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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령 상곡 입향조 다포 이지화
프롤로그
낙남조 이필이 경기도 부평을 떠나 대구 달성 하빈에 터를 잡음으로써 시작된 전의이씨 예산공파. 낙남조 이후 하빈 일대에서 세를 넓혀 가던 하빈 전의이씨는 이필의 증손자 대에 와서 한 문중이 낙동강을 건너게 된다. 이종문의 2남인 다포 이지화 때다. 그는 나이 24세 때인 1611년(광해군 3) 하목정을 떠나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에 터를 잡았다. 상곡으로 이거移居한 것은 아버지 이종문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상곡은 아버지 이종문의 외가이자 이지화의 진외가였다. 그런데 외가인 파평윤씨 문중에 대가 끊어지자 이종문이 자신의 차자인 이지화를 상곡으로 보내 외손봉사[직계 비속이 없어 외손이 대신 제사를 받듦]를 하게 한 것. 그로부터 400년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고령 상곡·차남 등지로 세거지를 넓혀간 전의이씨. 그 출발은 전의이씨 고령 상곡 입향조 다포 이지화였다.
그 형에 그 동생
이지화李之華[1588-1666]의 자字는 이실而實, 호는 다포茶浦다. 전의이씨 낙남조 예산현감공 이필의 증손자이자 하목당 창건주 낙포 이종문의 2남이다. 그는 1588년(선조 21) 음력 5월 2일 하산에서 태어났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는 어릴 적부터 재주와 영리함이 남 달랐다. 그의 나이 4세 때 일이었다. 한 번은 그가 뽕나무로 활을 만들어 하늘을 나는 솔개를 겨누어 쏘았다. 이를 지켜본 할아버지 참판공 이경두는 “이 아이가 하늘의 북두칠성을 엿볼 뜻이 있구나”라며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그의 나이 5세가 되던 1592년 임진란 때, 그는 형과 함께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다. 하빈 일대가 한순간에 왜적에게 노략질을 당할 때였다. 왜적이 마을 가까이 오자 그는 할아버지 이경두, 형 이지영과 함께 낙동강변 한 흙다리 밑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흙다리에 다다른 왜적들이 왠지 흙다리가 불안해 보인다며 주변 나뭇가지를 베어 다리 위를 덮고 그 위를 지나갔다. 다리를 덮은 무성한 나뭇가지 덕분에 할아버지와 손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팔공산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이후 할아버지 이경두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에서 의병활동을 했고, 두 손자는 자라서 문과에 동방급제 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7세 때 할아버지 이경두로부터 수업을 받고, 12세 때인 1599년(선조 32) 피난지인 팔공산을 떠나 다시 하빈으로 돌아왔다. 15세 때인 1602년(선조 35) 형과 함께 낙재 서사원에게, 18세 때인 1605년(선조 38)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을 찾아 수업했다. 23세 되던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급제하고, 26세 되던 1613년(광해군 5) 형과 함께 증광문과에 동방급제했다. 27세 때인 1614년(광해군 6) 권지성균관 학유를 시작으로 세자시강원 설서, 예문관 검열·대교·봉교, 병조·공조 좌랑을 지냈는데 항상 지제교와 춘추관 기주관을 겸했다.
하지만 30세 때인 1617년(광해군 9), 당시 병조 판서로 있던 그의 장인 완창군完昌君 이영李覮10)이 이이첨·한찬남 등과 함께 국정을 어지럽히고 폐모론을 일으켰다. 이때 그는 장인과 의절義絶했고, ‘의절시義絶詩’ 한 수를 남기고 낙향했다.
10) 覮은 음이 ‘영’과 ‘병’ 두 가지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는 ‘이병’으로 표기했으나, 전의이씨 문중에서는 예로부터 ‘이영’으로 읽었다고 한다. 본 글에서는 문중 의사를 따라 이영으로 표기했다.
의절시 - 이지화
風波世路間關險 풍파는 세상사 험함을 알려주고
雲雨人情閱歷難 비구름은 사람 마음 어려움을 보여주네
嶺路悠悠歸去晩 해질녘 고개 길 유유히 돌아가니
半天斜日欲西山 하늘의 해 기울어 서산으로 넘어가려하네
이후 병조·예조 정랑 등에 제수 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34세 때인 1621년(광해군 13) 5월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어 다시 나아갔다. 하지만 동료와 함께 이이첨의 다섯 가지 죄를 논하다 도리어 벼슬을 잃고, 형 이지영과 함께 각각 ‘휴수동귀’ 시 한 수씩을 남긴 채 낙향했다.
휴수동귀 - 이지화
旅洛多年滿帽塵 서울살이 여러 해 사모엔 먼지만 가득
北來風氣正愁人 세찬 북풍은 사람을 근심 시키네
不如歸臥山南屋 남쪽 고향 집 돌아감만 못하니
護竹藏花老此身 대나무 가꾸고 꽃 심으며 이 한 몸 늙으리
인조반정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지화는 성균관 전적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 경성도호부 판관, 의주통판, 의주판관 등에 제수 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40세 때인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여헌 장현광의 군막에서 군량미를 담당했다. 43세 때인 1630년(인조 8) 대동도 찰방에 제수되어 비로소 나아갔다. 이후 함경도사, 호조·공조 정랑, 군기시 첨정, 예천군수를 지냈다. 49세 때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호소사 종사관으로 창의해 의병을 이끌었다. 51세 때인 1638년(인조 16) 봉상시 첨정, 대동찰방, 통례원 봉례, 55세 때인 1642년(인조 20) 파주목사로 부임했다. 57세 때인 1644년(인조 22) 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8세 때인 1645년(인조 23) 통례원 우통례·좌통례, 63세 때인 1650년(효종 1) 창원부사, 1651년(효종 2) 통정대부 병조 참의를 지내고 정주목사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5세 때인 1652년(효종 3)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함양군수에 부임했다. 67세 때인 1654년(효종 5) 함양군수로 있을 때 안렴사의 탄핵을 받아 영해로 귀양을 갔다. 69세 때인 1656년 (효종 7) 귀양이 풀리면서 고향인 다산 상곡으로 돌아와 꽃과 약초를 가꾸며 스스로 다포茶浦라 자호自號했다. 여생은 고령 상곡과 달성 부강정을 오가며 보냈으며, 1666년(현종 7) 음력 2월 15일 오시[11시-13시] 향년 79세로 상곡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두 명인데 초배는 완창군 이영의 딸인 전주이씨, 후배는 주부를 지낸 하성운의 딸 진주하씨다. 아계 이산해의 손자 과암果菴 이무李袤가 지은 이지화의 묘갈명에는 다음과 같이 이지화의 인물됨을 기록하고 있다.
···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니 이것은 공을 아는 사람이 나만한 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공을 일찍부터 알았는데 살결이 희고 키가 크며, 옥으로 깎아 세운 듯이 훤칠하였으며, 찬바람이 서리는 듯 바른 말로 왕을 보좌할 기풍이 있어, 선배들이 국사國士로 대우하는 이유를 나로서도 알만하였는데, 중간의 30여 년 동안을 근심과 즐거움과 슬픔과 기쁨들이 엇바뀌면서 세월이 흘러 존망을 알 수 없도록 소식이 끊겼었다. 이것은 서로 저버린 것이 아니고 때의 형편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으니 지금 이 부탁을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 효제孝悌하는 품성은 천출天出이며, 가정을 다스려 나감에 있어 엄숙하게 도의道義를 세웠고, 공경으로 관직을 받들었으며, 온화하게 사물을 처리하였고, 마음은 곧으며 표정은 평화스러웠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절함이 없어 배척을 받았지만, 또한 도리어 배척당한 것이 백 번이나 단련한 강철처럼 그 뜻이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또 항상 정동계[동계 정온]를 흠모하였으니···
하목정을 쏙 빼닮은 장육당
다포 이지화가 터를 잡은 전의이씨 세거지 고령군 다산면 상곡마을. 지금의 상곡 1리 마을회관 서쪽에 아주 멋진 누정이 하나 있다. 장육당藏六堂이다.11) 이 건물은 이지화의 아들인 이윤李玧[1611-1686]이 건립한 정자 겸 별당채다.
11) 2006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1호로 지정되었고, 2017년 ‘고령 장육당’이란 명칭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7호로 승격됐다.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5길 7-22.
이윤의 자字는 여온汝溫, 호는 장육당이다. 문음으로 통덕랑의 자품을 받았으며, 모당 손처눌 문하에서 수업했다. 문학과 시·서·행의行誼로 이름이 났고 많은 제자를 길렀다. 그는 61세 때인 1671년(현종 12) 아버지 다포공 때부터 거처하던 집 남쪽에 별당채이자 정자라 할 수 있는 건물 한 동을 짓고 장육당이라 이름했다. 장육당이란 당호는 ‘구장육의龜藏六義’에서 취한 것. 거북이란 동물은 위험을 만나면 껍질 속에 자신의 머리·꼬리·네 다리 이렇게 여섯 신체를 감추는데 이를 ‘구장육’이라 한다. 이윤의 친구인 학연거사學淵居士 박진구가 쓴 ‘장육당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내가 생각건대 거북은 갑각류의 으뜸이라 낙수에서 나와 성인의 상서로움을 나타내며, 묘당廟堂에 들어가서는 나라의 보배가 되었으니, 그 영험스러움이 본디 환하게 나타나고 신비하고 이상한 자취가 몸 안에 쌓였으니, 바야흐로 그 고요함을 스스로 간직한 까닭이다. 그 목은 움츠려 숨겨 머리를 감추고, 그 다리는 거두어 없는 듯이 행하여 발을 감추고, 거두고 감싸서 흔들지도 아니하고 끌지도 아니하니 꼬리를 감추는 방법이었다 ··· (중략) ··· 그러므로 그 감춤을 당하여서는 할 바가 있지 아니한 듯하나, 그 움직임에 미쳐서는 앞서 줄어들고 움츠린 것이 머리를 내밀고, 앞서 거두어 움츠리다 없진 것이 다시 나오고, 앞서 거두어 감춘 것이 이미 흔들고 끌어서 크고도 넓음이 큰 물결의 장대함을 능가하고, 큰 골짜기의 깊음을 쫓아, 순간에 천리를 달려 오직 뜻 한데로 가니, 어찌 움츠려야 펴지고 숨겨야 나타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 (중략) ··· “굽히면 반드시 펴지고 숨으면 반드시 나타나니 이는 이치의 당연함이라. 생각건대 우리의 여온[이윤의 자字]은 힘쓸지어다”고 말하니 여온은 빙그레 웃으면서 벽에 기록할 글을 청하거늘 ···
이윤이 자신의 정자 이름을 장육당이라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윤의 아버지 이지화는 30세 때인 1617년(광해군 9) 자신의 장인인 완창군完昌君 이영과 의절했다. 이영이 이이첨·한찬남 등과 더불어 폐모론을 일으키는 등 국정을 농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광해군 때 국정농단 세력이었던 이영과 인척관계에 있었던 상곡 전의이씨 문중은 당연히 출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광해군 당시 이지화가 장인인 이영과 의절한 사실이 분명했던 까닭에 다행히 정치적 제약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윤은 정치적 문제로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의절하는 비정한 정치세계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이로써 그는 정계 진출에 대한 꿈을 접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으로 ‘구장육의’를 취했던 것이다. 이윤은 두 명의 부인을 뒀다. 초배는 완산이씨, 후배는 진천송씨이며, 슬하에 강고江皐 이시격, 이시두, 이시상 세 아들을 뒀다.
한편 장육당에는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이 있다. 강 건너 있는 달성 하목정과 장육당이 여러 면에서 꼭 닮았다는 점이다. 건물 모양도 똑같고 살림집에 붙여 건립한 별당채이자 정자라는 점도 같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두 건물은 모두 ‘T’ 자형이다. 둘 다 머리 부분인 ‘─’에 방이 있고, 몸체 부분인 ‘’에 대청이 있다. 두 건물은 대청 쪽에 서서 방 쪽을 바라보면 대청 너머 좌우로 방이 모두 5칸[하목정은 현재 4칸]이다. 하지만 한 칸의 길이가 달라 규모에는 차이가 있다. 대청도 하목정은 평면 6칸, 장육당은 4칸이니 전체적인 규모는 하목정이 장육당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건물의 모양만 놓고 보면 분명 장육당은 하목정 축소판이다.
또한 두 건물은 기둥과 처마양식도 같다. 원기둥에 부연이 설치된 겹처마 양식이다. 조선시대엔 ‘가사제한령’에 의해 일반 사가에서는 기본적으로 부연과 원기둥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목정은 인조와의 특별한 인연으로 부연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장육당은 어떤 사연이 있어 부연을 설치 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윤의 외조부인 완창군 이영이 왕실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어쨌든 하목정을 건립한 이종문의 손자가 강 건너 상곡 땅에 하목정을 쏙 빼닮은 장육당을 세웠다는 것이 흥미롭다.
사족 하나를 달아본다. 장육당 대청에 올라 위쪽을 잘 살펴보면 대들보 위에 턱을 괴고 있는 용머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충량衝樑이라는 부재다. 측면이 두 칸 이상인 건물에서 사용하는 부재인데 용머리[용두량龍頭樑]나 소꼬리 형태로 장식하는 예가 많다. 하목정 충량은 소꼬리 형태 우미량牛尾樑이 적용됐다.
진외가 상곡 파평윤씨
파평윤씨 문중구전 ‘배씨 처녀의 화’
‘파평윤씨’. 우리나라 성씨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정말 대단한 성씨다. 세칭 삼한갑족이라 불리는 파평윤씨는 조선조에서 왕비 6명과 그 왕비 소생의 왕 6명을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다. 파평윤씨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과 후삼국통일에 기여한 고려통합삼한익찬공신 윤신달尹莘達이며, 중시조는 고려 때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尹瓘이다. 전의이씨 발복 전설처럼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도 기이한 탄생설화를 지닌 인물이다.
신라 진성왕 7년(893)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연못에 구름이 자욱하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연못 위로 옥으로 만든 상자 하나가 떠올랐다. 고을 태수가 제단을 마련해 기도하기를 여러 날, 여전히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어느 날 동네에 사는 윤온尹媼이라는 이름의 한 노파가 이 옥함을 건져보니 그 안에 옥동자가 있었다. 얼굴은 용의 상이오,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日月을 상징], 좌우 겨드랑이에는 여든 한 개의 비늘[용·잉어를 상징]이오,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북두칠성]이 있었다. 노파가 거두어 기르며 자신의 성을 붙였으니 그가 바로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이다.
파평윤씨는 크게 16개 파로 분파됐다. 이중 고려 말 판도판서를 지낸 파평윤씨 14世 윤승례尹承禮를 파조로 하는 분파가 판도공파다. 고령 상곡에 세거한 파평윤씨 문중은 판도공파 파조 윤승례의 증손자 판관 윤귀년尹龜年의 후손이다. 윤귀년은 조봉대부 행 상주판관을 지냈고, 아들 윤탕보尹湯輔[생부는 윤귀년의 형인 윤귀령]는 성균 진사였으며, 손자 윤황尹滉은 선교랑 부장이었다. 윤황은 부인 청송심씨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성균 진사 윤대승尹大承, 2남은 한림를 지내고 호조 참의에 추증된 윤대명尹大鳴, 3남은 윤희안, 4남은 윤계안[혹은 윤경안]이다. 딸은 전의이씨 문중으로 출가했는데 남편이 바로 참판공 이경두다. 이경두의 장남이 낙포 이종문이고, 이종문의 차남이 고령 상곡 입향조 다포 이지화다.
다포 이지화의 진외가인 상곡 파평윤씨 문중은 1500년대 말에서 1600년대 초 쯤 상곡 땅을 떠나게 된다. 이후 이 문중은 칠곡군 소학산 자락으로 이거했다가 다시 지금의 달성군 논공읍 약산리에 터를 잡아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현재 ‘파평윤씨 논공문중’이라 불리는 문중이 바로 이 문중이다. 상곡 파평윤씨 문중이 상곡 땅을 떠나게 된 데는 마치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기이한 사연이 있었다. 달성군 논공과 고령군 상곡 두 지역에서 전해지는 속칭 ‘배씨 처녀의 화禍’ 또는 ‘상사녀의 화’라고 하는 전설이 그것이다.[디지털달성문화대전에는 ‘상사녀의 화’, 디지털고령문화대전에는 ‘처녀와 상사병 난 윤씨’, 파평윤씨 논공문중에서는 ‘배씨 처녀의 화’라고 칭하고 있다] 두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설은 내용이 거의 똑같다. 다만 파평윤씨 문중이 상곡을 떠날 때의 상황이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다.
400여 년 전 고령 상곡 땅에는 파평윤씨들이 살았다. 이 중 4대가 벼슬을 한 집이 있었다. 할아버지[윤귀년]는 상주판관, 아버지[윤탕보]는 성균 진사, 자신[윤황]은 부장, 장남[윤대승]은 성균 진사, 차남[윤대명]은 한림을 지냈다. 어느 날 이 집의 한림공 윤도령이 낙동강 건너 용연사로 나들이를 갔다가 설화마을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윤도령은 이 마을 배동지라는 천석꾼 집에 잠시 머물며 비를 피했다.[배동지가 역참에서 일하는 천한 신분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배동지의 18세 무남독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온갖 약을 다 써보았지만 딸의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딸의 병은 얼마 전 소나기를 피해 자신의 집에 잠시 머물렀던 윤도령을 사모하는 상사병이었다. 배동지는 딸을 살리기 위해 강 건너 고령 상곡 윤도령집을 찾아가 청혼을 했지만, 윤씨네에서는 거절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딸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강 건너 상곡의 윤씨 마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밤마다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나타나고, 소나 말이 죽고, 사람들까지 하나 둘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괴변의 원인이 배씨 처녀의 원한 때문이라 생각한 윤씨네는, 화를 피하기 위해 낙동강 건너 100리 밖 칠곡 소학산자락으로 피신을 했지만 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자 윤씨네는 또 다시 100리를 옮겨 이번에는 배씨 처녀가 살던 설화 인근 약산으로 피신, 배씨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자 괴변이 사라졌다. 그 후부터 약산에 터를 잡은 윤씨네는 매년 배씨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달성군 논공읍 약산마을에는 자연부락이 두 곳인데 약산과 덧재[가현리]다. 서쪽 낙동강 쪽이 약산, 동쪽 산골짜기 쪽이 덧재다. 이곳 파평윤씨 논공문중 입향조는 윤대승의 아들 운강雲江 윤홍尹弘이다. 파평윤씨 문중이 상곡을 떠나 멸문에 이르게 되자, 상곡에 있던 파평윤씨 선대 묘소는 외손이었던 전의이씨 문중에서 외손봉사를 했다. 이후 350년 넘게 이어온 전의이씨 외손봉사는 6·25한국전쟁을 전후한 1950년대에 끝이 났고, 지금은 파평윤씨 문중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부강처사 윤대승의 정자 부강정
‘부강정浮江亭’. 대구의 누정문화를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하는 누정이다. 그것도 현존하는 정자가 아님에도 말이다. 부강정은 지금의 강정보 인근 다사읍 강정마을 쪽에 있었던 조선시대 정자다. 대구의 젖줄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자리한 부강정 터가 얼마나 좋았던지, 신라왕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는 옛 기록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부강정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부강정이 전의이씨 상곡 입향조인 이지화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이다.
본래 부강정은 파평윤씨 약산 입향조 윤홍의 아버지 생원 윤대승[1553-?]이 처음 건립하고 소유했던 정자로 알려져 있다.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임진란 직후인 1600년대 초 정자 주인이 바꿨다. 윤대승에서 다포 이지화에게로 넘어간 것.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지화는 24세 때인 1611년(광해군 3) 아버지 이종문의 명에 의해 하목정을 떠나 고령 상곡에 터를 잡았다. 이는 아버지의 외가이자 자신의 진외가인 상곡 파평윤씨 문중 외손봉사를 받들기 위함이었다.
이지화의 문집인 다포집 연보에는 이지화가 1611년(광해군 3) 24세 때 상곡으로 이거하고, 1622년(광해군 14) 35세 때 부강정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참고하면 부강정 소유권이 윤대승에서 이지화로 넘어온 것은 1611년에서 1622년 사이쯤으로 보인다. 1622년 부강정을 중수한 것은 임란 때 정자 일부가 소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중수한 부강정이 언제 다시 사라졌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포집 연보를 참고하면 1660년(현종 1)까지는 실존한 게 분명하다. 연보에는 1630년(인조 8) 이지화 나이 41세 때 부강정에서 거했다는 기록이 있고, 1660년에 이지화가 화공을 시켜 ‘부강정도浮江亭圖’를 그려 거처하는 곳의 벽에 걸어 놓고 감상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후 어느 때인가 부강정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부강정을 대신한 정자 하락정河洛亭이 세워졌다. 하락정은 서헌恕軒 이세형李世珩[1685-1761]이 건립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지은 ‘하락정기’ 내용 중에 “부강정은 곧 예전의 합강정合江亭이다”는 표현이 있다. 기록이 맞다면 아마도 부강정 이전에 그 자리에 합강정이란 정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수 백 년 전 사라진 부강정이 지금 대구 달성군 논공에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파평윤씨 논공문중 세거지인 약산 덧재[가현] 마을에 부강정이라 편액한 고가古家가 한 채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48년 건립한 것으로 현재 파평윤씨 논공문중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역시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 낙동강과 금호강 두물머리에 위치했던 ‘합강정’이 파평윤씨와 전의이씨 문중의 ‘부강정’을 거쳐, 광주廣州이씨 문중 ‘하락정’이 되었다가, 위치를 옮겨 다시 파평윤씨 부강정이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 덧재마을에 있는 부강정은 과거 강정에 있었던 부강정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역사나 전통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시각이 아닌 당시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달성군 하빈면과 고령군 다산면은 행정구역도 행정구역이지만 일단 낙동강에 의해 서로 단절되어 있다. 그래서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심리적으로는 꽤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또한 지금의 시각일 뿐 예전에는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본래 고령 다산지역은 신라시대 이후 1906년까지는 대체로 대구 달성 하빈 땅이었다. 신라 초기에는 다사지현多斯只縣[하빈]으로 불리다가가, 757년(경덕왕 16) 신라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 할 때 하빈현이 되어 수창군[대구]에 속했다. 이후 고려시대엔 성주, 조선시대엔 대구에 속했다가 1906년 고령군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빈에서 다산茶山으로 지명이 바뀐 것은 조선시대 때로, 이 지역 지명이었던 다기방·다산방·벌지방 등에서 유래됐다.
이처럼 전의이씨 예산공파 대표 문중 세거지인 지금의 달성군 하빈면과 고령군 다산면은 비록 낙동강이 가로 막고 있지만, 문중·역사·인문지리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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