하게 도면 화 하였다. 투시도를 그리면서 건물의 단면구조가 자동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러자 선배들이 벽에 붙여놓은 단면도가 금방 이해되었다. 그렇다고 나도 도면을 작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감히 청하진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가 내가 그려놓은 투시도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내게 하나의 미션을 주었다. 건물이 아닌 각종 조형물(간이 실측대상으로 부도, 석탑, 기타)을 날더러 실측하여 그리라는 것이었다. 화암사는 고찰이지만 경내가 한정된 장소에 자릴 잡으면서 조형물들은 사찰 마당과 가까운 근처에 있다. 선배들과 함께 수평 수직 규준 선을 띄워 본 경험을 바탕으로 혼자서 석탑의 수평 및 수직 규준 선을 설치하였다. A1 사이즈의 화판에 모눈종일 종이테이프로 반듯하게 붙이고 머리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위풍당당하게 절 뒤편에 위치한 작고 아담한 석탑을 실측하러 간다. 절로 흥이 나서 휘파람을 불며 조사를 하였다. ‘아 나도 이제 직원 대접을 받는구나.’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 선배는 내게도 도판을 내주었다. 방구석 한쪽에 있는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선 유행가가 잡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스탠드로 날아드는 날벌레를 쫓아내며 도면을 그리고 있노라면 어느새 밤은 깊어가고 절간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석조물은 건물과 다르게 선으로만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명암을 주어야 제대로 표현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깨져나가 움푹 파이거나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되는 부분은 선으로 표현하면 오히려 어색한 그림이 된다. 샤프로 명암을 표현하기 위해 수없이 점을 찍어대야 했다. 다들 도면작도에 여념이 없는데 나 혼자서 ‘다다다다다다...’ 시끄러웠다. 그러자 선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야 정기사 조용히 좀 해 방정 그만 떨고” 그러면 난 한 번씩 웃고 만다.
나의 고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석조물 도면을 다 그리자 내게 또 하나의 미션이 주어졌다. 그건 건물 평면에 해당하는 기단, 계단, 섬돌, 초석 등을 전담하라는 것이다. 평면도와 입면도까지 한꺼번에 조사하고 그려야 하는 일이다. 사방에 설치된 비계 사이를 비집고 조사해야 하고 누각건물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안쪽에 위치한 누 하주 초석과 마루 동바리기둥 초석까지 조사하고 그리는 일이다. 그러나 다음 미션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새발의 피였다.
화엄사엔 남한 땅에선 유일하게 ‘하앙식 구조’를 가진 극락전 건물로 유명하다. 고건축을 공부하는 학도들에겐 꼭 한 번 답사해야 할 대상이다. 선배들은 극락전의 안팎을 샅샅이 훑어가며 도면작업을 진행하였다. 극락전의 御間 후불벽 앞에 부처를 모신 불단과 불단 위에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닫집 내부 천장엔 용트림을 하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각종 구름과 천상을 상징하는 조형물들과 함께 입을 크게 벌리고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날더러 불단과 닫집을 실측하여 도면 화하라는 것이었다. 극락전 안에 들어가 불단을 바라보았다. ‘꿈에 나올 것 같은 무서운 용과 보기만 해도 질려버리는 복잡한 닫집을 날더러 그리라고 헐 저걸 어떻게 미쳤지 내가 저걸 그려야 한다고 하이구야’ 그야말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시켰으니 하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모두 물리치면서 극락전 내부의 불단과 닫집 실측에 몰두하였다. ‘그까짓 꺼 못할 것도 없지 보고 그리는데 그것도 못하랴’ 용기백배해 덤벼들었지만 정말 이건 내 분에 넘치는 미션이었다. 그래도 미련 맞게 작업에 매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측조사에 요령이 붙었다. 캄캄했던 부분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닫집의 복잡한 공포 양식이 처음엔 너무 어렵게 생각되었는데 자꾸만 보니 같은 방식의 연속이요 중첩이란 걸 알자 이것처럼 단순한 것도 없다 싶었다. 닫집은 오히려 도면으로 표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용트림하고 있는 용과 각종 조형물을 어떻게 실측하느냐다. 다행히 용을 빼고 나머진 철사로 매달아 놓은 것들이어서 하나씩 분리해 법당 마루에 내려놓고 자로 재고 모눈종이에 스케치하였다. 문제는 허공에 매달린 용을 실측하는 일이다. 용의 몸통은 굵은 동아줄로 되어 있고 겉면에 천을 감싸고 단청으로 용의 비늘을 표현하였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징그럽고 무섭게 생겨서 가까이하기가 싫었다. 몸통에 감아 놓은 천과 굵은 동아줄 몸통이 군데군데 찢겨서 더 심란해 보였다. 머리와 발톱은 나무로 조각하여 별도로 끼워 붙인 방식이다.
한밤중에 불단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손전등을 들고 확인하러 법당에 들어갔다. 법당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사물을 파악해야 한다. 낮과 달리 밤중에 혼자 법당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난생 처음이다. 측면에 난 협문을 벌컥 열자 컴컴한 법당 안이 시커멓게 다가왔다. 잠시 후 서서히 눈으로 들어오는 벽면의 탱화가 섬뜩한 형상으로 보였다. ‘내일 아침에 확인할까 아냐 여가까지 왔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오금이 저렸다. 닫집에 매달린 용이 오늘따라 살아 꿈틀대는 것 같다. 내가 확인할 부분은 불단의 내부 구조다. 불단의 내부는 대개 빈 공간이다. 불단은 마루와 분리된 채 마루 밑바닥까지 하부가 연결되는 별도의 구조물이다. 불단의 뒷면은 보통 판벽으로 막혀 있는데 때에 따라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비가 설치되어 있다. 조심조심 불단의 뒤로 돌아 내부를 손전등으로 비췄다. 그 순간 난 귀신을 보았다. 온몸이 굳고 식은땀이 났다. 순식간에 전신에서 식은땀이 난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다. 그래도 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귀신은 믿지 않는다. 그래도 한 밤중에 이런 상황에서라면 보이는 것이 귀신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전설의 고향을 하도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손전등을 조심스럽게 불단 안쪽을 비추는 순간 검음 머리를 어깨까지 풀어헤친 여자가 흰옷을 입고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았다. 놀라 자빠질 일 아닌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안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귀신이라고 착각했던 건 귀신이 아니라 관음보살 석고상이었다. 머리 장식만 검은색을 칠해 놓았던 것이다. 확인이고 뭐고 얼른 극락전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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